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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억, 정치: 베트남전쟁과 1960년대 '비-냉전적 세계질서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_학술연구교수(인문사회)
연구과제번호 2009-353-A00089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3 년 (2009년 09월 01일 ~ 2012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김정배
연구수행기관 신라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냉전 개념을 '해체'하여 '허구'와 '사실'의 자리를 복원하는 것이다. 통념적 냉전 개념은, 즉 소련과 미국 혹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결은 실체가 없는 냉전적 신념에 기초한 '허구적 담론'이다. 냉전 개념은 전후 세계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출발부터 과장되었으며 왜곡된 지식과 제도와 정책의 산물이다. 혹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혹은 엄혹한 냉전적 경험 때문에 당대가 냉전시대임을 의심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냉전은 현실이 되고 '자기증식'을 거듭하여 50년여 동안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다. 마치 근거없는 두려움이 현실을 지배하듯이 실체 없는 냉전이 현실을 지배하고 현실이 곧 냉전이 된 것이다. 그래서 통념적 냉전 개념으로 역사적 실체를 설명하는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예컨대,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 1968년 푸에블로 사건 때의 미소의 '공조', 1969년 중소국경분쟁, 1979년 중베트남 전쟁, 특히 베트남전쟁 때 중국과 소련의 적대적 관계(중국은 소련을 '주적'으로 간주) 등을 설명하기 어렵다. 주된 이유는 냉전 개념 자체와 그것에 바탕을 둔 지식, 가치, 문화가 연구자의 인식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통념적 냉전 개념을 해체하고 허구를 확인하고 진실을 찾아야 하는 까닭이다.

    다른 하나는 전후 세계질서의 실제 작동 '메커니즘'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것의 구조와 동태를 이해하는데는 베트남전쟁을 매개로 전개된 1960년대의 중국,미국,소련,베트남,남북한,동유럽, 그리고 미국 세력권 내의 다양한 행위자들의 사고와 태도, 사건들을 분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그 때 전후 체제의 모순이 가장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와 민족해방운동, 사회주의와 민족해방운동, 국가건설의 전략과 권력투쟁, 그리고 각자의 특정한 역사적 경험과 그에 바탕한 이미지와 가치가 이들의 사고와 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본 연구는 특히 헤게모니, '초대된 제국', 지정학, '이중 봉쇄' , 세력균형, 세계체제론, 세력권 개념을 차용하여 이들 변수의 중요성의 지형도 그릴 것이다. 그 속에서 전후 질서의 구조와 양태는 물론이고 그 위치와 의미가 드러날 것이고 모순되어 보이는 문제들의 의문도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의 기대 효과는 4가지이다. 첫째, 학문적 기여로서 냉전사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연구를 자극할 수 있다. 기존의 냉전 개념을 해체하지 않으면 냉전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모순, 가령 외견상 첨예한 대립 속의 미-소의 '공조', 중-소의 동지에서 '적'으로의 변화, 강대국 데탕트 속의 약소국의 독재 등을 설명하기 어렵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속시원하게 설명함으로써 전후 세계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케 할 것이다.

    둘째, 사회적 기여로서, 냉전 개념의 '해체'는 좌우파의 지식, 가치, 문화에 박혀 있는 냉전적 '주술'을 걷어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빨갱이'와 "미제국주의'는 엄연한 현실의 구호이다. 그러나 둘 다 실체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각자의 신념을 사실로 착각하거나 둔갑시키고 그것에 기초하여 지식과 문화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며 사회적 지분을 분점하고 있다. 통념적 냉전 개념의 해체는 냉전적 망탈리테, 지식, 문화, 삶을 '치유'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셋째, 교육적 기여로서 현대 세계사, 동양사, 한국사를 하나의 '세계사'로 인식하고 교육할 수 있는 논리와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학생과 일반인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조차 단편적인 '정보'와 협소한 시각으로 현대사의 특정 주제에 접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는 이들 모두에게 한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 지식의 내용과 폭넓은 안목을 갖추게 할 것이다.

    넷째, 정책적 기여로서, 본 연구는 한반도가 처한 현실을 타개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좌파든 우파든 냉전적 관념으로 역사도 보고 현실도 본다. 그래서 핵문제, 6자회담 등 남북문제, 대미 및 주변국가와의 관계가 꼬이고 이용당하고 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국익과 그 추구의 논리와 역사적 실상을 잘 보여줄 것이다.
