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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기 요산 김정한의 문학 활동 연구
A Study on Literary Activities of Kim, Jeong-han during the Independence Period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2S1A5B5A07037813
선정년도 2012 년
연구기간 1 년 (2012년 09월 01일 ~ 2013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이순욱
연구수행기관 부산가톨릭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광복기 요산 김정한의 삶과 문학 활동을 실증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둔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통해 알 수 있는바, 김정한 문학 연구에서는 두 가지 전제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절필과 문단복귀 담론의 형성과 재생산으로 고착화된 저항적인 생애가 작품을 압도하면서 작품 해석에 선험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생애의 신화화가 거듭 재생산된 자리에서 그의 작품을 저항성이라는 맥락을 도외시하고는 그 실체에 접근하는 일이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요산 문학의 주요한 특징으로 경험적 글쓰기 또는 체험의 서사화를 꼽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자전 기록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 줄 있는 기록문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문학적 생애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이때 절필과 문단복귀로 굳어진 작가상 속에서 작가 스스로 문학적 공백으로 규정했던 시기, 그러니까 25년에 이르는 ‘절필의 시기’가 문제적인 영역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드러내 의식화해야 할 집단적 추억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김정한 문학 연구에서 각별히 주목해야 할 시기는 바로 광복기라 하겠다.
    광복기 요산의 문학 활동에 대해서는 윤정규의 대담 기록과 조갑상, 차민기, 임지영의 논의가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조갑상의 연구는 요산 문학 연구의 중요한 토대를 구축하고 연구 방향을 제시한 논문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후속 연구들은 조갑상이 연구대상으로 삼은 「옥중회갑」(<전선> 창간호, 1946.3)과 「설날」(<문학ㆍ비평> 제1호, 1947.6)에 한정된 논의를 고스란히 반복함으로써 이 시기 요산의 매체 활동과 문학 활동에 대해 자전 기록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잘 알려진 잡지매체에만 기댐으로써 광복기 경남ㆍ부산 지역 문학사회의 층위에서 요산의 문학 활동을 파악하는 종합적 시각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 연구는 기존 연구가 지닌 연구 대상의 편협성과 문단사적 시각의 부재, 조직 활동과 전향의 과정에 대한 소홀한 접근 등의 문제에 주목하여 광복기 요산 김정한의 삶과 문학 활동을 실증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둔다. 세부적인 연구 방향을 구체적으로 밝히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광복기 경남ㆍ부산 지역에서 발행된 신문 잡지 매체를 대상으로 지역문학적 시각에서 요산의 삶과 문학 활동을 실질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사료를 발굴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요산의 작가 해적이와 작품 해적이를 보완하거나 지역문학사 연구를 위한 실증 자료를 발굴할 수 있으리라 본다.
    둘째, 광복기 김정한의 문단 조직 활동과 매체 활동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경남ㆍ부산 지역문학의 새로운 실체에 다가서고자 한다. 두루 알다시피 광복기 부산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좌파 조직과 세력이 공고하게 구축된 지역이었다. 각종 사회단체와 정당 지부가 결성되는 과정 속에서 민족문학의 건설을 표방하며 조선문학동맹 부산지부가 결성된 것은 1946년 2월 10일이었다. 광복 직후부터 좌파 계열의 <인민해방보>에 「解放賦」, 「獄中鬪士에게」라는 제목으로 시조 8편을 발표하면서 문학적 입지를 다져나갔던 김정한이 위원장을 맡았다. 이 무렵 김정한은 시와 정론(「直言者가 되라」)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매체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사회단체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지역 문학사회에서 자신의 문학적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었다. 1946년 1월에는 좌우 세력을 망라한 신탁통치배격부산위원회가 결성될 당시 조사연락부 상무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만큼 요산은 광복 초기 부산 지역 좌파 문학단체 결성과 활동을 이끈 핵심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셈이다.
