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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와 회의주의
Locke and Scep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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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2S1A5A8023309
선정년도 2012 년
연구기간 1 년 (2012년 05월 01일 ~ 2013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황설중
연구수행기관 대전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연구자의 주제는 <로크와 회의주의>이다. 키케로가 전해주는 신아카데미 학파의 논변들과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정리해 놓은 피론주의의 논변들, 그리고 이런 고대 회의주의자들에 의해 “이미 조리된 재료를 다시 데워 내놓은” 데카르트의 의심들과 로크의 『인간지성론』이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런 철학사적 배경 위에서 숙고를 거듭한 로크의 회의주의에 대한 답변이 신중하게 평가되었어야 했음에도, 『인간지성론』은 출판되자마자 푸대접을 받았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로크는 그 자신의 기획과는 반대로 회의주의자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반화된 평가가 로크의 지식론의 한 부분을 명중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주의의 대응에 대한 로크의 핵심적인 기획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만든다. 로크의 지식론은 고대 회의주의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피론주의자의 논변들을 접하였고, 신아카데미 학파의 입장에도 정통하였다. 바로 키케로가 저술한 『아카데미의 회의주의에 관하여』에서 신아카데미학파의 회의주의자들의 해결책을 로크는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로크 이후 피론주의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로크가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렇게 <로크와 회의주의>에 대한 관계는 매우 기나긴 철학사적 배경을 깔고 있음에도 특별히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 주제는 로크와 버클리 그리고 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발전적인 철학사의 입장에서만 조망되고 있을 뿐이다. 회의주의에 대한 대응에 있어 로크 지식론이 갖는 문제성은 단순하고 명확한 듯이 보인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인간지성론』에서 로크는 구체적으로 철학자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지 않지만, 로크는 고대 회의주의자들과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근세 철학자들의 인식론을 샅샅이 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지식론을 이해하고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기나긴 우회로를 돌아가야 한다. 그의 지식론은 고대에 치열하게 벌어졌던 신아카데미 학파와 피론주의자들 간의 논박을 포함하고 있고, 이런 논박 과정을 고려하면서 로크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크 인식론에 대한 비판이, 말하자면 로크 이후의 인식론의 발전이 곧 고대 회의주의자들 간의 전선의 확장이고, 신아카데미 학파에 대한 피론주의의 근대적 비판의 버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도 않고, 일목요연하지도 않다. <로크와 회의주의>의 관계를 온전하게 파악하려면 근세 철학자들과 더불어 (얼핏 로크와는 상관이 없이 보이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고대 회의주의자들이 불가피하게 소환되어야 한다. 연구자는 <로크와 회의주의>를 통해 지금까지 별로 연구된 적이 없는 고대 회의주의자들과 로크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하며, 로크의 이론적 아킬레스 건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근세 경험론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입지점을 마련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로크와 회의주의>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거의 없으며, 국외 연구도 미흡한 실정이다. 로크 철학 역시 회의주의의 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회의주의에 대한 로크의 해결은 매우 선구적이며, 심사숙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로크 지식론은 경험론의 발전사나 근대 철학사의 전개라고 하는 시야에서 아주 쉽게 비판되었고, 처리되었다. 좋게 보아준다 해도, 로크의 지식론은 철저하게 철학적인 회의주의로 가기 위해 거쳐 가는 일종의 관문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다르고, 보기보다 복잡하다. 회의주의에 대한 로크의 입장은 저 고대의 회의주의와, 말하자면 신아카데미 학파와 피론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로크 지식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키케로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구자의 주제는 로크와 고대 회의주의자를 분석하고 결절점을 찾아냄으로써 로크 지식론에 대한 새로우면서도 좀 더 심층적인 이해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철학계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고대 회의주의의 철학적 중요성과 영향력을 환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왜 신아카데미 학파와 피론주의가 근세에 계속 문제의 진앙지였는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 철학에서도 그렇다.) 신아카데미 학파와 피론주의자들의 회의적 논변형식들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단순히 회의적 논의를 위한 주석적 수준에서의 참조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지식 일반의 정초 가능성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회의주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근세 철학자들 간의 상반된 평가와 입장은 오히려 고대 회의주의의 물음의 철학적 유효성과 생명성을 보여줄 것이다. 