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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무관층의 구성과 기능 분석 - 󰡔고려사󰡕 열전 등재 인물을 중심으로 -
Analysis on military officers’ social stratum in the Late Goryeo Period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2S1A5A2A01020028
선정년도 2012 년
연구기간 1 년 (2012년 05월 01일 ~ 2013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윤훈표
연구수행기관 연세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의 목표는 고려 후기 무관층의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 및 역할을 분석해서 그 구체적인 운영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후기에 들어서 지극히 복잡해진 무반의 실상을 체계적으로 해명하는 것과 더불어 양반 관료제와 군제의 작동 원리를 일면이나마 밝혀보고자 한다.
    우선 검토 시기는 무신 정권의 수립을 기점으로 왕조가 붕괴될 때까지를 잡고 있다. 이 시기는 전근대 역사에 있어 분수령이라 할 정도로 굴직한 변화와 곡절이 많았다. 자연히 그 시기의 무관층에 대한 검토는 한 계층의 파악에만 그치지 않고 여타 관련 부문의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분석 대상은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인물 가운데 무반으로 분류되는 사람들로 한정했다. 이들은 열전에 기술된 인사들은 물론 전체 무관 중에서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시대적인 변화 추이와 경향성을 보여줄 수 있는 표본적인 상징성을 지녔다. 국가적인 차원의 편찬 작업의 소산으로, 나름의 검증 절차를 거쳤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칭적 존재였던 문반에 필적할만한 영향력을 지녔다는 점도 십분 고려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전체에 대해 소수라고 하더라도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데 큰 지장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 ‘고려 후기’와 무관층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것에서 벗어나 실상에 대한 실증적 접근으로 새로운 이해의 시도
    극도의 위기 상황에서도 장기간 왕조가 지속되었던 것은 지탱하는 힘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제도라든가 틀이 동요되었음에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은 내재된 요소들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 한 축은 틀림없이 무관층이 담당했을 것이다. 전기에 비해 이질적인 분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짜임새가 크게 떨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맡은 바의 직무를 수행했다. 그로 말미암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성질이 다른 부류들 사이에 대립과 다툼이 격화되면서 마침내 커다란 시행 착오를 겪었다.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이 그것이다. 비록 종국에는 파국을 초래했다고 해도 이전에는 수없는 위기 극복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무관층의 실상 파악은 후기 사회의 구체적인 모습, 지탱과 붕괴, 안정과 혼란의 양 측면을 두루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이질적인 부류들의 편입으로 복잡한 구성을 보이는 무관층의 실체 해명과 그 기능에 대한 분석
    후기 무관층 구성의 특징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복잡다단함이다. 내외의 상황으로 부득이했다. 그러므로 어느 시기에 어떤 형태로 들어와서 무슨 자리에서 수행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심층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를 통해 무관층의 시대적 추이에 따른 성분 분석을 시도해야 그 전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방대한 작업이 되는 것을 피하되 경향성만큼은 뚜렷하게 파악하기 위해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후기 무관들로 분석 대상을 한정하고자 한다.
    ○ 무관층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기여도에 대한 재고
    고려 후기 무관층에 대한 지금까지의 인상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하다. 이는 󰡔고려사󰡕를 필두로 기본 사료들 속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는 식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문관층은 민생 안정을 위한 개혁에 앞장섰다든지 국체 보존에 최선을 다했다든지 하면서 밝은 면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이는 한 측면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실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처했던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고찰했을 때 맡은 바의 주된 직무가 군사였기 때문에 일선에서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점을 본격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 통시대적 이해에서 면하여 시기별 특징을 파악하는 것에 주력
    불가피하게 시대 전반에 걸쳐 검토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관층에 관한 자료가 문관에 비하여 매우 영성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그마저 단편적인 사실만 전하여 전체상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그로 말미암아 통시대를 다루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정치적 격변이 점철되었던 긴 기간을 한꺼번에 취급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일정한 관점에 의거한 시기 구분이 중요하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여러 분야에서의 고찰 형태를 참작하여 무신정권기, 원간섭기, 반원 정치 이후의 말기 등으로 시기를 나누어 각각의 무관층의 존재 양태나 특징을 파악해서 그 변화의 추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전체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 개별적이며 고립적인 고찰 방식에서 벗어나 계층적인 이해에 초점
    유명하거나 뛰어난 업적을 세운 한 사람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에서 벗어나 계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무관은 전쟁과 관계가 깊기 때문에 개인에 의한 국난 극복으로 귀결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를 피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 문관에 비해 부진하며 쏠림과 편중 현상이 심한 고려 후기 무관층 연구의 활성화
    고려 후기는 그 시대상으로 말미암아 무관층의 활동이 매우 두드러졌다. 하지만 그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진한 편인데, 특히 특정 시기나 인물에 편중되거나 쏠림 현상이 매우 심하다. 예를 들면 무신집정자나 말기의 유명한 무장에 대한 것은 상당한 양이 축적된 반면에 그 밖의 인물군에 대해서는 소략하다. 그 위에 문관층에 비하면 말할나위도 없다. 그러므로 본 연구를 통해 그 동안 부진하거나 쏠림, 편중이 심했던 것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고려 후기 사회 및 무관층에 대한 인식 전환의 계기
    후기 사회에 대한 인상은 동요, 혼란, 외적의 침입과 간섭 등으로 얼룩진 편이다. 어떤 측면으로는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몾지 않은 면도 있었다. 안팎에 걸쳐 극도로 어려운 지경에 처했으면서도 왕조를 장기간 유지하거나 외세의 간섭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했던 것은 매우 중요했다. 그 일선에 섰던 것은 무관층이었다. 물론 모두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본 연구를 통해 잠재해 있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함으로써 종래의 어두운 이미지를 탈피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등한시했던 조직 내에서 기능과 역할에 대한 중요성 부각
    후기의 무관층에 대한 분석에서 항상 거론되는 어려움은 그 존립 기반이 되었던 관료제와 군사 조직의 동요이다. 이는 정도가 매우 심각했는데 주지하듯이 그 토대가 되었던 전시과를 위시한 토지제도와 신분제의 문란으로 운영이 극히 혼란했다. 그러므로 기존 연구에서는 무관층의 출신 배경이나 정치 활동 등에 초점을 두었다. 상당한 성과를 내었으나 ‘무관’이라는 특징은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즉 관료나 지배층의 일원이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으나 무관으로서 무슨 이유로 그와 같이 행동했는지가 불명확했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고 우려감을 불식시키고자 조직 내에서 실제 기능과 역할에 대해 과감하게 분석해서 그 실제와 중요성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 계층 분석 방법의 도입에 대한 전망
    후기 무관층은 매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형성되었다. 그 정도는 문관층에 비해 훨씬 심했다. 조선의 무과와 같은 상징적인 입사로가 부재한 상황에서 정치적 격변이 겹쳐 발생함에 따라 갖가지 형태나 방식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 구성이 복잡다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그에 대한 파악을 위해서는 계층 분석에 입각한 방법론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미 선행 연구들에 의해 해명되었던 바와 같이 이 시기 무관층 자체가 일정한 성층성(成層性)을 지녔다. 그들은 스스로 서열적 상하 관계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우선 직위에 의거한 권한의 차이에 따른 층위가 존재했으며, 거기에는 사회적인 명예와 위신의 상하가 수반되었다. 이는 다시 지배 구조 내에 있어서의 지위를 점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양상들이 어떻게 작용해서 후기 무반층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시켰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계층 분석에 관한 이론을 아주 기본적인 것이나마 도입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전망해 보고자 한다.