    셋째, 광복기 요산의 창작 활동 전반을 대상으로 삼되, 주로 시(시조)와 소설을 중심으로 광복기 요산문학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지역 문학사회와 제도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많은 매체와 작품들을 새롭게 발굴할 수 있으리라 본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는 광복기 김정한의 문학 활동을 실증적으로 고찰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이 과정에서 근대 부산 지역 문학사회를 형성하는 주요한 매체인 1차 문학 사료들을 발굴․갈무리하여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경남ㆍ부산 지역문학사 서술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연구가 이러한 연구 목적을 구체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면, 아래와 같은 학문적․사회적 기여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 연구는 광복기 지역 문학사회에서 부산을 대표하는 작가 김정한의 삶과 문학 활동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그동안 작가 스스로 괄호로 묶어버린 굴욕의 경험, 이른바 ‘절필기’의 가장 중요한 지점을 조사 복원하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실증 작업은 지역 문학사회 안쪽의 문단 재편 과정과 연동되어 있다는 점에서 광복기 경남ㆍ부산 지역문학사 연구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둘째, 광복 초기 부산 지역 좌파 문단을 이끌었던 김정한을 통해 1930년대 후반부터 계급주의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던 김병호, 손풍산, 이주홍 등 경남ㆍ부산 지역 좌파 문학인의 광복기 이념 선택과 전향의 논리를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광복과 단정 수립, 그리고 국민보도연맹 시기를 거치면서 좌파 문학인의 일반적인 행로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는 점에서도 지역문학 운동의 전개과정과 좌절을 확인할 수 있는 뜻 깊은 사례가 될 것이라 본다.
    셋째, 광복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까지 김정한의 문학 활동을 실증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국가주의의 강압적인 기획 속에서 한 문학인이 지배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연구는 한국전쟁기 피난문단이 형성된 부산 지역에서 김말봉, 오영수, 조향과는 달리, 구국총력연맹(救國總力聯盟)에 가입하여 신분을 보장받았던 명망가 문인 김정한의 문학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넷째, 이러한 실증적 접근을 통해 김정한의 삶과 문학 활동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후속 연구를 촉발하는 데 일정하게 이바지할 수 기대한다. 앞으로 이 연구에 이어 다양한 분과학문 영역에서 지역 내부의 좌파 지식인이나 사회운동가에 대한 후속 연구나 이해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그동안 연구영역에서 배제되었던 광복기 요산 김정한 문학 활동과 매체 활동을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두루 알다시피 우리의 근대문학사는 1차 문학사료의 망실로 심화된 문학담론을 창출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따른다. 지역으로 눈길을 돌리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러한 연구 환경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지점이 광복기다. 본 연구는 좌파 민족주의자였던 김정한의 문학 활동을 통해 광복기 경남ㆍ부산 지역 문학사회의 재편 과정과 헤게모니 투쟁의 양상을 고찰하는 데 유용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 연구의 내용을 세부적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광복기 부산에서 발행된 신문 잡지 매체를 통해 요산의 삶과 문학 활동을 실질적으로 복원함으로써 기존의 작가 해적이(연보)와 작품 해적이를 보완하여 이 시기 요산 문학 연구의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이를 위해 광복 직후인 9월 편집국 논설위원으로 몸을 담은 <민주중보>뿐만 아니라 <인민해방보>, <자유민보>, <부산신문>, <부산매일신문>, <대중신문>, <부산일보>, <문예신문>, <산업신문> 등의 지역지뿐만 아니라 <자유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의 중앙지, <전선>, <한얼>, <신조선>, <학생동무>, <문예조선>, <중성>(주간, 월간) 등 부산 지역에서 발간된 잡지매체를 조사할 예정이다.
    둘째, 광복기 부산 지역 문학사회에서 김정한의 조직 활동의 면면과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작가 스스로 수필에서 밝힌바 있듯이 서울에서 조직된 좌우 문화단체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이름을 올렸던 것과 달리, 지역에서의 단체 활동은 자신의 정치적인 이념에 기초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광복기 요산의 이념 지향과 노선 선택의 변화 과정을 보다 면밀하게 고찰할 수 있으리라 본다. 경남 인민위원회 문화부원과 부산문학동맹, 부산예술연맹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좌우 통합 결사체 성격의 삼남문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과정,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경상남도연맹 위원장으로 활동한 전력이 문제되어 피검되는 과정, 우파 문단으로부터 반동매체로 규정된 월간지 <문화건설>의 매체발행인으로서의 면모 등 이 시기의 요산의 조직 활동은 사뭇 역동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단정 수립 이후에는 과거의 좌파 전력이 문제되어 결국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전향에 이르게 된다.
