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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아에서 영원한 행복의 도덕교육적 이해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1-327-B00650
선정년도 2011 년
연구기간 1 년 (2011년 05월 01일 ~ 2012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황종환
연구수행기관 한남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도덕교육은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평생의 과제로 요청되고 있다. 도덕에 대한 학생과 성인의 선입견은 아직도 금욕, 절제 등 금지와 연관되어 이해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연구는 도덕생활이 인간에게 금욕이나 절제를 통한 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된 생활임을 밝히고자 한다. 도덕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을 주는 것이라는 본 연구를 통하여 학교의 도덕교육뿐만 아니라 성인의 도덕교육에서도 새로운 장(場)을 열고자 한다.
    도덕교육이 지금까지 주로 지적 정서적 연구에 중심을 두었지만 본 연구는 키르케고아의 간접전달이 갖는 도덕교육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키르케고아는 인간이 자율적으로는 윤리적으로 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실존적 변형(變形)을 언급하면서 직접적 향락을 추구하는 생활은 권태와 허무를 가져오고 자율적으로 도덕적 생활을 추구하는 생활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키르케고아는 인간의 윤리적 생활의 가능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키르케고아는 윤리적 삶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율적 능력에 근거하여 윤리적 목적을 추구하려고 할 때 오히려 모순된 결과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의 실존 삼 단계에서 최종적 단계인 종교적 생활은 윤리적 노력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삶이 윤리적으로 객관화되어 입증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키르케고아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제시하듯이 윤리적인 것이 종교적인 것에 의하여 목적론적으로 정지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연구자(Léon Chestov)들이 오해했듯이 종교적 실존이 윤리적인 것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종교적으로 살 때에(만) 오히려 윤리적 삶을 역설적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Swenson, Lowrie, 1944: xix). 이런 삶은 『종결(終結)적 비학문적 후서(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영원한 행복을 믿으며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오히려 도덕적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율적으로는 윤리적 삶을 살 수 없지만 종교적 실존(B)을 통해 이런 역설이 가능하게 된다. 키르케고아 사상을 전달의 측면에서도 이해하고 자율적 도덕교육의 한계를 간접적으로 지적하며 그 대안을 키르케고아의 '주체성이 진리'라는 시각에서 제시하고자 함이 본 연구의 목표다.
  • 기대효과
  • 우리 사회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해이(解弛)현상이 심각하게 지적된다. 키르케고아 사상을 도덕교육의 간접전달로 수용하여 우리 사회의 도덕교육에 일조한다. 간접전달은 자기 자신의 체험의 내면화를 전하는 실존적 표현이다. 단지 윤리학설의 전수(傳授)가 이아니라 실제적으로 윤리적 삶을 통해 윤리를 가르치는 방법이다. 간접전달은 이론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삶’을 전달하기에는 그 한계를 의식하고 실천적 방법에 호소하게 된다. 키르케고아는 인간의 실존은 간접전달을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한다. 실존적 주체성의 전달을 요구하는 간접전달은 각 개인이 삶의 체험을 드러낸다. 객관적 숙고(reflection)는 사유와 삶이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 예로 선생이 자신의 삶은 비(非)윤리적이면서 윤리학에 대한 명(名)강의를 하고자 한다.
    키르케고아에 의하면 객관적 사유는 인간의 체험을 관념으로 환원하기 때문에 실제로 바람직한 삶이나 전달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인간의 숙고는 추상화가 아니라 실존적 관계에서만 깊어질 수 있다. 주체적 사유자만이 타자와 관계하고 자신의 사유에 실제적으로 관여하는 것이다. 추상적 사유도 사실은 그에 합당한 실존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인간은 소위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식할수록 실존적으로 더욱 상승하게 된다. 개인의 삶은 타인과 전적으로 동화될 수는 없기에 진리를 찾아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키르케고아는 자신의 저작 내용의 결론을 독자들이 스스로 찾도록 했다. 그는 진리란 ‘무엇이냐(What)' 보다는 ‘어떻게(How)'에 의해 발견되고 있음을 즉 진리는 실존적으로만 전달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간접전달은 최근에 정신분석이나 심리분석에도 응용된다.