    ○ 문치주의 일변도에서 탈피하여 문무의 균형 잡힌 시각의 제시
    조선왕조에 비해 덜하나 여전히 교육 현장에는 문관의 활동과 그 역할을 중시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 무신정권의 수립 등에서 그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의 사회 발전을 들여다 보았을 때 기여한 측면도 있다. 이런 점을 본 연구를 통해 부각시킴으로써 문관의 공헌에 버금갈 정도로 역할했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문무를 균등하게 파악할 수 있는 근거로 삼고자 한다.
  • 연구요약
  • ○ 분석 대상 무관층의 선정과 분류, 총체적 결합을 통한 위치 부여
    분석 대상층을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인물로 고정했으나 그 선정 과정 은 매우 복잡했다. 열전의 내용 만으로는 명확하게 무관으로 규정하기 어렵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존립의 기반이었던 관료제와 군 조직의 동요와 관계가 깊다. 열전의 기술 내용만으로는 확정할 수가 없으며 기타 보충되는 자료라든가 선행 연구들로부터 광범위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현재 기초 조사를 통해 후비(后妃), 종실(宗室), 공주(公主)를 제외한 718명(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本․附를 모두 포함) 가운데 191명이 무반으로 분류된다. 그 중에 무신 정권 수립 이전에 주로 활약했던 26명을 제외한 165명이 본 연구의 분석 대상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분류 작업에 착수해서 출신 배경이라든가 조직 내에서의 기능과 역할 등에 대한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검토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분류와 직무 분석 등을 통해 그 성층성이 파악된다면 총체적인 결합 과정을 거쳐 전체로서의 계층적 특징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 같은 단계를 거쳐 후기 무관층의 성격과 그 위상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 시기를 구분하여 양상의 변화 추이를 분석
    ‘고려 후기’는 정치적 격변으로 점철되었다. 무신 정권의 수립을 기점으로 해서 촉발된 파동은 간간의 휴지기도 없지 않았으나 연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외세의 압력도 그 어느 시기 보다 강했다. 특히 장기간에 걸쳤다는 점에서 그 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무관층의 활동이 극히 활발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시기에 따라 달랐으며 자연히 끼친 영향에서도 차이가 났다. 그러므로 시기를 구분해서 변화의 추이를 파악하는 것이 긴요하다.
    무신정권기, 원간섭기, 반원 정치로부터 붕괴에 이르는 시기로 구분했다. 무신정권기는 안팎에 걸쳐 무관층의 활동이 현저히게 지배적이었다. 그에 맞추어 검토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기초 조사 작업에서 파악된 총 분석 대상자 165명 가운데 61명으로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다. 이 시기는 다양함이 특징이다. 출신 배경도 문벌에서 노비, 승려 등으로 폭이 넓으며 조직에서의 기능과 활동도 여러 층위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국왕의 권력을 능가하는 자로부터 반란의 선두에 섰던 경우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본 연구의 유형별로 심화된 분석을 통해 이 시기의 정황을 파악하고자 한다.
    원간섭기에는 다른 분야에 비해 무관층에 대한 외세의 압력이 거세었다. 그에 따른 현상은 결국 변질이나 왜곡으로 표현되기 마련이었다. 분석 대상 인원은 165명 중에 51명으로 선정했다. 그 시대의 영향을 받았던 탓인지 이민족 출신이 다수 편입되었다. 문관층 보다도 무관층으로 입사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최고 문벌층 자제들도 다수 들어왔다. 전에는 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는데 이 역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요소로 짐작된다. 본 연구를 통해 보다 심층적으로 밝혀 보고자 한다.
    말기는 반원 정치로 시작됨으로 말미암아 전기 제도의 회복이라는 구호가 대두되었다. 이는 무관층에게도 커다란 숙제를 제공했다. 무신정권기로 돌아가야 하느냐, 그 이전, 순수한 전기 체제로 복귀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미처 정리할 여유도 없이 원명교체에 따른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동으로 또 다른 형태의 외세 간섭이 닥쳤다. 이는 즉각 무반층의 움직임에 반영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했다. 대상 인원 53명으로 예상되며, 안팎의 도전이 거세게 일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군공자가 많았다. 그리고 자체간의 갈등도 대단히 컸다. 문관이라든가 다른 층과의 대립 뿐만 아니라 자기 내부의 충돌도 컸다. 그 여파로 왕조가 붕괴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점에 유의해서 이 시대의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렇듯 시대를 구분해서 그에 대응하는 무관층의 변화 추이를 파악하는 것이 본 연구의 줄거리라 할 수 있다.