    셋째, 광복기 요산의 창작 활동을 시(시조)와 소설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요산문학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소설은 「옥중회갑」과 「呼出의 설날」을 개제하여 되실은 「설날」, 「하느님」을 대상으로 삼아 그의 삶과 작픔의 관계를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좌익 성향의 <대중신문> 연재 「呼出의 설날」을 고증함으로써 요산이 급변하는 당대의 문화 지형에 즉각적으로 부응하는 글쓰기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창작 시점과 연재 시기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음으로 이제까지 학계에 단 한 번도 실체가 공개되지 않았던 시편을 발굴ㆍ보고함으로써 광복기 요산 문학의 종합적 연구를 가능하게 할 토대를 마련할 것이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바, 이 시기 요산은 시조 12편과 시 1편, 노랫말 1편을 남기고 있다. 이 시편들은 광복기 급변하는 문화지형 속에서 요산이 보여주었던 다양한 이념과 문학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도 부족함이 없다. 광복기의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호흡이 짧은 시를 통해 자신의 문학적 태도를 표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 본 본 연구의 목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광복기 김정한의 문학 작품 발굴 조사와 수집, 정리
    2. 신문 잡지 매체를 통한 광복기 김정한의 삶과 문학 활동 복원
    3. 광복기 부산 지역 문학사회에서 김정한의 문단 조직 활동의 면면과 성격 규명
    4. 광복기 김정한의 시(시조)와 소설 분석
  • 한글키워드
  • 김정한, 광복기, 미발굴시, 문학사회, 문단제도, 문학매체, 부산 지역문학, 저항, 절필, 문단복귀, 조선문학동맹 부산지부, 삼남문학회, 문총 경남지부,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경남본부, <민주중보>, <문예신문>, <인민해방보>, <前線>, <衆聲>, <중성>, <신조선>, <한얼>, <문예조선>, <날개>, <浪漫派>, 탁소성, 염주용, 이주홍, 오영수, 박영한, 전향, 반공주의, 국가보안법.
  • 영문키워드
  • Kim, Jeong-Han, the Independence Period, Not-excavated Poems, literary society, literary circles system, Busan's regional literature, literary media, Resistance, Giving up Writing, Reversion of Literary World, Busan Branch of Joseon Literary Alliance, Samnam Literary Club, Busan Council of Joseon Arts Alliance, Samnam Literary Association, Gyeongnam Office of the Chosun Association of Youth Writers, Conversion, Anti-Communism, the National Security Law.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광복기 요산 김정한의 삶과 문학 활동을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동안 작가 스스로 괄호로 묶어버린 굴욕의 경험, 이른바 ‘절필기’의 가장 중요한 지점인 광복기 그의 문단 활동을 실질적으로 복원하여 되돌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광복기 부산 지역 문학사회의 문단 재편과 연동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고 본다.
    첫째, 당시 부산에서 발행된 신문 잡지 매체를 통해 요산의 삶과 문단 활동을 실질적으로 복원함으로써 요산문학 연구의 한 디딤돌을 놓고자 했다. 제도로서 부산 지역의 문학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어 가던 광복기는 요산 김정한의 문학적 생애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했던 시기다. 또한 굴욕의 경험이라 스스로 괄호를 친, 이른바 절필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서울에서 조직된 문화단체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이름을 올렸던 것과 달리, 부산ㆍ경남 지역에서 그의 사회 운동과 문단 활동은 자신의 정치적인 이념에 기초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광복기의 격랑 속에서 요산은 배달학원 강사,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와 경남해방운동자구원회 산하의 연극단체 희망좌, 경남 인민위원회에서 문예부문을 담당했으며, 신탁통치배격 부산시위원회 조사연락부 위원, 조선예술동맹 부산지구협의회 위원장, 삼남문학회 회원, 조선문학가동맹 경남도위원장 겸 부산지부장,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경남도연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지역의 명망가 문화인으로서 좌파 문화전선을 구축하여 대중 계몽과 민주임정 수립을 전취하기 위한 조직 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광복 직후부터 공위 재개와 해체에 이르는 시기까지 그는 부산ㆍ경남 지역 좌파 문학사회와 예술단체의 핵심인물이자 매체 발행인이었으며, 문화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셈이다. 우파문단으로의 문단재편이 가파르게 이루어진 단정 수립 이후에는 이러한 조직 활동이 문제되어 반동문화인으로 규정되었으며, 그가 주도하던 매체 󰡔문화건설(文化建設)󰡕 또한 발행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부산∙경남 지역을 거점으로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던 좌파 문학인 김정한은 문화운동의 날개를 꺾인 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함으로써 혹독한 전향의 계절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둘째, 광복기 요산은 연시조 3편(총12수)과 자유시 3편, 노랫말 1편을 남겼다. 