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고려 후기 무관층의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 및 역할을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무관들을 분석해서 그 구체적인 운영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체제로 연구 논문이 작성되고 있다.
1. 머리말
2. 무신정권의 수립과 무관층의 구성 및 그 기능 ...
본 연구는 고려 후기 무관층의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 및 역할을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무관들을 분석해서 그 구체적인 운영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체제로 연구 논문이 작성되고 있다.
1. 머리말
2. 무신정권의 수립과 무관층의 구성 및 그 기능의 변화
3. 원의 정치적 간섭에 따른 무관층의 변질과 기능의 혼란상
4. 말기의 사회 갈등으로 인한 구성과 그 기능의 양극화 현상
5. 맺음말
1. 머리말
고려 후기 무관층의 구성과 그 기능에 대해 고찰했던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현재까지도 매우 저조한 편이다. 그 동안 문반에 비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으며 여러 다른 계층에 견주어보았을 때에도 상당히 떨어지는 쪽에 속한다. 이는 절대로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적당한 균형을 위해서라도 무관층에 대한 검토는 필요하다.
그런데 그 방향과 방법이 문제다. 지금까지의 경향은 대체로 초창기 성과로 지금까지도 중요시되고 있는 변태섭의 일련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후에도 어느 특정 시기를 다루었거나 특수 부류의 인물들을 구분해서 고찰하거나 중요한 업적을 이룩했던 개인이나 소수 집단을 특화시켜 검토하기도 했다. 그 수를 모두 헤아리면 방대하다고 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태섭의 연구 성과에서 보듯이 전 시기에 걸쳐 무반의 존재 양태를 해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즉 부분적으로 무반에 대한 심화된 업적들이 계속해서 산출되고 있으나 여전히 개별화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바탕으로 해서 무관층의 전반적인 모습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변태섭의 무반 연구가 모두 1960년대에 이루어졌음을 감안했을 때 지금 수준에서의 정리 작업이 반드시 요구되는 바이다.
더불어 무관과 분리될 수 없는 관료제, 군제와의 상관성 문제다. 먼저 그 동안 고려의 사회 성격을 귀족제로 보는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대해 서서히 관료제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는 여러 가지 연구 성과 및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관직이나 기구, 관원 등에 관한 업적들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들은 대체로 문반에 집중되었다. 무반에 대한 검토가 없지 않았으나 문반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이는 순전히 연구자의 게으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무반에 관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어쨌든 관료제의 온전한 파악을 위해서는 무반에 대한 고찰이 필수이다. 어렵지만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관료제에서 무반에 대해 검토했을 때 역시 무관의 실태부터 파악해야 한다. 핵심을 외면한 상태에서 연구 진전은 어렵다. 일찍이 변태섭은 고려를 귀족제 사회로 보아야 하는데, 무신은 귀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결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기 사회의 성격과 후기의 그것이 크게 달라졌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주지하듯이 귀족의 개념 정리가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이에 대해 다각도로 보강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더불어 반대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에서도 무관층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 어떤 견해를 옹호하던, 반대하던 일단 무관층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가 필요하다.
군제의 경우에서도 다양한 각도에서 실증적 연구가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한국군사사(2012, 경인문화사)라는 큰 제목으로 우리 학계의 최초로 전근대의 군사제도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그 가운데 한국군사사 3 - 고려 Ⅰ과 한국군사사 4 - 고려 Ⅱ가 고려시대 군제사에 해당된다. 즉 1983년에 간행된 高麗軍制史의 뒤를 이어 전시기에 걸친 군제를 기술하였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연구 성과가 쌓여 많은 부분에서 보강 작업이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관층에 대한 언급은 매우 적었다. 지휘체계를 다루면서 부분적으로 검토되기는 했지만 그 비중에 비해서 다소 소략하였다.
