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志>라 부르는 <三國志通俗演義> 혹은 <三國志演義>는 晉의 학자 陳壽(233~297)가 쓴 魏, 蜀, 吳 三國의 正史와 민간에 유전되던 삼국의 이야기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소설로 중국은 물론 전 세계에 퍼져 읽혀지고 있는 대표적 스테디셀러이다. 특히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는 소설뿐만 아니라 만 ...
<三國志>라 부르는 <三國志通俗演義> 혹은 <三國志演義>는 晉의 학자 陳壽(233~297)가 쓴 魏, 蜀, 吳 三國의 正史와 민간에 유전되던 삼국의 이야기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소설로 중국은 물론 전 세계에 퍼져 읽혀지고 있는 대표적 스테디셀러이다. 특히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는 소설뿐만 아니라 만화, 영화, 컴퓨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영역을 만들고 있으며, 현대인의 필독서를 묻는 많은 조사에서 단연코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기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기 이면에는 각국의 독특한 문화적 특이성이 존재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타국의 문학이 유입되어 번역되는 과정에서 자국의 독특한 문화가 결합되어 원래의 텍스트와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는데, 특히 <삼국지연의>의 경우 그 유행의 모습이 사뭇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7세기 후반부터 강화되는 ‘대명의리론’에 의해 주희의 『통감강목』이 강조되고, 이것의 보급서로서 『통감절요』가 중시되면서 ‘촉한정통론’에 의해 쓰여진 <삼국지연의>가 역사 교화서로서 유행한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미 <삼국지연의>가 번역되어 외국어 교과서로도 사용되는가 하면, 민간에서는 한글 필사본 형태 또는 이야기꾼의 입을 통해 여항에 널리 퍼지게 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완질의 <삼국지연의>가 18세기 후반에 상업출판이 성행하게 되면서 경제적 여건상 巨帙을 모두 판각할 수 없자 독자들이 원하는 재미있는 부분만을 절취하거나, 내용을 개작하여 출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축약과 개작은 <삼국지연의>가 주는 정통론적 대의명분과 역사적 사실은 희석하고, 흥미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흥미만을 강조한 개작 <삼국지연의>에도 언제나 유비는 善人, 조조는 惡人으로 묘사하는 정통론적 대의명분은 이어졌으며, 현재의 독자들 또한 ‘大義’와 ‘名分’에 의해 싸우는 <삼국지연의> 주인공들을 통해 역사의 흥망을 배우고 있다. 이에 반하여 일본은 <삼국지연의>가 처음 일본어로 번역되어 유통되었을 때부터 이미 상업적으로 출판되어 ‘대의’나 ‘명분’ 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읽혀졌으며, 이후 가부키라는 공연물로 연희되면서 일본풍이 한층 강조된 <삼국지연의>로 연변되었다. 이러한 일본풍의 <삼국지연의>는 간혹 조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삼국의 이야기를 만들기도 해 촉한정통론이 주는 <삼국지연의>의 ‘대의’는 퇴색되었다. 특히 ‘47명의 충신’들이 주군을 위해 복수를 하고, 바쿠후(幕府)의 결정에 따라 전원 할복한 사건을 통속화한 <주신구라>의 영향으로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대의’는 주군을 위한 ‘忠義’로 바뀌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삼국지연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게다가 현재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삼국지연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군기자였던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가 전쟁 중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에 연재한 소설로 기존의 <통속삼국지>에 ‘주신구라의 충의’와 세계대전 중 만들어진 ‘일본식 파시즘’을 결합해 독특한 일본식 <삼국지연의>를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정사를 다시 소설화해 조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삼국지연의>를 창작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삼국지연의> 수용 양상을 연구하는 일은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읽혀질 <삼국지연의>를 통해 타국의 문화가 유입되어 자국화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화의 특이성을 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정통론의 입장에서 기술된 이 작품이 두 나라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이것이 두 나라의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삼국지연의> 수용에 나타난 두 나라의 문화적 특이성을 찾아내고, 그 특이성이 만들어지게 된 원인과 배경을 밝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두 나라의 ‘문화 형성 지형도’를 만들 것이다. 