그의 시작 활동이 동경 유학시절에 집중되어 있는바, 광복 직후 자기 모색의 과정에서 자신의 문학적 출발점이기도 한 시쓰기로 돌아간 것은 문학을 통해 민족적 울분을 표출하고자 했던 문학청년시대의 초발심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광복 직후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 호흡이 짧은 시는 요산의 정치적 태도와 입장을 드러내기에 효과적인 방법적 전략이었다. 특히 연시조를 집중적으로 창작했는데, 이는 생산적인 민족문학으로서 시조의 가능성을 탐색했기 때문이다. 요산은 시조를 국민문학의 한 형식으로서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제인 동시에 대중과 익숙하게 소통할 수 전략적 갈래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미 유학 시절에 「독음(獨吟)」, 「조선학(朝鮮鶴)」, 「고향신문」, 「가을잡영(雜咏)」 등의 연시조를 창작한 경험이 있었던 터였다. 연시조 「해방부」, 「옥중투사에게」, 「새해에 바침」은 서정시와 다른 자리에서 새로운 나라만들기를 둘러싼 현실적 갈등과 모순, 자신의 신념과 내면적 정서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정치적ㆍ미학적 실천의 형식이었던 셈이다. 광복열사를 추념하고 새로운 민족국가건설에 이바지할 민족지도자의 역할을 촉구하고 있는 「해방부」는 자책과 반성으로 광복을 맞은 자신의 처지와 역할을 이들에게 투사함으로써 자기 결의를 다진 시였다. 또한 광복의 감격을 노래한 「四二七八ㆍ八ㆍ十五ㆍ十二時」에서는 집단적 주체인 동포를 호출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서 미래에 대한 비전을 탐색하고자 했다. 촉나라 망제의 한이 서려있는 두우라는 필명으로 쓴 「옥중투사에게」는 가치가 전도된 현실에서 반역사적 주체들과의 대결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며, 「유리창」에서는 자신의 태도와 신념을 견고하게 다지고 있었다. 「새해의 아침」 또한 좌파 문화운동이 패색되어 가던 정세 속에서 자기 결의를 거듭 피력한 시였다. 이처럼 광복기 요산의 시편들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적 무기로 기능하고 있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로서 시는, 광복기의 역사적 비전과 민족주의적 지향성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본 연구에서는 「옥중회갑」(1946.3)과 「호출의 설날」(1947.1)을 개제하여 발표한 「설날」(1947.6), 새로 발굴한 「서거픈 이야기」(1948.1), 「하느님」(1949.8)을 대상으로 광복기 요산 소설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당시 문학사회의 과제로 제기되었던 자기비판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소설 「옥중회갑」은 좌파 혁명가 노백용에 대한 존경심과 탁치 정국 속에서 부산 지역사회의 이념 대립과 갈등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이 소설은 작가와 서술자의 동일성을 전제로 작가의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으며, 광복 직후 경남 인민위원회에 몸담았던 자신의 체험을 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전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었다. 특히 소설의 첫머리에서 1940년대 전반기 일제의 관리로 일했던 과거에 대한 화자의 자기반성적인 은밀한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자기비판의 문제를 새로운 나라만들기의 대열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치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옥중회갑」의 중심적 서사는 혁명가 노선생의 인간적 풍모와 신념, 그에 대한 서술자의 존경심을 다루고 있지만, 여기에는 작가의 정치적 선택에 따른 내면화된 자기비판, 탁치 정국을 맞은 부산 지역의 이념지형과 현실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옥중회갑」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설날」은 1947년 1월 좌익지 󰡔대중신문󰡕에 연재한 단편소설 「호출의 설날」을 개제한 작품이었다. 연재분 1회치만 본다면 부분적으로 단어를 손질한 것 이외에 잡지 게재본과 내용상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지만, 󰡔문학ㆍ비평󰡕에 되실으면서 장 분할에서 일정한 재편이 이루어졌다. 이 소설은 10월인민항쟁의 와중에 남편을 잃은 호출의 어머니가 설날을 맞아 아들, 여교사 진숙과 함께 칠순의 혁명가 아버지를 면회하는 내용이 중심이다. 10월인민항쟁의 발발과 실패가 좌파세력이 우세했던 광복 초기의 정치지형이 우파세력 우위로 바뀌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고 보면, 요산에게 10월인민항쟁은 좌파문화운동의 위축 상황을 극복하고 문학운동의 대중화를 추진하기 위한 전환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 소설은 조선문학가동맹 부산지부장으로서 당대의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여 자신의 이념과 실천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증좌라는 점, 10월인민항쟁문학 가운데서도 도식적 경향이 농후한 여타 작품과는 차별화된다는 점, 시기적으로도 10월인민항쟁문학의 첫자리에 든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호출어머니의 태도 변화가 혁명가 집안의 수난사를 넘어 10월인민항쟁의 역사적 성과나 과제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나 치열한 자기갱신의 과정이 생략된 채 지나치게 낙관적인 결말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 또한 지니고 있었다.