무관층의 기능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군대 운용과 관련된 것이다. 이를 통해 그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실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기의 무반층은 귀족에 속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그 기저에는 군대의 최고 지휘관은 문반이라는 점이 내재해 있었다.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김부식(金富軾), 윤관(尹瓘) 등이 그 전형적인 예로써 거론되었다. 출정군의 최고위층이 문반 출신이라고 해서 무관의 역할이 제한적이었거나 단지 실무에만 종사했던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문반 출신의 최고 지휘관 휘하에서 무관들의 기능이 무엇이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례들도 중요하다. 무신정권하에서 일어났던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는데 동원된 총지휘관은 문반 출신 윤인첨(尹鱗瞻)이었다. 이어서 강동성 전투(江東城戰鬪)에서 고려측의 최고 지휘관으로 활동했던 사람은 조충(趙沖)이었고, 그 역시 문반 출신이다. 그 이외에도 여러 사례가 더 있다. 따라서 최고 지휘관의 하나만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무관의 기능을 폭넓게 해명하는 가운데 특징 따위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무관층의 연구와 관련된 성과들을 검토했을 때 개별, 또는 특정 집단에 대한 분석도 중요하나, 이 시점에서는 그 전반의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에 대한 고찰하다. 하지만 대상 인원의 방대함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대표성을 지닐만한 표본에 대한 조사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에 그 기준을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무관층으로 삼았다. 나름대로 충분한 대표성을 지녔다고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 후기라는 시기에는 우선 무관층의 활동이 자료상, 기타 여러 정황상 전기에 비해 매우 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복잡하였다. 아마도 전기에도 무관층의 활동이 대단하였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남은 자료의 존재가 그것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후기로 국한하게 되었다. 더불어 복잡성이라는 문제도 심각하게 고려하였다. 이는 후기의 특징적 현상으로, 무신정권의 수립,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에 따른 군대의 독자적 운영의 곤란, 반원 정치의 시도 이후에 잇단 외환으로 인해 상시적 동원이라는 미증유의 장기적인 국가 비상사태의 초래 등이 그러한 결과를 낳았다.
때로는 임금의 위상을 능가할 정도의 권력이나 권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며 종종 측근 신하로 활약하면서 각종 수탈 등에 동원돼 민폐의 원흉이 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극력한 외침을 막아내서 모든 백성의 추앙을 받기도 하며 도리에 앞잡이로 전락하여 국가 운영과 민생에 암적인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대단히 복잡하였음이 특징이었다. 따라서 한꺼번에 묶어서 고찰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이에 격동기, 또는 급변기라 할 수 있는 고려 후기를 기존 연구 성과에 의거하여 무신정권기, 원간섭기, 반원 정치 이후 왕조의 멸망에 이르는 말기로 구분해서 각 시기의 무관층의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극히 복잡한 무관층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시대적 특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2. 무신정권의 수립과 무관층의 구성 및 그 기능의 변화
고려사 열전에 등재되어 무관으로 분류된 인물 가운데 무신정권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60명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삼별초의 난에 주역이었던 배중손을 포함시킨 숫자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중에서 19명이, 즉 전체 선정 인물의 1/3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고려사 열전의 반역전에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원간섭기나 말기에 속했던 인물 등의 경우에는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단히 이채롭다. 앞으로 만약 고려사 열전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경우에는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무관층의 거의 1/3에 달하는 인물들이 반역전에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역으로 무신정권의 수립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일깨어준다. 그것은 조선의 역사가뿐만 아니라 당 시대에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는 다시 무관층 자체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면서 종전과 다른 길을 걷게 했을 것이다.
먼저 60명의 출신과 그 사회적 배경을 분석해 보면, 군인이 7명, 관리의 후예로 이른바 음서 출신이 20명이다. 나머지 33명은 미상인데, 그 가운데 13명은 미천하다고 했다. 그 중에는 섬주민[島民]도 있고 옥공(玉工)의 자식도 있다. 아무튼 절반 이상이 출신 경로와 사회적 배경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고려 전기의 무관층과는 대비된다. 하지만 전기의 경우 고려사 열전에 수록된 인원의 수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비교로서의 의미가 큰 편은 아니다. 아무튼 대상 인물의 절반 이상이 미상이라는 것은 그만큼 구성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자료 부족에서 기인한 측면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다양함의 징표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후에 다시 기능 분석을 통해 뒷받침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진 군인 7명의 경우인데, 이들은 일반 병사, 그 중에는 숙위군이 절반이 넘는데, 무예 능력이 뛰어나 무관으로 발탁되었다. 이것은 고려 무반제의 특징이었다. 조선과 달리 무과라는 등용 시험이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 가운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거나 특별한 군공을 세운 자들을 무반으로 발탁하였다. 이들은 그런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군인이 되었던 경로이다.