  • 연구요약
  • 1년차: 동지에서 '적'으로: 베트남전쟁과 중국-베트남-소련, 그리고 사회주의

    첫째, 중국과 소련의 분쟁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화이관'과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1956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폴란드, 헝가리혁명에 대한 중국의 개입은 중국 지도부에게 스탈린 이후 세계에서 중국이 소련과 '동등'해야 하고, 중국의 노선이 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자신감과 의지를 심어주었다. 전통적 중화주의가 근대의 혁명적 언어와 의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소련은 중국의 도전에 직면하여 사회주의 내부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중소 분쟁은 불가피했다.
    둘째, 중국의 소련에 대한 적대감은 중국의 경제적 사회적 개혁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연장선에 있었다. '대약진', '문화혁명'은 권력투쟁을 수반하였다. 마오의 '영구혁명'과 급진 정책은 반제국주의 전쟁을 필요로 하였고, '수정주의', '사회주의적-제국주의', '반동'을 내외부에 적용하였다. 그래서 소련과 베트남의 협상파는 모두 중국의 적으로 몰렸다.
    셋째,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가 악화된 근본 이유는 중국의 전통적 근대적 화이관과 관련이 깊었다. 중국 지도부는 베트남 지도부에게 '동등'한 관계와 혁명적 순수함을 강조하였지만 베트남혁명과 전쟁에 대한 중국의 '지도'와 '힐책'은 두 나라가 평등한 관계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베트남 지도부는 그러한 '외상적' 고리를 끊고자 하였다.
    넷째, 베트남이 중국과의 역사적 현실적 경험에서 얻은 교훈은 소련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지원을 아끼지 않은 소련의 불만과 요구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 전쟁과 외교에 관한 정책을 소련과 사전에 조율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한 것도 중국과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다.
    다섯째, 세계공산주의세력은 이념보다는 '국익'을 우선 추구하고 분열과 적대를 지속하였다. 공산주의 세력은 소련과 중국을 지지하는 다수파와 소수파로 갈라져 있고, 동유럽에서는 소련의 권위가 약화되고, 다수 공산당의 독립적 경향은 아시아, 서유럽, 아메리카 지역에서도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2년차: 적에서 '친구로: 베트남전쟁과 중-미관계, 그리고 자본주의

    첫째, 미국은 공산주의세력의 분열과 대립이 비-공산주의세력에게는 이익이면서 동시에 위험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공산주의를 '단일체'로 규정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친구들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가 미국이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라고 보지 않았다.
    둘째, 미국은 중소관계가 근본적으로 회복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소련은 중국을 국수주의, 분열 획책, 민족경제 고수 등을 들어 비난하고, 중국은 소련을 수정주의, 사회주의적-제국주의, 반동, '주적'으로 규정하였다. 특히 베트남전쟁을 이용하여 그들은 치열하게 싸웠다. 그래서 중소에게 미국은 부차적인 적이고 암묵적인 우군이었다.
    셋째, 미국은 중국을 매우 위험스런 존재로 보면서도 '화해' 신호를 계속 보냈다. 미국은 중국이 '지역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국의 목적과 현실의 괴리가 크다는 것을 미국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중국의 핵보유, 드골과 윌슨의 중미화해 요구 의 상황에서 미국은 안보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체면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면서도 고립시키지 않고 상호이익의 토대 위에서 '공존'을 모색하였다.