    키르케고아는 인간에게 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로 나타나고 이런 증오는 이웃과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음을 의식했다. 『두려움과 떨림』에서 아브라함이 신의 부르심에 누구와도 의논할 수 없었듯이 키르케고아의 시각에서 인간관계는 신과 관계가 우선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교육의 종교적 배경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연구자가 다년간 좋은 반응 속에 수행해온 인터넷 강좌에 본 연구를 적용하여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행복에 대한 이해 속에서 더 행복한 윤리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 연구요약
  • 키르케고아에서 신 앞에 단독자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관념적 생활과 달리 역사와 환경에 대한 표현으로 객관화 된다. 도덕교육 역시 전수(傳受)된 가치와 이상들은 다음 세대의 관심과 유익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대 간의 관심은 인지적인 면만 아니라 도덕적 면 혹은 도덕교육적 측면이 당연히 고려되어 다음 세대도 같은 관심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쾌락주의적 생활은 타인에 대한 의존적 관계에서 추구하기 때문에 타인이 사라지면 자기 자신도 잃게 된다. 이렇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회적 관계에서 잃게 되면 스스로 단지 수(數)의 하나로 전락(轉落)시키게 된다. 키르케고아에 의하면 인간은 이미 불안의 상태에 있으며 불안에 의해 억눌린 직접적 향락은 더 이상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회의(懷疑) 중에 쾌락으로 자신이 되고자 하지 않거나 윤라로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려는 시도를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평안과 안식에 도달할 수 없게 되며 영원한 행복을 갈구하게 된다. 우리는 키르케고아가 인간의 자존(自存)적 혹은 자기 의지에 근거한 생활은 자기 모순적 실존을 낳게 된다는 비판을 감지한다.
    키르케고아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인간이 신과 단독자적 관계에서 윤리적인 것을 목적론적으로 정지시키면서 종교적 실존을 전한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은 스스로 자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가능하며 이는 『불안의 개념』에서 분명하게 기술된다. 자기선택은 자유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인간에게 후회를 가져올 뿐이다. 키르케고아에 의하면 인간은 죄와 허물 속의 자신을 깨닫고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의지할 수 없음을 알고 역사 속에 들어온 구원자와 실존적 만남을 통해서만 역설적으로 윤리적 생활을 할 수 있다.
    키르케고아는 일방적으로 가르치지 않았고 각자가 스스로 실존을 묻는 소위 ‘간접 전달’의 생활을 하였다. 그는 현대의 인간의 자율 정신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키르케고아는 하느님의 용서의 은혜와 사랑에서 사람들에게 영원한 쉼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자신을 거룩한 유혹자로 받아들인다. 영원한 행복은 간접전달을 통해 알려지며 도덕교육적 함축을 지닌다.
  • 한글키워드
  •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 자기화.,도덕교육,영원한 행복,간접전달,도덕적 해이,키르케고아
  • 영문키워드
  • Eternal Happiness,S. Kierkegaard,Indirect Communication,Moral Education,Moral Hazard,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Appropriation.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키르케고아에서 영원한 행복의 도덕교육적 이해

    한국사회는 경제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해이(解弛)현상이 심각하게 지적된다. 키에르케고어의 영원한 행복에 관한 사상을 도덕교육의 간접전달로 수용하여 한국사회의 도덕발전에 기여한다. 간접전달은 자기 자신의 체험의 내면화를 전하는 실존적 표현이다. 단지 윤리학설의 전수(傳授)가 이아니라 실제적으로 윤리적 삶을 통해 윤리를 가르치는 방법이다. 간접전달은 이론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삶’을 전달하기에는 그 한계를 의식하고 실천적 방법에 호소하게 된다. 키르케고아는 인간의 실존은 간접전달을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한다. 실존적 주체성의 전달을 요구하는 간접전달은 각 개인이 삶의 체험을 드러낸다. 객관적 숙고(reflection)는 사유와 삶이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 예로 자신의 삶은 비(非)윤리적이면서 윤리적 주장을 하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도덕교육은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평생의 과제로 요청되고 있다. 도덕에 대한 학생과 성인의 선입견은 아직도 금욕, 절제 등 금지 금제와 연관되어 이해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연구는 도덕생활이 인간에게 금욕이나 절제를 통한 추구가 아니라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오히려 축복된 생활임을 밝힌다. 도덕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을 주는 것이라는 본 연구는 학교의 도덕교육뿐만 아니라 성인의 도덕교육에서도 새로운 장(場)을 연다.
