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子 <周易本義>에서 합리적 판단과 도덕적 선택에 관한 연구
- 邵雍 · 程頤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Research on the Relation between Rational Judgment and Moral Choice shown in the Zhouyi benyi.- Focusing on the comparison of Shaoyong and Chengyi.
<周易>은 미래예측을 위한 占卜書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동양철학의 가장 심오한 정수를 담고 있는 哲學書이다. 占卜 즉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세계관이 전제되어야 한다. 반면 철학 및 도덕적 결단과 선택이 가능하기 ...
<周易>은 미래예측을 위한 占卜書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동양철학의 가장 심오한 정수를 담고 있는 哲學書이다. 占卜 즉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세계관이 전제되어야 한다. 반면 철학 및 도덕적 결단과 선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주체의 의지가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 최소, 주체의 의지가 외적 장치에 의해 구속되지 않을 것이 요구된다. 때문에 점복서이면서 최고의 철학사로 평가되는 <주역>이 이 양면적인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행위의 선택이 주체의 자유의지에 의해 수행되는가 아니면 외부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는 흔히 ‘결정론과 자유의지’라는 주제로 요약된다. 때문에 점복서이자 철학서인 <周易>을 이러한 주제에 입각해 접근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도 적절한 연구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周易> 본문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직접적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때문에 역학의 역사에서도 주된 문제로 인식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는 역학이 아닌 송대 성리학자들에게서 주체의 도덕적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이 도덕적 능력을 어떻게 배양할 것인지의 문제로 다루어졌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송대 성리학자들이 주체의 도덕적 행위를 설명하고 강조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철저히 <주역>의 세계관에 의존하고 있다. <주역>이 말하는 결정되어 있는 세계의 질서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태도는 그대로 송대 성리학자들의 시대의식이자 아젠다가 되었다. 흔히 太極으로 표현되는 세계의 질서 즉 易理는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개체의 도덕적 근원이자 사회를 지지하는 이성적 질서의 모태가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결정되어 있는 세계의 질서에 내면화되는 것은 결코 자유의지의 침해가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송대 성리학자들의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입장은 ‘약한 결정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인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것은 정해진 理法으로서의 세계질서가 아니었고, 오히려 정해진 질서를 거스르려는 개체적 · 이기적 욕망 혹은 무지였다. ‘자유의지의 반대는 결정론이 아니라 강요(compulsions)나 강제(constraints)’라고 보는 홉스(Thomas Hobbes) 이래 일단의 철학적 견해는 동양에서 이미 뿌리 깊은 전통으로 발전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송대 성리학자들의 결정되어 있는 세계와 그 속에서의 주체의 자유의지 및 도덕적 선택에 대한 입장에는 약간씩 스펙트럼의 차이를 보인다. <皇極經世>에서 소옹은 우주의 질서를 元會運世라는 주기성으로 규칙화한다. 그에게 있어서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전개 그리고 개인의 행위는 거의 예외 없이 이 우주적 질서의 규칙성 속에 놓여 있다. 때문에 그는 송대 성리학자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결정론적 입장을 견지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程頤는 <程氏易傳>에서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개체가 취해야 할 도덕적 입장을 제시하는 것에서 그침으로써, 주체의 의지적 선택의 폭을 최대한 인정한다. 남송의 朱子는 이 두 입장을 절묘하게 절충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원회운세와 같은 닫힌 규칙성은 배제하지만 <易經>을 점복서라고 인정하면서 정이의 입장보다는 주어진 조건의 강제성을 보다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周易本義>에서 주자는 결정된 조건 속에서 취해야 될 행위의 준칙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고 그것이 곧 가장 도덕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특정한 조건에서 취해야 할 행위를 규정한 것이 바로 <주역>이고, 성인들에 의해 규정된 이러한 행위준칙을 내면화해서 자발적으로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도덕적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문제는 주자철학의 理氣論 체계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특히 도덕적 성향과 비도덕적 성향 간에 놓여 있는 주체의 도덕적 책임과 선택을 논구함에 있어서는, 그의 역학에서 보이는 합리적 판단과 도덕적 선택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매우 중요하고도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가 지니게 되는 목적과 의의는 다음과 같이 세분화 될 수 있다.
기대효과
역학 연구의 두 축은 義理와 象數이다. 北宋의 程頤가 철학적 담론을 싣고 있는 義理書로 <주역>을 이해했다면 邵雍은 象數的 체계 속에서 <주역>의 이치를 설명하려고 했다. 같은 <주역>을 텍스트로 사용하면서도 程頤가 주체의 도덕적 결단과 선택을 중시한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를 인 ...
