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과제는 우리 문자생활사에서 한문이 타자화되기 시작하는 근대계몽기에 계몽지식인이 갖고 있던 한문에 대한 복잡한 시선을 정리해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0세기 초 근대계몽기에 이르기 전까지 전통지식인들은 한문(漢文)을 통하여 문명을 영위하며, 한문을 읽고 ...
본 과제는 우리 문자생활사에서 한문이 타자화되기 시작하는 근대계몽기에 계몽지식인이 갖고 있던 한문에 대한 복잡한 시선을 정리해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0세기 초 근대계몽기에 이르기 전까지 전통지식인들은 한문(漢文)을 통하여 문명을 영위하며, 한문을 읽고 쓰는 권역과 그렇지 못한 권역은 문명과 야만으로 구분된 별개의 세상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근대계몽기에 들어서면 문명으로 믿고 있던 천하는 청산의 대상인 구문명으로 치부되고, 추구되어야 할 신문명은 지금껏 야만이라고 폄하하던 세계로부터 등장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절대적 자부심을 품고 있던 구문명의 입장과 긴박한 시대적 요구를 감당해야 하는 신문명의 입장이 자못 팽팽한 대결을 벌이며 긴장을 조성했어야 될 듯싶지만, 그런데 의외로 갈등과 충돌이 전면적으로 벌어지거나 전통 유산이 체계적으로 정리되면서 신문명의 자양분으로 제공되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는 않았다. 구문명과 신문명의 팽팽한 긴장이 조성되기엔 근대계몽기가 너무 짧은 순간에 불과하였다. 근대계몽기 계몽담론의 입장에서 한문은 중세, 즉 구문명의 언어였다. 짧은 기간에 구문명이 배제되고 신문명이 추구되었듯이, 구문명의 언어인 한문도 순식간에 주도적 위치를 신문명의 언어에 내어준 셈이다. 결국 구문명의 언어와 신문명의 언어는 대단히 이질적인 단층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밀어낸 신문명의 도구는 국문체이며, 계몽의 담론이 이 압력작용의 에너지원이었다. 실상 신문명의 근대 담론은 전지구적 승리를 자랑하며 국지전 하나를 간단하게 정리하였다. 구문명의 몰락은 일견 당연한 귀결인 듯하지만, 신문명이 철저히 외래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구문명의 유산을 변변하게 정리해내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신문명을 위해서라도 더 치열한 대결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순식간에 만들어진 이 이질적 단층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단순한 짐작처럼 ‘구문명의 한문/신문명의 국문’으로 대비되는 선명성이 곧장 드러나지 않고, 부정교합의 복합성이 보인다. 근대계몽기 국문체는 당시 조선에 닥친 근대의 모양새처럼 극히 혼란스러운 양상이었다. 이 시기 국문체는 크게 국한문혼용체와 순국문체의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한문의 생리에 가까운 국한문혼용체에서부터 한자어만 사용하는 국한문혼용체까지의 스펙트럼이 있고, 순국문체도 언문일치의 실현까지는 적지 않은 방황 속에 놓여 있었다. 한문체의 입장도 마찬가지로 계몽담론이 싸잡아 수구로 몰았던 것에 비해 변화의 시도가 아주 없지 않았다. 신문명을 추구하며 계몽담론의 중심에 서 있던 인사들 대부분은 사실 자신들이 타자화하고 배제하려는 구문명의 한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과감히 청산을 주장하는 한편으로 한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급박하게 근대를 성취하여 전지구적 근대화 과정의 보폭을 따라가야 한다는 계몽담론의 절박한 입장을 한문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문명과 한문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바, ‘구문명의 한문/신문명의 국문’이라는 계몽 담론의 도식적 인식이 당시 현실에서 일관되게 관철되는 것은 아닌 모양새이다. 종국적으로는 20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언문일치의 순국문체라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는 것이지만, 대략 구문명의 교육을 받은 인간들이 개명하여 신문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적지 않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구문명과 신문명이 만들어낸 단층이 복잡한 부정교합을 이루고 있음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제 근대계몽기 계몽담론과 한문 문체의 관계와 실상에 대해 검토해보고, ‘신문명의 한문’이라는 시도에 대해 주목해보려 한다. 신문명과 구문명의 문명적 전환이라는 극적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근대계몽기에 구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한문학도 일정정도 내적 갱신 노력이 없지 않았음을 보이고, 그 동인과 경과에 대해 살펴보겠다. 결과적으로 한문이 폐지된 현상에 주목하여 계몽담론이 한문을 타자화하고 배제하려던 측면을 부각한 기존 인식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반증을 제시하여 일정정도 교정된 시각을 확보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한문을 타자화하여 배제하려던 계몽담론의 중심영역을 우선 살펴보고, 한문의 타자화가 전일적으로 관철되지 않았던 양상으로 시선을 옮겨본 후에, 계몽담론 그 자체를 한문으로 시도하던 양상까지 점검하는 것으로 논의의 순서를 잡아보려 한다. 근대를 넘어서는 작업이 요구되는 현재, 이 복합단층의 부정교합에서 근대를 반성할 자료를 확충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기대효과
20세기 초반 근대계몽기는 지금 우리 문자생활의 기준이 되는 근대적 문체가 창출되었던 시기이다. 이 근대계몽기 계몽지식인들이 신문명을 추구하는 의식적 노력에 의해 구문명의 대표적 문체였던 한문이 청산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고, 그들의 계몽담론은 구문명의 유 ...