    도덕교육이 지금까지 주로 지적 정서적 의지적 연구에 중심을 두었지만 본 연구는 키에르케고어의 영원한 행복의 간접전달이 갖는 도덕교육적 의미를 주목한다. 키에르케고어는 스토아학파나 휴머니스트의 주장과 달리 인간이 자율적으로는 윤리적으로 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실존적 변형(變形)을 언급하면서 직접적 향락을 추구하는 생활은 권태와 허무를 가져올 뿐이며 자율적으로 도덕적 생활을 추구하는 생활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키르케고아는 인간의 윤리적 생활의 가능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키에르케고어는 윤리적 삶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율적 능력에 근거하여 윤리적 목적을 추구하려고 할 때 오히려 모순된 결과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의 실존 삼 단계에서 최종적 단계인 종교적 생활은 윤리적 노력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삶이 윤리적으로 객관화되어 입증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어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제시하듯이 윤리적인 것이 종교적인 것에 의하여 목적론적으로 정지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종교적 실존이 윤리적인 것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종교적으로 살 때에(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삶은 『종결(終結)적 비학문적 후서』(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o Philosophical Fragments)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영원한 행복을 믿으며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자율적 분투로는 불가능했던 도덕생활이 가능하게 되고 오히려 도덕적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즉 인간은 자율적으로는 윤리적 삶을 살 수 없지만 종교적 실존을 통해 이런 역설이 가능하게 된다. 키에르케고어 사상을 '주체성이 진리'라는 시각에서 이해하고 전달의 측면에서도 이해하고 자율적 도덕교육의 한계를 간접적으로 지적함이 본 연구의 성과다.
    키에르케고어를 교육학적 시각에서 자기화(自己化, appropriation)라고 할 때 도덕교육은 각 개인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도덕생활과 도덕교육은 키에르케고어에서는 신과 인간의 단독자적 관계에서 가능하다. 키에르케고어에서 신 앞의 단독자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관념적 생활과 달리 역사와 환경에 대한 표현과 영향력으로 객관화 된다. 도덕교육은 전수(傳受)된 가치와 이상들을 다음 세대의 관심과 유익이 될 수 있도록 한다. 주체적 진리로서 가능하게 하는 도덕생활은 인간의 인지적, 감정적, 의지적 측면을 모두 변화시키는 도덕교육적 측면이 당연히 고려되어 다음 세대도 같은 관심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쾌락주의적 생활은 타인에 대한 의존적 관계에서 추구하기 때문에 타인이 사라지면 자기 자신도 잃게 된다. 이렇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회적 관계에서 잃게 되면 스스로 단지 수(數)의 하나로 전락(轉落)된다.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인간은 이미 실존적 불안의 상태에 있으며 불안에 의해 억눌린 직접적 향락은 더 이상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회의(懷疑) 중에 혹은 삶의 바른 신앙이 정립되지 않았을 때 쾌락으로 자신이 되고자 하지 않거나 윤리적 행위를 통해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려는 시도를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평안과 안식에 도달할 수 없게 되며 인간내면의 가장 깊은 원망(願望)인 영원한 행복을 갈구하게 된다. 우리는 키에르케고어가 인간의 자존(自存)적 혹은 자기 의지에 근거한 생활은 자기 모순적 실존을 낳게 된다는 비판을 감지(感知)할 수 있게 된다.