역학 연구의 두 축은 義理와 象數이다. 北宋의 程頤가 철학적 담론을 싣고 있는 義理書로 <주역>을 이해했다면 邵雍은 象數的 체계 속에서 <주역>의 이치를 설명하려고 했다. 같은 <주역>을 텍스트로 사용하면서도 程頤가 주체의 도덕적 결단과 선택을 중시한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를 인정했다면, 邵雍은 元會運世와 같은 數的 주기성 속에서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비교적 강한 결정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송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南宋의 朱熹는 전대 철학의 문제의식과 성과를 유기적으로 종합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완성했고, 그 주된 골격은 理氣論에 바탕을 둔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理와 氣는 공히, 주체가 도덕적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주체적 선택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理의 내면화 즉 도덕적 본성[性]이 없으면 주체는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理가 기계적으로 개입한다면 역시 주체는 도덕적 책임을 질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자발적 동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기계적 입력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氣는 도덕적 본성을 따르지 말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추동하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氣는 비이성적 · 비도덕적으로 행위 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개체성의 근원이기도 하기 때문에, 도덕적 본성의 명령을 기계적으로 따르지는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인간에게 氣的 동인이 없다면 주체는 도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된다. 인간이 악마도 천사도 아닌 이유는 理와 氣를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理氣論은 결정되어 있는 도덕적 · 기질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주체의 자유의지를 세울 수 있고 또 길러갈 것인가에 대한 담론이 되는 것이다. 사실상 朱子 이후 송명 신유학은 물론 조선의 성리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담론은 이러한 도덕적 · 기질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주체의 ‘자유의지’를 확보할 것인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陽明學이 그렇고 조선의 四七論 · 人物性同異論 · 聖凡論 등이 모두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朱子 이전의 북송대 철학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周敦頤로부터 二程 형제 및 張載와 邵雍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도덕적 주체의 확보와 이성적 사회의 건립을 추구하지 않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자의 <주역> 주석서에서 드러나는 합리적 판단과 도덕적 선택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新儒學 전반의 사상적 구조를 도덕적 책임이라는 주제로 새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요약
元明과 朝鮮의 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기능한 것은 정이의 <程氏易傳>과 주자의 <周易本義> 그리고 「역학계몽」이다. 「역학계몽」은 주석서가 아니라고 할 때, 앞의 두 책은 가장 영향력 있는 <주역> 주석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책의 주석서에는 내용의 상이함에 앞 ...
元明과 朝鮮의 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기능한 것은 정이의 <程氏易傳>과 주자의 <周易本義> 그리고 「역학계몽」이다. 「역학계몽」은 주석서가 아니라고 할 때, 앞의 두 책은 가장 영향력 있는 <주역> 주석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책의 주석서에는 내용의 상이함에 앞서 형식적 차이가 비교적 도드라져 보인다. <정씨역전>이 일반적으로 ‘∼이면 ∼이다’라는 주석적 특징을 보인다면, <주역본의>는 ‘∼이니 ∼이’라고 주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乾卦 九三의 경우 정이는 ‘君子 終日乾乾하야 夕惕若하면 厲하나 无咎리라’라고 주석한다면 주자는 ‘君子 終日乾乾하야 夕惕若이니 厲하나 无咎리라’라고 주석한다. 구체적으로 정이는 ‘日夕不懈而兢惕 則雖處危地而无咎’라고 주석함으로써, ‘夕惕若’이 조건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자는 ‘有能乾乾惕厲之象 故其占如此’라고 주석함으로써, 이미 ‘夕惕若’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夕惕若’이 조건문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坤卦 六四에서도 정이는 ‘括囊이면 无咎며 无譽리라’라고 주석하는데 반해 주자는 ‘括囊이니 无咎며 无譽리라’라고 주석하고 있다. 정이는 주석에서 ‘若晦藏其知, 如刮結囊口而不露則可得无咎’라고 함으로써 ‘括囊’이 조건문임을 보인다. 반면 주자는 ‘謹密, 如是則无咎而亦无譽矣’라고 주석함으로써 ‘括囊’이 이미 갖추어진 상태라고 보았다. 