    특히 본 연구를 통해 처음 발굴․소개한 세태소설 「서거픈 이야기」는 좌파 문화운동의 날개가 꺾이던 시기, 좌절과 모색을 거듭하던 요산이 악질모리배가 판을 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세태소설이었다. 요산 소설의 특장 가운데 하나인 서술자가 작중인물의 위치에서 당대 현실을 그려내는 방식은 이 소설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서술자는 수남이 아버지의 시선으로 악질모리배와 향락문화에 젖어 있는 당대의 현실을 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었다. 비록 연재분 1회치만으로 이 소설의 성격을 재단할 수 없으나, 단순히 ‘서거픈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중의 자각과 저항을 다룬 서사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추정해 보았다. 또한 단정 수립 이후 전향 직전에 발표한 「하느님」에서는 역사 발전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사 부인을 등장시켜 사회 진보의 주체로서 개인의 책임과 역할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넷째,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본 연구에서는 정치적 사유와 실천, 문학 창작과 실천이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었던 광복기를 요산문학의 특정 시기로 설정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학계에 제안하였다. 문학적 연대기와 관련지어 기존의 ‘초기-절필기-후기’ 또는 ‘전기-중기-후기’라는 구분은, 작가가 스스로 구획한 절필과 문단복귀라는 틀에 갇히거나 새로운 자료 발굴 성과에 기대 절필기를 중기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네 시기로 나누어 요산문학의 지속과 변화를 읽어내고자 했다. 우선, 희곡 「인가지」(1943.9)가 신체제기 조선문학의 일반적 흐름 속에서 놓인다고 할 때, 요산의 문학적 생애에서 그 예외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 없이 「그물」(1932.12)과 등단작 「사하촌」(1936.1) 이후의 초기작을 문학적 청년기에 해당하는 ‘요산문학 1기’로 보았으며, 정치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표출한 광복기를 ‘요산문학 2기’로 규정하였다. 국민보도연맹 가입과 전향 이후와 그 연장선에서 구국총력연맹에 가입하여 신변을 보장받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전쟁기부터 대표작 「모래톱 이야기」(1966.10) 이전까지를 한 단위로 묶어 ‘요산문학 3기’로, 「모래톱 이야기」 이후의 시기를 ‘요산문학 4기’로 제안하였다. 특히 「모래톱 이야기」를 3기와 4기의 분기점으로 본 까닭은 ‘문단복귀작’이라 하여 작가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적지 않고, 이전 시기를 압도하는 문학적 성취를 보였기 때문이다. 「수라도」(1969.6), 「인간단지」(1970.1) 등 수작들을 배출한 ‘요산문학 4기’는 광복기의 실천 동력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며 심화시켜 나갔던 시기였다.
    정치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한껏 표출한 광복기의 문학을 작가는 어떤 까닭으로 ‘절필기’라는 장막 속에 가두려 했을까? 시와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부산 지역 좌파문단의 핵심인물이었던 요산은 당대의 정치 문화지형에 즉각적으로 부응하는 글쓰기를 수행함으로써 당대의 역사적 현실과 과제에서 비켜서지 않는 내적 치열성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1940년대 전반기의 경력이나 희곡 「인가지(隣家誌)」에만 매몰된 단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단정 수립 이후 좌파문화운동의 좌절과 가파르게 진행된 전향 정국 속에서 민족주의 좌파 문화인으로서 또는 실존적 개인으로서 그가 감당해야 했던 ‘굴욕’의 실체에 심층적으로 다가가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 영문
  • The Independence Period in Korea, when the literary society in Busan began to establish itself as an institution, coincided with the time when Yosan Kim Jeong-han delved himself into political thought and practice more deeply than ever in his literary life. Moreover, he put this period in brackets for himself describing it as a humiliating experienc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ore Yosan Kim Jeong-han's participation in social movements, his activities in literary circles and his literary world during the Independence Period in an empirical way. This provided an important stepping stone to getting closer to substance of his literature by supplementing the chronological list of his literary works during the Independence Period.
