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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에 관한 고찰
Reflection on the character of the movement of peace of God in 11th centur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2S1A5B5A07038044
선정년도 2012 년
연구기간 1 년 (2012년 09월 01일 ~ 2013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이정민
연구수행기관 경상국립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989년 프랑스 남부 샤루(Charroux) 공의회에서 전투원들의 비전투원에 대한 전투행위금지와 비전투원의 생명과 재산보호라는 사회구성원들의 합의와 공감에 토대를 둔 단순한 자치운동으로 출발하여 특히 11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크게 확산된 ‘신의 평화운동(the peace of God, la paix de Dieu)’의 사회개혁운동의 성격과 그 기능과 역할에 관한 분석을 그 목적으로 한다. 전투원에 대한 단순한 제재조치로 출발한 신의 평화운동은 1030-1040년대 이르러 일시적인 전투중지를 비롯한 보다 절제되고 세련된 일종의 전쟁도덕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신의 휴전운동(the truce of God, la trêve de Dieu)’으로 이어지게 된다. 신의 평화운동의 전통과 정신은 1095년 클레르몽(Clermont)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교황 우르바누스(Urbanus)2세의 연설문으로 계승된다. 신의 평화운동이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평화(pax)’를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989년 프랑스의 남부 샤루 공의회에서도, 1033년 아키텐느(Aquitaine)지방과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서 열린 여러 공의회에서도 일관되게 외치는 평화에 관한 교회의 정확한 개념설명과 입장은 명시되지 않는다. 카롤링거 왕조의 행정 조직 약화와 지방 제후들의 비약적인 성장은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비전투원들에게는 증폭되는 폭력이라는 현실적인 부담감과 공포감이라는 결과를 발생시켰다. 그리하여 강력한 공권력의 부재로 혼란스러워진 정치․사회 질서와 평화의 재정립의 문제는 교회의 적극적인 개입과 주도적인 역할 담당을 자연스럽게 제공하게 되었다. 물론 전투원의 무력사용 제한과 비전투원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목적으로 개최된 샤루 평화운동은 금지조항을 위반할 경우 교회는 파문이라는 제재를 내세웠다.
    신의 평화운동의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의 휴전운동은 엄격한 전쟁도덕률과 전투원에 대한 통제를 통한 세속 질서의 평화 정립이라는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즉 중세 교회는 평화와 전쟁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끊임없는 선과 악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며 성인들의 삶이 바로 끊임없는 선과 악의 갈등의 삶 속에서 평화를 실현시킨 증인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신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전투와 전쟁은 ‘성전(聖戰)’으로 정당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교회의 노력은 임시적인 평화를 의미하는 ‘휴전’이라는 개념을 신의 평화운동에 첨가하였다. 호전성과 폭력성이 팽배해진 세속 질서의 재정립이라는 현실적인 요구는 중세 교회에게 단순한 종교적 권위의 구심체의 소극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이고 현실개혁적인 역할을 요청하게 된다.
    강력하고 통일된 공권력의 부재는 고대 로마로부터 이어오는 중세 교회의 적극적인 역할과 개입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는 세속에서의 최고 지상권 행사를 바탕으로 하는 비전투원들의 자기 방어를 포함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의 평화운동이 제안되었으며 카롤링거의 전통과 가치를 계승하고 있는 사회개혁운동으로서 신의 평화운동이 제안되었으며 이는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강력한 공권력에 근거한 세속 통치권의 붕괴는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보편적 질서 위에 성립된 중세 교회의 적극적인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게 되었고 신의 평화운동이 지니는 사회개혁운동의 성격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문법의 부재와 통치 질서의 붕괴를 극복할 수 있는 신의 평화운동의 전개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 질서의 재확립은 과히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신의 평화운동에 관한 일반론적 접근은 이루어져왔으나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이 지니는 사회개혁운동으로서의 성격과 그 기능과 역할에 관한 연구가 미흡하였다. 그러므로 중세 교회가 주도하는 평화운동의 성격과 동시에 강력한 공권력의 와해와 공동체 질서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사회개혁운동의 성격을 지닌 신의 평화운동에 관한 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중세 그리스도교적 봉건 사회의 성격과 특징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 기대효과
  • 본 연구의 결과물은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을 주제로 한 국내 연구와 연구 결과가 충분하지 못한 현실에서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과 그 역할을 재조명함으로써 연구 활성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가 붕괴된 서양 중세 사회의 기존 질서를 재정립하고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그리스도교적 가치관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보편적 질서 체제의 확립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사회개혁운동으로 설명될 수 있는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은 국내 서양 중세사 연구에 차지하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과 그 역할에 관한 본 연구는 그리스도교적 봉건 사회의 정치적·사회적·종교적 특징과 그 고유성을 잘 드러내어 줄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하는 서양 중세인들의 삶과 세계관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에 관한 고찰을 통한 본 연구 결과물은 서양 중세사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정보와 연구 동기를 제공할 수 있다. 또한 본 연구 결과물은 비단 서양 중세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신학 연구자·정치학 연구자·사회학 연구자에게도 활용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 더불어 역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서양사 관련 교양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서양 중세 사회에 관한 지적 호기심이나 학습 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대학 강의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 강좌나 인문학 강좌에서도 본 연구 결과물은 충분히 학습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므로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그 활용 가치를 드높일 수 있다.