이 두 주석의 구조를 형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정이는 ‘A라는 괘·효의 조건에서 B의 행동을 할 경우 C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 朱子는 ‘A라는 괘·효의 조건에서는 B의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러니 C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주체의 의지를 강조하는 정이에게 있어서 이 명제는 딱히 占卜과 연결될 필요가 없다. 언제라도 A라는 조건 속에서라면 B → C 혹은 ∼B → ∼C 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행동의 요령을 일반화해서 규범화하는 전형적인 義理的 태도이다. 그러나 <역경>을 점복서라고 규정하는 주자에게서는 좀 더 복잡하게 돌아간다. 우선 그는 B라는 행동을 하게 되는 상황을 ‘象’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C라는 결과는 ‘占’이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분석 구조에서는 점치는 자가 A라는 점의 결과를 얻게 되면 언제나 B라는 행동을 하게 되고 또 언제나 C라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주체의 자율적 판단이나 의지적 선택이 설 자리는 없게 된다. 하지만 주자는 ‘占’의 단계에서 다시 주체의 선택이 가능한 것처럼 기술한다. 다시 乾卦 九三의 주석을 보자. “有能乾乾惕厲之象 故其占如此. 君子 指占者而言. 言能憂懼如是 則雖處危地 而无咎也.” 여기서 주자는 ‘能憂懼如是’라고 말함으로써 ‘能不能’이 가능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사실 이런 방식의 주석은 <주역본의> 전체에서 다수 목격된다. 이렇게 이해될 때, 앞의 분석은 다시 이렇게 구체화 되어야 한다. “A라는 괘·효의 조건에서는 B의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런데 점치는 자가 과연 B의 행동을 할 경우 그는 C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해결되어야 할 곤혹스러운 문제가 숨어 있다. 점치는 주체는 과연 B의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B의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인가? ‘象’의 단계에서는 결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占’의 단계에서는 또 주체의 의지에 달린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이 내려질 수 있다. B라는 행위를 따르는 것은 우주적 질서에 가장 적합한 합리적 판단이 된다. <주역>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행위방식을 일반화시킨 성인의 가르침이다. 때문에 그러한 성인의 지침에 따르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율성이 주어져 있다. 이때의 자율성이란 주체가 자유의지에 의해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 이외에 도덕률을 거스르려고 하는 비도덕적 경향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러한 자율성에도 불구하고 우주적 질서를 따르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현명한 판단임과 동시에 가장 도덕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한글키워드
주자, <주역본의>, 합리적 판단, 도덕적 선택, 소옹, 정이
영문키워드
Zhuzi, Zhouyi benyi, Rational Judgment, Moral Choice, Shaoyong, Chengyi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일반적으로 성리학에서는 개인의 이익보다 도덕적 선택을 우선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주역에서는 결코 이익을 죄악시 하지 않는다. 이 글은 성리학자이면서 역학자인 주자의 이익과 도덕에 대한 입장을 추적하는 연구이다. 주자가 소옹의 결정론적 세계관과 도덕적 ...
일반적으로 성리학에서는 개인의 이익보다 도덕적 선택을 우선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주역에서는 결코 이익을 죄악시 하지 않는다. 이 글은 성리학자이면서 역학자인 주자의 이익과 도덕에 대한 입장을 추적하는 연구이다. 주자가 소옹의 결정론적 세계관과 도덕적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이천의 관점을 결합함으로써 완성하고자 한 것은 주역의 筮 속에서 理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占筮의 결과가 그렇게 나오는 것은 그에 해당하는 이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주역의 理 즉 易理란 오랜 경험과 관찰을 통해 확보된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심리적 행위적 경향성의 총합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바로 상황적 합리성과 타자와의 조화로움이다. 이 理는 우주와 사회의 정해진 질서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개인은 이 주어진 질서에 따를 수 있는 자유와 함께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지닌다. 때문에 정해진 질서와 그 속에서의 개인의 자유의지는 양립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런 의미에서 주자는 약한 결정론자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은 우주의 질서로부터 부여받은 당위의 법칙에 자발적으로 동의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주자는 상황적 합리성과 타자와의 조화로운 관계에서만이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와의 유기적 관계를 부정하고 唯我的 이익만 추구하려는 자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니는 심리적 행위적 경향성을 무시한 어리석은 자이다. 이렇게 주자에게서 이익[利]은 상황적 합리성[宜]이 되고 또 그것은 바로 도덕[義]이 된다. 참다운 의미에서의 합리적인 판단은 도덕적 선택을 불러온다.
