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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간섭기 정국운영과 정치제도 - 국왕의 지위와 역할과 관련하여
The political situation and a system of government during the 14th Centry Yuan Intervention period - The position and role of the king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2S1A5A2A01017828
선정년도 2012 년
연구기간 2 년 (2012년 05월 01일 ~ 2014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이정훈
연구수행기관 연세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전근대 사회의 정국운영과 정치제도는 기본적으로 국왕이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라는 전제 하에서 구조화되고 운영된다. 그러므로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인 국왕의 지위와 역할에 변화가 생긴다면, 정국운영과 정치제도는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원간섭기는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의 약 80년간 원의 지배를 받던 시기였다. 무신정권의 붕괴로 왕정(王政)이 복고되었지만, 고려 국왕은 원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 결과 고려 국왕은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이자 원 황제의 신하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원 황제의 신하라는 지위로 인해, 고려 국왕은 국왕이 직접 원의 수도에 입궐하여 원 황제를 알현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굳히고 더불어 원의 공물 요구는 등 현안을 직접 해결하였다.
    이러한 국왕의 지위와 역할의 변화는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원 정국의 동향에 따라 고려 국왕의 즉위와 폐위가 결정되면서, 고려 국왕과 정치세력들은 원의 동향에 주목하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지위 유지를 위해 원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거나 때로는 원의 동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 국왕의 지위와 국정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원 황제를 알현하는 국왕의 조근(朝覲)으로, 국왕이 국정운영의 현장을 고려를 떠나게 되면서 국정 운영에 공백이 생겨났다. 그 결과 고려 국왕과 신료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정국운영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제도가 절실히 요청되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국정운영에 친림(親臨)을 전제로 하면서도 조근으로 인한 국정운영의 공백을 감안한 정국운영 및 정치제도의 운영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충렬왕과 충선왕대를 거쳐 완성된다.
    국왕의 친림과 조근으로 인한 국정운영의 공백을 결합시킨 정국운영 및 정치제도의 운영은 국왕의 친림을 전제로 한 고려말조선초 사대부들에게는 문란으로 인식되었다. 그렇지만 100년에 가까운 원간섭기 동안 고려왕조가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국왕의 친림과 조근으로 인한 국정운영의 공백을 결합시킨 정국운영 및 정치제도는 이 시기를 대변하는 국정운영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이해는 원간섭기 고려 사회를 보다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본 연구는 원간섭기 국정운영 최고 책임자인 국왕의 지위와 역할 변화에 따른 정국 운영 및 정치제도의 변화 양상을 밝혀, 원간섭기 정치사에 대한 외연을 확대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 기대효과
  • 본 연구가 진행될 경우 다음과 같은 기대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첫째,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의 지위와 역할에 변화에 따른 정국운영과 정치제도의 변화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본 연구는 원간섭기라는 이민족의 지배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국왕이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이자 원 황제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지위를 갖게 되면서 나타나는 정국운영과 정치제도 변화상을 검토할 것이다. 그러므로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의 지위와 역할을 변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정국 운영과 정치제도 변화 상에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 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원간섭기 정치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본 연구는 국왕의 지위와 역할에 초점을 두고 정국 동향과 정치제도 운영을 고찰하려고 한다. 국왕 조근 시에 국왕의 명령을 받아 재추로 대변되는 집단들이 국정 운영을 대임하는 경우, 국왕과 재추는 국정운영을 동시에 책임지게 된다. 그러므로 국왕과 재추는 대립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특히 국왕의 조근이 원과의 관계에서 국정 현안을 처리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이해는 왕과 재추의 대립, 국왕 측근세력과 비측근세력의 대립으로 이 시기의 정국 운영을 파악했던 기존 연구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가 완료될 경우, 원간섭기 정치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조선전기 정치제도사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전기 정치기구들은 개별 관청마다 몇 품이라는 관질(官秩)이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정치기구를 운영방식이 6조(曹)가 속아문(屬衙門)을 관할 통솔하였다. 한국 정치사에서 관청에 관질이 명시되고, 상위 관청이 하위 관청을 관할 통솔하였던 것은 원간섭기에 처음 출현하였다. 상위 관청이 하위 관청을 관할 통솔하는 구조는 충선왕이 자신은 원에 있으면서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 도입된 방식이었다. 따라서 원간섭기 정치제도에 대한 이해는 조선전기 정치제도사를 이해하는 밑거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대외 정세의 변화에 따른 국왕 및 정치세력의 대응 양상에 대한 이해를 높여 줄 것이다. 고려에 대한 원의 지배 강도는 원의 국내정세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원간섭기 고려의 국왕은 이전 시기와 달리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고 국왕 자신이 원 황제를 알현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또한 충선왕의 경우, 황위 계승전에 참여하고 원 정치운영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정국 및 정치제도는 운영되었다. 본 연구가 완료될 경우, 대외 정세 변화에 따른 국왕 및 정치세력의 대응 양상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원간섭기 국왕의 지위와 역할 변화에 따른 정국 운영 및 정치제도의 변화 양상을 살피기 위해 세 측면을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첫째, 국왕의 지위와 역할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고려는 유교를 국가의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규정하는 국왕의 지위와 역할을 무엇이며, 고려의 정치운영에 얼마나 반영되었는지에 대해 고찰해야 할 것이다.
