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현대음악 작곡가로 인식되는 윤이상과 박영희의 작품세계에 한인의 망명, 또는 이주라는 문화학적 시각으로 접근하였다. 문화적 특성이 짙은 작품들을 분석적으로 고찰한 다음, 분석의 결과를 양식과 사회의 관계 도출에 적용하였다. 박영희에 관한 연구에서는 ...
본 연구는 현대음악 작곡가로 인식되는 윤이상과 박영희의 작품세계에 한인의 망명, 또는 이주라는 문화학적 시각으로 접근하였다. 문화적 특성이 짙은 작품들을 분석적으로 고찰한 다음, 분석의 결과를 양식과 사회의 관계 도출에 적용하였다. 박영희에 관한 연구에서는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페미니즘과 결부된 문화음악학적 해석과, 윤이상과의 비교 연구를 추가하였다.
◉ 망명작곡가 윤이상
망명작곡가 윤이상의 사회참여작품 가운데, 평양에서 작곡되고 초연된 윤이상의 칸타타 <나의 땅이여, 나의 민족이여>(1986/1987)와 동경에서 위촉, 거기서 초연된 마지막 교향시 <화염에 쌓인 천사>(1994)를 분석하였다. <나의 땅이여, 나의 민족이여>에서는 화성과 특징적 제스처, 가사에 대한 세팅방식, 4악장의 양식적 특성을 중심으로 분석하였고, <화염에 싸인 천사>에서는 음정층의 구조와 관현악 기법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전자에서는 '통일'이라는 표상과 관련된 가사가 말소리기법으로 처리되었다. 후자에서 관현악의 극적 효과는 분신을 묘사하는 장면 III에 특히 잘 나타나며, 타악기군과 금관악기의 배치방식, 다이내믹이 극적 전개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 작품을 각각 '민족표상', 망명자의 마지막 '기억'이라고 볼 수 있다. 윤이상의 사회참여 작품은 1980년대 사회의 흐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연구자는 유럽에서 입수한 자료를 통해 그의 작품활동이 그가 처한 경제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 여성 이주작곡가 박영희
박영희의 작품세계에서 땅을 소재로 한 작곡구상을 먼저 살펴 본 다음, 여성 독창과 타악기를 위한 <불꽃>(1983), 대관현악을 위한 <님>(1987), 그리고 네 타악그룹과 전자음향을 위한 <지신굿>(1993/94)을 분석하였다. 박영희는 한국의 민속문화를 ‘땅’에 비유, 이를 여성 특유의 미학으로 재구성한다.
<불꽃>(1983)에서는 판소리의 표현특성이 서구 텍스트작곡(Textkomposition) 양식으로 변용된다. 주요텍스트는 나치에 저항하던 백장미 그룹의 전단지이며, 작곡자가 성경구절을 직접 삽입하기도 하였다. 전체 여섯 부분과 에필로그로 나누어지며, 프레이즈들은 휴지부나 ‘말소리(Sprechstimme)', 또는 타악기를 통해 연결된다. 판소리의 창법을 장식음적 전타음, 다양한 방식의 비브라토, 글리산도와 같은 가창법 표기를 통해 변용하며, 부분적으로는 판소리의 실제 창법이 요구되기도 한다. 추임새는 독창자가 말하며 스스로 북을 치는 방식으로 변용된다.
‘땅’-시리즈의 주요작품인 <님>은 민주항쟁에서 분신자살한 젊은이들을 기억, 애도하는 의미에서 작곡되었다. 이 기억이 어떻게 관현악화되는지를 살펴 보았다. 전체 네 부분,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E♭음이 중심음의 효과를 내는 가운데, 둘째 부분을 제외한 각 부분들의 첫째 아코드와 마지막 아코드의 경계음이 한국 전통의 계면모드로 구성되었다. 한국 민속리듬의 변용을 셋째 부분부터 증대시키면서, 한국 민중의 “억압과 분노”를 연출한다.
<지신굿>(1993/94)은 네 명 타악주자의 라이브 연주, 이것이 전자음향과 공존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며, 구체음악작법에 속한다. 뒤로 갈수록 라이브의 비중이 커지고 전자음향의 비중이 적어진다. 한국의 민속악기들이 세 그룹에 배치되었으며, 중국, 남미, 아프리카 문화권의 타악기들이 적어도 한 그룹에는 배치되었다. 비서구 민속음향의 이산구조는 기계화 - 즉흥 - 공연의 양식으로 도식화된다. 심봉사가 도둑맞고 절규하는 판소리 <심청가>의 일부분이 기계적으로 가공, 재생되었는데, 이를 남성 중심의 기술사회에 대한 저항, 포스트식민적/페미니즘적 주체의 숨은 저항이라고 해석하였다.
◉ 윤이상과 박영희 비교
윤이상이 대관현악곡을 선호하고 서양 전통의 장르를 적극 수용한 반면, 박영희는 성악, 타악기, 그리고 작은 규모의 앙상블을 선호하였다. 두 작곡가의 제스처적 어법의 근원은 공통적이지만 그 구현방식은 각기 다르다. 윤이상의 작품에 직접 나타나지는 않는 즉흥, 민속리듬과 한국어 가사가 박영희에게는 나타나는가 하면, 특정리듬이 주제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선호하는 헤미올 리듬, 수평적 음향은 윤이상이 응용했던 아악음향의 특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박영희의 <지신굿>(1993/94)과 윤이상의 <예악>(1966)은 모두 상호문화적 의식, 포스트식민적 재현의 요소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