    First, his activities in social movements and literary circles in Busan and Gyeongnam area during this period were the result of his own political ideologies, as opposed to the fact that cultural organizations organized in Seoul used his name in their activities without his consent. Amidst the turbulence of the time, Yosan usually took responsibility for literature in Baedal Educational Foundation, Gyeongnam branch of the Committee for the Preparation of Korean Independence, Theater Company Huimangjwa under the umbrella of the Gyeongnam Independence Movement Association, and the Gyeongnam People's Committee and he served as the member of the investigation and liaison department of the Anti-Trusteeship Busan Committee, the Chairman of the Busan Council of the Joseon Arts Alliance, the member of the Samnam Literary Society, the Chairman of the Gyeongnam and Busan branch chief of the Joseon Literary Alliance and the Vice Chairman of the Gyeongnamdo Federation of the Federation of Korean Cultural Organization. As an eminent cultural figure in the region, he set up a leftist front culture and actively carried out organizational activities to enlighten the public and to advance the establishment of a democratic provisional government. From the moment that Korea was liberated from the Japanese colonial rule to the resumption and dissolution of the US-USSR Joint Commission, he was both a key member and media publisher of the leftist literary society and art organizations in Busan and Gyeongnam region, staying in the frontline of the cultural movements. With the establishment of a government during which the literary circles were rapidly reorganized toward the right, he was categorized as a reactionary cultural figure due to his activities in these organizations and was forced to stop publishing "Munhwa Geonseol," a medium that he took initiative. As a result, discouraged by the repression on the cultural movements, he joined the Federation of Protecting and Guiding the Public and had to go through the adversity of conversion. This study was able to shed a light on the procedure of his conversion to the ruling ideology and the literary course he had to take as he joined an ideological organization to guarantee his status under the coercive nationalist measure of forcing him to convert.
    Second, previous studies on Yosan's literary works during the Independence Period over the years did not present a new perspective as they were confined to "Okjunghoegap" which expresses awe and respect toward an old revolutionary and "Seollal," a story about the popular struggle in October. Due to their heavy dependence on a few well-known resources, they could not provide any comprehensive view encompassing his poems (sijo), novels and essays. During this time, Yosan produced three pieces of stanzaic sijo (12 poems), three free verses and one lyrics. Among these works, he published his free verses of "Yurichang" and "Sa-i-chil-pal, pal, sip-o, sip-i poem" under the pen name of Mokwon and his sijo "Okjungtusa" under the pen name of "Duu" when published in "Inmin Haebangbo." In particular, Yosan wanted to picture the rapidly changing reality of the time and the intellectual's attitude through "Haebanbu", "Ode to the New Year" and "Okjungtusa", which were his stanzaic sijo works of compiling four poems under one title. He attempted to show his literary attitude through these short-breathed poems in the middle of the tumultuous political situation during the Independence Period.
    Third, this study discovered and explored his serial short stories "Hochuleui Seollal" published in "Popular Newspaper" and another serial short stories "Seogeopeun Story" published in "Industrial Daily (predecessor of Kukje Daily)," both of which were never handled in previous studies. The title "Hochuleui Seollal" was changed into "Seollal" when it was listed in the 1st issue of "Literature and Criticism" (June 1946). There were no major differences between the works published in the newspaper and the magazine, but it seems that he reorganized some of the chapters. Though it cannot be easily defined only with its first episode, "Seogeopeun Story" is a novel of manners that critically describes the harsh reality of the Independence Period, infested with heinous profiteers. "Haneunim (God)" which was published just before he joined the Federation of Protecting and Guiding the Public, expressed indirectly the responsibilities and roles that an individual should take as a principal agent of social progress by using a character of a pastor's wife who tries to avoid her responsibilities for historic progress. As seen from his poems and novels, Yosan did not avoid his ideologies or practicing them and faced the historic challenge of the time as a Chairman of the Busan Branch of the Joseon Literary Alliance by writing literary works that can keep pace with the rapidly changing literary landscape.
