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경장 전후로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시기에 대한 교육사 연구에서, 종래의 연구관행은 전통적 교육의 구태를 벗고 이른바 근대교육 또는 신식교육을 시행하고자 어떤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지, 그 성과가 어땠는지에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 시기 ...
갑오경장 전후로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시기에 대한 교육사 연구에서, 종래의 연구관행은 전통적 교육의 구태를 벗고 이른바 근대교육 또는 신식교육을 시행하고자 어떤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지, 그 성과가 어땠는지에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성균관이나 향교, 양사재, 사숙(私塾) 등 전통적 교육기관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하며, 이들 기관에 대해서 별다른 존재 의의를 찾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관행이나 전통적 교육기관에 대한 시각은 최근 몇 몇 연구의 등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당시 새로운 교육기관을 통한 개혁의 움직임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전통교육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변용과 개선의 모색 역시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는 연구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단기간에 많은 자료를 검색하고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이 갖추어짐에 따라,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료가 새롭게 발굴되거나 부각됨으로써 이런 연구 경향이 큰 힘을 받고 있으며, 나아가 부정확한 이해를 바로 잡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높이고 있다.
이 연구는 갑오경장 직후에 등장한 경의문대(經義問對)라는 새로운 제도의 시행배경, 시행경위, 시행절차, 관련 인물들의 진로 등을 규명함으로써, 당시 성균관을 정점으로 하는 전통 교육체제가 어떤 시대적 적응을 모색했는지 소개하고 그 의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경의문대는 성균관장이 출제한 문제를 학부대신이 훈령으로 각 도(道)에 하달함으로써 관찰사로 하여금 전국의 유생에게 그에 대한 답안을 작성해 올리도록 하고, 그 중에서 일정한 수를 뽑아 한성에 소집하여 재차 시험치고 최종 합격자에게 직함을 주는 제도였는데, 사업시선(司業試選)으로 명칭이 바뀌고 근대학문이 출제과목에 포함되는 등 제도적 변용을 겪으면서 경술국치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이 제도는 교육사학 연구자들에게 조차도 생소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서, 최근 일기 시작한 전통 교육체제에 대한 새로운 경향의 연구에 소개된 적이 있으나, 그 면모가 제대로 드러났다고 보기 어렵다. 기존의 연구에서, 경의문대 제도는 당시 성균관의 운영과 관련하여 부수적으로 다루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체에 대해 의구심만 더하거나 유명무실 했던 것으로 도외시하기 쉬운 시선을 받는데 머물러 있다.
갑오경장 이후의 성균관 연구에서, 조선의 태학(太學)이 서구나 일본의 대학에 얼마나 멀거나 가까운 상태에 있었는가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명시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고 타당하지도 않다. 그것은 서구적으로 변모해 버린 오늘날의 대학을 갖고 있는 현대인이 자기편견을 반영한 것일 뿐이다. 이런 편견을 가급적 자제하고 당시 성균관에서 무엇을 했었는지, 성균관을 정점으로 하는 전통 교육체제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당시의 성균관 운영, 전통 교육체제의 실상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게 많기 때문이다. 경의문대가 바로 그 중 대표적인 요소이다.
당시 성균관의 운영과 관련된 제반 요소들을 추적해 나가다 보면, 경의문대라는 제도도 만날 수 있다는 식의 연구방향을 뒤집어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경의문대의 성립경위와 운영의 규칙 및 실제, 이로 인해 파생된 제반 사항 등을 엄밀하게 밝혀 나가다 보면, 당시 성균관을 어떻게 운영했는지, 성균관을 정점으로 했던 조선의 전통교육체제가 어떤 얼개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어떤 지향성을 띠고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연구방향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인재의 양성과 등용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평가하려는 의욕을 앞세우기 이전에, 과연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실상을 상세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