    ○ 관료제 및 군 조직의 운영 실태에 대한 일면적인 진단
    후기 사회에서는 관료제와 군 조직의 동요와 변질이 극심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럼에도 왕조가 유지되었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이에 제도가 아닌 그 체제 속에서 활동했고 기능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무관층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고찰해서 어떤 식으로 가동되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로써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일면이나마 구체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키워드
  • 무관층, 문관층, 관료제, 군제, 무신정권기, 원간섭기, 반원정치, 구성, 기능, 󰡔고려사󰡕, 열전, 전쟁, 내우외환, 서열적 상하관계, 성층성, 직무 분석, 직능 분석, 문벌, 군사
  • 영문키워드
  • military officers, civil officers, social stratum, bureaucracy, military organization, composition, function, Goryeosa, the biographies, war, internal and external troubles, the relationship between subordinates and superiors, social stratification, job analysis, aristocrat, soldier, period of military rule, policy directed against Yüan, son-in-law nation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고려 후기 무관층의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 및 역할을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무관들을 분석해서 그 구체적인 운영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체제로 연구 논문이 작성되고 있다.

    1. 머리말
    2. 무신정권의 수립과 무관층의 구성 및 그 기능의 변화
    3. 원의 정치적 간섭에 따른 무관층의 변질과 기능의 혼란상
    4. 말기의 사회 갈등으로 인한 구성과 그 기능의 양극화 현상
    5. 맺음말

    1. 머리말

    고려 후기 무관층의 구성과 그 기능에 대해 고찰했던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현재까지도 매우 저조한 편이다. 그 동안 문반에 비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으며 여러 다른 계층에 견주어보았을 때에도 상당히 떨어지는 쪽에 속한다. 이는 절대로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적당한 균형을 위해서라도 무관층에 대한 검토는 필요하다.
    그런데 그 방향과 방법이 문제다. 지금까지의 경향은 대체로 초창기 성과로 지금까지도 중요시되고 있는 변태섭의 일련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후에도 어느 특정 시기를 다루었거나 특수 부류의 인물들을 구분해서 고찰하거나 중요한 업적을 이룩했던 개인이나 소수 집단을 특화시켜 검토하기도 했다. 그 수를 모두 헤아리면 방대하다고 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태섭의 연구 성과에서 보듯이 전 시기에 걸쳐 무반의 존재 양태를 해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즉 부분적으로 무반에 대한 심화된 업적들이 계속해서 산출되고 있으나 여전히 개별화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바탕으로 해서 무관층의 전반적인 모습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변태섭의 무반 연구가 모두 1960년대에 이루어졌음을 감안했을 때 지금 수준에서의 정리 작업이 반드시 요구되는 바이다.
    더불어 무관과 분리될 수 없는 관료제, 군제와의 상관성 문제다. 먼저 그 동안 고려의 사회 성격을 귀족제로 보는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대해 서서히 관료제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는 여러 가지 연구 성과 및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관직이나 기구, 관원 등에 관한 업적들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들은 대체로 문반에 집중되었다. 무반에 대한 검토가 없지 않았으나 문반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이는 순전히 연구자의 게으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무반에 관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어쨌든 관료제의 온전한 파악을 위해서는 무반에 대한 고찰이 필수이다. 어렵지만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관료제에서 무반에 대해 검토했을 때 역시 무관의 실태부터 파악해야 한다. 핵심을 외면한 상태에서 연구 진전은 어렵다. 일찍이 변태섭은 고려를 귀족제 사회로 보아야 하는데, 무신은 귀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결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기 사회의 성격과 후기의 그것이 크게 달라졌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주지하듯이 귀족의 개념 정리가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이에 대해 다각도로 보강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더불어 반대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에서도 무관층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 어떤 견해를 옹호하던, 반대하던 일단 무관층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가 필요하다.
    군제의 경우에서도 다양한 각도에서 실증적 연구가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한국군사사󰡕(2012, 경인문화사)라는 큰 제목으로 우리 학계의 최초로 전근대의 군사제도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그 가운데 󰡔한국군사사 3 - 고려 Ⅰ󰡕과 󰡔한국군사사 4 - 고려 Ⅱ󰡕가 고려시대 군제사에 해당된다. 즉 1983년에 간행된 󰡔高麗軍制史󰡕의 뒤를 이어 전시기에 걸친 군제를 기술하였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연구 성과가 쌓여 많은 부분에서 보강 작업이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관층에 대한 언급은 매우 적었다. 지휘체계를 다루면서 부분적으로 검토되기는 했지만 그 비중에 비해서 다소 소략하였다.
    무관층의 기능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군대 운용과 관련된 것이다. 이를 통해 그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실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기의 무반층은 귀족에 속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그 기저에는 군대의 최고 지휘관은 문반이라는 점이 내재해 있었다.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김부식(金富軾), 윤관(尹瓘) 등이 그 전형적인 예로써 거론되었다. 출정군의 최고위층이 문반 출신이라고 해서 무관의 역할이 제한적이었거나 단지 실무에만 종사했던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문반 출신의 최고 지휘관 휘하에서 무관들의 기능이 무엇이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례들도 중요하다. 무신정권하에서 일어났던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는데 동원된 총지휘관은 문반 출신 윤인첨(尹鱗瞻)이었다. 이어서 강동성 전투(江東城戰鬪)에서 고려측의 최고 지휘관으로 활동했던 사람은 조충(趙沖)이었고, 그 역시 문반 출신이다. 그 이외에도 여러 사례가 더 있다. 따라서 최고 지휘관의 하나만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무관의 기능을 폭넓게 해명하는 가운데 특징 따위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무관층의 연구와 관련된 성과들을 검토했을 때 개별, 또는 특정 집단에 대한 분석도 중요하나, 이 시점에서는 그 전반의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에 대한 고찰하다. 하지만 대상 인원의 방대함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대표성을 지닐만한 표본에 대한 조사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에 그 기준을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무관층으로 삼았다. 나름대로 충분한 대표성을 지녔다고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 후기라는 시기에는 우선 무관층의 활동이 자료상, 기타 여러 정황상 전기에 비해 매우 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복잡하였다. 아마도 전기에도 무관층의 활동이 대단하였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남은 자료의 존재가 그것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후기로 국한하게 되었다. 더불어 복잡성이라는 문제도 심각하게 고려하였다. 이는 후기의 특징적 현상으로, 무신정권의 수립,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에 따른 군대의 독자적 운영의 곤란, 반원 정치의 시도 이후에 잇단 외환으로 인해 상시적 동원이라는 미증유의 장기적인 국가 비상사태의 초래 등이 그러한 결과를 낳았다.
