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신분적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엄격하였다. 그 때문에 ‘죽었다’는 표현도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는 졸(卒), 사(士)는 불록(不祿), 서민은 사(死)’라고 하는 등 지위에 따라 다르게 일컬었다. 죽음의 표현에 대한 구별만이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장례에 ...
조선시대에는 신분적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엄격하였다. 그 때문에 ‘죽었다’는 표현도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는 졸(卒), 사(士)는 불록(不祿), 서민은 사(死)’라고 하는 등 지위에 따라 다르게 일컬었다. 죽음의 표현에 대한 구별만이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장례에 대한 칭호 역시 등급에 따라 구별되었다. 국왕이나 왕후의 장례는 국장(國葬), 세자와 세자빈, 후궁, 대원군, 공주 등은 예장(禮葬)이라 일컬었다. 그 뒤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황제가 되면서 황제의 장례는 ‘어장(御葬)’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여러 계층에 따라 죽음에 대한 표현, 장례에 대한 칭호가 다양하였다. 그렇다면 조선 왕실의 상장례(喪葬禮)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떤 장례일까. 바로 국왕이나 왕후의 국장을 떠올릴 것이다. 국왕과 왕후의 국장 과정은 국가전례서 및 의궤, 등록 등의 자료에 그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 있어 연구하기에 용이하다.
그런데 왕실에는 국왕 이외에도 세자・세자빈, 세손, 공주, 대군, 군, 대원군, 후궁, 군주(郡主), 현주(縣主)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존재하였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인물, 정치, 사상사 등 어느 방면으로 보더라도 이들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제대로 있지 못하다. 심지어 공주 이하의 사람들은 어떤 인물이 살다갔는지 조차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상장 과정을 보여주는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세자나 세자빈의 경우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이들의 장례 규정이 기재되어 있어 다른 이들에 비해 연구가 용이하다. 그 중 세자빈은 세자보다 먼저 졸한 세자빈과 세자보다 뒤에 졸한 세자빈의 상례 기간이 달라 구별해서 살피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후궁의 상장 과정이다. 후궁 가운데 기록이 잘 남아 있는 경우는 그 아들이 국왕 혹은 추존된 국왕으로 그들의 생모에 해당되는데, 이들과 관련한 의궤나 등록이 어느 정도 남아 있을 뿐이다.
본 과제에서 3년 동안 왕실의 상장 의례라는 대주제 아래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삼기는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세자, 세자빈, 정1품에 해당하는 후궁의 상장 과정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특히 후궁은 ‘아들이 국왕이 된 후궁’, ‘아들이 국왕으로 재위한 동안 졸서한 후궁’ 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세자는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를 대상으로 할 것이다. 비록 문효세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하지만 문효세자 보다 앞서 살다간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와 문효세자 보다 뒤에 훙서한 효명세자의 상장과도 비교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세자빈은 세자 보다 먼저 훙서한 경종의 첫 번째 빈 단의빈(端懿嬪)과 세자 보다 뒤에 훙서한 영조의 첫 번째 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빈 효순현빈(孝純賢嬪)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후궁은 수빈 박씨를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수빈 박씨의 경우 순조가 재위 시절 졸서하여 다른 후궁에 비해 그녀의 상장례에 대한 기록이 풍부해서이다. 희빈 장씨의 상장 기록과 숙빈 최씨의 상장 기록과 비교해서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