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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地上의 墓碑에서 地下의 墓誌銘으로
From Tombstones on the Ground to Epitaph in the Grave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2S1A5A2A01016209
선정년도 2012 년
연구기간 2 년 (2012년 05월 01일 ~ 2014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홍승현
연구수행기관 서강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연구는 後漢末 墓碑의 성행 원인과 墓碑銘의 정형화 과정, 그리고 그것을 대신한 魏晉南北朝時期 墓誌銘의 등장 배경과 시대별 특징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해 중국 고대 喪葬禮俗의 내용을 복원하고, 묘비와 묘지를 이용한 사사로운 頌德 행위를 통해 명성을 얻고 유지했던 사대부들의 사회적·정치적 욕망을 규명하고자 한다. 특별히 묘비와 관련해서는 무덤 양식의 변화, 유학의 사회 전반에의 浸潤, 禮 실천과 選擧의 관계, 후한 말 사대부 사회의 건설과 같은 요소들이 어떻게 묘비에 투영되고, 묘비명에 반영되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서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후한 말 立碑 금지의 목적이 厚葬의 금지가 아닌, 사적인 인물평의 금지였음은 자연히 밝혀지리라고 생각한다. 한편 묘지와 관련해서는 그것이 曹操의 禁碑令 이후 등장하는 것에 주목하여, 묘지명이 王法에 대응하는 私法 혹은 사대부가의 家禮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고대 중국 상장예속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후장일 것이다. 중국인 고유의 영혼불멸관과 국가의 孝에 대한 稱揚이 후장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고대 중국에 있어 후장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한편, 후한 말이 되면 상장예속과 관련하여 특징적인 사항 하나가 눈에 띠는데, 다름 아닌 입비 행위의 성행이다. 지금까지 후한 들어 활발해진 묘비의 건립은 흔히 후장의 결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묘비의 유행을 후장의 경쟁 결과로만 이해한다면 다음의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어 진다. 우선 묘비가 건립된 기간의 쏠림 현상이다. 현재 남아있는 漢碑 중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묘비는 桓帝와 靈帝時期 45년간에 집중적으로 건립되어, 입비가 단순히 후장의 결과만은 아님을 알려준다. 다음은 입비가 후장의 실제적 표현인가 하는 문제다. 최근 당시 묘비 건립은 1인이 부담한 것이 아니라 다수에 의해 분담되었기 때문에 1인의 부담은 크지 않았다는 연구가 제출되었다. 요컨대 당시 입비 행위는 그리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시기 입비가 후손들에 의해서 행해지기 보다는 주로 묘주의 門生·故吏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입비 행위를 유교 국교화의 결과로, 혹은 효성의 지극한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우선 묘비의 출현부터 그 정형화 과정을 시대적 상황과 결부하여 복원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한다.
    입비 행위를 후장의 발현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금비령 또한 후장 금지의 결과로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私諡 행위와 입비 행위가 결합하여 있었던 것은, 입비 행위가 ‘사사로운 미덕을 기리는 행위’였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사사로이 미덕을 기리는 행위’는 곧 체제 밖에서 사회적 기준이 성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정부도 이러한 사사로운 사회적 기준의 성립을 용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建安 10년에 조조에 의해 금비령이 내려진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금비령은 왕법에 의한 사법의 간섭이라는 측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사사로이 행하던 稱頌 행위가 금지되면서,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자율적인 질서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연구의 두 번째 목적은 사법의 자기주장과 관련하여 무덤 속에 매장하는 묘지의 출현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런데, 묘지명의 빈출 횟수와 관련하여 南朝보다 北朝에서 묘지명이 많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기존의 연구는 위진 이래 남조에서 유지되었던 薄葬의 풍습에 주목하였고, 묘지명이 古禮에 부합하지 않아 남조 사대부들로부터 외면당했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劉宋時期 묘지명이 사회적으로 유행했던 현상은 이러한 분석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게 한다. 또한 북조의 묘지명 성행의 이유를 虛葬이나 潛埋, 그리고 孝文帝의 귀향금지 조치의 결과로 발생한 타향에 묻힌 자기 자신을 확인해 줄 진술 자료의 필요로부터 찾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칭송을 목적으로 韻文에 의해 쓰인 銘의 발전을 설명하는 데 다소 부족하다. 따라서 연구의 세 번째 목적은 서진 이후 시대별로 묘지명이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하는 변화의 과정을 복원하는 것이다.