고대 회의주의의 논변이론뿐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의 경쟁적인 다른 철학 학파들은 국내에서 전혀 주목받고 있지 못하며, 이것은 적어도 회의주의론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상당한 지적인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연구자의 주제는 이런 손실에 대한 자각뿐 아니라 고대 회의주의자들이 제기한 이론적, 실천적인 철학적 물음들의 심각성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연구자의 주제는 비단 로크의 지식론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도움을 주는 데에 그치지 않으리라고 본다. 회의주의와 로크의 관계를 통해 데카르트에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근세의 인식론을 추동시킨 동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회의주의에 대한 대응’이라는 문제틀로 로크 지식론을 분석하는 가운데, 근세 경험론을 포함하여 근세 철학 일반의 배경에 깔려 있는 저변의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왜 근세 철학이 로크와 버클리와 흄을 거쳐 칸트와 헤겔로 나아가야 했는가?”에 대한 근세 철학사의 진행의 필연성도 암시해 줄 수 있을 것이며, 근세 철학의 전개를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 연구요약
  • 흥미롭게도 신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자들과 이론적 근친관계를 형성했던 이들은 신아카데미 학파의 철학자들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피론주의자들이었다. 갈등하는 논변들을 제출하여 판단중지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신아카데미 학파와 피론주의는 이론적 중첩성을 갖는다. 고대 회의주의의 양 학파는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독단주의자를 공격하는 데 있어서는 연합전선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도 피론주의자들은 신아카데미 학파가 회의주의의 이론적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며, 독단화의 요소를 내재적으로 갖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피론주의자들은 그들의 이론의 수미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삶의 태도로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관습, 전통, 자연에 기대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거꾸로 신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자들이 볼 때 이런 삶의 방식은 식물처럼 극히 수동적이다. 우연히 뿌리박은 토양과 기후가 이 식물의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또 이런 삶은 결국 우리 자신의 전체적인 삶의 형식이나 내용을 망가뜨리고 말 것이라는 것이 키케로의 확신이었다. 신아카데미가 승인하는 회의적 동의의 이점은 좀 더 개연적인 인상에 따라 행동하면 우리는 무력한 채로 자신의 삶을 방임하지 않으면서, “‘예’와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신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자들은 피론주의자의 삶의 태도가 무책임하고,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로크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피론주의가 채택한 삶을 산다면, “날개가 없다는 핑계로,” 또는 “대낮이 햇볕이 없다는 핑계로,” 깜깜한 어둠 속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저 가만히 있는 꼴이라고 로크는 생각하였다. 회의주의와 관련하여 로크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세계를 남김없이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삶의 편리를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었고, 또 현세를 위한 충분한 준비와 좀 더 나은 것에 이르는 길을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두었다”는 것이다.로크는 이미 회의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가 신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자들에 해결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나 삶의 영위가 개연성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로크는 인간의 경험을 통해 판단하고 결정함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유용한 삶의 합리적인 형식과 내용을 (어느 정도는) 획득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그는 이런 점에서 회의주의의 문제를 쓸데없이 철학적 정력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으로 간주하는 프래그머티스트와 닮아 있다. 그렇지만 회의주의에 대한 로크의 프래그머티즘적인 해결책은 부각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의 제안은 이후의 철학자들에 의해 호된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철저하게 ‘반표상주의자’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표상주의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아예 일관되게 프래그머티스트처럼 문제 해소 전략에 주력했더라면, 즉 피론주의자들이 제기한 문제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지 않고 그런 수고를 비웃었더라면, 그는 그렇게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의해 쉽게 도마 위에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삶의 유용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근세적 표상주의의 패러다임 속에 있었다. 그의 실재 세계에 대한 이런 미련이 곧바로 그에게 파멸을 가지고 왔다. 로크의 회의주의는 근세의 신아카데미 학파의 철학자가 근세의 피론주의자에게 패퇴해 가는 이론적 여정을 잘 보여준다. 거꾸로 말한다면, 로크의 회의주의는 왜 근세에서도, 현상과 본질이라는 표상주의의 잔재를 버리지 못하는 한, 신아카데미 학파가 아니라 피론주의가 철학의 진정한 적으로 등장하는가의 필연성을 드러내준다.