    넸째, 중국은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미국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였다. 중국의 선전과 태도는 안보 자체보다는 내부 권력투쟁을 반영하였다. 중국은 험악한 말을 쏟아내면서도 대만으로부터의 미군 철수를 '원칙적'인 문제로 규정하고 시한을 정하지 않았다.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3년차: 기회, 그리고 절망과 희망의 교차: 베트남전쟁과 한반도 정치

    첫째, 베트남 전쟁은 남북한 정권에게는 존립의 '기회'였다. 김일성은 민족해방운동의 '대의'를 내세워 국제적 어려움을 돌파하고, 박정희는 정권을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둘째, 베트남 평화협상은 박정희에게 '절망'이었고, 김일성에게는 '희망'이었다. 박정희는 돈줄이 막히고 국민을 '협박'할 꺼리가 사라질 것이고, 김일성은 그것을 민족해방운동의 '승리'로 규정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중국과 미국의 화해, 남북 7.4공동성명, 독재체제, '자주국방' 등은 4자의 입장과 상황적 조건에 맞는 필연적 과정이었다. 4자에게 남북의 정권 안정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중미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합의하였고, 김일성과 박정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와 김일성이 안보 빙자해 독재를 구축한 것은 기본적으로 정권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 한글키워드
  • 냉전,베트남전쟁,사회주의,민족해방운동,제국주의,자본주의,지정학,민족주의,이데올로기,중화주의,헤게모니
  • 영문키워드
  • Geopolitics,Cold War,Ideology,Nationalism,Sino-Centralism,Hegemony,Capitalism,Socialism,National Liberation Movement,Vietnam War,Imperialism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일반적으로 냉전체제는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이 이데올로기와 군사력 등 여러 가지 수단으로 긴장상태를 유지한 세계질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냉전 개념 혹은 인식으로는 20세기 후반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 -중소분쟁, 베트남전쟁,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유신체제,...- 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냉전의 개념과 역사적 사건들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는 중미화해 이후 한반도 정치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베트남전쟁과 중미화해를 중심으로 살펴 본 내용과 의미를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1960년대 베트남전쟁 시기에 미국과 소련 혹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자체의 대결은 없었다. 미국과 소련은 적이라기보다는 동료에 가까웠다. 소련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협상을 통해 베트남전쟁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은 주로 국내적 이유로 군사적 해결을 주장했다. 북베트남은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어정청한 태도를 보이다가 점차 협상 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그들 내부의 첨예한 입장 차이와 갈등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편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은, 아시아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미국의 전쟁 명분에 동의하지도 지원 요청에 응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내부에서 베트남전쟁은 실은 미국의 전쟁이었다. 베트남전쟁은 모두에 의해 냉전적 이데올로기적 언어로 선전되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은 미국제국주의와 베트남민족주의로 구체화된 제국주의와 식민지민족주의 갈등의 폭발이었지 미국과 소련 혹은 자본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의 냉전은 아니었다.
    둘째, 베트남전쟁 동안 사회주의진영은 깨졌으며 중국과 소련은 동지에서 적으로, 그리고 중미화해 이후 중국과 미국은 적에서 동지로 바뀌었다. 사실 그 동안 좌파든 우파든 그들은 이익을 위해 냉전적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삼았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은 그 허구성을 폭로해 버렸다. 그러한 변화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질서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려는 세력과 그것 자체를 위기로 느끼는 세력이 있었다. 닉슨과 마오쩌뚱은 그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주도했으며, 김일성은 비교적 적극적으로, 그리고 박정희는 기회주의적으로 그것에 편승했다. 중미화해는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중미화해는 김일성에게는 평화공세의 기회를 제공했고, 박정희에게는 권력불안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남북정권은 무력통일을 사실상 포기했음을 서로가 확인한 이후에도 정권안보를 위해 안보불안을 날조하고 독재체제를 제도화했다. 한민족은 그런 식으로 강요된 현실 속에서 냉전적 가치와 문화로 의식화되었다.
    요컨대 베트남전쟁과 중미화해로 냉전체제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과 소련이 중심인 냉전체제의 해체가 아니었다. 중미화해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시대의 억압과 저항에 뿌리를 둔, 그 마지막 시기에는 중국과 미국이 대결의 중심이 된 그런 의미의 냉전체제 혹은 전후질서의 해체를 의미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독재체제는 어떤 의미의 냉전과도 무관한 한반도 고유의 권력투쟁의 속성을 반영했다. 따라서 중미화해 이후 한반도에서 전개된 국가안보를 빙자한 독재체제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교활한 테러였다. 아직도 냉전적 지식과 문화가 힘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냉전적 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체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 영문
  • It is the conventional wisdom that the Cold War was basically ideological and military conflicts between capitalist and socialist camps since the Second World War. The established concept of the Cold War is probably an ideological construct, or myth which effectively fail to interpretate historical facts, especially the Vietnam War and Sino -American rapprochement. So, it is necessary to reexamine the real pictures and its historical meanings of the Cold War.