  • 기대효과
  • 한말 묘비의 성행으로부터 위진남북조시기 묘지명이 출현하여 남북조에서 정형화되는 과정을 복원하고, 그를 통해 중국 고대 상장의례의 특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기대효과를 가질 것이다.
    고대사 연구자들에게 항상 문제가 되어 온 한정된 사료의 문제는 1차 자료의 꾸준한 발굴과 보고에 의해 극복할 수 있는 문제임이 최근 간독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다. 따라서 위진남북조 연구 역시 부족한 자료의 한계를 1차 자료를 이용하여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최근 발견된 동진 묘지의 경우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어, 동진 사대부 가계의 계보를 추적하거나 당시 혼인 풍습을 고찰하려는 작업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묘비와 묘지를 통해 고대 상장예속의 변화 및 시대상과 사회상을 복원하려는 본 연구는 이러한 석각 자료 활용이라는 연구 방법을 확산하여, 위진남북조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제와 예학연구가 활성화되었다 해도 현재 발표되는 논문은 특정 예제를 출현시켰던 이론이나 국가 예제에 대한 부분이 대종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예제와 예학 연구는 朝廷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벗어났다 해도 사대부 사회라는 엘리트 집단의 공간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특정 시대의 예가 한 사회의 산물이라면 예의 모습은 보다 다양하게 탐구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고중세 상장예속과 그 변천에 따라 등장한 기념물을 분석하는 본 연구는 중국 고중세 예제 연구의 대상을 다양화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위진남북조 묘지의 등장 및 발전과 더불어 후한 묘비의 특징을 고찰하는 본 연구는 막연하게만 이해되던 후한과 위진남북조시대의 연속성을 분명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소외되어 있던 후한사 연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까지 후한사 연구는 위진남북조시기 귀족제 사회의 단서를 발견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 다수를 이룬다. 그러나 후한 말 사회에서 위진남북조 귀족제 사회의 단서가 출현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이 후한 사회 내에서 배태된 것이라면 우리의 시선은 후한 초기와 중기로 돌려져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후한 초부터 등장한 묘비의 발전과정과 묘비를 대신해 등장하는 위진남북조 묘지를 연구하는 본 연구는 후한사 연구의 관심을 촉발시키고, 후한과 위진남북조시기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중국 고중세 상장예속 연구에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고중세 상장예속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정리된 것이 없다. 그러나 초기 고대 중국의 민간예제의 상당부분이 상복례와 장례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고중세 중국 예제 연구에 있어 민간의 상장예속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앞으로 기대되는 중국 고중세 상장예속 연구에 기초 자료로서 조그만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본 연구는 고중세 상장예속을 복원하는 한편, 묘비와 묘지라는 죽음과 관련한 기념비를 통해 당시 사대부들이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욕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규명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중국 고중세 사회사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후한시기 들어 사대부들에 의해 독특한 조문행위가 수립되고, 장례식이 하나의 정치적 공간이자 사회적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가족들만이 볼 수 있었던 묘기나 봉기대신, 살아있는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는 무덤 앞 묘비가 가족의 손을 떠나 고리나 문생에 의해 세워지게 된다. 따라서 묘비는 사대부 사회가 만들어지고 황제와의 대치적 명성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대부들의 사적 결합의 상징물이라는 성격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그렇기에 사대부들의 정치적·사회적 욕망의 표현물을 분석하는 본 연구는 중국 고중세사 사회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묘비를 대신하여 등장한 묘지는 묘지는 자신들의 가풍을 적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묘지가 고중세 중국의 가례 연구를 위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동진의 묘지와 초기 북위의 묘지에는 가족관계에 대한 서술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것은 묘지가 당시 결혼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확인하는 자료로써 사용될 수 있음도 말해준다. 