    원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이면서 원 황제의 신하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물론 원간섭기 이전에도 고려가 거란과 여진에 대해 사대의 관계를 취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민족 국가에 대한 신하라는 지위를 가졌다. 그렇지만, 거란과 여진의 고려에 대한 지배 강도와 원의 고려에 대한 지배 강도가 달랐다. 그러므로 원의 고려에 대한 지배 강도가 어떠했으며, 시기에 따라 지배 강도가 달라졌는지, 지배 강도 및 원과 고려 국왕의 관계에 따라 국왕의 지위와 역할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둘째, 정국 운영에 대해 검토해야 할 것이다. 원간섭기 고려의 국왕은 원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고려를 비웠다. 그러므로 이 시기 정국 운영은 국왕이 고려에 있을 때와 고려를 비웠을 때로 구분된다. 전자는 국왕이 고려에 있기 때문에 국왕이 국정운영을 친림(親臨)하였지만, 후자는 국왕이 원에 있기 때문에 국정운영을 친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국정 운영은 국왕의 이름으로 모든 정책이 결정되고 명령이 하달되어야 한다. 국왕의 조근(朝覲)으로 국왕이 국정운영을 친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운영을 대신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했다. 따라서 국왕의 이름으로 명령이 하달되고 국왕 대신 국정운영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무엇인가를 검토할 것이다.
    셋째, 정치제도의 변화 양상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국왕의 조근은 짧게는 한 두달, 길게는 일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국왕의 이름으로 명령이 하달되고, 국왕 대신 국정운영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다고 하더라도, 국왕의 친림을 전제로 짜여진 정치제도로는 행정운영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기존과 다른 새로운 정치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원간섭기 정치제도는 충렬왕 원년 원에 의해 격하된 정치제도와 충선왕대에 개편된 정치제도가 있다. 충렬왕 원년 관제는 고려전기 정치제도가 격하된 것이지만, 실제 운영은 1부4사에서 보듯이 정치기구의 변화가 있었다. 충선왕대 정치제도는 원의 지배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게 충렬왕 원년 정치제도를 개편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정치기구의 기능이 변화되었다. 그러므로 충렬왕과 충선왕대의 정치제도 및 정치기구의 변화를 검토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원간섭기 국정운영 최고 책임자인 국왕의 지위와 역할 변화에 따른 국정운영 및 정체도의 변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원간섭기 국왕은 고려가 원의 지배를 받는다는 시대적 특성으로 인하여, 국왕의 지위가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이면서 동시에 원 황제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또한 원 황제의 부마로서, 원 황실의 외손자라는 지위까지 갖게 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지위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국정운영 최고 책임자의 지위였다. 그렇지만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얼마 되지 않았던 원간섭기 초기에는 국정운영 최고 책임자로서의 지위가 공고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충렬왕은 친조(親朝)를 적극 활용하여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고려의 현안을 직접 해결함으로써 국정운영 최고 책임자라는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폐위를 당했던 충선왕은 고려 국왕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과의 관계를 공고히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충선왕은 폐위 이후 원에 머물면서 충실히 숙위(宿衛)를 행하는 한편, 다시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에 원에서 원격으로 통치하는 재원(在元) 통치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국왕의 지위를 유지하고 동시에 고려에 대한 원의 지배 강도를 약화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충렬왕의 친조 및 충선왕의 재원통치는 국정운영 최고 책임자가 국정운영의 현장인 고려를 떠난다는 점에서 국정운영의 공백이라는 문제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원간섭기에는 국왕의 부재에 따른 국정운영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정국운영 및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제도가 필요하였다.