현재까지도 두 나라 교양인의 필독서라는 <삼국지연의>를 통해 만들어진 ‘문화 형성 지형도’는 나아가 한 ․ 일 양국의 문화 정체성을 밝히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기대효과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적 지배이념에 의해 ‘도가 실려 있지 않는 글(文以載道)’은 세상을 어지럽힌다 하여 천시했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비록 허황된 소설이긴 하지만 연의류 소설이 주는 역사성과 촉한정통론 때문에 한문 독자들에 많은 인기를 얻어 과장의 시험으로 출 ...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적 지배이념에 의해 ‘도가 실려 있지 않는 글(文以載道)’은 세상을 어지럽힌다 하여 천시했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비록 허황된 소설이긴 하지만 연의류 소설이 주는 역사성과 촉한정통론 때문에 한문 독자들에 많은 인기를 얻어 과장의 시험으로 출제될 정도로 정사와 혼용해 읽혀졌으며, 아동이나 부녀를 위한 교화서로서의 기능도 했다. 임진 이후 유포된 관우 신앙과 함께 여항에 급속도로 퍼진 <삼국지연의>는 한글로 번역되면서 필사본 또는 방각본 형태로 빠르게 유전되었다. 특히 경제적 여건상 많은 분량의 <삼국지연의>를 모두 판각할 수 없는 방각본의 경우 인기 있는 부분만을 따로 떼어 축약 또는 개작을 했기 때문에 기존의 <삼국지연의>와는 그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다른 <삼국지연의>를 판각해냈고, 이러한 축약과 개작은 <삼국지연의>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흥미만을 강조한 개작 <삼국지연의>에도 언제나 유비는 善人, 조조는 惡人으로 묘사하는 정통론적 대의명분은 이어졌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삼국지연의> 수용은 지배이념과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 속에서 정통론을 고수하게 되었다. 반면 일본은 섬나라의 특수성 때문에 중국과의 정치적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데다가 지배 이념도 달라 순수하게 문화적 측면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때문에 <삼국지연의>가 처음 일본어로 번역되어 유통되었을 때부터 일본은 이미 상업적으로 출판되어 ‘대의’나 ‘명분’ 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읽혀졌으며, 이후 가부키라는 공연물로 연희되면서 일본풍이 한층 강조된 <삼국지연의>로 연변되었다. 이러한 일본풍의 <삼국지연의>는 간혹 조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삼국의 이야기를 만들기도 해 촉한정통론이 주는 <삼국지연의>의 ‘대의’ 퇴색되었다. 특히 ‘47명의 충신’들이 주군을 위해 복수를 하고, 바쿠후(幕府)의 결정에 따라 전원 할복한 사건을 통속화한 <가나데혼주신구라(假名手本忠臣藏)>(一名 <주신구라>)의 영향으로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대의’는 주군을 위한 ‘忠義’로 바뀌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삼국지연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와 같이 兩國의 <삼국지연의>는 초기 수용에서부터 차이가 났으며, 문화의 이질성에 따라 그 주제의식마저도 변용되어 독특한 그들만의 <삼국지연의> 문화를 만들어갔다. 이러한 문화의 이질성은 특히 전근대 사회에서 중국과 잇닿은 반도국인 우리나라와 섬나라인 일본의 지리적 특성도 한몫을 했다. 따라서 중국 문화가 한 ․ 일 양국에 전파되어 유전되어 나갈 때는 언제나 그 나라만의 역사와 문화가 작용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번 연구는 바로 이렇게 타국의 문화가 전파 유전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국만의 역사와 문화적 특징에 대해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정통론의 입장에서 기술된 <삼국지연의>가 한 ․ 일 두 나라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이것이 두 나라의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연구가 더욱 穿鑿되어 올바로 시행되면 두 나라의 문화 형성의 大旨를 밝힐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두 나라의 ‘문화 형성 지형도’를 만들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한 ․ 일 양국 문화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삼국지연의> 早期版本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에서 <삼국지연의>를 연구하게 되면 부수적으로 그동안 일본 자료를 확인하지 않고 막연히 추정해왔던 우리나라에 유입된 <삼국지연의>의 저본을 확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연구요약
<삼국지연의>가 우리나라에 처음 유입된 것은 대략 선조 때이며, 이때 유입된 <삼국지연의>는 시기적으로 가정본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이후 유입된 주왈교본의 개각본이라 추정되는 <정묘탐라간본>만이 여러 도서관에 낙 ...