    키에르케고어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인간이 신과 단독자적 관계에서 윤리적인 것을 목적론적으로 정지시키면서 종교적 실존을 전한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은 스스로 자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가능하며 이는 『불안의 개념』에서 분명하게 기술된다.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자기선택은 자유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인간에게 후회를 가져올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죄와 허물 속의 자신을 깨닫고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의지할 수 없음을 알고 역사 속에 들어온 구원자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실존적 만남을 통해서만 역설적으로 윤리적 생활을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일방적으로 가르치지 않았고 각자가 스스로 실존을 묻는 소위 ‘간접 전달’의 생활을 하였다. 그는 현대인간의 자율정신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키에르케고어는 하느님의 용서에 근거하는 은혜와 사랑에서 사람들에게 영원한 쉼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자신을 거룩한 유혹자로 받아들인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영원한 행복은 간접전달을 통해 알려지며 도덕교육적 함축을 지닌다.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객관적 사유는 인간의 체험을 관념으로 환원하기 때문에 실제로 바람직한 삶이나 전달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인간의 숙고는 추상화가 아니라 실존적 관계에서만 깊어질 수 있다. 주체적 사유자만이 타자와 관계하고 자신의 사유에 실제적으로 관여하는 것이다. 추상적 사유도 사실은 그에 합당한 실존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인간은 소위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식할수록 실존적으로 더욱 상승하게 된다. 개인의 삶은 타인과 전적으로 동화될 수는 없기에 진리를 찾아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자신의 저작 내용의 결론을 독자들이 스스로 찾도록 했다. 그는 진리란 ‘무엇이냐(What)' 보다는 ‘어떻게(How)'에 의해 발견되고 있음을 즉 진리는 실존적으로만 전달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간접전달은 최근에 정신분석이나 심리분석에도 응용된다.
    키에르케고어는 인간에게 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로 나타나고 이런 증오는 이웃과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음을 의식했다. 『두려움과 떨림』에서 아브라함이 신의 부르심에 누구와도 의논할 수 없었듯이 키에르케고어의 시각에서 인간관계는 신과 관계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는 도덕교육의 종교적 배경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신앙은 주체적 개인이 직면하는 상황에서 주체성을 받아들이느냐 혹은 거절하느냐를 결정하는 실존적 행동이다. 단지 객관성만을 의존하는 행동의 거짓됨은 개인의 참여가 실종되는 데에서 드러난다. 즉 주체적 실존은 개인의 참여와 결단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진리란 모순적이라서 주체적 내면성은 결국 객관적 외면(外面)성으로 검증된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도덕교육은 신과 단독자적 관계에서 근원하며 신앙은 도덕적으로 검증되게 된다. 정열적 내면성으로 살아가는 주체적 사상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입증되는 진리를 더욱 심화하게 된다. 내면성은 단독자로서 개인이 영원한 행복을 발견하게 되는 윤리적 무한성이 된다.
    진리는 신앙에 의해 자기화(自己化)되지만 객관화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진리는 주체화되기도 하며 객관화되기도 한다. 물론 모든 지식이 주체적 신앙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앙에 관한 문제는 주체적으로 답변되어야 한다. 사실 인간실존에 대한 문제는 불확실성을 의식하게 한다. 진리는 추상적 관계나 존재의 불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주체적 사상가의 실존에서 발견되며 주체적 사상가가 미적 윤리적 종교적 단계를 거쳐 전진함에 따라 더욱 정열적으로 자기화(自己化)된다. 그러므로 주체적 사상가는 늘 형성(形成)되는 과정에 있게 된다. 주체적 사상가의 정열은 깊어지는 내면성과 높아지는 주체성에 의해 드러난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형성(形成) 중에 있기에 불확실한 상태에 있게 된다.
    주체적 사상가는 진리를 종교적 신앙에서 찾는다. 헤겔이 진리를 절대자가 현실세계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보는데 반하여 키에르케고어는 신앙의 비약으로 진리를 기술(記述)하기에 끊임없는 개인의 주체성을 통해 표현된다. 관념적 사유가 구체적인 것들을 추상적으로 다루는데 반하여 주체적 사유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한다. 주체적 사상가가 신앙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을 객관적 확실성에서 찾으려고 할 때 어리석게 된다.