    국왕의 부재에 따른 국정운영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정국운영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은 도평의사사였다. 충렬왕이 친조할 때에 국왕을 대신해 국정 운영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충렬왕은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로 개칭하는 가운데, 국정 전반의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논의하는 기구로 변화시켰다. 또한 국왕의 요청에 의해서만 회의가 개최되던 것을 국왕의 요청이 없어도 재추가 판단하여 회의를 개최하도록 하는 등 재추들이 전폭적으로 협조하고 적극적으로 국정 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재원통치를 실시하였던 충선왕은 국정 운영 및 대원 외교에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충선왕이 직접 전지를 보내 처리하는 방식을 취하였지만, 그 외 사안에 대해서는 도평의사사가 처리하도록 하는 등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재원통치에 따른 국정 운영의 공백을 최대한 메울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국왕의 부재에 따른 국정운영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정치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정치제도 중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첨의부였다. 충선왕대에 들어와 첨의부에 는 행정실무자층이 증원되고 행정기능이 강화되었다. 이를 통해 첨의부는 중앙의 정치기구와 지방을 관할 통속하고, 장관인 첨의정승이 국왕을 대신하여 행정 운영을 총괄하였다. 그리하여 국왕이 재원(在元) 통치로 인해 국정을 친림(親臨)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완하도록 하였다.
  • 영문
  • This study is to consider the change of political situation and institutions in Goryeo Dynasty due to the change in kingship and his role under the interference of Yuan Dynasty.
    During the interference of Yuan, kings of Goryeo were controlled by Yuan. Due to the peculiar characteristics of this age, Goryeo kings came to have the double status as the supreme political leader of Goryeo and the vassal of Yuan emperor. Furthermore, as the sons-in-law of Yuan emperors, they also had the position of maternal grandsons in Yuan’s royal family. Of course, the most important in the diverse positions was that as the supreme political leader of Goryeo. But, in early days of Yuan interference when their kingship was first restored, their position as the supreme ruler was not stable. So, in case of King Chungnyeol, he used Chinjo(親朝, royal trip to Yuan) actively. At the seat that he met with the emperor, he asked the emperor directly to solve the current problems in Goryeo, making firm his position as the supreme ruler of Goryeo. King Chungseon, who had been once dethroned, realized that he had to consolidate the relation with Yuan to maintain the position as Goryeo king. So, while he was staying in Yuan, King Chungseon made Sugwi(宿衛, guarding the emperor) faithfully. And, after he restored his kingship, he kept on staying in Yuan and ruled Goryeo remotely. Through this, he tried to maintain his kingship in Goryeo and weaken the rule of Yuan Dynasty to Goryeo.
    King Chungnyeol’s Chinjo and King Chungseon’s in-Yuan governing brought out the problem of political vacancy in Goryeo that the supreme leader of government was out of position. Therefore, during the Yuan interference days, they needed a new political system that could cover the political vacancy due to the absence of king.
    One axis of government to cover the political vacancy of king was Dopyeonguisasa(都評議使司). King Chungnyeol needed his representative to lead the Goryeo government during his absence for Chinjo. So, he changed the title of Dopyeongmasa to that of Dopyeonguisasa and made it as the organization to discuss all the national problems. Furthermore, unlike the former system that only the king could summoned the meeting, it could be summoned by Jaechus(宰樞, high officials) without king’s order, making the Jaechus participate in the government actively and collaboratively. In case of King Chungseon who carried out the remote ruling in Yuan, while he sent the royal order directly to Dopyeonguisasa for some important national problems and Yuan-related diplomatic issues, he usually trusted Dopyeonguisasa to treat other issues. In this way, he could minimize the political vacancy due to his in-Yuan governing.