대체로 고려전기에서는 선군급전(選軍給田)이라고 해서 결원이 생겼을 경우 적당한 자를 선발하여 충원하고 군인전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이들 7명은 선군급전의 과정을 거쳐 충원된 경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무신정권의 수립기에는 선군급전을 행할만한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 즉 선군급전을 실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러한 상황은 군인에서 무관으로 올라가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설사 올라갔다고 해도 적절한 대우를 받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러한 사정이 이들이 무관으로 출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신 봉기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던 배경이 아닌가 한다.
이어서 음서 출신 20명의 경우인데, 그 중에는 일반적인 예에 포함되지 않는 자도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무신집정자의 후손으로 그 직위를 세습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모두 4명으로 최이, 최항, 최의, 임유무가 그들이다. 이들은 세습이므로 음서와는 달랐다. 다만 가문의 배경으로 입관했다 점에서 한데 묶었을 뿐이다. 나머지 13명의 경우인데, 거기에서도 미묘한 변화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무신정권의 수립 초기에는 무반 가문에서 음서를 통해 입관하였다. 그런데 점차로 무신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무반이 아닌 문반 중에서도 음서로 무관이 되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보기 힘든 현상이었다. 즉 무반직이 출세하는데 오히려 문반직보다 유리하다고 인식되었는지 그 쪽을 택하는 사례가 늘었다. 이 시기에도 무과가 설치되지 않은 탓인지 점차로 문반 가문에서도 무관직을 택했다. 무신정권기의 대표적 전쟁 영웅이었던 김취려(金就礪)가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의 부친은 예부시랑을 지낸 부(富)였다. 이러한 현상은 무반직의 기능 변화와 관계가 있다.
무신정권기에도 종전의 무관층에 비해 그 구성이 매우 복잡해졌다. 그것은 곧 기능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다양한 계통의 사람들이 무관층을 형성하면서 조직 내에서 이전과 다른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기능에 있어서 특기할만한 점은 널리 알려졌듯이 무신정권기에는 무관 출신의 집정자의 권한과 권위가 국왕을 능가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기존 연구에서 상세하게 밝혀졌다. 다만 그 휘하의 인물들과 일반 무관 사이의 관계다. 집정자만이 아니라 그 아래에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무관들이 많았다.
우선 무관 출신으로 최고의 정무 기관, 예를 들면 삼성(三省)과 중추원(中樞院)의 최고위직, 재상직에 올랐던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전과 마찬가지라 국정의 주요 사항을 맡아 처리하였다. 종전에는 그 자리에 무관들이 오르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신정권의 수립으로 가능했다. 그 권한과 지위에 있어서도 비록 무신집정자에 미치지 못했으나 결코 적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앞선 시대와 조금 달랐다. 그것은 무신집정자들의 측근 세력에 의해 견제를 당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자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무관 중에서 대성직(臺省職)에 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이전에는 문반에 의해 독점되었으나 상황이 변하여 무관들도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기능이 조금 달라졌다. 기본적으로 국왕과 관리 등의 견제가 주된 역할이었으나 그 대상과 내용에 변화가 생겼다. 아무래도 집정자가 중요시하는 문제를 맡아서 처리하는 일에 주력했다. 하지만 본연의 임무가 도외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군대를 통솔하는 것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전에는 문반 출신의 최고 지휘자 휘하에서 실무를 담당하였으나 무신정권 수립 이후에는 바뀌었다. 무관들도 최고직에 취임했다. 그러므로 조직 구성의 양상이 변모하면서 지휘 체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군사들과 직선적으로 연결되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운용 단위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새로운 현상, 즉 인적 결합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종래에는 혈연과 지연, 또는 토지 지급 및 신분제와 연계된 조직 체계가 중심이었는데, 그 이외에 새로운 형태가 출현하게 되었다.
