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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접경지역 영남유학 연구 -17,8세기 대구지역, 진주지역, 상주지역 기호학파를 중심으로-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09-327-A00168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2 년 (2009년 11월 01일 ~ 2011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백도근
연구수행기관 영남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는 영남지방의 기호학파로서, 밖으로는 기호의 서인세력과 연락하고, 안으로는 거주지 향교의 교관자리를 두고 지역의 남인들과 대립했던, 소위 ‘영남의 서인들’의 삶과 학문적 의의를, 17,8세기 대구지역, 진주지역, 경북지역 서인문중의 실태와 함께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위 세 지역을 접경지대라고 부르는 것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집권하면서 기호-영남의 전선(戰線)이 영남 내륙 깊숙이 들어와서 위 지역들이 서인과 남인이 혹은 반목하거나 혹은 소통하며 타협하던, 접경지대로서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향교, 서원들은 서인정권으로서는 수령의 파견을 통한 지역지배의 전초기지로서, 재지 남인 양반들로서는 관에 의한 지배를 부인하고 자신들의 신분적 이해를 대변하는 보루로 삼고자 하였으므로 향교는 그야말로 접경지대였다.
    시간적으로 17,8세기로 한정한 것은 예송논쟁, 무신난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사회가 기호와 영남으로 갈리고, 영남지방의 주요관직들이 서인에 의해 점거됨으로서, 대구지역, 진주지역, 경북지역들이 서서히 접경지대화 되어 간 주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대구지역과 진주지역 그리고 경북지역(상주, 안동, 장기)을 특별히 선정한 것은 이 지역들이야말로 서인노론 출신 수령의 영향력 아래 서인이 부식(扶植)되고, 장기지역의 경우는 귀양왔던 송우암으로부터 직접 사사받은 제자들이 서인화한 경우로서, 모두 접경지대로서의 특성을 충실히 갖추었기 때문이다. 각 지역별 두세 가문씩을 선정한 것은 물론 주요 인물 배출의 가문에 한정하고, 또 무엇보다 삼년 과제로서 충실한 연구를 계획한 데서 간략하게 선택한 것이다. 그 이상에 대한 것은 연구의 여력여하에 달려 있다.
    접경지대 영남의 유학자들이 기호학파의 학문을 수용한 데는 자발적 요인과 비자발적 요인이 있다. 자발적 요인은 재지 사족가운데 대체로 서열이 낮은 문중이 문중의 위상을 높이고자 외부의 명망있는 서인과 교분을 맺고 이를 이용하려 했던 것과 같은 이유이고, 비자발적 요인은 토착 서인세력의 부식을 통한 영남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려했던 서인지배층의 의지이다.
    이상의 여러 관점을 바탕으로 접경지대 영남 서인들의 행적과 그들의 학문을 밝혀보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이해관계를 따라 조선유학이 기호와 영남으로 대립했었다는 일반적인 이해와는 달리, 기호속의 영남학파, 영남속의 기호학파로서의 어려움을 감내하면서까지, 지역의 남인들과 학적, 인적 소통을 꿈꾸었던, 접경지대 유학파의 존재의의를 발굴함으로써, 오늘날 점증하는 우리 사회 내부갈등의 문제를 되짚어 보고, 소통의 지혜를 여는 모멘텀을 구해 보고자 하는 뜻도 있다.
  • 기대효과
  • 접경지대 영남유학의 연구는 전통사회의 소통의 방법으로 이 시대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광복 후 우리사회는 때로는 보수가, 또 때로는 진보가 집권하여 시대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세계사에 다시 한 번 우리 민족의 위대한 기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음을 본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경쟁의식이 지나쳐서, 타자에 대한 존중의식 보다는 대립의식이 더 강하게 표출되어 사회적 균형과 조화가 위협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모순과 대립을 넘어 진정으로 영남과 기호 선비들이 소통하기를 구했던, 영남과 기호의 접경지대에 살았던 학자들의 소통정신을 연구함으로써, 우리 시대 소통문제를 해결하는 한 단초를 얻게 될 것이다.