<삼국지연의>가 우리나라에 처음 유입된 것은 대략 선조 때이며, 이때 유입된 <삼국지연의>는 시기적으로 가정본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이후 유입된 주왈교본의 개각본이라 추정되는 <정묘탐라간본>만이 여러 도서관에 낙권으로 산재해 있다. 이후 숙종연간에 촉한 정통론이 강화된 모종강평본이 유입되면서 <삼국지연의>는 교화서로서 자리를 잡으며 대거 유행한다. 물론 正史가 아닌 연의류 소설이 주는 허황함 때문에 유자들의 비난을 받기는 했어도 <삼국지연의>는 유입 초기부터 꾸준히 世人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미 <삼국지연의>가 번역되어 만주어 교과서로도 사용되는가 하면, 민간에서는 한글 필사본 형태로 널리 읽혀졌거나, 이야기꾼의 입을 통해 여항에 퍼졌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완질의 <삼국지연의>가 18세기 말부터 상업출판이 성행하게 되면서 경제적 여건상 巨帙을 모두 판각할 수 없자 독자들이 원하는 재미있는 부분만을 절취하거나, 내용을 개작하여 출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축약과 개작은 <삼국지연의>가 주는 정통론적 대의명분과 역사적 사실은 희석하고, 흥미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함께 가져왔다. 그리고 19세기 말 일본을 통해 들어온 연활자 인쇄 기술은 西歐의 製紙術에 의한 低價의 종이 공급과 결합되어 저렴한 서책을 다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삼국지연의> 또한 이러한 다량 생산에 힘입어 많은 이본을 만들어 냈는데, 이로 인해 <삼국지연의>는 더 이상 역사 부연물이 주는 ‘교화서’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오락서’로서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오락서’로서의 기능만 남게 된 개작 <삼국지연의>에도 언제나 유비는 善人, 조조는 惡人으로 묘사하는 정통론적 대의명분은 이어졌다. 이에 반하여 일본에 <삼국지연의>가 전해진 것은 대략 17세기 초반이고, 17세기 말에 湖南文山이라는 삼류문인에 의해 <삼국지연의>가 <通俗三國志>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 이 책은 이탁오평본을 저본으로 삼아 쉬운 일본말로 완역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白話를 번역한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개작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天保년간에 당시의 유명한 화가 葛飾北齌의 제자가 그린 400여 장의 그림을 붙인 <繪本通俗三國志>가 출판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들 이본들은 번역이라기보다는 湖南文山의 잘못된 번역을 답습했거나 일본풍으로 고친 것으로 근대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은 대개 이렇게 고친 일본풍 <삼국지연의>를 읽었다. 때문에 <삼국지연의>의 초기 유행부터 우리와는 사뭇 다른 상업적 오락서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렇게 고쳐진 <삼국지연의>는 일본의 전통 연극인 조루리와 가부키를 통해서 일본풍이 한층 고조되었다. 게다가 ‘47명 충신’들이 주군을 위해 복수를 하고, 幕府의 결정에 따라 전원 할복하는 사건을 통속화한 <주신구라>의 영향에 의해 <삼국지연의>의 전통 주제인 ‘大義’가 ‘忠義’로 바뀌게 된다. 또한 에도시대에 형성된 소라이가쿠(徂徠學)에 의한 정치 문화적 영향은 주자학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겨나면서 한국에서와 같은 <삼국지연의>의 교화적 측면 없이 상업적 오락물로서의 가치만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개작된 일본의 <삼국지연의>는 이후 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군기자였던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가 전쟁 중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에 연재하면서 ‘일본식 파시즘’이 결합해 독특한 일본만의 <삼국지연의>를 만들었으며, 최근 정사를 다시 소설화해 조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삼국지연의>를 창작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삼국지연의>는 수용 초기부터 성리학의 정통 이념에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조루리와 가부키 같은 연희물에서는 유비를 여성인물로 묘사하거나 조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등의 다양한 일본식 <삼국지연의>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兩國의 <삼국지연의>는 초기 수용에서부터 차이가 났으며, 문화의 이질성에 따라 그 주제의식마저도 변용되어 독특한 그들만의 <삼국지연의> 문화를 만들어갔다. 