결국 무신정권의 수립을 계기로 무관층의 구성과 기능에 변화가 생겼는데, 그것은 역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무관층의 구성과 기능 변화가 무신정권을 장기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3. 원의 정치적 간섭에 따른 무관층의 변질과 기능의 혼란상
원간섭기에 무관으로 분류한 사람은 모두 53명이다. 앞 시기인 무신정권기의 60명에 비해 숫자상으로 큰 차이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격은 크게 달랐다. 53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28명이 고려사 열전의 폐행전(嬖幸傳)과 간신전(姦臣傳)에 등재되었다. 무신정권기에 1/3 가량이 반역전에 실려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문제는 폐행전과 간신전에 수록된 자들이 순수하게 무관층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일부는 무관으로 활동했다고 인정할만한 요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상당수는 무관을 거쳤으면서도 그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많다. 즉 무관으로서의 활동에 의심이 가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것은 곧 무관의 성격과 기능이 크게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앞서 보았던 군인 출신인가 관리의 자제로 음서 출신인지 구분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을 정도다. 폐행전과 간신전에 들어간 인물들은 출신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저 국왕의 은총 등으로 무슨 무관직에 임명되었다는 기사가 상당수에 달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제도와 과정을 밟아서 무관이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비록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 저술된 것이기는 하지만, 정도전(鄭道傳)은 경제문감(經濟文鑑) 위병(衛兵)조에서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섬긴 이래로, 매양 조정안에서 환시(宦寺)와 부녀(婦女)와 사신으로 오는 자들의 청탁으로 인하여 관작(官爵)이 넘쳤는데, 청탁된 사람들이 모두 부위(府衛)의 관직에 제수되면 세력을 믿고 교만하여 제멋대로 행하면서 숙위(宿衛)를 하려고 들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부위의 법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무릇 숙위의 직무를 받은 자가 나라의 녹봉[天祿]만을 도식(徒食)하면서 할 일을 하지 않으니, 마침내 나라를 잃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곧 폐행전에 수록되었던 무관들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정도전의 주장대로 자격이 능력이 없는 인물들이 대거 무관직에 진출하면서 군사 조직의 운영에 커다란 혼란이 발생하면서 전체가 심각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충렬왕을 필두로 한 고려 국왕들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그 배후에는 원나라의 교묘한 정치적 간섭이 작용하였다. 원의 입장에서는 고려의 여러 기구 중에서 일차로 군대를 운용하는 것에 대해 최고로 신경을 썼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감시와 견제를 가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협조할 수 있는 인물들을 배치하는데 힘썼다. 그 결과 상당수의 친원(親元) 세력, 즉 부원배(附元輩)들이 무관직에 제수되었으며 이들도 역시 폐행전, 간신전에 등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로 해서 무관직의 기능이 크게 변질되면서 운영상에 여러 가지 혼란이 초래되었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일반 병사 중에서 발탁되거나 관리의 자손으로 음서에 의해 무관에 입관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무신정권기에 비해 병사 중에서 발탁되는 경우는 드물어지고 음서를 통해 들어오는 사례는 많아졌다. 특히 음서에 있어서 무관 자제뿐만 아니라 최고 문벌의 후손이 다수 들어왔다. 무관의 위상이 전기와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폐해가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배정지(裴廷芝)였다. 겨우 10살의 나이에 금위(禁衛)에 소속되어 도지(都知)가 되었다. 심지어 그의 묘지명(墓誌銘)에는 7살에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문반에 있어서도 나이 어린 자제들이 음서를 통해 일찍 입관하는 것이 풍조가 되었는데, 그것이 무관에게도 적용되었던 대표적 사례였다. 드디어 젖비린내 나는 어린 아이들이 무관직을 차지하여 각종 폐단을 일으켰다는 고려말 개혁파사대부들 주장의 단초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통치 체제 운영에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는데, 그 중에서 정치, 군사 부문은 그 정도가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무관층에 대한 압력은 대단하였다. 자연히 구성에 있어서는 원래부터 있었던 과정을 거쳐 들어왔던 사람들과 기타 여러 갈래의 통로를 거쳐 입관했던 사람들이 한데 섞이면서 혼잡스러운 양상을 보였다. 특히 그 중에는 자격과 능력이 없는 자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무관층이 점차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구성의 혼잡스러움은 조직에서의 기능면에도 즉각 영향을 주었다. 자격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무관에 제수되면서 제 기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하였다. 물론 이는 무관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문관도 마찬가지였으나 그에 따른 폐해는 무관측이 컸다. 군사 조직의 마비와 허소화를 곧 바로 일으켰기 때문이다.