    Fourth, I believe that the Independence period when Yosan's political thought, practice and literary creation were all intertwined need to be categorized as a special period in his literary life. Moreover, instead of the previous methods of dividing his literary chronology into three periods, such as 'beginning-stop writing-latter period' or 'former-middle-latter period,' it would be more effective to look at Yosan's literary works in four different periods to better understand the continuity or changes in his literary history. If we include the play "Ingaji (1943.9)" in the general time frame of the new regime period, it is natural to categorize "Geumul (1932.12)" and his debut work "Sahachon (1936.1)" into 'the 1st stage of Yosan's Literature,' which can be considered to be his literary youth period. The Independence period when the potential of political literature was released can be deemed as the '2nd stage.' The 3rd stage is when he did a post-war self-searching by joining the Federation of Protecting and Guiding the Public and being converted, followed by the Korean War period during which he had to join the National Salvation Federation for the guarantee of his status, before the publication of his famous work "Moraetop Story (1966.10)." "Moraetop Story" served as a point of junction because he attached a great importance to this work as his comeback to the literary circles and he made more remarkable accomplishments than ever before. The last '4th stage of Yosan's Literature' includes masterpieces like "Surado (1969.6)" and "Ingandanji (1970.1)" and he actively displayed and deepened his strong drive to practice during the Independence perio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요산 김정한 문학의 심층에 접근하기 위해 작가 스스로 괄호로 묶어버린 이른바 절필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정치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했던 광복기 요산의 삶과 문학 활동에 대한 실증 연구다.
    첫째, 광복기의 격랑 속에서 김정한은 배달학원 강사,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와 경남해방운동자구원회 산하의 연극단체 희망좌, 경남 인민위원회에서 문예부문을 담당했으며, 신탁통치배격 부산시위원회 조사연락부 위원, 조선예술동맹 부산지구협의회 위원장, 삼남문학회 회원, 조선문학가동맹 경남도위원장 겸 부산지부장,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경남도연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지역의 명망가 문화인으로서 좌파 문화전선을 구축하여 대중 계몽과 민주임정 수립을 전취하기 위한 조직 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이를 통해 경남 지역 우파문단을 주도한 조향과는 달리 이른바 전향이라는 국가주의의 강압적인 기획 속에서 한 문학인이 지배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과정과 사상단체에 몸담아 신분을 보장받을 수밖에 없었던 문학적 행로를 구체적으로 해명할 수 있었다.는 광복과 단정 수립, 그리고 국민보도연맹 시기를 거치면서 좌파 문학인의 일반적인 행로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는 점에서도 지역문학 운동의 전개과정과 좌절을 확인할 수 있는 뜻 깊은 사례가 될 것이라 본다.
    둘째, 광복기 요산은 연시조 3편(총12수)과 자유시 3편, 노랫말 1편을 남겼다. 그의 시작 활동이 동경 유학시절에 집중되어 있는바, 광복 직후 자기 모색의 과정에서 자신의 문학적 출발점이기도 한 시쓰기로 돌아간 것은 문학을 통해 민족적 울분을 표출하고자 했던 문학청년시대의 초발심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광복 직후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 호흡이 짧은 시는 요산의 정치적 태도와 입장을 드러내기에 효과적인 방법적 전략이었다. 특히 연시조를 집중적으로 창작했는데, 이는 생산적인 민족문학으로서 시조의 가능성을 탐색했기 때문이다. 연시조 「해방부」, 「옥중투사에게」, 「새해에 바침」은 서정시와 다른 자리에서 새로운 나라만들기를 둘러싼 현실적 갈등과 모순, 자신의 신념과 내면적 정서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정치적ㆍ미학적 실천의 형식이었던 셈이다.