    In addition to it, another political system to cover the king’s absence was absolutely necessary. Cheomuibu(僉議府) was the main measure to take the role. During the rule of King Chungseon, Cheomuibu was expanded with administrative experts and its function was enhanced. Through this, Cheomuibu came to control the central and local political organizations and its director Cheomui Jeongseung began to control the overall national affairs instead of king. In this way, the king tried to complement the limit that he himself could not rule over the country due to the in-Yuan governing.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원간섭기 국정운영 최고 책임자인 국왕의 지위와 역할 변화에 따른 국정운영 및 정체도의 변화 양상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원간섭기는 약 80년간 고려가 원의 지배를 받던 시기였다. 무신정권의 붕괴로 왕정이 복고되었지만, 고려 국왕은 원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 결과 고려 국왕은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이자 원 황제의 신하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원 황제의 신하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고려 국왕은 원 황제를 직접 알현하거나(親朝) 원 정계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在元 統治). 특히 원 황제를 알현하는 과정에서 고려 국왕은 고려의 현안을 황제에게 보고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런데 고려 국왕이 원 황제를 만나 고려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국정운영 최고 책임자가 직접 국가의 현안을 해결함을 의미한다. 이는 사신 파견을 통해 외교 문제를 해결하던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난 것으로서, 국왕이 직접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국왕의 역할도 이전과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친조와 재원 통치는 국왕이 국정운영의 현장인 고려를 떠나는 것이었다. 이는 국정운영의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고려 국왕은 정국운영과 정치제도를 변화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국정 의결 기관이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참여하는 인원을 확대하여 정치세력의 이해 및 합의를 이끌어 내도록 하였다. 또한 국정 운영 및 대원 외교에서 중요한 사안은 국왕이 직접 전지(傳旨)를 보내 처리하는 방식을 취하였지만, 그 외 사안에 대해서는 도평의사사가 처리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최고 정무기관인 첨의부(僉議府)의 행정 기능을 강화시켜 정치기구를 관할 통솔하고, 장관인 첨의정승이 국왕을 대신하여 행정 운영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국왕이 친조 및 재원통치로 인해 국정을 친림(親臨)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완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연구의 연구결과 활용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의 지위와 역할에 변화에 따른 정국운영과 정치제도의 변화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본 연구는 원간섭기라는 이민족의 지배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국왕이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이자 원 황제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지위를 갖게 되면서 나타나는 정국운영과 정치제도 변화상을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의 지위와 역할을 변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정국 운영과 정치제도 변화상에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였다.
    둘째, 원간섭기 정치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본 연구는 국왕의 지위와 역할에 초점을 두고 정국 동향과 정치제도 운영을 고찰하였다. 국왕의 친조 시에 국왕의 명령을 받아 재추로 대변되는 집단들이 국정 운영을 대임하는 경우, 국왕과 재추는 국정운영을 동시에 책임지게 된다. 그러므로 국왕과 재추는 대립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특히 국왕의 친조가 원과의 관계에서 국정 현안을 처리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이해는 왕과 재추의 대립, 국왕 측근세력과 비측근세력의 대립으로 이 시기의 정국 운영을 파악했던 기존 연구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원간섭기 정치사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셋째, 조선전기 정치제도사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전기 정치기구들은 개별 관청마다 몇 품이라는 관질(官秩)이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정치기구를 운영방식이 6조(曹)가 속아문(屬衙門)을 관할 통솔하였다. 한국 정치사에서 관청에 관질이 명시되고, 상위 관청이 하위 관청을 관할 통솔하였던 것은 원간섭기에 처음 출현하였다. 상위 관청이 하위 관청을 관할 통솔하는 구조는 충선왕이 자신은 원에 있으면서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 도입된 방식이었다. 따라서 원간섭기 정치제도에 대한 이해는 조선전기 정치제도사를 이해하는 밑거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대외 정세의 변화에 따른 국왕 및 정치세력의 대응 양상에 대한 이해를 높여 줄 것이다. 고려에 대한 원의 지배 강도는 원의 국내정세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원간섭기 고려의 국왕은 이전 시기와 달리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고 국왕 자신이 원 황제를 알현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또한 충선왕의 경우, 황위 계승전에 참여하고 원 정치운영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정국 및 정치제도는 운영되었다. 본 연구는 대외 정세 변화에 따른 국왕 및 정치세력의 대응 양상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를 제공하였다.
  • 색인어
  • 국왕의 지위와 역할, 국왕의 이중적 지위, 친조, 재원통치, 국정운영의 공백, 도평의사사, 국정 전반 논의, 정국운영, 정치제도, 첨의부, 행정기능 강화, 행정 운영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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