이러한 문화의 이질성은 특히 전근대 사회에서 중국과 잇닿은 반도국인 우리나라와 섬나라인 일본의 지리적 특성도 한몫을 했다. 예컨대 한국과 일본에 들어와 민간에 널리 퍼진 ‘관우 신앙(관제묘)’은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인들에 의한 것이지만, 일본의 요코하마(橫浜), 고오베(神戶), 나가사키(長崎) 등지에 있는 ‘관제묘’는 모두 중국 상인들이 건설한 것처럼 중국 문화가 한 ․ 일 양국에 전파되어 유전되어 나갈 때는 언제나 그 나라만의 역사와 문화가 작용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글키워드
인식의 변화,문화의 특이성,상업성,정통론,저본,<삼국지연의>,수용 양상,이본,상업출판,의,충의,문화의 전파
영문키워드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culture diffusion,reception,alternative version,original text,commercial publication,change of awareness,loyalty,justice,particularity of culture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한국에서의 <삼국지연의> 수용은 유입 초기부터 왕을 비롯한 상층 독자를 위해 중국에서 유입된 <삼국지연의> 원문을 그대로 인출 혹은 판각해 보급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로 보건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지연의>가 유입 초기부터 성행했음을 알 수 있으며, 여 ...
한국에서의 <삼국지연의> 수용은 유입 초기부터 왕을 비롯한 상층 독자를 위해 중국에서 유입된 <삼국지연의> 원문을 그대로 인출 혹은 판각해 보급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로 보건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지연의>가 유입 초기부터 성행했음을 알 수 있으며, 여러 문인들의 문집에 기록된 글로 볼 때 비록 허황된 소설이지만 역사 교화서로서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면서 이러한 역사 교화서로서의 역할은 축소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삼국지연의>의 기본 주제인 촉한을 정통으로 하는 ‘대의’는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인식은 중국과 잇닿은 반도국이라는 지리적 여건상 중국의 정치 문화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성리학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삼국지연의>의 주제의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일본에서의 <삼국지연의> 수용은 중국에서 유입된 <삼국지연의>를 따로 출판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때 유입 초기에 독자층이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최초의 자각적 주자학자인 하야시 라잔과 같은 문인들의 독서목록에 역사서류와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일본 역시 유입초기에는 역사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를 성리학적 맥락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촉한에 대한 정통론적 대의명분을 직접 내세우는 것과는 달리 일본은 <삼국지연의>의 정통론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 정통론과 당시의 지배이념을 공고히 하는데 활용하고 있어 <삼국지연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일본어로 번역된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더욱 두드러져 일본만의 <삼국지연의> 문화를 형성했으며, 가부키 등과 같은 공연물로 연희되면서는 일본풍이 더욱 가미되어 그 주제의식마저 ‘충의’로 바뀌게 된다. 게다가 2차 대전 당시 종군 기자였던 요시가와 에이지가 신문에 연재한 <삼국지연의>는 기존의 <통속삼국지>에 ‘주신구라의 충의’와 세계대전 중 만들어진 ‘천황제 파시즘’이 결합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의 <삼국지연의>는 촉한 정통론보다는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새로운 정통론과 주제를 부각시키면서 발달하게 된다.