따라서 묘지의 출현과 시기별 묘지의 내용을 분석하는 본 연구는 중국 고중세 가례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로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지금까지 연구의 대부분은 묘비가 후장의 결과물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묘비를 후장의 결과물로만 본다면 그것이 특정한 시기에 치우쳐 출현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며, 자식이 아니라 주로 門生이나 故吏에 의해 세워졌다는 점도 명확하게 해석해주지 주지 못한다. 따라서 묘비의 기원과 출현, 그 발전과정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서 금비령의 실질적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금비령이 공포되는 建安 10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그 작업을 통해서는 금비령이 冀州를 평정한 조조가 袁紹의 남은 세력을 와해시키며, 그들의 집단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내린 금령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금비령이 국가권력 밖에서 자율적으로 행해졌던 사대부들의 집단행동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 즉 사법에 대한 왕법의 간섭이라면, 사대부들은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 묘비를 대신하여 등장하는 묘지는 왕법에 대한 사법의 자기주장이란 측면을 갖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한편 살아있는 자들에게 보이지 못하는 묘지는 묘비와는 다른 형식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묘지가 묘비의 대체물로 나타났다는 역사적·시대적 필요는 초기 묘지의 내용을 변화시켰다. 묘지는 묘비에서 공덕을 찬미했던 銘부분을 급격히 상실해 갔다. 서진 묘지의 특징은 묘주를 설명하는 지 부분(혹은 서 부분)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서진시기 몇 몇의 묘지는 銘辭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서진 전체 묘지의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살아있는 자들을 향해 쓰인 부분이 생략되게 된 것이다. 동진시기에도 여전히 묘주의 事跡이 중심이 되어 서술되었으나, 피난 왕조라는 상황은 묘지에 舊墓의 장소를 기록하게 하였다. 또한 가문의 世系에 대한 서술이 강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묘비가 사대부 사회의 자율적 질서를 대변하였다면, 묘지가 가문의 자율성을 표현하는 가례의 측면을 띰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것이 영구한 원칙은 아니었다. 유송시기에 들어서면 묘지의 송덕 부분이 강화된다.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기록에 따르면 송 대명 연간에는 태자비의 경우도 묘지명을 사용하였고, 왕공 이하가 모두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묘지명으로 공덕을 기리는 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상의 내용들은 아마도 중원 회복이 포기되며, 강남 정권으로서의 성격을 고정화는 과정 속에서 등장했을 것이다. 더 이상 분묘가 假墓의 성격을 갖지 않게 되면서 동진시기와 같은 짧은 기록물에서 더 발전한 기록물로의 전화가 발생했을 것이다. 특히 억제되었던 개인에 대한 송덕 행위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입비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지상의 묘지가 아닌 묘비로써 공덕이 표현되게 된다. 그렇다면 국가는 왜 개인의 송덕 행위를 인정하면서도, 그 형태를 지하의 묘비명으로 국한시키는가? 이것은 裴松之의 주장이 잘 보여준다. 그는 사사로운 송덕 행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후세에까지 기억할만한 특별한 공적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당시는 후한 말과 같이 황제권력 밖에서 황제와 대치적 명성을 획득하려는 사대부들의 집단행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대부들의 송덕 행위가 중앙정부에 대한 위험한 도전행위로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허위사실을 가지고 명성을 획득하려는 것은 구품중정제에 의해 등급질서가 구축되어 있는 사회에 있어서는 인정할 수 없는 반칙행위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유송시기 송덕을 목적으로 하는 명사의 등장과 발전은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북위 묘지명의 특징은 死者에 대한 전기부분이 발달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孝文帝時期 강제적인 改姓 조치와 歸葬禁止 조치로부터 발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 인해 북위 太和 초기의 묘지문은 본인에 대한 表題·諱·字·行蹟·諡號·年齡, 家系에 관한 姓氏·籍里·世系, 墓所에 관한 卒年·卒地·葬年 등의 항목이 어느 시기의 묘지문 보다 구체적이고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치 동진의 묘지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과 가문에 대한 증거물이라도 되는 양 구체적인 기록의 특성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점차 완성도 높은 銘辭가 첨부되며 묘지명으로서 정형화 과정을 걷게 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연구는 다음의 두 논문의 완성되었다. 이하는 두 논문의 요약문이다.