    때로는 임금의 위상을 능가할 정도의 권력이나 권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며 종종 측근 신하로 활약하면서 각종 수탈 등에 동원돼 민폐의 원흉이 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극력한 외침을 막아내서 모든 백성의 추앙을 받기도 하며 도리에 앞잡이로 전락하여 국가 운영과 민생에 암적인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대단히 복잡하였음이 특징이었다. 따라서 한꺼번에 묶어서 고찰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이에 격동기, 또는 급변기라 할 수 있는 고려 후기를 기존 연구 성과에 의거하여 무신정권기, 원간섭기, 반원 정치 이후 왕조의 멸망에 이르는 말기로 구분해서 각 시기의 무관층의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극히 복잡한 무관층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시대적 특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2. 무신정권의 수립과 무관층의 구성 및 그 기능의 변화

    󰡔고려사󰡕 열전에 등재되어 무관으로 분류된 인물 가운데 무신정권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60명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삼별초의 난에 주역이었던 배중손을 포함시킨 숫자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중에서 19명이, 즉 전체 선정 인물의 1/3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고려사󰡕 열전의 반역전에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원간섭기나 말기에 속했던 인물 등의 경우에는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단히 이채롭다. 앞으로 만약 󰡔고려사󰡕 열전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경우에는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무관층의 거의 1/3에 달하는 인물들이 반역전에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역으로 무신정권의 수립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일깨어준다. 그것은 조선의 역사가뿐만 아니라 당 시대에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는 다시 무관층 자체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면서 종전과 다른 길을 걷게 했을 것이다.
    먼저 60명의 출신과 그 사회적 배경을 분석해 보면, 군인이 7명, 관리의 후예로 이른바 음서 출신이 20명이다. 나머지 33명은 미상인데, 그 가운데 13명은 미천하다고 했다. 그 중에는 섬주민[島民]도 있고 옥공(玉工)의 자식도 있다. 아무튼 절반 이상이 출신 경로와 사회적 배경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고려 전기의 무관층과는 대비된다. 하지만 전기의 경우 󰡔고려사󰡕 열전에 수록된 인원의 수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비교로서의 의미가 큰 편은 아니다. 아무튼 대상 인물의 절반 이상이 미상이라는 것은 그만큼 구성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자료 부족에서 기인한 측면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다양함의 징표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후에 다시 기능 분석을 통해 뒷받침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진 군인 7명의 경우인데, 이들은 일반 병사, 그 중에는 숙위군이 절반이 넘는데, 무예 능력이 뛰어나 무관으로 발탁되었다. 이것은 고려 무반제의 특징이었다. 조선과 달리 무과라는 등용 시험이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 가운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거나 특별한 군공을 세운 자들을 무반으로 발탁하였다. 이들은 그런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군인이 되었던 경로이다.
    대체로 고려전기에서는 선군급전(選軍給田)이라고 해서 결원이 생겼을 경우 적당한 자를 선발하여 충원하고 군인전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이들 7명은 선군급전의 과정을 거쳐 충원된 경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무신정권의 수립기에는 선군급전을 행할만한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 즉 선군급전을 실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러한 상황은 군인에서 무관으로 올라가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설사 올라갔다고 해도 적절한 대우를 받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러한 사정이 이들이 무관으로 출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신 봉기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던 배경이 아닌가 한다.
    이어서 음서 출신 20명의 경우인데, 그 중에는 일반적인 예에 포함되지 않는 자도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무신집정자의 후손으로 그 직위를 세습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모두 4명으로 최이, 최항, 최의, 임유무가 그들이다. 이들은 세습이므로 음서와는 달랐다. 다만 가문의 배경으로 입관했다 점에서 한데 묶었을 뿐이다. 나머지 13명의 경우인데, 거기에서도 미묘한 변화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무신정권의 수립 초기에는 무반 가문에서 음서를 통해 입관하였다. 그런데 점차로 무신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무반이 아닌 문반 중에서도 음서로 무관이 되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보기 힘든 현상이었다. 즉 무반직이 출세하는데 오히려 문반직보다 유리하다고 인식되었는지 그 쪽을 택하는 사례가 늘었다. 이 시기에도 무과가 설치되지 않은 탓인지 점차로 문반 가문에서도 무관직을 택했다. 무신정권기의 대표적 전쟁 영웅이었던 김취려(金就礪)가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의 부친은 예부시랑을 지낸 부(富)였다. 이러한 현상은 무반직의 기능 변화와 관계가 있다.
    무신정권기에도 종전의 무관층에 비해 그 구성이 매우 복잡해졌다. 그것은 곧 기능의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다양한 계통의 사람들이 무관층을 형성하면서 조직 내에서 이전과 다른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기능에 있어서 특기할만한 점은 널리 알려졌듯이 무신정권기에는 무관 출신의 집정자의 권한과 권위가 국왕을 능가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기존 연구에서 상세하게 밝혀졌다. 다만 그 휘하의 인물들과 일반 무관 사이의 관계다. 집정자만이 아니라 그 아래에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무관들이 많았다.
    우선 무관 출신으로 최고의 정무 기관, 예를 들면 삼성(三省)과 중추원(中樞院)의 최고위직, 재상직에 올랐던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전과 마찬가지라 국정의 주요 사항을 맡아 처리하였다. 종전에는 그 자리에 무관들이 오르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신정권의 수립으로 가능했다. 그 권한과 지위에 있어서도 비록 무신집정자에 미치지 못했으나 결코 적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앞선 시대와 조금 달랐다. 그것은 무신집정자들의 측근 세력에 의해 견제를 당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자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무관 중에서 대성직(臺省職)에 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이전에는 문반에 의해 독점되었으나 상황이 변하여 무관들도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기능이 조금 달라졌다. 기본적으로 국왕과 관리 등의 견제가 주된 역할이었으나 그 대상과 내용에 변화가 생겼다. 아무래도 집정자가 중요시하는 문제를 맡아서 처리하는 일에 주력했다. 하지만 본연의 임무가 도외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군대를 통솔하는 것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전에는 문반 출신의 최고 지휘자 휘하에서 실무를 담당하였으나 무신정권 수립 이후에는 바뀌었다. 무관들도 최고직에 취임했다. 그러므로 조직 구성의 양상이 변모하면서 지휘 체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군사들과 직선적으로 연결되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운용 단위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새로운 현상, 즉 인적 결합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종래에는 혈연과 지연, 또는 토지 지급 및 신분제와 연계된 조직 체계가 중심이었는데, 그 이외에 새로운 형태가 출현하게 되었다.