    This study primarily focuses to the Vietnam War and Sino-American Rapprochement in terms of the Cold War history in which conflicts had been centered between Imperialism and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The following is the results of this study:
    First, Camps were actually absented in the Vietnamese War. The Vietnam War had wholly involved local, regional, and global contradictions in the 1960s -regional Hegemony, Imperialism, Colonial Nationalism. The relations of among Hanoi, Beijing, and Moscow were always suspicious and seriously conflicting each other, although the basic cause of socialist internationalism. The Chinese and the Soviets were became ‘primary enemy’ since at least 1965. Despite of openly proclamation about their hostility, the US and the USSR were cooperative in the Vietnamese War. Thus, the war partner of the US was naturally China, not Russia. On the other hand, the America's European allies not agreed and responded to the causes and efforts of American's Vietnam War and sought for political settlement as the USSR prefer to. Nevertheless, Johnson decided to plunge into the Vietnam swamp to avoid political defeat in domestic and foreign policies and justified it with the domino theory. The Vietnam War was basically conflict between the Vietnamese nationalism and imperialist America. But, it also was war between American and China in which they attempted to resolve complex matters in their domestic and foreign policies.
    Second, China's drastic change of attitudes toward the US was based on serious threats on its national security imposed by the Soviets and Northern Vietnam. Northern Vietnam' acceptance of negotiated settlement proposed by Jonson Administration represented the betrayal of the cause of Cultural Revolution and adoption of the Soviets line. The Soviets military threats was the matter of live and death to the Chinese. It was, therefore, necessary for Chinese leadership to approach to the US. Then, ironically, the behaviors of the Soviets and Northern Vietnam gave logic and rationale capable to contact with imperialist America without some changes of Chinese revolutionary ideology. Chinese leadership regarded the Soviets as primary enemy and could established United Front with the US.
    The American new approach toward China was to preserve national interests in the changing global situation, not simply counterweight against the Soviets and extension of former adminstration' China policies. Nixon perceived that conflictive world order between imperialism and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was over, and all nations, notwithstanding their systems and ideologies, should seek to new peaceful world order. That order is not able to established, without China. That was essential reason why Nixon had to keep friendship or ally with China. But, with especially domestic conservatives' negative criticism of China policy change, Nixon and Kissinger were imposed to explain Snio-American Rapprochement in terms of realistic perspective or power politics against the Soviet. But, it was not mainly purpose of Nixon's historical Visit China.
    Third, after Sino-American Rapprochement, the Politics on the Korean Peninsular have been worked by 'Cold War ideology without the Cold War' and conventional geopolitical logic. With effects of new peaceful mood, Inter-korean relations also seemed to change in line with the principles of self-determination, peaceful reunification, and great national unity. But, before long, aspiration and anticipation on reunification was shattered, authoritarian regimes were established in the two koreas. The domestic and international circumstances itself resulting from Sino-American rapprochement were threatening crisis to the South regime while, for North regime, provided the chance of peaceful offensive chance to the South regime and international community. South Korean regime was a reactionary response to the new reconciliation and world order.
    Sum it up, with the Vietnam War and Sino-American rapprochement, the Cold War, long term confrontation between imperialism and principally National Liberation, was actually over. Notwithstanding, authoritarian regimes on korean peninsular threateningly controled korean peoples in the name of national security. That was the operation mechanism of the politics on the Korean peninsula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통념상 냉전체제는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이 이데올로기와 다양한 수단으로 적대적 긴장상태를 유지한 세계질서였다. 냉전은 처음에 유럽에서 시작하여 점차 동아시아와 여타 세계로 확대되었으며 1970년대에 잠시 두 진영의 화해가 시도되었지만 곧 갈등이 재연되고 1980년대 후반부터 다시 해빙을 맞으면서 1990연대 초에 소련과 사회주의의 붕괴로 끝났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그러한 냉전 개념 혹은 인식으로 20세기 후반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 특히 베트남전쟁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베트남전쟁은 미국과 소련 혹은 두 진영 간의 대결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전의 개념과 역사적 경험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접근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중미화해 이후 한반도 정치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과 의미를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적어도 1960년대 베트남전쟁 시기에 미국과 소련 혹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자체의 대결은 사실상 없었다. 미국과 소련은 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동료였다. 소련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협상을 통한 베트남전쟁 해결을 희망했다. 이것은 소련이 혁명적 민족해방전쟁에서 후퇴하여 미국과 이해를 같이했다는 의미이다. 전쟁의 핵심 주체는 베트남민족주의와 미국이었다. 하지만 명복상의 주체는 미국과 중국이었다. 이것은 베트남전쟁이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민족주의 모순의 폭발이었으며 중국이 후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국제적 대표성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한편 유럽의 주요 미국 동맹국은 미국의 도움 요청을 거부했다. 그들은 미국의 베트남전쟁 명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트남전쟁에서 냉전의 의미는 미국제국주의와 베트남민족주의로 구체화된 제국주의와 식민지민족주의 갈등이었지 미국과 소련 혹은 자본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의 냉전은 아니었다.
