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상주(尙州)의 선비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는 영호남이 주리(主理)․주기(主氣)로 양분되어 대립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여 ‘근세 양가의 설은 전습 된지 오래다. 서로 맞서서, 나누지 않는 측에서는 오직 나누지 않는 것에 힘을 써서 그 나누는 것을 미워하고, 나누는 ...
일찍이 상주(尙州)의 선비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는 영호남이 주리(主理)․주기(主氣)로 양분되어 대립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여 ‘근세 양가의 설은 전습 된지 오래다. 서로 맞서서, 나누지 않는 측에서는 오직 나누지 않는 것에 힘을 써서 그 나누는 것을 미워하고, 나누는 측에서는 오직 나누는 것에 힘을 써서 나누지 않는 것을 미워하니, 다 같이 반은 얻고 반은 잃어버림을 면치 못하고 있다.’ 라고 하여 당시의 영․호남의 유학이 각기 교조주의적으로 흐르는 것을 비판하였다.
당시 정치적으로 적대하고, 사상적으로 모순관계에 있었던 특정지역에서 타 당, 타 지역의 학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영남의 접경지대 서인들은 바로 이러한 위험을 감수했던 소수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했던 영남의 서인들을 대상으로 다음의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여기서 세 지역을 특별히 지목한 것은 세 개 지역이 접경지대로서의 특성을 비교적 잘 간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과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전선(戰線)이 이들 지역으로부터 인근의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볼 때, 연구의 범위를 더 넓힐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연구의 충실을 기하기 위하여 방편적으로 설정한 것임을 말해둔다.
이러한 한계 안에서 본 연구는 첫째, 17,8세기 대구지역, 진주지역, 경북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한 영남서인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대구는 퇴계학의 세가 강했던 곳이다. 대구에서 서인이 등장했던 것은 제2차 예송논쟁 패배로 이후 남인세력이 중앙정가에서 축출되면서 부터였다. 17,8세기 대구에서 서인의 기치를 들과 행세했던 주요가문으로는 만촌동의 옥천 전씨(全氏), 상인동의 단양 우씨(禹氏,) 파동의 대구 하씨(夏氏), 무태의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었다. 이들 중 옥천 전씨가 먼저 서인을 표방하였고, 옥천전씨와의 혼맥관계로 단양 우씨가 서인에 편입되었으며, 또 단양 우씨와의 혼맥관계로 대구 하씨가 서인에 편입되었다. 인천 이씨의 경우는 이약채가 도암 이재의 제자인 송명흠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서인에 편입된 경우이다. 진주는 안동, 경주와 함께 경상도를 삼등분하여 그 한 중심에 위치하면서 문화활동의 중심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남명학의 세가 강했던 곳이지만 서인이 득세한 이후 기호학도 널리 보급되었다. 17,8세기 서인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주요가문으로는 귀곡의 해주 정씨(鄭氏), 단목의 진양 하씨(河氏) 등을 대표로 들 수 있고, 그 외 백곡의 청주 한씨(韓氏), 신안의 안동 권씨(權氏) 등도 서인에 속한다. 경북장기향교의 서인들은 송우암이 69세(1675, 숙종 원년)되던 해 에 장기현으로 귀양와서 위리안치되어 4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배운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에게서 배우고 스승을 기념하여 죽림서원을 창건했던 오도종, 이석증, 황보헌, 이동철, 한시유 등 유생과, 우암의 장기 유배생활에 대한 실상을 후세에 기록으로 전해준 김연, 오도징, 이유, 오시좌, 민종대 등에 관해 연구한다. 둘째, 세 향교를 배경으로 서인들과 남인들의 각축, 타협, 협력 등에 관한 연구이다. 흔히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는 대립을 넘어 소통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지역향교에서 대치했던 영남 남인과 영남 서인의 문제는 바로 이 오늘날 우리 사회 모든 대치상황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대치는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대치, 억지주장을 푸는 데 있어서 유교적 지혜는 무엇이었나를 영남지역 서인들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이 이 연구의 중요한 목적가운데 하나이다. 셋째, 미시사적 연구를 통해, ‘조선유학=기호․ 영남의 분립’ 이라는 기존의 시각을 해소하고자 하는 연구이다. 오늘 날에 있어서도 사회의 대립을 ‘영․호남의 대립’이란 시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사회가 영호남으로 대립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은 허위이다. 사회적 대립은 보다 근원적인 불안과 불만으로 인해서 생겨난다. 조선유학도 결코 기호․․ 영남 이란 시각으로 보는 것은 왜곡에 가깝다. 이는 영남에 상당한 기호학파=서인들이 존재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접경지대 향교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갖게 된다. 우리의 연구는 조선시대 영남의 접경지 향교, 문중에 대한 미시사적 연구를 통해 조선유학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기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