    결국 무신정권의 수립을 계기로 무관층의 구성과 기능에 변화가 생겼는데, 그것은 역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무관층의 구성과 기능 변화가 무신정권을 장기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3. 원의 정치적 간섭에 따른 무관층의 변질과 기능의 혼란상

    원간섭기에 무관으로 분류한 사람은 모두 53명이다. 앞 시기인 무신정권기의 60명에 비해 숫자상으로 큰 차이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격은 크게 달랐다. 53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28명이 󰡔고려사󰡕 열전의 폐행전(嬖幸傳)과 간신전(姦臣傳)에 등재되었다. 무신정권기에 1/3 가량이 반역전에 실려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문제는 폐행전과 간신전에 수록된 자들이 순수하게 무관층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일부는 무관으로 활동했다고 인정할만한 요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상당수는 무관을 거쳤으면서도 그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많다. 즉 무관으로서의 활동에 의심이 가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것은 곧 무관의 성격과 기능이 크게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앞서 보았던 군인 출신인가 관리의 자제로 음서 출신인지 구분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을 정도다. 폐행전과 간신전에 들어간 인물들은 출신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저 국왕의 은총 등으로 무슨 무관직에 임명되었다는 기사가 상당수에 달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제도와 과정을 밟아서 무관이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비록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 저술된 것이기는 하지만, 정도전(鄭道傳)은 󰡔경제문감(經濟文鑑)󰡕 위병(衛兵)조에서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섬긴 이래로, 매양 조정안에서 환시(宦寺)와 부녀(婦女)와 사신으로 오는 자들의 청탁으로 인하여 관작(官爵)이 넘쳤는데, 청탁된 사람들이 모두 부위(府衛)의 관직에 제수되면 세력을 믿고 교만하여 제멋대로 행하면서 숙위(宿衛)를 하려고 들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부위의 법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무릇 숙위의 직무를 받은 자가 나라의 녹봉[天祿]만을 도식(徒食)하면서 할 일을 하지 않으니, 마침내 나라를 잃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곧 폐행전에 수록되었던 무관들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정도전의 주장대로 자격이 능력이 없는 인물들이 대거 무관직에 진출하면서 군사 조직의 운영에 커다란 혼란이 발생하면서 전체가 심각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충렬왕을 필두로 한 고려 국왕들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그 배후에는 원나라의 교묘한 정치적 간섭이 작용하였다. 원의 입장에서는 고려의 여러 기구 중에서 일차로 군대를 운용하는 것에 대해 최고로 신경을 썼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감시와 견제를 가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협조할 수 있는 인물들을 배치하는데 힘썼다. 그 결과 상당수의 친원(親元) 세력, 즉 부원배(附元輩)들이 무관직에 제수되었으며 이들도 역시 폐행전, 간신전에 등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로 해서 무관직의 기능이 크게 변질되면서 운영상에 여러 가지 혼란이 초래되었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일반 병사 중에서 발탁되거나 관리의 자손으로 음서에 의해 무관에 입관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무신정권기에 비해 병사 중에서 발탁되는 경우는 드물어지고 음서를 통해 들어오는 사례는 많아졌다. 특히 음서에 있어서 무관 자제뿐만 아니라 최고 문벌의 후손이 다수 들어왔다. 무관의 위상이 전기와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폐해가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배정지(裴廷芝)였다. 겨우 10살의 나이에 금위(禁衛)에 소속되어 도지(都知)가 되었다. 심지어 그의 묘지명(墓誌銘)에는 7살에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문반에 있어서도 나이 어린 자제들이 음서를 통해 일찍 입관하는 것이 풍조가 되었는데, 그것이 무관에게도 적용되었던 대표적 사례였다. 드디어 젖비린내 나는 어린 아이들이 무관직을 차지하여 각종 폐단을 일으켰다는 고려말 개혁파사대부들 주장의 단초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통치 체제 운영에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는데, 그 중에서 정치, 군사 부문은 그 정도가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무관층에 대한 압력은 대단하였다. 자연히 구성에 있어서는 원래부터 있었던 과정을 거쳐 들어왔던 사람들과 기타 여러 갈래의 통로를 거쳐 입관했던 사람들이 한데 섞이면서 혼잡스러운 양상을 보였다. 특히 그 중에는 자격과 능력이 없는 자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무관층이 점차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구성의 혼잡스러움은 조직에서의 기능면에도 즉각 영향을 주었다. 자격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무관에 제수되면서 제 기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하였다. 물론 이는 무관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문관도 마찬가지였으나 그에 따른 폐해는 무관측이 컸다. 군사 조직의 마비와 허소화를 곧 바로 일으켰기 때문이다.
    일례로 무신정권기에는 집정자들의 세습이 있었다. 한편 그들의 권한과 권위는 국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자연히 그에 따른 문제가 컸다. 원간섭기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은 원의 군제 중에서 수용된 만호(萬戶), 천호(千戶) 같은 무관직에서 일어났다. 특히 원나라 황제는 고려인 중에서 만호, 천호 등을 임명하고, 나아가 후손들에게 세습을 허용하였다. 그런데 황제로부터 만호의 세습을 허락 받았던 자들은 고려왕의 명을 종종 무시하기도 했다. 마치 군대를 사병(私兵)처럼 거느리는 자들도 있었다. 물론 그 기원은 무신정권기로 소급되는데, 원간섭기에 들어와 해소되지 않고 변형되면서 운영상의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
    결국 구성상의 변질이 기능에서의 혼란을 가져오는 결정적 요인이 되면서 정치, 군사면의 여러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다.