  • 한글키워드
  • 로크, 키케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신아카데미 학파, 피론주의, 회의주의, 개연성, 표상주의
  • 영문키워드
  • Locke, Cicero, Sextus Empiricus, New-Academic School, Pyrrhonism, Scepticism, Probability, Representationalism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로크가 1690년 그의 주저인 『인간지성론』을 정식으로 출판했을 때, 철학계의 화두 가운데 하나는 회의주의였다. 신(新)아카데미 학파와 피론주의를 포함하여 고대 회의주의에 대한 극복이야말로 (회의주의에 동조하는 몽테뉴와 샤롱이나 벨을 제외하고) 로크를 포함하여 근세의 대부분의 주류 철학자들이 전념한 철학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가 수행한 의심들과 로크의 『인간지성론』이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런 철학사적 배경 위에서 숙고를 거듭한 로크의 회의주의에 대한 답변이 신중하게 평가되었어야 했음에도, 『인간지성론』은 출판되자마자 푸대접을 받았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예컨대, 로크는 『인간지성론』에서 회의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고 보았지만, 버클리에게는 오히려 로크가 회의주의를 인도하는 길잡이로 비춰졌다.
    회의주의를 대하는 로크의 전략은 단순히 이론적이고 학문적으로 회의주의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삶에 주목하였고,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일은 개연성으로 다스려도 충분하다고 보았다. 로크가 『인간지성론』에서 회의주의자들에 대응하고 있는 핵심적인 전략은 간단히 말해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의 확립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문제 해소의 맥락에서 프래그머티즘적 태도를 취하는 데에 있다. 로크는 우리에게 회의적 이론의 대응에 집중하자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무엇이 유용한가에 주목하자고 역설하는 것이다. 로크에게는 개연성이야말로 [참된] 지식의 결여를 메우는 것이다. 로크는 개연성만으로도 삶과 지식에 충분하다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이, 회의주의에 대한 로크의 프래그머티즘적인 해결책은 부각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의 제안은 이후의 철학자들에 의해 호된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철저하게 ‘반표상주의자’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표상주의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아예 일관되게 프래그머티스트처럼 문제 해소 전략에 주력했더라면, 즉 피론주의자들이 제기한 문제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그런 수고를 비웃었더라면 그는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의해 그렇게 쉽게 도마 위에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재 세계에 대한 그의 미련이 곧바로 그에게 파멸을 가지고 왔다. 로크 철학은 현상과 본질이라는 표상주의의 잔재를 버리지 못하는 한, 피론주의가 철학의 진정한 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필연성을 드러내준다.
  • 영문
  • When Locke officially published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in 1690, a important philosophical topic was how to overcome scepticism. Most mainstream philosophers of the early modern philosophy including Locke dedicated to solve the problem of scepticism originated from ancient new-academic school and pyrrhonism. Although Locke carefully prepared to the answer to scepticism, An Essay Concering Human Understanding received a cold respond as soon as published and was criticized by leading philosophers of his time. For example, Berkeley considered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as a guide to scepticism.
    Locke's strategy for dealing with scepticism is not simply to defeat scepticism theoretically. He paid attention to actual life and saw the probability enough to cope with predicaments caused by life. The core answer to scepticism in An Essay Concering Human Understanding is not to establish the absolutely certain knowledge as Descartes did, but to take a pragmatic position in the context of problem solution. Locke suggested to focus on the usefulness, that is, what is useful to our life. According to Locke, the probability is to supply the defect of our knowledge and to live an happy life without terrible difficulties.
