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삼국 중에서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국가였다. 이는 4세기 이후 중국제 도자기가 백제로 다량 수입되며, 근초고왕 때 중앙의 귀족들이 노자의『도덕경』을 읊을 정도로 중국 문화에 친숙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배경에는 313․3 ...
백제는 삼국 중에서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국가였다. 이는 4세기 이후 중국제 도자기가 백제로 다량 수입되며, 근초고왕 때 중앙의 귀족들이 노자의『도덕경』을 읊을 정도로 중국 문화에 친숙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배경에는 313․314년 낙랑과 대방의 멸망 이후 밀물처럼 들어온 중국계 유민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따라서 4세기 이후 백제와 중국과의 밀접한 교류로 볼 때 남조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음다(飮茶) 문화도 백제에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 한성시대에 차 문화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는 견해는 일부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었고, 그 근거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동진시대부터 크게 유행하는 계수호(천계호)는 그 당시 앵(罌)으로 불렸는데 차나 술과 같은 액체를 담는 다기(茶器)였으며, 백제지역에서 발견된 중국 자기 중 숫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청담과 현학을 숭상하던 남조의 은사들은 음악, 바둑과 차를 중시하였다. 유송(劉宋)대부터는 황실 전용의 차밭에서 생산된 막대한 양의 차가 음료와 제사용으로 사용되었다. 제나라의 무제 소색(蕭賾)은 그의 유언에서 “영좌(靈座)에는 희생으로 제사를 지내지 말고, 병과(餠果), 다음(茶飮), 건반(乾飯), 주포(酒脯)만을 올려라.”라고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남조와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었던 백제에 차 문화가 자연스럽게 수입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견해는 백제의 왕실과 귀족들이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최고급 문화를 동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역시 백제가 한성시대에 중국의 차 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돌절구’를 통해서 백제의 음다(飮茶) 문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돌절구는 남조시대에는 ‘다확(茶確)’이라 불리었으며, 당시 사람들이 즐겼던 병차(餠茶)를 마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도구였다.
기대효과
일반적으로 고고학 논문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 즉 출토된 유물에 대한 의미 부여에 소홀한 현 학계의 연구경향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차문화의 유입배경을 출토유물의 대조와 분석을 통해 설명한 부분을 주목해야할 대목이다. 특히 다확과 다구로서의 ...
일반적으로 고고학 논문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 즉 출토된 유물에 대한 의미 부여에 소홀한 현 학계의 연구경향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차문화의 유입배경을 출토유물의 대조와 분석을 통해 설명한 부분을 주목해야할 대목이다. 특히 다확과 다구로서의 수입 청자를 거론하였다는 점은 시사적이라 하겠다.
연구요약
이 논문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소형 돌절구, 즉 다확(茶確)을 매개로 하여 한성백제시대 차문화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국가였다. 따라서 4세기 이후 백제와 중국과의 밀접한 교류로 볼 때 ...
이 논문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소형 돌절구, 즉 다확(茶確)을 매개로 하여 한성백제시대 차문화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국가였다. 따라서 4세기 이후 백제와 중국과의 밀접한 교류로 볼 때 남조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차문화도 백제에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남조시대에 차는 병차(餠茶)가 일반적이었다. 병차란 다 자란 차 잎은 끈기가 적기 때문에 쌀로 풀을 끓여서 혼합하여 만든 떡이다. 병차를 마실 때에는 우선 다확(茶確, 절구)에 병(餠)을 넣고 갈아서 분말로 하고, 그것을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양념을 넣어 마셨다. 따라서 다확은 남조시대에 차를 마시는 데 꼭 필요한 도구였다. 이러한 다확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2010년 현재 9점이 출토되었으며, 남조에서 수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2009년 중국 남경시(南京市) 강녕구(江寧區) 상방지구(上坊地區)의 조가산(趙家山)에서 남조시대(南朝時代)의 석기(石器) 가공(加工) 공장유적지(工場遺蹟址)가 조사되었다. 이곳에서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다확과 동일한 다확이 출토되었다. 이는 백제인들이 남조지역에서 발달한 차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차를 마실 때 필요한 도구 등도 함께 들여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백제의 차문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물질자료는 청자이다. 특히 2008년도 풍납토성 197번지 일대 발굴조사에서 차를 담아 마시던 용기였던 청자음양각연판문완(靑磁陰陽刻蓮瓣文盌)이 출토되었다. 한편 통일신라 왕경유적에서도 9세기 이후 차문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청자완과 소형 돌절구가 다수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성백제시대에 중국으로 차문화가 전래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논문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소형 돌절구, 즉 다확(茶確)을 매개로 하여 한성백제시대 차문화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국가였다. 따라서 4세기 이후 백제와 중국과의 밀접한 교류로 볼 때 ...