    4. 말기의 사회 갈등으로 인한 구성과 그 기능의 양극화 현상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분석 대상 인원은 모두 53명이다. 무신정권기 63명, 원간섭기 53명에 비교했을 때 숫자상의 차이가 없거나 크지 않았다. 따라서 숫자에 따른 편차는 그렇게 심하지 않는 편이었다. 다만 실제 구성상의 다름이 얼마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먼저 󰡔고려사󰡕 열전의 폐행전과 간신전에 올라있는 사람은 9명이었다. 원간섭기에 절반 이상이 수록되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반역전에 단지 1명이 등재되었는데, 무신정권기에 1/3 가량이 반역전에 실려 있는 것과도 크게 달랐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첨가해야 할 사실은 간신전에 수록된 사람들의 성격에 관한 문제다. 말기에 해당하는 인물 가운데 조민수(曺敏修)나 변안렬(邊安烈) 등이 객관적으로 그들의 행적에서 간신으로서의 전형적 모습이 발견되느냐의 여부다. 오히려 이성계의 정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말기의 무관층 구성이 전 단계와 성격 면에서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즉 무관의 원래 모습에 좀더 가까운 인물들이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앞 시기 보다 많아졌다.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일반 병사 중에서 무관으로 선발되거나 음서를 통해 입관하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그 과정과 통로가 달랐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원간섭기에 설치되어 국왕의 주위에서 근시(近侍), 또는 숙위(宿衛) 등의 임무를 맡았던 우달치(于達赤) 출신자들이 무관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최영(崔瑩)을 필두로 박위(朴葳), 임견미(林堅味) 같은 유명한 무장들이 모두 거기에서 나왔다. 우달치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조직이 여러 있었는데, 통상 애마(愛馬)로 불리기도 했다. 말기의 무관들 가운데 아마도 많은 수가 그 출신일 것으로 생각된다. 몽골식 제도를 수용하여 약화된 숙위군 조직을 보강하고자 했다. 아무튼 이들은 종래의 일반 병사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이 시기에도 문벌 가문에 속하는 자제들이 상당수 무관으로 입신하였다. 그러나 최영의 경우에서 보듯이 곧 바로 무관직에 올랐던 것이 아니라 우달치를 거쳤다. 그 이외의 여러 인물들도 비슷한 경로를 거쳤다. 따라서 일반 병사에서 승진하거나 음서를 통하는 것 이외에 애마를 거쳐 올라가는 경로가 있었다. 이는 원간섭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나 말기에 이르러 더욱 확대되었다. 이렇게 입사로가 늘어나게 됨으로써 무관층의 구성도 다양하고 다채롭게 되었다.
    한편 그 구성을 좀 더 다채롭고 다양하게 형성되도록 했던 것 가운데에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무관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포함되었다. 원나라 사람이었던 나세(羅世), 여진족이었던 이지란(李之蘭), 근본이 심양(瀋陽) 사람인 변안렬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수복 지역인 동북면 출신도 있었는데, 조돈(趙暾)이 그에 해당한다. 이성계(李成桂) 역시 그에 해당한다.
    아울러 문무반직을 두루 거치면서 양쪽 모두에 깊숙하게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도 여러 명이 있다. 이는 말기에 들어와 관료제 및 신분제의 운영이 크게 문란해졌다는 점과 내우외환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군대가 거의 상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겹쳐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무관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여 무관으로 편입시켰던 예가 있다. 김득배(金得培)가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당시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서 무관에도 포함시켰다. 그렇다고 문관이 아니라고는 보기도 어렵다. 문관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다만 당시의 사정과 그의 행적, 후대의 평가를 종합했던 결과다.
    그러므로 말기의 무관층 구성은 매우 복잡했으며 그 이전과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순수한 원래 모습 그대로의 무관도 있었으며 문관에 경도된 인물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문관이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 정도다. 군사보다도 정치에 더욱 헌신했던 인물이 있는가 하면 군공과는 거리가 먼 부정부패 및 권력 남용의 상징과 같았던 존재도 있었다. 따라서 균질성이 완전히 사라진 채 이질화된 모습을 보이며 양극단으로 갈라져서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구성뿐만 아니라 조직의 기능에서도 복잡함과 다양함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여기에 말기적 양상인 군 조직의 허소화와 사병화가 겹치면서 무관층 내부의 균열도 심각했다. 결국 무관층 내부의 대립을 해소하지 못해 고려 왕조가 붕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5. 맺음말

    고려 후기의 무관층의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에 대해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특히 후기를 다시 무신정권기, 원간섭기, 반원 정치 이후의 말기로 구분해서 각각의 시대적 특성을 최대한 반영하면서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였다.
    무신정권기에서는 60명의 대상 인원 가운데 1/3 정도가 󰡔고려사󰡕 열전 반역전에 등재되었다. 이에 대해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나 일단 시대적 특성과 관련이 깊다. 출신과 배경을 분석해 보면, 군인 7명, 음서 20명, 나머지 33명은 미상인데, 그 가운데 13명은 미천하였다. 대상의 절반 이상이 미상이며 그 가운데 다시 절반 정도가 미천했다는 것은 구성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다양함은 조직 내에서의 기능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관료직 뿐만 아니라 군대 안에서도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이는 다시 그 구성의 변화를 추동하였다. 나아가 구성과 기능 변화가 무신정권을 장기간 유지하도록 만들었던 동인이 되었다.
    한편 원간섭기에는 53명으로 다른 시기의 인원수에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절반이 넘는 28명이 󰡔고려사󰡕 열전의 폐행전과 간신전에 등재되었다. 그들의 행적을 조사하면 상당수가 무관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에 의심이 많이 간다. 출신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전래의 방법으로 등용된 인물들도 많았지만 전혀 다른 이질적인 통로를 통해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원의 정치적 간섭이 정치, 군사 분야에 강하게 미쳤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에 대응하는 고려의 편법이 작용했던 것도 없지 않다. 이로 인해 관제, 신분제, 군제 운영 등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말기에는 53명이 대상이 되었다. 󰡔고려사󰡕 열전의 폐행전, 간신전, 반역전에 편성된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설사 설정되었더라도 앞 시기와 비교했을 때 성격이 달랐다. 상대적으로 무관 본래의 모습을 지닌 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 대신 다양한 계통의 사람들이 여러 통로를 통해 입관하였다. 전통적인 통로, 즉 일반 변사 가운데 발탁되거나 음서로 들어오는 경우도 물론 있었다. 그 이외 몽골 제도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애마 등의 숙위 조직 구성원 중에서도 들어왔다. 외지 출신자들도 있었다. 더불어 그 동안 무관직의 변화로 인해 최고 문벌 가문의 자제도 들어왔다. 이러한 이질적 요소가 말기의 혼란으로 인하여 양극화의 경향을 추동하였다. 이는 조직 내에서의 기능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무관 본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이는가 하면 자신에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던 자들도 있었다.