영문
From the early stage of its reception to Chosun,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as copied and printed in its original Classical Chinese form in order to be distributed to the upper class readers, including the king. It seems to have enjoyed popula ...
From the early stage of its reception to Chosun,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as copied and printed in its original Classical Chinese form in order to be distributed to the upper class readers, including the king. It seems to have enjoyed popularity among Koreans from the early stage of its introduction, and judging from the accounts in anthologies of many literati, it provided historical lesson and guidance to the readers, although it was a book of fiction. Though its role as historical lesson reduced when the Korean translation became available, the fundamental theme that supported the cause of Shu Han remained intact. This may have been a result of political consideration that came from Chosun's geographic location as the neighboring country of China. However, a more fundamental reason would be that the theme of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as deeply related to Chosun's state ideology, Confucianism. To the contrary,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in its original form from China was not published in Japan. This suggests the limited readership in Japan in the early stage of its reception. As it was listed along with history books in the reading list compiled by intellectuals, such as Hayashi Razan, it seems that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as also treated as a book of historical lesson in Japan. Hence, Japan seems to have accepted the Confucian context of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just as Chosun did. Nonetheless, while Chosun asserted the cause of Shu Han based on its direct relation with China, Japan used the logic of historical legitimacy demonstrated in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to support their own historical legitimacy and the ruling ideology. Japanese translation of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enhanced the difference even more and established a culture of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unique to Japan. When it was adopted in Kabuki, the Japanese-ness was far more strengthened and even the theme changed to the 'loyalty.' This could be a result of Japan's geographical location that allowed it to keep certain distance from China's political influence, and enabled it to accept the purely cultural side of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三國志演義>는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읽히는 소설로 만화, 영화, 컴퓨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영역을 만들고 있는 대표적 스테디셀러이다. 이러한 인기는 七實三虛라는 이 소설의 역사성과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영웅들의 모습이 ...
<三國志演義>는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읽히는 소설로 만화, 영화, 컴퓨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영역을 만들고 있는 대표적 스테디셀러이다. 이러한 인기는 七實三虛라는 이 소설의 역사성과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영웅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 될 것은 타국의 문화가 유입될 때 자국의 문화적 특이성이 작용된다는 것이다. 특히 <삼국지연의>와 같은 문학작품이 유입되어 유통되는 과정에서는 자국의 역사나 정치적 상황이 결합되어 원래 텍스트가 가지는 의도와는 다르게 유행하기도 한다. 