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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허구적 이미지 - 독일문학과 한국문학 비교 연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인문저술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09-812-A00271
선정년도 2009 년
연구기간 3 년 (2009년 12월 01일 ~ 2012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최문규
연구수행기관 연세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인간은 육체로서 존재하는 한 물질적 덩어리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사실 자신의 육체가 소멸되는 과정을 밝으며 이것이 곧 인간의 존재 혹은 삶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란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부재하는 순간, 탈물질화된 순간을 뜻한다. 그 순간은 곧 육체와 영혼, 물질성과 비물질성, 말할 수 있음과 말할 수 없음, 유한과 무한을 나누는 간극이자 차이이며 단절이다. 인간은 병과 상처 등을 통해 그와 같은 죽음을 맞이하거나 뜻밖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말하자면, 순간으로서의 죽음은 전과 후, 지나간 것과 나중의 것을 갑작스럽게 갈라주는 시간이다. 죽음은 또한 인간의 물리적, 육체적 한계를 뜻한다. 그렇기에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어떤 초월적인 것을 구함으로써 불변의 세계나 영혼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간직하려 하며, 영혼이나 정신과 관계된 형이상학적, 우주론적 사유는 그런 물질적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화나 종교의 근원과 관련해서도, 유한한 존재의 죽음은 신의 금지된 명령을 위반한 원죄에 대한 징벌을 뜻하고 그 징벌과 함께 무한한 세계로의 구원과 연결된다.
    본 연구의 목적은 죽음 자체에 대해 철학적, 종교적, 인류학적 대답을 구하는 데 있지 않다. 사실 서양의 경우 죽음은 기독교의 구원 사상이나 존재론에 의해 주로 해석되어 왔고, 동양이나 한국의 경우 불교, 유교, 도교 같은 종교적 배경 하에서 구원, 본향, 근원 같은 의미에서 죽음의 초극론(超克論)이 다루어졌다. 이러한 사상과 이념에 대한 탐색은 불교와 철학 영역에서 자주 제시되어 왔기에 본 연구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또한 본 연구는 실제 삶에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의 심리학적, 정신의학적인 연구, 예를 들면 <<상실 수업>>(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혹은 <<죽음의 기술>>(피터 펜윅/엘리자베스 펜윅) 같은 연구서가 내세운 죽음을 회피하지 말고 ‘제대로 된 죽음’,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라는 그런 삶의 자세와 관련된 연구가 결코 아니다.
    그런 철학적, 종교적, 인류학적, 심리학적 경향을 염두에 두면서 본 연구는 독일 문학과 한국 문학 작품에서 죽음이 허구적, 미적으로 어떻게 이미지화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삶은 죽음의 시작이다. 삶은 죽음을 위해 존재한다”(노발리스), “모든 삶의 목적은 죽음이다”(프로이트), “죽어가는 자기 - 그 죽음의 실천 - 이것이 현대의 순교다”(김수영) 같은 식의 죽음의 존재론적, 심리학적 이론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작품 내에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죽음의 다양한 이미지를 읽어냄으로써 본 연구는 서양과 동양 간의 문화적, 문학적 차이를 밝힐 뿐만 아니라 개별 문학사조 간의 차이를 읽어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죽음에 대한 기존 철학적(하이데거, 아도르노, 마르쿠제), 문화학적(아리에, 아스만)의 선행 작업을 살펴볼 것이며, 이어서 다양한 독일 문학 작품과 한국 문학 작품들을 중심으로 죽음의 허구적 이미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문학은 터부시된 죽음을 다시 호명한다. 그 호명된 죽음은 때론 추악하고 적나라한 육체로, 때론 초현실적이고 상상적인, 극히 추상적인 모습을 띤다. 적나라함에서도 다양하며, 추상성에 있어서도 다양하다. 그런 다양한 허구적 이미지를 통해 호명된 그 죽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동서양이 서로 만난다면, 죽음의 허구적 이미지를 다양한 범주로 세분화함으로써 그 양자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독일문학과 한국문학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각 나라의 작가들이 자신의 허구적 인물에 어떤 식으로, 어떤 의미에서의 죽음을 부여하는가를 통해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에 허구적으로 이미지화된 죽음에 대한 이해와 연구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죽음의 내면화의 위험성을 극복하게 해주며 아울러 거리와 성찰의 계기를 가져다준다. 물론 그런 긍정적인 측면 이외에 문학작품은 항상 잘못된 수용이라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모방과 키치화의 위험이 그것이다.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흔한 소재를 새로운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문학의 주된 특성이지만, 이러한 문학의 허국적 이미지는 수용 과정을 통해 종종 삶에서 키치화되곤 한다. 죽음의 허구적 이미지의 경우,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서 죽음이 숭고하게 그려지는 결말을 쉽게 대할 수 있다. 이 때 죽음의 일상화 혹은 죽음의 키치화는 독자와 관객에 의해 초래되는데,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유래된 일명 베르테르 효과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오늘날의 경우 새로운 매체 환경의 변화가 그런 기이한 수용의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많은 이들이 각종 컴퓨터 게임을 통해 ‘유희적 죽음’에 익숙해짐으로써 인간의 실제 죽음에 대한 진지한 사유보다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해체된 나머지 잘못된 죽음의 형이상학에 빠져드는 환경 말이다. 그러나 수용의 부정적인 현상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조건 회피하거나 억압하기보다는 인간 존재와 관련되어 죽음을 적극 허구적으로 이미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문학작품의 근본 특성이며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 ‘위험하고도 어두운’ 대상을 이미지로 표현해냄으로써 문학작품은 현재 사회와 인간적 삶의 의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계기를 또 다른 독자에게 건네준다.