    접경지대 영남유학의 연구는 그 간 주목받지 못했던 비주류 유생들의 사상을 주목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광복 이래 조선유학연구는 퇴계와 고봉, 율곡과 우계 사이의 사칠논변, 노론과 남인 사이의 예송논쟁 같은 거대담론에 치중했던 것이 많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명유석학들의 사상을 구명하는 일에 치중했던 점이 많았다. 접경지대 영남의 서인들은 비록 명유석학은 아니었을지라도 매우 전혀 비우호적인 지역적 상황 하에서 기호학을 수용하여 끝까지 고수했다는 점만으로도 그들의 객관적 학문정신은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고 통합적 시대정신의 소유자들로 새로이 부각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접경지대 영남유학 연구는, 기존의 연구가 보통 한 시대 뛰어난 개인의 자질과 업적을 드러내는 데 편중된 것이었다면, 본 연구는 지역중심의 연구, 문중중심의 연구에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이는 조선조 사회가 가족주의 내지는 집단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사회였다는데 착안한다. 물론 개인이 영달하게 되면 그 개인이 집단의 표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조차도 집단의 힘을 고양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때, 지나치게 영웅만들기식의 개인중심 연구는 보통사람 중심의 시대정신과는 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영남서인 연구는 당연히 개인연구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분석들에 맞게, 거론된 지방향교와 서원을 끼고 있는 문중들에서 드러나는, 집단주의적 성향에 대해서 다루게 될 것이다.
  • 연구요약
  • 일찍이 상주(尙州)의 선비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는 영호남이 주리(主理)․주기(主氣)로 양분되어 대립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여 ‘근세 양가의 설은 전습 된지 오래다. 서로 맞서서, 나누지 않는 측에서는 오직 나누지 않는 것에 힘을 써서 그 나누는 것을 미워하고, 나누는 측에서는 오직 나누는 것에 힘을 써서 나누지 않는 것을 미워하니, 다 같이 반은 얻고 반은 잃어버림을 면치 못하고 있다.’ 라고 하여 당시의 영․호남의 유학이 각기 교조주의적으로 흐르는 것을 비판하였다.
    당시 정치적으로 적대하고, 사상적으로 모순관계에 있었던 특정지역에서 타 당, 타 지역의 학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영남의 접경지대 서인들은 바로 이러한 위험을 감수했던 소수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했던 영남의 서인들을 대상으로 다음의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여기서 세 지역을 특별히 지목한 것은 세 개 지역이 접경지대로서의 특성을 비교적 잘 간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과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전선(戰線)이 이들 지역으로부터 인근의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볼 때, 연구의 범위를 더 넓힐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연구의 충실을 기하기 위하여 방편적으로 설정한 것임을 말해둔다.
    이러한 한계 안에서 본 연구는 첫째, 17,8세기 대구지역, 진주지역, 경북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한 영남서인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대구는 퇴계학의 세가 강했던 곳이다. 대구에서 서인이 등장했던 것은 제2차 예송논쟁 패배로 이후 남인세력이 중앙정가에서 축출되면서 부터였다. 17,8세기 대구에서 서인의 기치를 들과 행세했던 주요가문으로는 만촌동의 옥천 전씨(全氏), 상인동의 단양 우씨(禹氏,) 파동의 대구 하씨(夏氏), 무태의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었다. 이들 중 옥천 전씨가 먼저 서인을 표방하였고, 옥천전씨와의 혼맥관계로 단양 우씨가 서인에 편입되었으며, 또 단양 우씨와의 혼맥관계로 대구 하씨가 서인에 편입되었다. 인천 이씨의 경우는 이약채가 도암 이재의 제자인 송명흠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서인에 편입된 경우이다. 진주는 안동, 경주와 함께 경상도를 삼등분하여 그 한 중심에 위치하면서 문화활동의 중심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남명학의 세가 강했던 곳이지만 서인이 득세한 이후 기호학도 널리 보급되었다. 