때문에 이러한 연구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각각의 ‘네이션’을 만드는 과정에서 문학 특히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으로 <삼국지연의>가 유입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선조(1552~1608) 때 유입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왕도 이 작품을 역사와 혼동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입 초기부터 허구적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구연물이 주는 역사성과 촉한정통을 내세우는 주제의식으로 인해 역사서와의 구별을 잘 안 했거나 혼동해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한글로 번역된 <삼국지연의>는 외국어 교재로 사용되는가 하면, 민간에서는 한글 필사본 형태 또는 이야기꾼의 입을 통해 여항에 널리 퍼지게 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완질의 <삼국지연의>가 18세기 후반부터 상업출판이 성행하게 되면서 경제적 여건상 巨帙을 모두 판각할 수 없자 독자들이 원하는 재미있는 부분만을 절취하거나, 내용을 개작하여 출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축약과 개작은 <삼국지연의>가 주는 정통론적 대의명분과 역사적 사실은 희석하고, 흥미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삼국지연의>가 이렇게 축약 ․ 개작되었어도 유비 중심의 평어 삽입과 이전 판본에 들어 있던 조조의 찬양성 평가를 의식적으로 삭제한 ‘모종강평본’보다 더 조조를 낮추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비를 높이는 전통론적 대의명분은 유지되었다. 일본 역시 언제 처음으로 <삼국지연의>가 유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 최초의 자각적인 주자학자로 알려진 하야시 라잔(1583~1657)의 문집에 이 책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봤을 때 대략 17세기 초반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연의>에 대한 그의 기록 중 눈에 띄는 것은 제갈량과 조조를 거론하면서 일본의 남북조시대 왕조 찬탈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는 일본의 남북조시대와 중국의 삼국시대를 연결시키는 예로 일본의 <삼국지연의> 유행에 일본의 역사적 사건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은 우리와 다르게 ‘대명의리론’ 등과 같은 이념적 요소보다는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정통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삼국지연의>를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후 일본어로 번역된 <通俗三國志>는 당시 유행했던 일본의 남북조시대를 다룬 <太平記> 등의 군기소설에 영향을 받아 빠르게 대중 속으로 전파된다. 이렇게 일본 군기소설의 영향 아래서 일본풍이 가미된 <삼국지연의>는 가부키 등으로 상연되면서 일본 문화에 녹아든다. 특히 일본 대중문화 속에 녹아든 <삼국지연의>는 ‘47명의 충신’들이 주군을 위해 복수를 하고, 바쿠후의 결정에 따라 전원 할복한 사건을 통속화한 <가나데혼주신구라>의 영향으로 촉한 정통론에 입각한 ‘大義’는 주군을 위한 ‘忠義’로 바뀌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삼국지연의> 문화를 만들어 갔다. 게다가 현재 일본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삼국지연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군 기자였던 요시가와 에이지가 전쟁 중 신문에 연재한 소설로 기존의 <통속삼국지>에 ‘주신구라의 충의’와 세계대전 중 만들어진 ‘일본식 파시즘’을 결합해 독특한 일본식 <삼국지연의>를 만들었다. 때문에 일본의 <삼국지연의>는 촉한 정통론보다는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새로운 정통론과 주제를 부각시키면서 발달하게 되면서 전통론적 大義論보다는 사무라이적 忠義論이 결합되어 일본만의 <삼국지연의> 문화를 형성했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그동안 수행한 ‘한국과 일본에서의 <삼국지연의> 수용 양상 비교 연구’는 타국의 문화가 유입되어 자국화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화의 특이성을 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특히 성리학적 정통론의 입장에서 기술된 이 작품이 두 나라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이것이 ...
그동안 수행한 ‘한국과 일본에서의 <삼국지연의> 수용 양상 비교 연구’는 타국의 문화가 유입되어 자국화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화의 특이성을 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특히 성리학적 정통론의 입장에서 기술된 이 작품이 두 나라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이것이 두 나라의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을 빌려 "네이션이란 vernacular한 언어(속어)를 통해,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형성된다고 말하고, 이 경우 신문과 소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이 그때까지 서로 관계가 없던 사건, 사람, 대상을 병치시키는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설’은 네이션 형성에서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했다. 따라서 이번 연구결과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전근대는 물론 근대 이후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라는 각각의 ‘네이션’을 만드는 과정에서 문학 특히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를 통해 사람들은 역사와 허구 그리고 이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또 하나의 역사 즉 살아있는 문화를 만드는지 알게 했다. 다시 말해 한 ․ 일 양국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삼국의 이야기는 당시 대중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새로운 <삼국지연의>의 문화적 코드를 읽어낼 지표가 될 것이다. 끝으로 이 연구결과는 현재 학문적 연구보다는 만화, 컴퓨터 게임으로 오락성만을 추구하는 <삼국지연의> 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꿀 것으로 기대된다.
색인어
삼국지연의, 전래, 수용, 성리학, 역사, 문화, 촉한정통론, 전통론적 대의론, 사무라의적 충의론, 네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