  • 연구요약
  • 임시적인 전투중지와 전투와 전투원에 관한 절제되고 정화된 그리스도교적 가치와 윤리의식을 갖추게 되는 신의 휴전운동으로 발전한 신의 평화운동은 11세기 서유럽에서 전개된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 중의 하나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과 더불어 제1차 십자군 원정은 물론이거니와 10세기말 프랑스 남부 샤루에서 시작하여 11세기 서유럽으로 급속히 확산된 그리스도교적 보편 가치를 실현시킨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평화운동은 신의 평화라는 이상과 가치를 전투력을 지닌 개인과 집단에게 제공함으로써 성전과 정화된 기사도라는 개념을 완성시켜 나가며 이를 바탕으로 종교적·도덕적 권위를 확립시키고자 하는 교회의 적극적인 개입과 의도가 잘 두드러지고 있다.
    비약적으로 팽창하는 세속 영주권에 대응하여 그리스도교적 사회 질서체제를 완성시켜야만 하는 중세 교회의 절박한 현실적인 요구와 이에 따른 뚜렷한 개혁의지는 중세 교회가 주도하는 새로운 사회 운동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신의 평화운동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반영주제적 혹은 무정부주의적 운동으로 평가하고 있는 경향이 강했다. 다시 말해서, 전투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스스로 무장할 능력을 갖춘 세속 영주와 기사들의 활동과 역할 등을 축소시키고 제한함으로써 기존의 사회질서를 부정하거나 파괴 혹은 전복시키려는 반영주제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였다. 또한 세속 군주나 영주에게 부여된 세속 통치권의 정당성과 의미를 부정하여 이를 대체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위를 교회에게만 부여하는 무정부의적 혁명운동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 연구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의 평화운동의 사회개혁운동의 성격을 바탕으로 하는 기능과 역할에 관한 고찰은 기존의 연구와는 구별되는 독창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평화운동은 기존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나 부정이 아니다. 스스로 무장할 수 없는 성직자를 포함한 비전투원의 현실적 자구책과 봉건적 그리스도교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주요한 대안으로써 제안된 신의 평화운동의 기능과 역할이 차지하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또한 비단 전투원과 비전투원이라는 자기방어를 현실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집단과 전투원의 전문적인 기술과 그 능력에 의존해야만 하는 비전투원들이 사법적 기능뿐만 아니라 비전투원들의 재산권과 소유권을 보호하고 가난한 상대적 약자들을 수용하는 현실적인 방법에서 신의 평화운동이 제안되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본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989년부터 시작하여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설파하는 클레르몽공의회까지, 즉 11세기에 해당된다. 그 공간적 범위로는 가장 전형적인 봉건사회의 성격을 보여주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신의 평화운동이 확산된 일부 에스파냐, 독일과 영국 등을 포함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과 긴장감으로 팽배한 1000년을 준비하는 시대적 배경과 구성원들의 정서를 파악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성서 해석을 바탕으로 종말론을 부정하고, 무능한 신앙인들을 반박하며 교회가 공포를 통해 사회 구성원들을 통제하는 권력을 강화시켜나가는 운동으로서 신의 평화운동을 설명하는 반공포주의 학파나 신의 평화는 곧 세속 군주의 평화로 대체되어지는 반영주제적 성격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1000년을 수용하고자 하는 당시대인들의 정서와 교회의 노력을 카롤링거의 전통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시도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11세기 전반 활발하게 전개되는 신의 평화운동은 1016년 베르덩 쉬르 르 두브(Verdun-sur-le-Doubs) 공의회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어 간다. 수도원장 오딜롱(Odilon)은 교회와 교회 재산을 보호할 것과 농민들의 재산을 훔치거나 인질을 납치하는 일, 그리고 비전투원인 성직자들을 공격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일련의 제재조항을 담고 있는 샤루 공의회의 내용을 준수함은 물론이거니와 부르고뉴의 기사들에게 정식 선서 요구와 함께 사순절을 지키는 기사들을 보호하는 조항을 덧붙이고 있다. 신의 평화운동의 개념에 신의 휴전운동(Treuga Dei)의 개념을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 연구에서는 신의 평화운동을 세속에서의 신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교회와 세속 제후들과 귀족들 사이의 우위권을 쟁취하려는 권력투쟁이나 갈등이 아닌 신의 의지와 섭리에 부합하는 공권력의 재정립과 봉건질서의 재편성을 위한 교회와 세속 권력의 새로운 사회개혁운동으로서 역할과 그 성격에 관한 접근을 시도하고 한다.