    As is well known, however, Locke's pragmatic response to scepticism was not taken seriously by later philosophers. Rather, his proposal degenerated into the subject of harsh criticism. The basic reason for his unfortunate destiny lies in that Locke did not become a thorough anti-representionalist. He always had kept real world itself as a source of ideas, primary qualities, resemblance between thing and idea etc. in mind. In short, lingering affection to representaionalism resulted in his failure to scepticism. Locke’s philosophy showed why phyrronist could emerge as a philosophical invincible enem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연구자의 주제는 <로크와 회의주의>이다. 키케로가 전해주는 신아카데미 학파의 논변들과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정리해 놓은 피론주의의 논변들, 그리고 이런 고대 회의주의자들에 의해 “이미 조리된 재료를 다시 데워 내놓은” 데카르트의 의심들과 로크의 『인간지성론』이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런 철학사적 배경 위에서 숙고를 거듭한 로크의 회의주의에 대한 답변이 신중하게 평가되었어야 했음에도, 『인간지성론』은 출판되자마자 푸대접을 받았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로크는 그 자신의 기획과는 반대로 회의주의자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반화된 평가가 로크의 지식론의 한 부분을 명중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주의의 대응에 대한 로크의 핵심적인 기획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만든다. 로크의 지식론은 고대 회의주의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피론주의자의 논변들을 접하였고, 신아카데미 학파의 입장에도 정통하였다. 바로 키케로가 저술한 『아카데미의 회의주의에 관하여』에서 신아카데미학파의 회의주의자들의 해결책을 로크는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로크 이후 피론주의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로크가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렇게 <로크와 회의주의>에 대한 관계는 매우 기나긴 철학사적 배경을 깔고 있음에도 특별히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 주제는 로크와 버클리 그리고 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발전적인 철학사의 입장에서만 조망되고 있을 뿐이다. 회의주의에 대한 대응에 있어 로크 지식론이 갖는 문제성은 단순하고 명확한 듯이 보인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인간지성론』에서 로크는 구체적으로 철학자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지 않지만, 로크는 고대 회의주의자들과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근세 철학자들의 인식론을 샅샅이 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지식론을 이해하고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기나긴 우회로를 돌아가야 한다. 그의 지식론은 고대에 치열하게 벌어졌던 신아카데미 학파와 피론주의자들 간의 논박을 포함하고 있고, 이런 논박 과정을 고려하면서 로크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크 인식론에 대한 비판이, 말하자면 로크 이후의 인식론의 발전이 곧 고대 회의주의자들 간의 전선의 확장이고, 신아카데미 학파에 대한 피론주의의 근대적 비판의 버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도 않고, 일목요연하지도 않다. <로크와 회의주의>의 관계를 온전하게 파악하려면 근세 철학자들과 더불어 (얼핏 로크와는 상관이 없이 보이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고대 회의주의자들이 불가피하게 소환되어야 한다. 연구자는 <로크와 회의주의>를 통해 지금까지 별로 연구된 적이 없는 고대 회의주의자들과 로크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하며, 로크의 이론적 아킬레스 건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근세 경험론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입지점을 마련하고자 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로크와 회의주의>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거의 없으며, 국외 연구도 미흡한 실정이다. 로크 철학 역시 회의주의의 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회의주의에 대한 로크의 해결은 매우 선구적이며, 심사숙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로크 지식론은 경험론의 발전사나 근대 철학사의 전개라고 하는 시야에서 아주 쉽게 비판되었고, 처리되었다. 좋게 보아준다 해도, 로크의 지식론은 철저하게 철학적인 회의주의로 가기 위해 거쳐 가는 일종의 관문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다르고, 보기보다 복잡하다. 회의주의에 대한 로크의 입장은 저 고대의 회의주의와, 말하자면 신아카데미 학파와 피론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로크 지식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키케로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구자의 주제는 로크와 고대 회의주의자들을 분석하고 결절점을 찾아냄으로써 로크 지식론에 대한 새로우면서도 좀 더 심층적인 이해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철학계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고대 회의주의의 철학적 중요성과 영향력을 환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왜 신아카데미 학파와 피론주의가 근세에 계속 문제의 진앙지였는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 철학에서도 그렇다.) 신아카데미 학파와 피론주의자들의 회의적 논변형식들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단순히 회의적 논의를 위한 주석적 수준에서의 참조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지식 일반의 정초 가능성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회의주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근세 철학자들 간의 상반된 평가와 입장은 오히려 고대 회의주의의 물음의 철학적 유효성과 생명성을 보여줄 것이다. 고대 회의주의의 논변이론뿐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의 경쟁적인 다른 철학 학파들은 국내에서 전혀 주목받고 있지 못하며, 이것은 적어도 회의주의론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상당한 지적인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연구자의 주제는 이런 손실에 대한 자각뿐 아니라 고대 회의주의자들이 제기한 이론적, 실천적인 철학적 물음들의 심각성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연구자의 주제는 비단 로크의 지식론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도움을 주는 데에 그치지 않으리라고 본다. 회의주의와 로크의 관계를 통해 데카르트에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근세의 인식론을 추동시킨 동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회의주의에 대한 대응’이라는 문제틀로 로크 지식론을 분석하는 가운데, 근세 경험론을 포함하여 근세 철학 일반의 배경에 깔려 있는 저변의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왜 근세 철학이 로크와 버클리와 흄을 거쳐 칸트와 헤겔로 나아가야 했는가?”에 대한 근세 철학사의 진행의 필연성을 암시하고, 근세 철학의 전개를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고 파악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 색인어
  • 로크, 데카르트, 가상디, 키케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회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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