일례로 무신정권기에는 집정자들의 세습이 있었다. 한편 그들의 권한과 권위는 국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자연히 그에 따른 문제가 컸다. 원간섭기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은 원의 군제 중에서 수용된 만호(萬戶), 천호(千戶) 같은 무관직에서 일어났다. 특히 원나라 황제는 고려인 중에서 만호, 천호 등을 임명하고, 나아가 후손들에게 세습을 허용하였다. 그런데 황제로부터 만호의 세습을 허락 받았던 자들은 고려왕의 명을 종종 무시하기도 했다. 마치 군대를 사병(私兵)처럼 거느리는 자들도 있었다. 물론 그 기원은 무신정권기로 소급되는데, 원간섭기에 들어와 해소되지 않고 변형되면서 운영상의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
결국 구성상의 변질이 기능에서의 혼란을 가져오는 결정적 요인이 되면서 정치, 군사면의 여러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다.
4. 말기의 사회 갈등으로 인한 구성과 그 기능의 양극화 현상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분석 대상 인원은 모두 53명이다. 무신정권기 63명, 원간섭기 53명에 비교했을 때 숫자상의 차이가 없거나 크지 않았다. 따라서 숫자에 따른 편차는 그렇게 심하지 않는 편이었다. 다만 실제 구성상의 다름이 얼마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먼저 고려사 열전의 폐행전과 간신전에 올라있는 사람은 9명이었다. 원간섭기에 절반 이상이 수록되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반역전에 단지 1명이 등재되었는데, 무신정권기에 1/3 가량이 반역전에 실려 있는 것과도 크게 달랐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첨가해야 할 사실은 간신전에 수록된 사람들의 성격에 관한 문제다. 말기에 해당하는 인물 가운데 조민수(曺敏修)나 변안렬(邊安烈) 등이 객관적으로 그들의 행적에서 간신으로서의 전형적 모습이 발견되느냐의 여부다. 오히려 이성계의 정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말기의 무관층 구성이 전 단계와 성격 면에서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즉 무관의 원래 모습에 좀더 가까운 인물들이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앞 시기 보다 많아졌다.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일반 병사 중에서 무관으로 선발되거나 음서를 통해 입관하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그 과정과 통로가 달랐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원간섭기에 설치되어 국왕의 주위에서 근시(近侍), 또는 숙위(宿衛) 등의 임무를 맡았던 우달치(于達赤) 출신자들이 무관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최영(崔瑩)을 필두로 박위(朴葳), 임견미(林堅味) 같은 유명한 무장들이 모두 거기에서 나왔다. 우달치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조직이 여러 있었는데, 통상 애마(愛馬)로 불리기도 했다. 말기의 무관들 가운데 아마도 많은 수가 그 출신일 것으로 생각된다. 몽골식 제도를 수용하여 약화된 숙위군 조직을 보강하고자 했다. 아무튼 이들은 종래의 일반 병사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이 시기에도 문벌 가문에 속하는 자제들이 상당수 무관으로 입신하였다. 그러나 최영의 경우에서 보듯이 곧 바로 무관직에 올랐던 것이 아니라 우달치를 거쳤다. 그 이외의 여러 인물들도 비슷한 경로를 거쳤다. 따라서 일반 병사에서 승진하거나 음서를 통하는 것 이외에 애마를 거쳐 올라가는 경로가 있었다. 이는 원간섭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나 말기에 이르러 더욱 확대되었다. 이렇게 입사로가 늘어나게 됨으로써 무관층의 구성도 다양하고 다채롭게 되었다.
한편 그 구성을 좀 더 다채롭고 다양하게 형성되도록 했던 것 가운데에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무관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포함되었다. 원나라 사람이었던 나세(羅世), 여진족이었던 이지란(李之蘭), 근본이 심양(瀋陽) 사람인 변안렬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수복 지역인 동북면 출신도 있었는데, 조돈(趙暾)이 그에 해당한다. 이성계(李成桂) 역시 그에 해당한다.
