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소설은 몇 가지 세부적 장치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연대기적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고, 이야기 밖에 존재하는 화자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술, 'hétérodiégétique' 서술 유형에 속한다.
2) 소설의 구성을 보면, <목로주점>은 전체 ...
1) 두 소설은 몇 가지 세부적 장치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연대기적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고, 이야기 밖에 존재하는 화자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술, 'hétérodiégétique' 서술 유형에 속한다.
2) 소설의 구성을 보면, <목로주점>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분량의 13개 장이, 여주인공 제르베즈의 삶의 여정을 따라 여러 장소를 옮겨간다. 장들 사이에 혹은 각 장의 내부에 눈에 띄는 특별한 공백이 없이 중요한 사건들이 그려져 있고, 상대적으로 균질적인 시간의 특성은 적절하게 주어진 시간의 지표들로 확인된다. 소설의 제목 자체에 “1880년”이라는 역사적인 시간 지표가 주어진 <파울리나 1880>은 소설 전체에 연대기적 성격이 강조되어 있지만, 주인공의 삶이 시작부터 끝까지 어느 정도 균질적인 시간으로 이어진 <목로주점>과 달리, 6개의 부는 포함된 장의 수가 불규칙적이고, 119개의 짧은 장들 사이에 혹은 한 개의 장 안에 포함된 스토리 상의 시간 역시 불규칙적이다. 이처럼 짧은 장들의 나열, 텍스트 곳곳에 존재하는 생략과 침묵, 그리고 서술의 현재를 가리는 베일 등은 선조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의 흐름을, 순서는 거의 바꾸지 않지만, 끊고 맺어가며 흩어지게 한다.
3) <목로주점>의 전반부는 버림받은 제르베즈가 세탁소 주인이 되는 상승 과정을, 후반부는 그녀가 가난과 술에 절어 비참한 죽음을 맞는 하강 과정을 그린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로 인해 비가역적 시간은 단순히 선형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피라미드 형의 구조물로 그려지며,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대응하면서 피라미드의 좌우대칭 구조는 더욱 강조된다. 그런데 <목로주점>의 서술은 상승의 순간들에 이미 앞날에 대한 불길한 그림자가 펼쳐지게 하고, 독서의 현재를 따라가는 동안 독자는 끊임없이 불안한 미래를 예감하고 앞질러 가게 된다. <파울리나1880>은 독자들이 이야기 진행에 중요한 요소들을 늦게, 그리고 간접적으로 알아가도록 배치되어 있고, 연대기적 시간을 가리키는 지표들이 사건 자체보다는 그 주변을 향하고 있는 것다. 사건들이 서로의 인과관계가 희미하게 지워진 채 별개의 이야기처럼 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건들이 서로간의 관계가 희미한 안개 속에 가려진 채 단편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독자는 끊임없이 조각난 시간 속을 되짚어가고 앞질러갈 수밖에 없다.
3) <목로주점>의 화자는 주인공의 삶의 결말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지만 그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 화자이다. 작중 인물들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 그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들려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특히 자유간접화법이 많이 사용되어 있는데, 그로 인한 화자의 부재 또는 중립성은 동시에 말하는 ‘다성적 효과’를 불러오게 된다. 그렇게 자연주의 미학이 추구한 ‘해부’에 가까운 중립적인 시선은 역설적으로 모든 목소리가 뒤엉킨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반대로 <파울리나1880>당연히 조심스럽게, 모호하게 이야기한다. 그로 인한 서술의 균열은 갑자기 옮겨다니는 시점의 변화로 더욱 두드러진다. 한 장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시점의 변화 외에도 별도의 장으로 중간중간 삽입된 파울리나의 독백, 일기 역시 같은 효과를 불러온다. 화자가 주인공에게 서술의 현재를 자주 내어줄수록 화자의 이야기는 더욱 더 불연속적이고 모호한 것이 되는 것이다.
4) <목로주점>의 서술은 제르베즈의 추락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노력을 넘어서는 숙명에 관한 이야기, 어두운 종말을 예고하는 ‘예언’ 이야기가 된다. 특유의 피라미드 대칭 구조는 시간의 비가역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면서 이야기를 비극적 신화의 세계로 끌고 들어간다. 이야기의 극적인 구조가 시간성을 배제하고 수많은 상징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파울리나 1880>의 경우, 사건들의 시간 관계를 의도적으로 지워버리며 이야기를 여백과 침묵 속에 흩어지게 하는 화자는 자기가 그리는 세계를 ‘알지 못하는’ 화자가 아니라 감추면서 보여주는 화자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파편화된 시간의 불협화음이 오히려 시간의 비가역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허구적 시간 경험’을 낳는다. 그 시간은 파울리나가 유년기부터 갈망하던 황홀경의 그것이다. 그곳은 절대(absolu)를 향한 고뇌와 순간의 쾌락이 뒤엉킨 곳,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곳, 순간과 영원이 맞닿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