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무관심’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헬레니즘 시대의 ‘아디아포라adiaphora’와 ‘아파테이아aphateia’, 정적주의(quiestism) 전통의 ‘산크타 인디페란티아 sancta indifferenia’, 칸트의 취미판단의 무관심성, 그리고 블룸스베리 그룹(Bloomsbur ...
본 연구는 ‘무관심’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헬레니즘 시대의 ‘아디아포라adiaphora’와 ‘아파테이아aphateia’, 정적주의(quiestism) 전통의 ‘산크타 인디페란티아 sancta indifferenia’, 칸트의 취미판단의 무관심성, 그리고 블룸스베리 그룹(Bloomsbury group)의 관조적 삶까지 ‘무관심’ 개념의 변천사를 통해, 내재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의 구분이 역사상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볼 것이다. 도구적 가치를 ‘좋음the good’ 자체와 혼동하는 세속적 믿음에 반해, 도구적 가치의 대상들은 선ㆍ악의 구분에 무관한 것임을 깨닫도록 했던 도덕이론의 계보학이 제시될 것이다. 이에 따르면 무관함에 대한 깨달음은 일상의 편견을 깨뜨리는 해방적 지식이며, 무관심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반대로, 일종의 윤리적 행동강령이나 규범이 된다. 이 깨달음의 두 측면, 즉 인지적 측면과 규범적 측면의 연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본 연구자는 ‘무관(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무관(심)의 계보학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첫째, 그것은 도덕의 지형도를 한 눈에 파악하도록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관심에 대한 고전적 정의와 현대적 정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자연과학과 윤리학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문제에 연결되어 있다. 고대 스토아 사상가들은 자연에 대한 참된 지식이 참된 자아에게로 되돌아오는 길이라 보았다. 따라서 참됨의 기준은 자연과학에 있어서나 윤리학에 있어 동일한 것이다. 반면, 현대의 사상가들은 두 학문을 배타적 관계로 파악한다. 자연과학은 가치판단적 지식을 철저히 배제할 때 그 객관성이 인정된다. 객관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윤리학의 영역에 있어 객관성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객관적 기술은 도덕의 원리를 주체성에 무관한 어떤 것으로 변질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객관성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도덕적 엄숙주의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도덕적 회의주의로 귀착된다.
둘째, 무관(심)의 계보학은 역사상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의 관계가 어떻게 결정되어졌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토아학파의 ‘아디아포라’개념은 좋음ㆍ나쁨의 (혹은 선ㆍ악의) 구분에 무관한 영역을 지칭한다. 좋음과 나쁨의 이원구도에 귀속되지 않는 영역을 설정하는 까닭은 실천철학을 의사(擬似)도덕적 판단들로부터 분리해내기 위해서이다. 일상적으로는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으로 평가받는 대상들이 실상은 도덕성에 전혀 무관한 것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디아포라에 대한 인식은 곧 의사도덕적 편견들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이 비판은 그 근거를 자연에 대한 참된 지식, 즉 이론철학에 둔다. 이 점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의 일치를 단언했다.
무관(심)의 계보학의 두 번째 기능에 의거, 본 연구는 3단계로 수행될 것이다.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의 관계설정이 상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철학사의 세 지평이 각 단계의 연구 주제가 될 것이다. 세 지평이란 (a) 자연주의적 사유, 달리 말해 인간이 세계의 독립된 대상들과 마주 서 있는 독립된 주체로서 경험되기 이전의 사유, (b) 선험적 의식과 자율적 의지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근대적 사유, (c) 언어적 전회로 대변되는 탈형이상학적 사유가 그것이다. 이로부터 보편주의 윤리학의 통일적 구조가 도출되기 위해서는, 세 지평 간의 지성사적 연속성이 동시에 보장되어야만 한다. 이 점에서 본 연구는 스토아, 칸트, 무어의 윤리학을 세 지평의 대표적 도덕이론으로 선정하였다. 칸트가 쾨니히베르크 대학에서 행한 윤리학강의는 스토아의 도덕성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무어의『윤리학원리』는 스토아와 칸트의 윤리학을 비판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외형적 연관성이 전부는 아니다. 세 도덕이론은 공통적으로 선의 내재적 가치를 주장한다. 그것들은 실재론적 윤리학의 계보를 잇는 이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