아울러 문무반직을 두루 거치면서 양쪽 모두에 깊숙하게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도 여러 명이 있다. 이는 말기에 들어와 관료제 및 신분제의 운영이 크게 문란해졌다는 점과 내우외환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군대가 거의 상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겹쳐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무관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여 무관으로 편입시켰던 예가 있다. 김득배(金得培)가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당시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서 무관에도 포함시켰다. 그렇다고 문관이 아니라고는 보기도 어렵다. 문관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다만 당시의 사정과 그의 행적, 후대의 평가를 종합했던 결과다.
그러므로 말기의 무관층 구성은 매우 복잡했으며 그 이전과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순수한 원래 모습 그대로의 무관도 있었으며 문관에 경도된 인물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문관이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정도다. 군사보다도 정치에 더욱 헌신했던 인물이 있는가 하면 군공과는 거리가 먼 부정부패 및 권력 남용의 상징과 같았던 존재도 있었다. 따라서 균질성이 완전히 사라진 채 이질화된 모습을 보이며 양극단으로 갈라져서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구성뿐만 아니라 조직의 기능에서도 복잡함과 다양함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여기에 말기적 양상인 군 조직의 허소화와 사병화가 겹치면서 무관층 내부의 균열도 심각했다. 결국 무관층 내부의 대립을 해소하지 못해 고려 왕조가 붕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5. 맺음말
고려 후기의 무관층의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에 대해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특히 후기를 다시 무신정권기, 원간섭기, 반원 정치 이후의 말기로 구분해서 각각의 시대적 특성을 최대한 반영하면서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였다.
무신정권기에서는 60명의 대상 인원 가운데 1/3 정도가 고려사 열전 반역전에 등재되었다. 이에 대해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나 일단 시대적 특성과 관련이 깊다. 출신과 배경을 분석해 보면, 군인 7명, 음서 20명, 나머지 33명은 미상인데, 그 가운데 13명은 미천하였다. 대상의 절반 이상이 미상이며 그 가운데 다시 절반 정도가 미천했다는 것은 구성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다양함은 조직 내에서의 기능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관료직 뿐만 아니라 군대 안에서도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이는 다시 그 구성의 변화를 추동하였다. 나아가 구성과 기능 변화가 무신정권을 장기간 유지하도록 만들었던 동인이 되었다.
한편 원간섭기에는 53명으로 다른 시기의 인원수에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절반이 넘는 28명이 고려사 열전의 폐행전과 간신전에 등재되었다. 그들의 행적을 조사하면 상당수가 무관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에 의심이 많이 간다. 출신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전래의 방법으로 등용된 인물들도 많았지만 전혀 다른 이질적인 통로를 통해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원의 정치적 간섭이 정치, 군사 분야에 강하게 미쳤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에 대응하는 고려의 편법이 작용했던 것도 없지 않다. 이로 인해 관제, 신분제, 군제 운영 등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말기에는 53명이 대상이 되었다. 고려사 열전의 폐행전, 간신전, 반역전에 편성된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설사 설정되었더라도 앞 시기와 비교했을 때 성격이 달랐다. 상대적으로 무관 본래의 모습을 지닌 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 대신 다양한 계통의 사람들이 여러 통로를 통해 입관하였다. 전통적인 통로, 즉 일반 변사 가운데 발탁되거나 음서로 들어오는 경우도 물론 있었다. 그 이외 몽골 제도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애마 등의 숙위 조직 구성원 중에서도 들어왔다. 외지 출신자들도 있었다. 더불어 그 동안 무관직의 변화로 인해 최고 문벌 가문의 자제도 들어왔다. 이러한 이질적 요소가 말기의 혼란으로 인하여 양극화의 경향을 추동하였다. 이는 조직 내에서의 기능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무관 본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이는가 하면 자신에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던 자들도 있었다.
마침내 양극화 현상이 사회 혼란으로 한층 확대되면서 무관층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고조시켰다. 그 갈등과 대립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면서 고려 왕조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고려 후기의 무관층은 구성과 기능 양쪽에서 복잡다단함이 그 특징이었다.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모했는데, 그것은 역으로 통치 체제의 변동을 추동하기도 했다. 때때로 상호 조화를 찾으며 공존하기도 했으나 말기에 이르러 양극화 현상을 보이며 내부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것은 왕조 교체의 한 요인이 되었고, 후속 왕조의 해결 과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