    <後漢代 墓碑의 성행과 建安十年 禁碑令의 반포>
    이글은 후한시기 묘비가 성행했던 이유와 건안 10년에 반포된 금비령의 성격을 분석하고자 작성되었다. 일반적으로 묘비는 厚葬의 표현으로, 금비령은 후장의 금지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묘비가 여러 사람에 의해 세워지고, 특히 墓主의 자손이 아닌 제자나 하부 官屬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묘비를 후장의 표현으로 보는 것을 망설이게 한다. 특히 묘비의 구성요소들이 정형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이 선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立碑者들은 묘비를 세우는 행위를 통해 선거에 유리한 명성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曹操의 금비령 역시 후장의 금지만을 목적한 것은 아니다. 입비행위가 정치적 의도를 가진 행위였기에 금비령을 단순한 후장의 금지로 볼 수만은 없다. 조조는 입비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입비행위와 함께 행해지던 사사로운 人物評을 금지하고, 황제의 권력 밖에서 행해지던 사대부들의 정치행위를 금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금비령은 이후 西晉 왕조에게로 계승되었고, 서진 왕조 역시 정부 밖의 일체의 私的 권위를 금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묘비를 대신하여 죽은 자를 추도하며, 산자의 정성을 보일 수 있는 대체물을 필요로 하였다. 이제 중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지하에 묘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西晉~劉宋時期 墓誌의 구성과 역할>
    이 글의 목적은 墓碑를 세우는 것이 금지되면서 등장한 묘지의 시대적 역할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흔히 묘지는 死者에 대한 정보를 적은 표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각 시대별로 묘지의 구성 요소와 내용의 차이가 있어, 묘지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서진 묘지의 가장 큰 특징은 銘辭의 사라짐이다. 묘지가 매장되며 사자를 칭송하던 명사는 독자를 상실하며 사라져갔다. 대신 가족관계에 대한 서술이 증가하여 서진 묘지가 가족과 종족을 위한 기념비였음을 알 수 있었다. 동진 묘지는 가족관계 중에서도 수평적 가족관계에 대한 서술이 증가하였다. 일가를 중심으로 하는 門流獨立化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결과다.
    유송의 묘지에는 명사가 재등장한다. 명사의 재등장은 묘주에 대한 頌德이 다시 사회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송왕조가 기존 왕조의 爵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왕조에 대한 충성과 공적을 기준으로 작을 수여한 것과 관련 있다. 요컨대, 유송시기가 되면 가문이 가진 특권이 아닌 개인의 공적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가문의 우월함이 아닌 개인의 공적을 드러내는 기록물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것이 묘지에 다시 사자의 공덕을 찬양하는 명사를 등장시킨 요인이 되었다.
  • 영문
  • Two papers have been submitted to the results of the study. The summary of the two papers.

    "Prevalence of Tombstones in the Later Han Period and Promulgation of the Tombstone Prohibition Order in Jian An(建安) 10(205)"
    This study aims to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Tombstone Prohibition Order promulgated in Jian An 10 and the background reasons for the prevalence of tombstones in the Later Han Dynasty Period.
    Generally, tombstones represented burials with ceremonies including full honours and the order of tombstone prohibition was understood as prohibition of such kind of burials. However, as most of the tombstones had been put by many people, especially by followers or subordinates of the dead, not necessarily by direct descendents, it is somewhat difficult to regard all tombstones as an expression of such procedures. Especially, when the standardization process of components of tombstones is examined, it is evident that the people who put the tombstones had a very close connection with elections. In other words, the people who put the tombstones were keen on earning a reputation which would benefit them in the elections.
    Therefore, the Tombstone Prohibition Order of Cao Cao(曹操) can also be considered as aiming something more than just prohibition of erecting tombstones. Because erecting a tombstone itself had a connotation for political intention, the tombstone prohibition order cannot be regarded as simply stopping tombstones to be put. Cao Cao, by prohibiting the erection of tombstones, wanted not only to stop personal criticisms that happened at the tombstone erection ceremonies but also to prohibit any other political behavior of nobility that might have been happening in the unreachable area of power. Such tombstone prohibition order was passed down to Western Jin Dynasty that prohibited any private authority other than the central government. On the other hand, this series of situation needed an alternative in place of tombstones to commemorate and to show respect of the living towards the dead. That is how the underground epitaph has appeared in earnest in the society of China.