  • 연구요약
  • 흔히 죽음은 현세와 이세, 육체와 영혼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플라톤 식의 사유에 의하면, 죽음은 육체와 영혼 간의 분리로서 순수 인식, 진리의 빛에 접근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지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이 아니고, 우리가 죽은 다음의 일이네.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는 동안은 순수한 인식을 가질 수 없다면, 두 가지 일 가운데 하나가 가능할 것이기에 말일세. 즉 인식에 전혀 도달할 수 없거나, 아니면 죽은 후에야 도달할 수 있거나 어느 하나일세.”(플라톤, <<파이돈>>) 죽음은 동시에 육체와도 긴밀하다. 즉 죽음은 육체의 종말이기도 하다. 플라톤 이후에도 수많은 철학자, 심리학자, 작가들이 언제나 죽음을 중요한 주제로 삼아 왔지만, 사실 엄격히 말하면 그 누구도 죽음 자체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경험을 전제하는 것인데, 살아 있는 자란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누군가 죽음을 경험했다면, 그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화의 능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한 자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자가 죽음 자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가운데 볼테르는 동물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죽는 것을 “알고 있는”(wissen)을 유일한 생물체라고 말한 바 있다(Voltaire, 1985: 144). 결국 자신이 죽는다는 것에 대한 앎이 있을 뿐, 죽음 자체가 무엇인지는 인간의 지적 한계 내에 있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1923년에 발표된 김억의 시를 통해 읽어낼 수 준다. “죽음이란 잠일가, / 꿈도 없는 새캄한 잠일가? / 그럿치 안으면 꿈일가. / 색캄한 잠 속에 생기는 밝은 꿈일가 / 우리들은 그것을 몰은다. 알 수가 업다. / 그러기에 죽음이란다 / 그것이 죽음이란다.”(김억, <<해파리의 노래>>) 결국 인간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 경우, 그것은 죽음 자체보다는 그것에 관한 자신의 지식에 불과하다. 그 지식은 시청각 기관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점차 부패되어 뼈만 남는 육체의 물질성 같은 현상, 삶의 한계와 불안의 상황, 피안에 대한 동경 등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죽음 자체의 본질적인 규명은 불가능하고 그 대신 단지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 죽음에 대한 앎/지식은 주로 타자의 죽음에 대한 간접적인 관찰의 결과이거나 혹은 죽음에 대한 자신의 불안감의 표상과 상상의 결과인 것이다. 상상적인 것 혹은 간접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앎은 결코 죽음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음을 하이데거는 이미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죽음은 상실로 드러나지만 그 죽음은 남아 있는 이들이 경험하는 손실 이상이다. 죽은 자가 ‘고통 받는’ 존재의 상실 자체는 그 손실의 고통 속에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정말 순수하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고작해야 ‘거기에 함께’ 있을 뿐이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흔히 존재의 상실로서 타자의 죽음과 함께 한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죽음 혹은 상실 자체가 아니며 단지 외적으로만 그 죽음과 함께 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죽어가는 이를 지켜보는 우리는 그 죽음 자체 혹은 죽는 자의 고통 자체를 경험하지 못한다.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 속에서 하이데거는 그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도 그 누구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는 죽음의 존재론적 논리를 펼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죽음을 “본래적인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독일에서 세기말로 일컬어지는 19세기말 및 20세기 초기의 독일 작품과, 한국 문학에서는 근대화 시기라 불리는 20세기 초기의 문학작품이 각기 중점적으로 비교 분석될 예정이며, 아울러 독일과 한국의 60년대 후반부터 최근 문학작품에서 죽음이 어떻게 허구적으로 이미지화되는지도 살펴볼 예정이다. 20세기가 중요한 이유는 죽음이 대량 생산되는 현대 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기 때문이며, 이 시기에 나름대로의 이미지화 방식을 통해 각각의 문학작품은 사회적으로 강요된 죽음에 대항하는 동시에 고유한 죽음을 찾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양 문학작품에 허구적으로 이미지화된 죽음을 범주화시키기 위해, 몸 자체의 생물학적 소멸, 허무와 추한 육신의 죽음, 아름다운 죽음, 에로틱한 죽음, 비개성적 존재의 죽음, 사회적 교환가치로서의 죽음, 추상적, 상징적 죽음, 자발적인 죽음, 잠행적 죽음, 충동적 죽음, 관습적 죽음, 강요된 죽음 등 다양한 범주를 설정할 예정이다.
  • 한글키워드
  • 전영택,하이데거,죽음,쉬니츨러,쥐스킨트,첼란,릴케,헤세,토마스만,카프카,추상적,허구적 이미지,사회적 교환가치로서의 죽음,비개성적 존재의 죽음,에로틱한 죽음,아름다운 죽음,몸 자체의 생물학적 소멸,문화학,야스만,아리에스,김연수,김훈,김승옥,이상,호프만스탈,노발리스,클라이스트,괴테,강요된 죽음,관습적 죽음,충동적 죽음,은희경,조경란,송경아,이문열,이청준,조세희,잠행적 죽음,자발적인 죽음,김동인,허무와 추한 육신의 죽음,브레히트,상징적 죽음
  • 영문키워드
  • Vergaenglichkeit und haessliche Leiche,Assmann,Aries,Heidegger,aesthetische Verbildlichung,Tod,gezwungener Tod,gewoehnlicher Tod,spontaner Tod,abstrakt-symbolischer Tod,biologisches Vergehen des Koerpers,Kulturwissenschaft,Tod als sozialerTauschwert,Tod des unpersoenlichen Daseins,erotischer Tod,schoener T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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