    마침내 양극화 현상이 사회 혼란으로 한층 확대되면서 무관층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고조시켰다. 그 갈등과 대립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면서 고려 왕조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고려 후기의 무관층은 구성과 기능 양쪽에서 복잡다단함이 그 특징이었다.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모했는데, 그것은 역으로 통치 체제의 변동을 추동하기도 했다. 때때로 상호 조화를 찾으며 공존하기도 했으나 말기에 이르러 양극화 현상을 보이며 내부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것은 왕조 교체의 한 요인이 되었고, 후속 왕조의 해결 과제가 되기도 했다.
  • 영문
  •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composition of the military officer in the end of Koryŏ period and the function and role within the organization and to seek the detailed operation status. Through this, it is to analyze the current status of the military offices in the end of Koryŏ period in details. Also, it verifies the principle of Yangban officer system and the operation status of the military system.

    First, the period for the study subjects is from the establishment of the military regime to the demise of the Koryŏ dynasty. Within this period, there were endless provocations locally and from overseas. Naturally, the military force had to come out often and the activities of the military officer became viable. Furthermore, foreign countries started ti intervene politically and in order to shake them off, movements of restoring the right for self-autonomy were enacted. Socially, it was a era of severe chaos.
    Accordingly, a lot of extraneous people were introduced into the military officers. Their role became very various as well. Along with the eccentric role of leading the military source, they had to work on various tasks. They also took part in roles controled by the previous civil officers. They even took roles of a translator-interpreter also.

    Therefore, the makeup of one's ancestry that wanted to be a military officer became various. Previously, among the soldiers, one who had outstanding martial arts or ones who had obvious military achievements became a military officer. Also, there were lot of people who became a military officer through protected appointment which is based on one's background of one's family. However, due to the various path coming from the chaos, various people were able to become a military officer. From a first-ranked children of a royal family to officers, commoner, lowly class, slave, monk and even foreigners were able to become a military officer.

    As extraneous people were quite included, the dynamics of the military officer order became quite loose. However, as they organically harmonized with each other taking their roles, they were able to overcome several nationals crises. However, confrontation and collision between the people with different backgrounds were inevitable. That became the main catalyst to the demise of the Koryŏ dynas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의 목적은 고려 후기 무관층의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 및 역할을 분석해서 그 구체적인 운영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후기에 들어와서 지극히 복잡해진 무반의 실상을 체계적으로 해명하는 것과 더불어 관료제와 군제의 운영 원리를 체계적으로 밝혀보려는 것이다.
    검토 시기는 무신 정권의 수립을 기점으로 왕조가 붕괴될 때까지를 잡았다. 이 시기에는 역사의 분수령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사회 변동이 일어났다. 그 요인은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 중의 하나는 국내외에 걸친 체제에 대한 거센 도전과 이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었다. 그 여파로 군사 활동이 매우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곧 바로 정치 운영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상당 기간 외세로부터 정치적인 간섭을 받기도 했다. 비록 자주권 회복 운동의 성공으로 벗어나는 듯했지만 계속된 국제 정세의 동요로 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다시 국내 정치와 군대 운영에 크나 큰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정치와 군사 양쪽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무관층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였다. 중요성 역시 비길 바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무관층에 대한 검토는 한 계층의 파악에만 그치지 않고 여러 관련 부문의 이해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분석 대상은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인물 가운데 무관으로 분류되는 사람들로 한정했다. 열전에 기재된 인사들은 전체 무관 중에서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시대적인 변화 추이와 경향성을 보여줄 수 있는 표본적인 상징성을 지녔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편찬 작업의 소산으로, 나름의 엄격한 검증 절차를 거쳤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칭적 존재였던 문관에 필적할만한 영향력을 지녔다는 점도 십분 고려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전체에 비해 소수라고 하더라도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데 큰 지장은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구체적으로 무신정권기, 원간섭기, 반원 정치로부터 왕조 교체에 이르는 시기로 구분했다. 무신정권기는 성격상 안팎에 걸쳐 무관층의 활동이 현저하게 지배적이었다. 저절로 그에 맞추어 검토가 진행되었다. 그로 인해 기초 조사 작업에서 파악된 총 분석 대상자 166명 가운데 60명으로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함이 특징이다. 출신 배경도 문벌에서 노비, 승려 등으로 폭이 넓으며 조직에서의 기능과 활동도 여러 층위를 지닌 것으로 파악되었다. 국왕의 권력을 능가하는 자로부터 반란의 선두에 섰던 경우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그 구성의 복잡함은 곧 조직 내의 기능 변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권한과 권위가 국왕을 능가하는 무신 집정자와 그 아래의 여러 무관들이 다양한 직책에서 활동하였다. 형태는 유사했으나 방식은 달랐다. 재상이라도 집정자의 측근에 의해 견제 당하기도 했다. 대성직(臺省職)에 오른 자들은 본연의 임무 외에 도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군사 분야도 비슷했다.