17,8세기 서인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주요가문으로는 귀곡의 해주 정씨(鄭氏), 단목의 진양 하씨(河氏) 등을 대표로 들 수 있고, 그 외 백곡의 청주 한씨(韓氏), 신안의 안동 권씨(權氏) 등도 서인에 속한다. 경북장기향교의 서인들은 송우암이 69세(1675, 숙종 원년)되던 해 에 장기현으로 귀양와서 위리안치되어 4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배운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에게서 배우고 스승을 기념하여 죽림서원을 창건했던 오도종, 이석증, 황보헌, 이동철, 한시유 등 유생과, 우암의 장기 유배생활에 대한 실상을 후세에 기록으로 전해준 김연, 오도징, 이유, 오시좌, 민종대 등에 관해 연구한다. 둘째, 세 향교를 배경으로 서인들과 남인들의 각축, 타협, 협력 등에 관한 연구이다. 흔히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는 대립을 넘어 소통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지역향교에서 대치했던 영남 남인과 영남 서인의 문제는 바로 이 오늘날 우리 사회 모든 대치상황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대치는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대치, 억지주장을 푸는 데 있어서 유교적 지혜는 무엇이었나를 영남지역 서인들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이 이 연구의 중요한 목적가운데 하나이다. 셋째, 미시사적 연구를 통해, ‘조선유학=기호․ 영남의 분립’ 이라는 기존의 시각을 해소하고자 하는 연구이다. 오늘 날에 있어서도 사회의 대립을 ‘영․호남의 대립’이란 시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사회가 영호남으로 대립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은 허위이다. 사회적 대립은 보다 근원적인 불안과 불만으로 인해서 생겨난다. 조선유학도 결코 기호․․ 영남 이란 시각으로 보는 것은 왜곡에 가깝다. 이는 영남에 상당한 기호학파=서인들이 존재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접경지대 향교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갖게 된다. 우리의 연구는 조선시대 영남의 접경지 향교, 문중에 대한 미시사적 연구를 통해 조선유학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기 하게 될 것이다.
  • 한글키워드
  • 갈등,화해,8세기,접경지역,영남 서인,영남 남인,대구지역,진주지역,영천지역,17
  • 영문키워드
  • Confucian temple,reconciliation,Joseon Dynasty's Latter Term,Youngnam's Frontier Districts,Confucianism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연구는 영남지방의 기호학파로서, 밖으로는 기호지방의 서인세력과 연락(連絡)하고, 안으로는 거주지 향교의 교관(敎官) 자리를 두고 지역의 남인들과 대립(對立)했던, 범 대구지역, 범 진주지역 서인들의 삶과 그들의 학문적 의의를, 17,8세기 범 대구지역, 범 진주지역에 산재했던 주요 서인문중의 실태와 함께 밝히는데 목적을 두었다.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영남의 향교는 서인정권으로서는 교관의 교체를 통한 정신적 지배의 전초기지로서, 영남남인들로서는 정신의 독자성을 고수하는 이념적 성채(城砦)로 삼고자 하였으므로 향교 주변은 점차 접경지대화 하였다.
    위 세 지역으로 연구를 한정한 것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집권하면서 기호-영남의 전선(戰線)이 영남 내륙 깊숙이 형성되기 시작했을 때 서인출신 감사나 목사 등 수령들이 부임함에 의해서, 위 지역들의 향교와 주변에 들어서기 시작한 서원들이 서인과 남인이 혹은 반목하거나 혹은 소통하고 타협하던 접경지대로서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17,8세기는 예송논쟁과 무신란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조선유학이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로 갈리고, 영남지방의 주요관직들이 서인에 의해 점거됨으로써, 영남지방의 주요 향교와 서원들이 서서히 접경지대화 되어 간 주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각 지역별 몇 몇 주요 가문으로 한정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2년 과제로서 충실한 연구를 계획한 데서 간략하게 선택한 것이다.