    둘째, 베트남전쟁 동안 기존의 사회주의진영은 깨졌으며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은 적에서 동지로, 동지에서 적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로 은폐되고 이미지화되었던 것들의 실상이 드러났다는 의미이다. 두 진영의 중심과 주변의 특정 세력들은 어떤 이념적 스펙트럼에 위치했던 서로의 이익을 위해 냉전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삼았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으로 그 허구성은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렵게 되었다. 그것은 국내 권력투쟁의 또 다른 흐름을 반영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질서의 모색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어떤 세력에게는 그 흐름이 절망과 위기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닉슨과 마오쩌뚱은 이러한 흐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주도했으며, 소련과 북베트남, 김일성은 비교적 소극적으로, 그리고 박정희는 기회주의적으로 편승했다. 중미화해는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중미화해는 김일성에게는 적극적 공세의 기회를 제공했고, 박정희에게는 권력의 위기를 극대화한 불안의 원천이 되었다. 그들은 이후에도 여전히 이미 안정화된 한반도에서 안보불안을 정권 안보를 위해 날조하고 독재체제를 제도화했다. 한민족은 그렇게 허구가 강요한 현실 속에서 냉전적 가치와 문화로 의식화되었다.
    요컨대 베트남전쟁과 1960년대에 냉전체제는 이미 해체되었다. 1972년 중미화해는 그것의 상징적 사건이다. 중미화해는 통념적 냉전체제 속의 데탕트가 아니었다. 통념적 냉전 개념에서 냉전의 핵심 주체는 미국과 소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냉전은 전후체제의 부분적 측면이었다. 중미화해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시대의 억압과 저항에 뿌리를 둔, 그 마지막 시기에는 중국과 미국이 대결의 중심이 되었던 그런 의미의 냉전체제 혹은 전후질서의 해체를 의미했다. 그래서 한반도의 독재체제는 어떤 의미의 냉전과도 무관한 한반도 고유의 권력투쟁의 속성을 반영했다. 중미화해 이후 한반도에서 전개된 안보를 빙자한 독재체제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교활한 테러였다. 아직도 냉전적 지식과 문화가 힘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냉전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체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제2차 대전 이후 세계질서와 한반도 정치의 성격을 추적하기 위한 작업이다. 다음과 같은 기대와 활용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학문적 기여이다. 냉전사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연구를 자극할 것이다. 기존의 냉전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냉전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모순들, 예컨대 외견상 첨예한 대립 속의 미소의 ‘공조’, 중소의 '동지에서 적으로'의 변화, 강대국의 데탕트와 약소국의 독재 등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허구적’ 냉전 개념을 세계와 한반도의 역사적 경험에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다.
    둘째, 사회적 기여이다. 기존 냉전 개념의 해체는 좌우파의 지식, 가치, 문화에 박혀 있는 냉전적 주술로부터 탈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빨갱이와 미 제국주의는 엄연한 현실의 구호이다. 그러나 둘 다 실체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고 그 이미지가 현실을 창조했다. 진보든 보수든 각자의 신념을 사실로 착각하거나 둔갑시키고 그것에 기초하여 지식과 문화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며 사회적 지분을 분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냉전 개념의 해체는 냉전적 망탈리테, 지식, 문화, 삶을 해체하고 치유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셋째, 교육적 기여이다. 현대세계사와 한국사를 하나의 세계사로 보고 교육할 수 있는 논리와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학생과 일반인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조차 단편적인 정보와 협소한 시각으로 현대사의 특정 주제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는 우리 모두에게 한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 지식의 내용과 폭넓은 안목을 갖게 할 것이다.
  • 색인어
  • 냉전, 베트남전쟁, 중미화해, 중소분쟁, 민족해방전쟁, 제국주의, 식민지민족주의, 사회주의진영, 자본주의진영, 데탕트, 닉슨독트린, 권위주의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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