    "The Structure and Role of Tomb Inscriptions during Western Jin – Liu Song Period"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timely role of tomb inscriptions after the tombstones had been prohibited. Usually, tomb inscriptions are known to exist to give information about the deceased. However, as there are differences in components and contents of tomb inscriptions in different period of history, it is understood that the tomb inscriptions also reflect the needs of the times.
    One of the most distinct characteristics of tomb inscriptions during Western Jin was the disappearance of epitaph(銘辭). The epitaph that had been used to eulogize the deceased when the tomb inscriptions were buried became rare to find as there were fewer and fewer readers. Instead, the description of family relations became increased, which characterized the tomb inscriptions of Western Jin as a monument for the family and tribes. As for the tomb inscriptions of Eastern Jin, there were more of horizontal relations described among the family relations. That was resulted from the trend of independence of individual families in earnest.
    The epitaph reappears in the tomb inscription of Liu Song. It signifies that the eulogy for the owner of the grave was again becoming socially emphasized. This is related to the historical event that the Liu Song Dynasty did not acknowledge the titles of the old dynasty, but awarded titles on the basis of achievement and loyalty to the new dynasty. In short, the individual merits were regarded to be more important than the family privilege. Thus, the records revealing an individual's achievement, not the family superiority, became required. It was the main factor of the reappearance of epitaph that praised the virtues of the decease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後漢末 墓碑의 성행 원인과 墓碑銘의 정형화 과정, 그리고 그것을 대신한 魏晉南北朝時期 墓誌銘의 등장 배경과 시대별 특징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 고대 喪葬禮俗의 내용을 복원하고, 묘비와 묘지명을 이용한 사사로운 頌德 행위를 통해 명성을 얻고 유지했던 사대부들의 사회적·정치적 욕망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연구는 두 개의 논문을 통해 수행되었다.
    첫 번째 글은 후한시기 묘비가 성행했던 이유와 건안 10년에 반포된 금비령의 성격을 분석하고자 작성되었다. 일반적으로 묘비는 厚葬의 표현으로, 금비령은 후장의 금지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묘비가 여러 사람에 의해 세워지고, 특히 墓主의 자손이 아닌 제자나 하부 官屬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묘비를 후장의 표현으로 보는 것을 망설이게 한다. 특히 묘비의 구성요소들이 정형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이 선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立碑者들은 묘비를 세우는 행위를 통해 선거에 유리한 명성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曹操의 금비령 역시 후장의 금지만을 목적한 것은 아니다. 입비행위가 정치적 의도를 가진 행위였기에 금비령을 단순한 후장의 금지로 볼 수만은 없다. 조조는 입비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입비행위와 함께 행해지던 사사로운 人物評을 금지하고, 황제의 권력 밖에서 행해지던 사대부들의 정치행위를 금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금비령은 이후 西晉 왕조에게로 계승되었고, 서진 왕조 역시 정부 밖의 일체의 私的 권위를 금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묘비를 대신하여 죽은 자를 추도하며, 산자의 정성을 보일 수 있는 대체물을 필요로 하였다. 이제 중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지하에 묘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글의 목적은 묘비를 세우는 것이 금지되면서 등장한 묘지의 시대적 역할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흔히 묘지는 死者에 대한 정보를 적은 표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각 시대별로 묘지의 구성 요소와 내용의 차이가 있어, 묘지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서진 묘지의 가장 큰 특징은 銘辭의 사라짐이다. 묘지가 매장되며 사자를 칭송하던 명사는 독자를 상실하며 사라져갔다. 대신 가족관계에 대한 서술이 증가하여 서진 묘지가 가족과 종족을 위한 기념비였음을 알 수 있었다. 동진 묘지는 가족관계 중에서도 수평적 가족관계에 대한 서술이 증가하였다. 일가를 중심으로 하는 門流獨立化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결과다.