    감각적 향락을 추구하는 생활에서는 개인의 정열적 참여와 관계를 볼 수 없다.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종교적 단계가 주체성의 가장 높은 단계다. 주체적 사상가는 고난이 종교적 경험과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향락을 추구하는 단계에서는 고난을 우연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종교적 실존은 고난을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주체적 개인은 신앙의 역설과정에서 고난의 의미를 이해한다. 주체적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점점 더 객관적 불확실성을 의식하게 된다.
    신과 주체적 내면화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자신의 실전에서 드러내는 자기화를 이룩함으로써 간접전달을 통한 도덕교육이 가능하게 된다.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자기화가 타인과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의 표현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돕기 위해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다. 신과 관계에서 개인은 자신의 한계를 성공적으로 확장하계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타인의 사랑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불가분리다. 자기사랑이 없이 타인사랑이 가능하지 않다. 자기화의 간접전달을 통해 타인의 자기화를 도울 수 있다.
    키에르케고어가 제기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는 도덕교육에 대한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삶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개선한다. 키에르케고어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인간의 실존적 행위가 윤리의 보편적 타당성을 유보시킬 수 있음을 드러낸다.
    키에르케고어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유보)(a 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를 문제시 하면서 인간의 윤리적 행위가 더 높은 목적을 위하여 중지 내지 유보될 수 있다고 한다. 주지하는바 키에르케고아는 인간의 행위를 미적, 윤리적, 종교적 단계로 구분했다. 그가 가장 높은 행위로 본 종교적 삶은 단독자로서 개인이 신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는 이런 단계에서 개인이 보편적인 윤리적 규범을 넘어서는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키에르케고아어는『두려움과 떨림』에서 아브라함은 조국을 위하여 자기의 딸을 바쳤기에 자신의 비극적 삶이 타인에게 이해되는 아가멤논(Agamemnon)과 달리 자신의 아들을 오직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이유에서 하나님에게 바치는 행위를 구분한다. 아브라함은 윤리적 표준보다는 신앙의 비약(the leap of faith)을 통한 하나님을 선택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삭을 바치려고 했다. 이런 믿음의 행위는 이성적, 즉 보편성을 넘어서 종교적 삶을 사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개인적 유익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하여 살아야 되지만 종교적 삶의 역설과 신앙의 비약은 키에르케고아에 의하면 바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지를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보편성은 인간행위의 절대적 준거가 될 수 없다. 보편성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은 이런 삶을 통하여 신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런 종교적 삶이 키에르케고어에게는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로 이해했고 다른 사람들도 주체적 결단을 통하여 신 앞에 단독자로 살아갈 것을 소위 ‘간접전달’을 통하여 알렸다. 윤리를 보편적 규범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이런 삶은 설명될 수 없다.
    윤리학이 인간의 바른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는 인간의 실존은 윤리적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인간의 삶이 윤리적으로 모두 설명될 있다면 종교적 영역이 필요하지 않다. 보편에 근거한 인간의 윤리적 책무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것일 뿐이다. 윤리가 보편적인 것에만 근거한다면 보편적인 것을 넘어서는 인간의 책임을 의식할 수 없다.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가 윤리교육에 원용될 수 있음은 이런 실존적 결단이 누 구에게나 요청된다는 점이다. 최근의 윤리학에서 미래윤리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새로운 세대에 대한 책임을 의식한다면 도덕교육에서 키에르케고아가 논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가 미래윤리학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자율적 윤리학을 비판하는 시각을 갖는 본 연구는 인간의 본성적 악(惡)과 악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필요함을 밝히고자 한다. 인간이 지닌 악에 대한 면모를 등한시하고 새로운 도덕교육을 시도하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이론 정립일 수는 있으나 도덕교육을 유효적으로 실시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실존적으로 불안으로 표현되는 본성적 악이 있기에 인간을 낙관적 존재로 가정하고 정립된 이론은 일시적으로 그 효용성이 있을 뿐이다. 이미 기존 연구에도 밝혀졌듯이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의 도덕교육적 호소는 인간본성의 악을 이해했을 때 올바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연구자의 견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본 연구가 기존의 연구와 차별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어에게서 시작하여 현대의 교육철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지는 주장 즉 특정의 인간의 삶과 행위가 보편적으로 인정된 윤리나 가치를 넘어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논의는 지구화와 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개인적 국가적 정체성과 관련하여서도 독특한 의미가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고유한 문화와 세계화의 관계는 어려운 물음으로 흔히 역설적 관계라는 잠정적 결론에 만족하고 있었으나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에서 그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이를 규명한다.