20세기 초반 근대계몽기는 지금 우리 문자생활의 기준이 되는 근대적 문체가 창출되었던 시기이다. 이 근대계몽기 계몽지식인들이 신문명을 추구하는 의식적 노력에 의해 구문명의 대표적 문체였던 한문이 청산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고, 그들의 계몽담론은 구문명의 유산 일체와 더불어 한문도 타자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이 시기 문체 인식에 대한 상식은 “계몽담론의 국한문체 / 구문명의 한문체”로 도식화되는 구도를 암암리에 인정하는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구문명 출신의 한문지식인들이 근대를 수용하여 계몽담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한문과 국문은 대단히 복잡한 양상으로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야 근대 초기의 문학 연구 과정에서 문체에 대한 접근이 섬세하게 전개되고 한문학 주변 분야에서 근대적 양상에 관한 접근이 산발적으로 전개되어 이 상식에 도전하는 견해들이 조금씩 제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 논문은 이 문제의 핵심적 고리인 근대계몽기의 계몽담론과 한문의 관련 양상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 것이다. 이 연구성과는 문체의 측면에서 근대적 국문체와 한문의 관계를 보다 상세히 밝히는 초석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우리 문자생활의 근대성에 대한 온전한 해명을 위한 초석의 기능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근대계몽기 문체 변혁 과정에 대해 한문을 중심으로 재구성함으로 해서, 전통적 문학과 문자가 근대에 접근해들어갔던 양상을 규명하고 전통의 자기갱신 노력이 없지 않았음을 보이는 하나의 기반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근대가 우리의 전통과 여러 부면에서 다양한 관계를 갖고 있기에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는 동시에,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보편적 경향도 내포하고 있음을 밝힐 수 있다.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 본 연구는 이 문제와 관련된 한문학 연구 분야는 물론 근대사와 근대철학, 근대문학의 연구성과들로부터도 다양한 참고를 통해 전개되었다. 여기 해명된 문제를 바탕으로 다시 주변 학문 연구 영역에도 일정한 자극을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육의 측면에서 우리의 문학과 역사를 다루는 분야에서 근대성의 문제를 재인식하는 과정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요약
이 논문을 통해 근대계몽기의 계몽담론과 한문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예를 찾아 고찰해 보았다. 20세기 초반의 계몽지식인들은 당시 조선에 닥친 위기 상황을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만이 관철되는 세계로 이해하고, 강자와 같은 수준의 근대화를 절박하게 이룩하여야만 한 ...
이 논문을 통해 근대계몽기의 계몽담론과 한문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예를 찾아 고찰해 보았다. 20세기 초반의 계몽지식인들은 당시 조선에 닥친 위기 상황을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만이 관철되는 세계로 이해하고, 강자와 같은 수준의 근대화를 절박하게 이룩하여야만 한다는 주장을 담은 계몽담론을 생산하였다. 대부분의 계몽담론은 긴박한 근대화의 과제 속에서 중세적 질서를 담고 있는 한문이 마땅히 청산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는바, 구문명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한문에 대한 지속적인 타자화를 시도한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를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던 「한국의 서적」이나 김갑순의 「부유(腐儒)」, 황희성의 「여여하정선생족하서(與呂荷亭先生足下書)」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계몽인사들은 대개 구문명의 한문을 제1의 문어로서 익히고 전통지식을 습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토대가 실상은 그들이 타자화하여 배제하려던 수구적 한문지식인들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과감한 청산을 주장하면서도 한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기는 「습관생애연 애연생완고(習慣生愛戀愛戀生頑固)」에서 한문 학습에 대해 아련한 애정을 품고 있는 자신을 고백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윤효정은 「문자쾌락(文字快樂)」에서 한문을 난해하여 장애로만 여기는 풍토를 비판하고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지 않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계몽담론은 근대 국민의 확보를 염두에 두고 대개 국한문체를 구사하였으나, 특별한 경우 한문문장에 계몽담론을 담는 경우도 있었다. 변영만이나 유길준의 이 시기 한문문장이 그에 해당하는 경우라 하겠는데, 구문명의 한문지식인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아 근대 국민의 범주에 포함시키려 한 시도라 하겠다. 또한 직접적으로 주변의 한문지식인들을 대상으로 계몽을 시도한 이상룡과 유인식과 같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지도적 계급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유림을 계몽의 교육 대상으로 격하했기 때문에 이상룡 등의 계몽사업은 대단히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근대 계몽매체인 각종 학회지나 신문에는 한문문장이나 한시가 적지 않게 게재되어 있었다. 계몽담론의 주류적 경향은 한문의 폐지이지만, 전통적 교양으로서의 한시와 전통적 독서물로서의 한문문장의 기능이 아직 마감되지 않았다는 표시이다. 근대계몽기를 지나고 나서 한문은 소수의 언어로 전락하고 공식적으로 근대적 국문체가 중심의 언어로 자리잡는다. 반면 일부 지방에서는 전통적 한문학의 영유가 조금 더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지속된 한문학과 근대적 국문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거나 의미 있는 대립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근대계몽기를 정점으로 서로 각자의 길로 갈라져서 외면하다가 한쪽이 소멸한 셈이다. 한문을 중세 보편 문어라고 규정한다면, 근대계몽기에 들어서서 한문이 폐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문이 중세 구문명의 언어로서 결국 청산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고, 근대적 국문체가 신문명의 언어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근대계몽기의 큰 틀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시기의 계몽담론과 한문의 관계를 더 탐구해 들어가면 ‘구문명의 한문/신문명의 국문’처럼 단순한 이분법적 사유로 설명될 수 없는 예들이 발견된다. 한문에서 국문으로의 전환이 압축적으로 전개되면서 다양한 입장들이 착종되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근대계몽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글키워드
근대계몽기.,근대 한문학,근대매체,문명적 전환
영문키워드
transition of civilization,Modern media,Modern Sino-Korean literature,Modern enlightenment peri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