일반적으로 성리학에서는 개인의 이익보다 도덕적 선택을 우선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주역에서는 결코 이익을 죄악시 하지 않는다. 이 글은 성리학자이면서 역학자인 주자의 이익과 도덕에 대한 입장을 추적하는 연구이다. 주자가 소옹의 결정론적 세계관과 도덕적 ...
일반적으로 성리학에서는 개인의 이익보다 도덕적 선택을 우선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주역에서는 결코 이익을 죄악시 하지 않는다. 이 글은 성리학자이면서 역학자인 주자의 이익과 도덕에 대한 입장을 추적하는 연구이다. 주자가 소옹의 결정론적 세계관과 도덕적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이천의 관점을 결합함으로써 완성하고자 한 것은 주역의 筮 속에서 理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占筮의 결과가 그렇게 나오는 것은 그에 해당하는 이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주역의 理 즉 易理란 오랜 경험과 관찰을 통해 확보된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심리적 행위적 경향성의 총합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바로 상황적 합리성과 타자와의 조화로움이다. 이 理는 우주와 사회의 정해진 질서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개인은 이 주어진 질서에 따를 수 있는 자유와 함께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지닌다. 때문에 정해진 질서와 그 속에서의 개인의 자유의지는 양립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런 의미에서 주자는 약한 결정론자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은 우주의 질서로부터 부여받은 당위의 법칙에 자발적으로 동의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주자는 상황적 합리성과 타자와의 조화로운 관계에서만이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와의 유기적 관계를 부정하고 唯我的 이익만 추구하려는 자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니는 심리적 행위적 경향성을 무시한 어리석은 자이다. 이렇게 주자에게서 이익[利]은 상황적 합리성[宜]이 되고 또 그것은 바로 도덕[義]이 된다. 참다운 의미에서의 합리적인 판단은 도덕적 선택을 불러온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흔히 주자학의 구조를 理氣論 · 心性論 · 修養論으로 분류한다. 주자학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조선의 성리학은 특히 주체로서의 心이 어떻게 이기론적 구조 속에서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추적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四端七情論이나 人物性同異論爭 혹은 退溪의 理 ...
흔히 주자학의 구조를 理氣論 · 心性論 · 修養論으로 분류한다. 주자학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조선의 성리학은 특히 주체로서의 心이 어떻게 이기론적 구조 속에서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추적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四端七情論이나 人物性同異論爭 혹은 退溪의 理發論등은 주자 철학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논제들에 대한 심층 연구에 해당한다. 또 未發論은 조선 성리학에 와서, 순정한 본성이 발휘될 수 있는 未發의 시점에 기질적 조건이 간여하는지의 여부 혹은 그러한 기질적 조건이 사람마다 모두 동일하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논의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논의들의 중심은 도덕적 조건과 기질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도덕주체의 윤리적 결단을 도출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논의의 핵심은 도덕적 책임의 문제이다. 예컨대 退溪 理發說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논의구조 속에서 주체의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 읽을 때 그 의미가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퇴계는 주자의 이기론에 바탕을 둔 심성론적 구조를 전대의 그 누구보다 온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人乘馬의 비유처럼 도덕적 조건과 반도덕적 조건의 긴장 속에서 주체의 자유의지적 위상이 축소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 두 조건의 긴장 속에서 주체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결단과 선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그리고 두 조건의 인력으로부터 동일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주체는 어떤 계기를 통해 도덕적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인가? 퇴계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논의 구조 속에서 그의 理發說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7세기 기호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未發시 지각의 유무 혹은 기질적 조건의 간섭에 대한 논의 역시 주체의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 읽을 필요가 있다. 순전한 본성이 유지되는 때인 未發의 때에도 기질의 간섭이 있다고 한다면, 주체는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좀 더 자유롭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도덕적 책임을 요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聖人과 凡夫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구분한다면 일반인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18세기에 전개된 人性物性同異論爭의 경우도 理氣的 구조 속에서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구체화시킬 것인가의 논의로서, 인간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고자 한 논의이다. 이 논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도덕적 본성의 단계에 기질적 간섭이 있다고 보아야 할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촉발 되었다. 기질적 간섭이 있다고 한다면 인간을 동물 등 다른 존재와는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하고, 인간만의 존귀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기질적 간섭을 덜한 것으로 보았을 때에도 여전히 인간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도덕적 순수성을 강조한 것이다. 어느 관점이든 도덕적 · 기질적 조건 속에서의 도덕주체의 책임과 의무 및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 시기 성리설의 많은 논의들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구조 속에서 도덕적 책임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분석틀은 조선 성리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