    유송의 묘지에는 명사가 재등장한다. 명사의 재등장은 묘주에 대한 頌德이 다시 사회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송왕조가 기존 왕조의 爵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왕조에 대한 충성과 공적을 기준으로 작을 수여한 것과 관련 있다. 요컨대, 유송시기가 되면 가문이 가진 특권이 아닌 개인의 공적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가문의 우월함이 아닌 개인의 공적을 드러내는 기록물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것이 묘지에 다시 사자의 공덕을 찬양하는 명사를 등장시킨 요인이 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는2013년 5월에 있었던 동양사학춘계발표회와 중국사학회 81회 학술발표회에서 발표된 후 2013년 9월에 발간된 <동양사연구>124호와 2014년 4월 발간된 <중국사연구>89호에 「後漢代 墓碑의 성행과 建安十年 禁碑令의 반포」라는 제목과 「西晉~劉宋時期 墓誌의 構成과 役割-묘지의 기원과 출현에 대한 분석을 겸하여-」라는 제목으로 게재하였다. 한편 「後漢代 墓碑의 성행과 建安十年 禁碑令의 반포」는 연구수행자의 저서인 <예의지국-고대 중국의 예제와 예학>(혜안, 2014)이라는 책에 일부로 포함되어 간행되었다.
    이상의 연구는 다음과 같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1) 중국 고중세 상장예속 이해를 위한 기초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고중세 상장예속에 관현 연구는 소략한 상태다. 고고학과 미술사 연구에 힘입어 무덤과 벽화 연구에 성과가 축적되었음에도, 역사학 분야에서의 이용도 저조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초기 고대 중국의 민간예제의 상당부분이 상복례와 장례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고중세 중국 예제 연구에 있어 민간의 상장예속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앞으로 기대되는 중국 고중세 상장예속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조그만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 중국 고중세 사회사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고중세 상장예속을 복원하는 한편, 묘비와 묘지라는 죽음과 관련한 기념비를 통해 당시 사대부들이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욕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규명하고자 한다. 후한시기 들어 사대부 사회에서 명성을 얻고자 하는 사대부들에 의해 독특한 조문행위가 수립되고, 장례식이 하나의 정치적 공간이자 사회적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가족들만이 볼 수 있었던 묘기나 봉기대신, 살아있는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는 무덤 앞 묘비가 가족의 손을 떠나 고리나 문생에 의해 세워지게 된다. 따라서 묘비는 사대부 사회가 만들어지고 황제와의 대치적 명성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대부들의 사적 결합의 상징물이라는 성격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묘비는 상장예속의 표현물만이 아닌 사대부들의 정치적·사회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된 정치행위의 표현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형화된 묘비명을 분석하는 본 연구는 중국 고중세 사회사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3) 중국 고중세 가례 연구를 위한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묘비를 대신하여 등장한 묘지는 시대별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한 묘지의 서문에서 말했던 것처럼 묘지는 자신들의 가풍을 적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묘지가 고중세 중국의 가례 연구를 위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동진의 묘지와 초기 북위의 묘지에는 가족관계에 대한 서술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것은 묘지가 당시 결혼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확인하는 자료로써 사용될 수 있음도 말해준다. 어느 시기보다 가족관계가 중시되고, 가문이 우선시되던 위진남북조식에 대한 연구에서 가례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연구 분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시기 가례에 대한 연구는 만족할만한 정도는 아니다. 따라서 묘지의 출현과 시기별 묘지의 내용을 분석하는 본 연구는 앞으로 활성화될 중국 고중세 가례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로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5)위진남북조시기 연구에서 석각자료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대사 연구자들에게 항상 문제가 되어 온 한정된 사료의 문제는 1차 자료의 꾸준한 발굴과 보고에 의해 극복할 수 있는 문제임이 최근 간독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다. 이것은 비단 고대사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위진남북조 연구 역시 부족한 자료의 한계를 1차 자료를 이용하여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최근 발견된 동진 묘지의 경우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어, 동진 사대부 가계의 계보를 추적하거나 당시 혼인 풍습을 고찰하려는 작업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따라서 석각 자료의 이용은 고대의 간독 자료만큼 부족한 사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묘비와 묘지를 통해 고대 상장예속의 변화 및 시대상과 사회상을 복원하려는 본 연구는 이러한 석각 자료 활용이라는 연구 방법을 확산하여, 위진남북조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묘비(墓碑), 금비령(禁碑令), 후장(厚葬), 조조(曹操), 인물평(人物評), 묘지(墓誌), 명사(銘辭), 기념비(記念碑), 송덕(頌德), 서진(西晉), 동진(東晉), 유송(劉宋), 가전(家傳)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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