    원간섭기에는 다른 분야에 비해 무관층에 대한 외세의 압력이 거세었다. 그에 따른 현상은 결국 변질이나 왜곡으로 표현되기 마련이었다. 분석 대상 인원은 166명 중에 53명이다. 무신정권기의 60명에 비해 숫자상으로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성격은 크게 달랐다. 절반이 넘는 28명이 󰡔고려사󰡕 열전의 폐행전과 간신전에 등재되었다. 이들이 순수하게 무관층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일부는 무관으로 활동했다고 인정할만한 요소가 없지 않으나 의심이 가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것은 곧 무관의 성격과 기능이 크게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 위정자의 잘못만은 아니었고. 원의 정치적 간섭이 작용하였다. 자기들에 협조할 수 있는 인물들을 군대, 특히 무관직에 배치하였다. 부원배들이 다수 들어와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말기는 53명인데 열전의 폐행전과 간신전에 올라있는 사람은 비교적 소수라 이전 시기와 비교했을 때 성격이 많이 달랐다. 일반 병사 중에서 무관으로 선발되거나 음서를 통해 입관하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그 과정과 통로가 달랐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원간섭기에 설치되어 국왕의 주위에서 숙위 등의 임무를 맡았던 애마 출신자들이 무관에 들어왔다. 여기에 외지에서 온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아울러 문무반직을 두루 거치면서 양쪽 모두에 깊숙하게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체제 운영이 문란해졌다는 점과 내우외환이 이어지면서 군대가 상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겹쳐 작용했기 때문이다. 군사보다 정치에 헌신했던 자도 많았다. 무관층 내부의 균질성이 사라지면서 서로 대립하다가 결국 왕조 붕괴의 요인을 제공했다.
    후기 무관층은 구성과 기능이 양쪽에서 모두 복잡하였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모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고려 후기 무관층의 구성과 기능 분석을 시도하기 위해 먼저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인물 가운데 무관으로 분류되는 자들을 선정하는 작업을 일차적으로 실시했다. 이미 기초 작업을 통해 165명을 뽑았다. 그러나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검토해서 1명을 추가했다. 이에 모두 166명으로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가능한 최대의 수를 확보해서 분석 결과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그 기준과 실제의 분류가 얼마나 적절했는가에 대한 검증이다. 다만 그 분류 과정에 대한 정밀한 소개는 본 연구에서는 어려울 전망이다. 고려 후기라는 긴 기간에 활동했던 무관층 전체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한정된 지면으로는 곤란하다. 따라서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인물 중에서 무관층을 정밀하게 분류해내는 작업은 별도의 연구를 통해 다소 보강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166명의 무관을 시기별로 나누는 작업이다. 이 역시 기초 작업에서 무신정권기, 원간섭기, 반원 정치로부터 왕조 교체에 이르는 말기로 구분하면서 각각 61명, 51명, 53명으로 정했다. 다시 본 연구를 위해 정밀하게 검증 작업을 진행하면서 각각 60명, 53명, 53명으로 최종 확정했다. 숫자에 관해서는 큰 변동 사항은 없었다. 단지 무신정권기와 원간섭기 사이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양 시기에 겹쳐 있는 인물을 어느 쪽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달린 문제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이면서 실제로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것이 삼별초의 난이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는 무신정권이 붕괴된 뒤에 발생했던 사건이었다. 자연히 그 때 활약했던 인물들은 모두 원간섭기에 포함시켜야 했다. 하지만 사건의 성격상 무신정권과 분리시키기는 어려웠다. 난의 주모자, 특히 배중손(裵仲孫)의 경우 원간섭기에 포함시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았다. 따라서 무신정권기에 넣어서 분석하였다. 반대로 삼별초의 진압에 앞장 섰던 인물, 그 전형인 김방경(金方慶)은 무신정권기에 포함시키는 것은 극히 곤란하였다. 그의 중추적 활동을 고려했을 때 원간섭기로 넣는 것이 적당하다고 여겼다. 이로 인해 같은 사건에 연관된 사람들이면서도 각각 다른 시기로 분류되기도 했다. 자칫 혼동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그가 처했던 상황이나 관련된 사건의 성격을 세심하게 검토해서 포함시키기로 방침을 세워 처리했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연구의 성격상 부득이하였다.
    원간섭기와 말기의 경우에는 그 심각함이 더했다. 공민왕 5년(1356)에 단행되었던 반원 개혁 조치를 기준으로 해서 나누었는데, 양 시기에 걸쳐 활동했던 무관들이 상당수에 달했다. 자연히 이들을 어느 쪽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궁극적으로는 반원 개혁 조치에 찬동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했거나 가담했던 사람들은 일단 말기로 편입시켰다. 이에 반하여 그 조치로 인해 제거되거나 몰락했던 사람들은 일단 원간섭기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하지만 반원 개혁 조치는 삼별초의 난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사실상 어려웠으며 실질적으로 현재까지도 완벽하게 모든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정밀한 검토와 함께 수정, 보완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인물 가운데 무관층을 선별하고 시기별로 구분하는 작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지었던 상태에서 그 구성과 조직 내에서의 기능에 대해 분석하였다. 구성에 있어서는 출신 배경과 어떻게 무관에 들어왔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리고 조직 내에서의 기능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크게 군대와 관료 사회로 구분하였다. 좀 더 세분화할 수도 있었으나 지금까지 고려 후기의 무관층에 대한 검토가 매우 부족했던 관계로 본 연구가 부득이하게 기초 작업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너무 세부적으로 갈라놓았을 경우에는 나중에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것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일단 현 수준에 알맞게 적절한 선에서 지표를 마련하는 것이 연구 작업의 진행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조작 내에서의 기능은 크게 군대와 관료,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나누어 파악하였다.
    이상과 같은 방법과 작업을 통해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체제로 연구 논문이 작성되고 있다.

    1. 머리말
    2. 무신정권의 수립과 무관층의 구성 및 그 기능의 변화
    3. 원의 정치적 간섭에 따른 무관층의 변질과 기능의 혼란상
    4. 말기의 사회 갈등으로 인한 구성과 그 기능의 양극화 현상
    5. 맺음말

    연구결과의 활용 방안으로는 문치주의 일변도에서 탈피하여 문무의 균형 잡힌 시각의 제시하고자 한다. 교육 현장에서 여전히 문관의 역할을 중시하는 경향을 본 연구를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고자 한다.
  • 색인어
  • 무관층, 문관층, 관료제, 군제, 무신정권기, 원간섭기, 반원정치, 구성, 기능, 󰡔고려사󰡕, 열전, 전쟁, 내우외환, 서열적 상하관계, 성층성, 직무 분석, 직능 분석, 문벌,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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