    도덕교육의 본질은 이미 객관적으로 주어진 교육적 가치나 덕목의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학습자 혹은 인격적 행위자가 구체적 삶에 대한 적용에서 이해되었다. 이런 선행연구를 도덕교육에 원용하여 ‘삶에 대한 적용’을 명시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을 낙관적으로 이해하는 도덕교육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인간 역사의 어두운 점을 설명할 것을 요청받는다. 보편적으로 승인받는 윤리적 가치가 종국적 규범이 될 수 없다는 키에르케고아의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지>도 보편적 악과 인간 본성의 악에 대한 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도덕교육은 기존의 가치와 문화를 전승하는 것으로만 살피지 않는다. 기존의 가치라는 것도 해석학자들이나 현상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학습자나 행위자의 가치화(valuing)과정을 통하여 그 타당성이 받아들여지고 전승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적 문화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교육은 늘 개인의 실존적 삶과 연관되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점이 급격한 산업화와 세계화에 따른 부수적 문제를 배태하고 있는 한국적 현실에서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을 정립하게 한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현실적 도전에서 지속적으로 변하지 않고 대응하는 실존적 태도가 정체성을 확립하게 한다.
    도덕교육은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하는 차원만이 아니라 실존적 삶이 요청되는 해결책이다.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는 쿤이 주장하는 상호주관적 이해를 넘어서는 실존적 기도(企圖)이지만 이런 태도가 맹신(盲信)이 아닌 것은 그런 삶이 종국적으로 상호주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개개인의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의 삶이 종국적으로는 상호주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앙과 미신은 구분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신앙은 도덕교육과 도덕발달을 새롭게 보게 하는 사회적 기여를 하게 된다.
    윤리학이 인간의 바른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는 인간의 실존은 윤리적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인간의 삶이 윤리적으로 모두 설명될 있다면 종교적 영역이 필요하지 않다. 보편에 근거한 인간의 윤리적 책무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것일 뿐이다. 윤리가 보편적인 것에만 근거한다면 보편적인 것을 넘어서는 인간의 의무는 이해될 수 없다.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주위의 환경과 관계를 정립하며 실존을 계속하여 나아간다. 이러한 실존의 계속은 주위의 환경에 대한 도덕의식을 동반하며 이런 의식은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 밝혀진다. 종교적 성격이란 사회의식의 개선이 보편적 윤리성을 넘어서는 맥락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또한 사회의식에 대한 연구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효과를 얻기 위하여서는 도덕성발달과 긴밀히 연관된다.
    롤스(J. Rawls)는 그의 정의론(theory of justice)에서 계약론적 정의론을 전개하기에 앞서 현대의 공리주의를 비판한다. 롤스에 의하면 인간의 존엄성은 사회이론을 구성하기에 앞서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사회 전체의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inviolability)을 갖는다. 그러므로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와 존엄성을 뺏는 것이 정당화됨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익을 위해서 소수의 기본적 권익이 희생될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동등한 시민적 자유'란 이미 보장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정의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은 어떠한 정치적 거래나 사회적 이득의 계산에도 좌우될 수 없는 것이다. 롤스에 의하면 사회정의를 점진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구성원은 각자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지키며 끊임없이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여 공동선을 이룩하고자 한다. 롤스의 이런 사회정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근거하며 키에르케고어에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실존의 과정에서 가능하다.
    키에르케고어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관계가 최우선하며 이런 관계는 객관적 보편적 설명을 넘어서는 것이다. 보편적 추론이나 객관적 설명이 가능할 때 이는 하느님과 실존적 관계를 맺을 수 없게 한다. 키에르케고어는 인간사변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독일관념론을 중심으로 하는 사변철학을 비판하면서 주체적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적 신앙을 추구했다.