    1차년도(2009.11.01-2010.10.31)에는 17세기 후반 대구서인들의 우율종사소, 사계성무종향소, 인동향교(仁洞鄕校)의 향전 등을 옥천 전씨 가문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연구하였고, 18세기 후반으로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대구노론들의 생활 모습을 우재악(禹載岳, 1734-1814)의『仁村文集』, 이약채((李若采, 1727-1761)의 『行休齋文集』, 하시찬의『悅菴文集』등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2차년도(2010.11.01-2011.10.31)에는 17세기로부터 18세기 말에 이르는 범(汎) 진주지역의 영남 노론에 관해 연구하였다. 그 주 연구대상은 귀곡의 해주 정씨(鄭氏), 단목의 진양 하씨(河氏), 백곡의 청주 한씨(韓氏), 신안(단성면, 신안면, 생비량면)의 안동 권씨(權氏) 가문을 대상으로 향교, 서원, 종가 방문 및 문헌연구, 문중이 소유한 재실, 서원답사 등을 통해 지역의 서인노론의 존재 의의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 영문
  • This research is a study on the Young-Nam Province's Noron-School(老論學派).
    In the late Joseon Dynasty, Noron-rulers thougt to strengthen their mental domination by the replacement of 'the local public school teachers(鄕校敎官)' in the Young-Nam Province. Yeungnam Namin Confucians resisted that the central government's attemption to replace 'the local public school teachers'. Thus, the local public schools of the province of Yeungnam was a violent battle between Yeungnam-Noron(嶺南老論) intellectuals and Yeungnam-Namin(嶺南南人) intellectuals at one time. We researched area was the Daegu and Jinju. And when was from the late 17th to early 19th century Chosun Dynasty. The reason, they showed good as the characteristics of the border regions, sometimes antagonistic and sometimes negotiate.
    First year (2009.11.01-2010.10.31), we studied for the Daegu-Noron's Woo-Yul-Jongsaso, Sagye-Jonghyangso, Indong-Hyanggyo-Dispute. Also we studied on Daegu-Noron woojaeak's Inchon-munjip(『仁村文集』), yiyakchae (李若采)'s Hanghujaemunjip(『行休斋文集』), Hasichan's Yulam-munjip(『悦庵 文集』), we studied about the life of the scholar at that time.
    Second year (2010.11.01-2011.10.31), we research for the 'late 18th-early 19th' century Pan (泛) Jinju, the Yeungnam Noron's school. The main subjects of this study, were family of Haeju Chung (郑氏), Jinju Ha (河氏), Chungju Han (韓氏), Andong Gwon (權氏).
    Our research methods, was to visit local public school(地域鄕校), local private school(地域書院), local famous family(宗家宅) of the Joseon dynasty, to have been the possessions, listen to the story, to investigate the literatur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연구는 밖으로는 중앙의 서인세력과 접맥하고, 안으로는 향교의 주도권을 두고 지역의 남인들과 대립했던 17,8세기 범 대구지역, 범 진주지역 노론 유생들의 삶과 학문에 관한 것이다.
    17,8세기 조선사회는 예송논쟁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사류가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로 갈리고, 영남지방의 주요 관직조차 서인의 차지가 됨으로써 5대 감영(監營) 소재지 중의 하나인 대구나, 전국 12목(牧) 중 하나인 진주지역 향교․서원 등이 빠른 속도로 접경지대화 되어 간 주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범 대구지역과 범 진주지역 특별히 연구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대구지역과 진주지역은 서인출신 수령의 영향력 아래, 서인세력이 급속히 부식(扶植)되어 영남 남인들과의 갈등이 첨예하게 맞서는 곳이기 때문에, 접경지대로서의 특성을 충실히 갖추었기 때문이다.
    각 지역별 대표적 가문들을 선정하고,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연구한 것은 2년 과제에 걸맞는 충실한 연구를 위함이다.
    접경지대 영남유학 연구는 지방사(地方史) 연구의 방법이고, 미시사(微視史) 연구의 방법이다. 철학을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관련지어서 연구하게 될 때, 그 방법은 구술채취 등이 빠질 수가 없다. 철학은 전문가의 펜 끝에 의해 표현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명의 사람들의 입술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에서도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사적 연구의 활성화는 중앙사 중심의 연구가 빚어놓은 조선유학=기호․영남의 대립이라는 분열주의적 시각을 극복해 내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접경지대 영남유학 연구는 1년차 (2009. 11. 01- 2010. 10. 31); 범 대구지역의 노론 유생들에 관한 연구, 2년차 (2010. 11.01- 2011. 10. 31); 범 진주지역의 노론 유생들에 관한 연구이다.