이 논문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소형 돌절구, 즉 다확(茶確)을 매개로 하여 한성백제시대 차문화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국가였다. 따라서 4세기 이후 백제와 중국과의 밀접한 교류로 볼 때 남조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차문화도 백제에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남조시대에 차는 병차(餠茶)가 일반적이었다. 병차란 다 자란 차 잎은 끈기가 적기 때문에 쌀로 풀을 끓여서 혼합하여 만든 떡이다. 병차를 마실 때에는 우선 다확(茶確, 절구)에 병(餠)을 넣고 갈아서 분말로 하고, 그것을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양념을 넣어 마셨다. 따라서 다확은 남조시대에 차를 마시는 데 꼭 필요한 도구였다. 이러한 다확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2012년 현재 9점이 출토되었으며, 남조에서 수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2009년 중국 남경시(南京市) 강녕구(江寧區) 상방지구(上坊地區)의 조가산(趙家山)에서 남조시대(南朝時代)의 석기(石器) 가공(加工) 공장유적지(工場遺蹟址)가 조사되었다. 이곳에서는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다확과 동일한 다확이 출토되었다. 이는 백제인들이 남조지역에서 발달한 차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차를 마실 때 필요한 도구 등도 함께 들여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백제의 차문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물질자료는 청자이다. 특히 2008년도 풍납토성 197번지 일대 발굴조사에서 차를 담아 마시던 용기였던 청자음양각연판문완(靑磁陰陽刻蓮瓣文盌)이 출토되었다. 한편 통일신라 왕경유적에서도 9세기 이후 차문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청자완과 소형 돌절구가 다수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성백제시대에 중국으로 차문화가 전래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문
This study investigates the Hansung Baekje’s tea culture associated small mortar, named dahwak, that was excavated in Mongchontoseong. Baekje was one of the countries that actively accept the advanced Chinese academic and cultural trend in the era of ...
This study investigates the Hansung Baekje’s tea culture associated small mortar, named dahwak, that was excavated in Mongchontoseong. Baekje was one of the countries that actively accept the advanced Chinese academic and cultural trend in the era of “three dynasties” in Korean peninsula. Thus, it is generally considered that the Chinese tea culture was introduced in Baekje at that time.
It was popular to have Byeongcha in the era of Namcho in China. Because dahwak is an essential tool for Byongcha to grind tea leaf into flour, it is assumed that 9 dahwaks that were excavated in Pungnabtoseong and Mongchontoseong were imported from Nancho to Baekje. In 2009, researchers found same type of dahwaks to those excavated in Pungnabtoseong when they investigated the historic cite which was a place to manufacture the stone implements in Namcho dynasty and located in Choga mountain near Sangbang area in Namkyong city. This finding suggests that when Baekje accepted the tea culture of Namcho, they also imported necessary tools for making tea.
In addition to dahwaks, celadon is an important evidence revealing the tea culture of Baekje. In particular, Cheongjaeumgakyonpanmunwan(청자음양각연판문완) that was a container for tea was excavated from the investigation of Pungnabtoseong in 2008. Meanwhile, in the historic sites of United Shila dynasty, Wangkyong, many of Chongjawans and small mortars were found. Based on these findings, we can conclude that Chinese tea culture was introduced to Hansung Baekje dynasty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백제는 삼국 중에서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국가였다. 이는 4세기 이후 중국제 도자기가 백제로 다량 수입되며, 근초고왕 때 중앙의 귀족들이 노자의『도덕경』을 읊을 정도로 중국 문화에 친숙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배경에는 313․314년 낙 ...
백제는 삼국 중에서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국가였다. 이는 4세기 이후 중국제 도자기가 백제로 다량 수입되며, 근초고왕 때 중앙의 귀족들이 노자의『도덕경』을 읊을 정도로 중국 문화에 친숙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배경에는 313․314년 낙랑과 대방의 멸망 이후 밀물처럼 들어온 중국계 유민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따라서 4세기 이후 백제와 중국과의 밀접한 교류로 볼 때 남조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음다(飮茶) 문화도 백제에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 한성시대에 차 문화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는 견해는 일부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었고, 그 근거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동진시대부터 크게 유행하는 계수호(천계호)는 그 당시 앵(罌)으로 불렸는데 차나 술과 같은 액체를 담는 다기(茶器)였으며, 백제지역에서 발견된 중국 자기 중 숫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청담과 현학을 숭상하던 남조의 은사들은 음악, 바둑과 차를 중시하였다. 유송(劉宋)대부터는 황실 전용의 차밭에서 생산된 막대한 양의 차가 음료와 제사용으로 사용되었다. 제나라의 무제 소색(蕭賾)은 그의 유언에서 “영좌(靈座)에는 희생으로 제사를 지내지 말고, 병과(餠果), 다음(茶飮), 건반(乾飯), 주포(酒脯)만을 올려라.”라고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남조와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었던 백제에 차 문화가 자연스럽게 수입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견해는 백제의 왕실과 귀족들이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최고급 문화를 동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역시 백제가 한성시대에 중국의 차 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돌절구’를 통해서 백제의 음다(飮茶) 문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돌절구는 남조시대에는 ‘다확(茶確)’이라 불리었으며, 당시 사람들이 즐겼던 병차(餠茶)를 마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도구였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본 연구의 성과는 크게 연구와 교육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활용이 가능하다. 먼저 연구의 측면이다. 일반적으로 고고학 논문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 즉 출토된 유물에 대한 의미 부여에 소홀한 현 고고학계의 연구경향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차문화의 ...
본 연구의 성과는 크게 연구와 교육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활용이 가능하다. 먼저 연구의 측면이다. 일반적으로 고고학 논문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 즉 출토된 유물에 대한 의미 부여에 소홀한 현 고고학계의 연구경향에 경종을 울릴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차문화의 유입배경을 출토유물의 대조와 분석을 통해 설명한 부분을 주목해야할 대목이다. 특히 다확과 다구로서의 수입 청자를 거론하였다는 점은 시사적이라 하겠다. 또한 본 연구는 역사 교육과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 동안 국내 학계에서는 차 마시는 문화는 신라 하대인 8∼9세기 도입된 것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풍납토성 발굴 등으로 최근 백제에서 차문화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고고학적 근거들이 적으나마 드러났다. 이번에 발표된 “한성백제의 차문화와 다확”이라는 논문은 최근 축적된 고고 유물과 문헌을 바탕으로 이 따 차문화의 기원에 대해 처음 구체적인 고찰을 시도한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