    객관적 진리가 역사적 철학적 진리에 관심을 갖는다면 주체적 진리는 종교적 진리 안에서 신앙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을 추구한다. 신앙은 주체적 진리를 확실하게 하는 내면의 정열이다. 객관적 진리가 끊임없이 수량화, 가능성을 통해 진리에 접근을 추구하는데 반하여 주체적 진리는 자기화(自己化, appropriation)를 통해 궁극적으로 불확실한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 영문
  • Korean society is tasked with renewing moral education for the balanced development. This reserch has point on criticizing moral education grounded on human autonomy. For S. Kierkegaard moral living is possible, when one has faith on Eternal Happiness. Anxiety as existential inconveniency is symptom of human alienation from God and himself. To overcome anxiety it is requested to have new relationship with God. That is possible not by acquring objective but by being in religious faith. So moral education could be grounded not on human autonomy, but subjective faith.
    Eternal happiness in S. Kierkegaard has practical implication of moral education. Eternal Happiness in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o Philosophical Fragments could be objectively understood, when eachone keeps his own existence in religious faith before God ,and appropriates oneself before God. In the perspective of Kierkegaard moral living and moral education can be possible in the human existence before God, which requests subjective religious faith. For Kierkegaard religious faith is the way to subjective truth, which promises the eternal happiness. Subjective truth is objectified by the works of love, which concretizes the attemp to help neighbor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한국사회는 경제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해이(解弛)현상이 심각하게 지적된다. 키에르케고어 사상을 도덕교육의 간접전달로 수용하여 각자가 자기 자신의 체험의 내면화를 전하는 실존적 표현을 이해한다. 간접전달은 단지 윤리학설의 전수(傳授)가 이아니라 실제적으로 윤리적 삶을 통해 윤리를 가르치는 방법이다. 간접전달은 이론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삶’을 전달하기에는 그 한계를 의식하고 실천적 방법에 호소하게 된다. 키르케고아는 인간의 실존은 간접전달을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한다. 실존적 주체성의 전달을 요구하는 간접전달은 각 개인이 삶의 체험을 드러낸다. 객관적 숙고(reflection)는 사유와 삶이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키르케고아는 윤리적 삶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율적 능력에 근거하여 윤리적 목적을 추구하려고 할 때 오히려 모순된 결과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의 실존 삼 단계에서 최종적 단계인 종교적 생활은 윤리적 노력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삶이 윤리적으로 객관화되어 입증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키르케고아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제시하듯이 윤리적인 것이 종교적인 것에 의하여 목적론적으로 정지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종교적 실존이 윤리적인 것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종교적으로 살 때에(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삶은 『종결(終結)적 비학문적 후서』(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o Philosophical Fragments )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영원한 행복을 믿으며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오히려 도덕적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율적으로는 윤리적 삶을 살 수 없지만 종교적 실존을 통해 이런 역설이 가능하게 된다. 키르케고아 사상을 전달의 측면에서도 이해하고 자율적 도덕교육의 한계를 간접적으로 지적하며 그 대안을 키르케고아의 '주체성이 진리'라는 시각에서 제시한다.
    도덕교육이 지금까지 주로 지적 정서적 연구에 중심을 두었지만 본 연구는 키르케고아의 간접전달이 갖는 도덕교육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키르케고아는 스토아학파나 휴머니스트의 주장과 달리 인간이 자율적으로는 윤리적으로 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실존적 변형(變形)을 언급하면서 도덕적 생활을 추구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자가 다년간 긍정적 반응 속에 수행해온 인터넷 강좌에 본 연구를 적용하여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행복에 대한 이해 속에서 더 행복한 도덕생활과 도덕교육에 적용되어 한국사회의 도덕성을 높이고 도덕생활이 인간에게 주어진 책무가 아니라 축복된 생활임을 알게 한다.
  • 색인어
  • 키에르케고어, 영원한 행복, 도덕교육,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 자기화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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