    셋째, 당시 문학사회의 과제로 제기되었던 자기비판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소설 「옥중회갑」은 좌파 혁명가 노백용에 대한 존경심과 탁치 정국 속에서 부산 지역사회의 이념 대립과 갈등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이 소설은 작가와 서술자의 동일성을 전제로 작가의 시각에서 자신의 삶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으며, 광복 직후 경남 인민위원회에 몸담았던 자신의 체험을 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전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었다. 「옥중회갑」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설날」은 1947년 1월 좌익지 󰡔대중신문󰡕에 연재한 단편소설 「호출의 설날」을 개제한 작품이었다. 이 소설은 10월인민항쟁의 와중에 남편을 잃은 호출의 어머니가 설날을 맞아 아들, 여교사 진숙과 함께 칠순의 혁명가 아버지를 면회하는 내용이 중심이다. 10월인민항쟁의 발발과 실패가 좌파세력이 우세했던 광복 초기의 정치지형이 우파세력 우위로 바뀌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고 보면, 요산에게 10월인민항쟁은 좌파문화운동의 위축 상황을 극복하고 문학운동의 대중화를 추진하기 위한 전환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 소설은 조선문학가동맹 부산지부장으로서 당대의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여 자신의 이념과 실천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증좌라는 점, 10월인민항쟁문학 가운데서도 도식적 경향이 농후한 여타 작품과는 차별화된다는 점, 시기적으로도 10월인민항쟁문학의 첫자리에 든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본 연구에서 처음 발굴․소개한 세태소설 「서거픈 이야기」는 좌파 문화운동의 날개가 꺾이던 시기, 좌절과 모색을 거듭하던 요산이 악질모리배가 판을 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세태소설이었다. 요산 소설의 특장 가운데 하나인 서술자가 작중인물의 위치에서 당대 현실을 그려내는 방식은 이 소설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서술자는 수남이 아버지의 시선으로 악질모리배와 향락문화에 젖어 있는 당대의 현실을 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었다. 비록 연재분 1회치만으로 이 소설의 성격을 재단할 수 없으나, 단순히 ‘서거픈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중의 자각과 저항을 다룬 서사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추정해 보았다. 또한 단정 수립 이후 전향 직전에 발표한 「하느님」에서는 역사 발전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사 부인을 등장시켜 사회 진보의 주체로서 개인의 책임과 역할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광복기 김정한의 문학 활동을 실증적으로 고찰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을 두었다. 이 과정에서 근대 부산 지역 문학사회를 형성하는 주요한 매체인 1차 문학 사료들을 발굴․갈무리하여 학계에 보고하였다. 이를 통해 학문적 기여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활용방안을 모색할 수 있으리라 본다.
    첫째, 본 연구는 광복기 부산 지역 문학사회를 대표하는 작가 김정한이 스스로 괄호로 묶어버린 절필기의 가장 중요한 지점인 광복기의 삶과 문학 활동을 실질적으로 복원함으로써 요산문학의 단절과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이러한 실증 작업은 지역 문학사회 안쪽의 문단 재편 과정과 연동되어 있다는 점에서 광복기 경남ㆍ부산 지역문학사 연구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이를 통해 김정한 문학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형성기 부산 지역문학사 서술의 토대를 굳건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고 본다.
    둘째, 광복 초기 부산 지역 좌파 문단을 이끌었던 김정한을 통해 1930년대 후반부터 계급주의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던 김병호, 손풍산, 이주홍 등 경남ㆍ부산 지역 좌파 문학인의 광복기 이념 선택과 전향의 논리를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이는 광복과 단정 수립, 그리고 국민보도연맹 시기를 거치면서 좌파 문학인의 일반적인 행로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는 점에서도 지역문학 운동의 전개과정과 좌절을 확인할 수 있는 뜻 깊은 사례가 될 것이라 본다.
    셋째, 광복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까지 김정한의 문학 활동을 실증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국가주의의 강압적인 기획 속에서 한 문학인이 지배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과정을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연구를 통해 한국전쟁기 피난문단이 형성된 부산 지역에서 김말봉, 오영수, 조향과는 달리, 구국총력연맹(救國總力聯盟)에 가입하여 신분을 보장받을 수밖에 없었던 좌파 문학인 김정한의 문학적 행로와 정신적 풍경을 읽을 수 있었다.
    넷째, 이러한 실증 연구를 통해 김정한의 삶과 문학 활동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후속 연구를 촉발하는 데 일정하게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앞으로 이 연구에 이어 다양한 분과학문 영역에서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한 좌파 문화인이나 사회운동가에 대한 후속 연구나 이해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다섯째, 본 연구를 통해 광복기 부산 지역 문화운동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앞으로 광복기 좌파 문화인 김정한에서 나아가 좌우의 경계를 오간 염주용이나 탁창덕, 우파문화인 조향을 포괄하는 광복기 부산 지역 매체 활동의 실체를 규명함으로써 부산 지역 문화운동사를 제대로 구축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색인어
  • 김정한, 부산 지역문학, 배달학원, 한얼몯음, 극단 희망좌, 조선문학가동맹 부산지부, 조선예술연맹 부산지구협의회,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경남도연맹, 국민보도연맹, 전향, 미발굴 시와 소설, 연시조, 「호출의 설날」, 「서거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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