본 연구에서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다시금 지성계에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자유주의 담론의 역사적 전제로서, 해방후 미군정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지식인 집단이었던 흥사단 계열 지식인들의 국가건설 구상과 냉전인식을 지성사와 사상사의 맥락에서 분석 ...
본 연구에서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다시금 지성계에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자유주의 담론의 역사적 전제로서, 해방후 미군정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지식인 집단이었던 흥사단 계열 지식인들의 국가건설 구상과 냉전인식을 지성사와 사상사의 맥락에서 분석 검토하려 한다.
해방직후 미군정하에 흥사단 계열은 경무부장 조병옥,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 문교부장 오천석, 문교부 성인교육국 부국장 황애덕, 농무부 차장 김훈, 농무부 농업경제과장 오익은, 상무부장 오정수, 상무부 상무국장 한승인, 보건후생부장 이용설, 노동부장 이대위, 운수부 차장 황희찬, 운수부 비행운수국장 강형섭, 공보부 차장 우대호, 인사행정처장 정일형, 사법부 총무국장 김용무, 충북지사 윤하영, 충남지사 황인식, 경북지사 최희송, 군정장관 행정고문 김동원 등의 면면이 말해주듯, 미군정 관료로 대거 참여하여 38선 이남 지역에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평안도 출신에, 기독교인이었으며, 미국유학을 다녀온 해방공간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지식인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미군정 관료로서 입안한 제반 정책과 주장은 이 시기 자유주의 국가건설 구상의 실체와 자유주의 지식인의 냉전인식을 살피는 데 가장 기초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미군정기의 대표적 이데올로그 집단이었던 흥사단 계열 지식인의 국가건설 구상과 냉전인식을 분석 검토하면서 특히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하려 한다.
첫째, 흥사단 출신 관료들이 주축을 이룬 미군정기와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기의 제반 정책에 나타난 연속과 단절의 측면이다. 일제하 미주 한인사회와 유학생계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하는 흥사단계와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동지회계로 나뉘어 각별한 경쟁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관서지방과 기호지방으로 각기 그 출신지역을 달리하였고,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에서도 일정한 차별성을 보였다.
예컨대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기의 교육정책은 그같은 차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흥사단계의 오천석이 문교부장으로 활약하던 시절 미군정의 교육정책이 자유주의 내지 민주주의 교육론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던 데 비해, 이승만 정권 출범후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의 교육정책은 국가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양자의 입장 차이는 민주교육과 민족교육을 둘러싼 교육계 내부의 논쟁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해방후 우익진영 내부에 적지않은 이념적 편차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흥사단 계열 지식인의 현실인식과 자유주의 국가구상을 검토 분석하는 가운데, 한국 근현대 지성사에서 자유주의 지식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둘째, 자유주의와 반공주의 사이의 작용-반작용의 문제이다. 냉전체제하에서 자유주의와 반공주의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동일시되었지만, 자유를 우선시할 것이냐, 반공을 우선시할 것이냐는 논쟁을 유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자유주의 지성은 '국가안보'와 개인의 자유, '반공'과 '반독재'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갈짓자 행보를 거듭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해방후 그같은 모습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였던 지식인 집단인 흥사단 계열 지식인의 자유민주주의론과 냉전인식 사이의 작용-반작용 과정을 분석 검토하는 가운데, 한국 자유주의의 사상사적 특질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