    접경지대 영남유학 연구는 크게 17,8세기 영남지역 노론 유생에 관한 연구이며, 범 대구지역, 범 진주지역 노론 유생을 대상으로 하며, 지역의 유명 가문 출신이라는 교집합에 해당되는 인물들에 관한 연구이고, 조선유학을 대립적 시각에서 화합적 시각으로 전환하려는 연구이다. 조선유학을 대립적으로만 보려는 것은 중앙사적 시각에서 만들어 낸 부작용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 영남의 접경지 영남의 기호학파-영남학파 간 대화, 협력, 타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실증함에 의해서 조선유학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기 하게 될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전통사회의 소통방법을, 시대적 불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활용
    광복 후 우리사회는 때로는 보수가, 또 때로는 진보가 집권하여 시대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세계사에 다시 한 번 우리 민족의 위대한 기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타자에 대한 존중의식 보다는 대립의식이 더 강하게 표출되어 사회적 균형과 조화가 위협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모순과 대립을 넘어 진정으로 영남과 기호 선비들이 소통하기를 바랐던 영남과 기호의 접경지에 살았던 학자들의 소통정신을 연구하는 것은 이 시대 소통문제를 해결하는 한 단초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2) 비주류 유생들의 사상에 주목하는 계기
    광복 이래 유학연구는 퇴계와 고봉, 율곡과 우계 사이의 사칠논변, 노론과 남인 사이의 예송논쟁 같은 거대담론에 치중했던 것이 많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명유석학들의 사상을 구명하는 일에 치중했던 점이 많았다. 접경지대 영남의 기호학파 서인들은 비록 명유석학은 아니었을지라도 매우 비우호적인 지역적 상황 하에서 기호학을 수용하여 끝까지 고수했다는 점만으로도 그들의 객관적 학문정신은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고 통합주의적 시대정신은 높이 살만한 것이다. 특히 기존의 시각으로서는 ‘조선 유학의 제1인자는 누군가 ’라는 시각이 언제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오랜 기간동안 유학의 다양한 지향성을 해치고, 고루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당시 소수자로서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던 영남 서인학자들의 통합주의적 태도와 학문적 열의에 주목함으로써 조선유학에 대한 시야를 넓히는 새로운 계기로 활용하고자 한다.

    3) 지나친 엘리트주의적 연구태도 탈피의 계기
    기존의 연구가 뛰어난 개인의 의식에서 추상되는 보편적 가치 추구에 초점을 맞춘 연구였다면, 본 연구는 지역사회의 평범한 유가 지식인들에 대한 연구이다. 조선조 사회는 적어도 지역주의 내지는 집단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사회였다. 물론 개인이 영달하게 되면 그 개인의 의식이 집단의 의식으로 표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조차도 집단의 힘을 고양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때, 지나치게 뛰어난 유학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유가사상을 비인간화하는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본 영남지역(경북지역) 서인 연구는 한 지역사회의 보통의 지식인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우리의 학문이 지나치게 관념화하는 데서 벗어날 계기를 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4) 유교적 화합정신의 재발견의 계기

    본 연구에서는 제1차 예송논쟁(1959) 직후로부터 18세기 말에 이르는 150여 년간의 접경지대 영남의 서인의 행적에 대한 연구를 주요 과업으로 한다. 우선 영남지역 내에 기호학파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과 다수의 남인세력에 둘러 사인 그들이 느꼈을 애환과 자부 그리고 어떻게 지역의 남인들과 타협했는지 등을 밝힘으로써 유교에 의한 화합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진정한 게기를 얻고자 한다.
  • 색인어
  • 조선유학, 접경지대 영남유학, 대구 노론, 진주 노론, 17-18세기, 인동향전, 우율종사소, 사계승무소, 예론소, 갈등과 소통, 향교, 서원, 옥천 전씨, 인천 이씨, 달성 하씨, 단양 우씨, 해주 정씨, 진주 하씨, 비주류 유생, 미시사적 접근, 지방사적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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