  • 한글키워드
  • 신의 평화운동, 신의 휴전운동, 샤루 공의회, 나르본 공의회, 클레르몽 공희외, 반공포주의학파, 제라르 드 캄브레, 아데마르 드 샤반느, 라울 글라베르, 가난한 이들(파우페레스), 힘없는 자들(이네르메스).
  • 영문키워드
  • the peace of God, the truce of God, the council of Charroux, the council of Narbonne, the council of Clermont, l'école de ‘anti-terreurs', Gérard de Cambrai, Adémar de Chabannes, Raoul Glaber, pauperes, inermes.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최초의 평화 공의회로 알려진 989년 샤루(Charroux) 공의회로부터 출발한 신의 평화운동(the peace of God, la paix de Dieu)은 임시적인 전투중지와 그리스도교적 전쟁도덕률을 갖춘 신의 휴전운동(the truce of God, la trêve de Dieu)으로 발전하였다. 신의 평화운동은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us) 7세의 개혁과 더불어 11세기 서유럽에서 전개된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신의 평화운동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반(反)영주제적 혹은 반(反)봉건적 운동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K. F. 베르너(Werner)나 D. 바르텔레미(Barthélemy) 와 같은 학자들은 신의 평화운동을 카롤링거의 전통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현실방안으로 설명한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강력한 공권력의 부재와 종말론적 위기 극복과 그리스도교적 봉건 질서의 재확립을 위해 중세 교회가 주도하는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과 그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신의 평화운동은 전투원에 대한 제재뿐만 아니라 불성실한 성직자들과 폭압적인 봉건 세속 권력자들에 맞설 수 있는 사회구성원들의 단결을 이끌어내는 사회운동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봉건질서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교회의 실천 의지와 개입은 신의 평화운동을 설파하는 여러 공의회로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먼저 신의 평화운동 관련 공의회를 크게 989년 샤루 공의회로부터 1041년 나르본느(Narbonne) 2차 공의회 전까지, 그리고 이후부터 교황 우르바누스(Urbanus)2세가 주재하는 1095년 클레르몽(Clermont) 공의회까지 크게 나누어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어서 신의 평화운동이 파문과 현실적인 제재조치 등의 실천력과 선서․성유골 숭배․단식 등 하나의 종교적 전례의식의 틀을 갖춰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또한 신의 평화운동 관련 공의회에서 제안된 파문과 전개 상황에 맞춰 채택된 금지조항의 분석은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이 지닌 사회운동의 실천적 성격과 역사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켜줄 것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의 평화와 휴전은 점점 영국 및 에스파냐 등 유럽으로 퍼져 나갔으며 그리스도교적 봉건 질서 확립을 위한 중요한 사회운동으로 성장하였다. 교황을 비롯한 대주교와 주교들 역시 신의 평화운동의 전개과정 속에서 세속 통치권의 의미를 부정하거나 축소시키기보다는 약화된 세속 군주권의 권위를 보완하고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은 그리스도교적 봉건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나 부정이라기보다 스스로 무장할 수 없는 성직자를 포함한 비전투원의 현실적 자기방어와 기존 질서를 지탱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은 파문과 현실적인 제재조치로 실천력을 겸비한 교회가 신의 평화와 정의에 부합하는 공권력과 봉건 질서의 재확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새로운 사회운동이었다.
  • 영문
  • In the 11th century, the peace of God, what we called, proposed firstly in the council of Charroux, was largely developed not only in France but also in Italy and in Spain. As a movement for the sake of protecting the non-armed and defenseless against the violence by the feudal seigneurs including knights equipped with armaments, the peace of God was actively received by kings, the aristocracy and the people. Certainly, it is needless to say that the churchmen were devoted to participate in this movement of the peace. At the council of Narbonne in 1041, the peace of God was said to be replaced to the truce of God that was certain ban to forbid violence during certain days and seasons, especially before Ester and Christmas. Finally, the councils treated by the peace of God led to Clermont in 1095 where was proclaimed the first crusade by the french pope.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the character of the peace of God in the 11th century where the weakness of king's power, the increasing of feudal seigneurs with their knights and the economic growth due to the social stability and the agricultural progress. It is truly that the peace of God was often regarded as a anti-seigneurial and anti-feudal movement by making trouble between the ecclesiastical power and the secular power. But, in this article, we can try to find the peace of God as the social movement that was endeavored to keep the christian feudal system of society in the 11th century. So, for answering this task, firstly, we examine the aspect of development of the peace of God from the council of Charroux in 989 to the Clermont in 1095. And then, we regard the peace of God as the social movement of reformation by the church in order to promptly meet the needs of the times in the 11th centur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최초의 평화 공의회로 알려진 989년 샤루(Charroux) 공의회로부터 출발한 신의 평화운동(the peace of God, la paix de Dieu)은 임시적인 전투중지와 그리스도교적 전쟁도덕률을 갖춘 신의 휴전운동(the truce of God, la trêve de Dieu)으로 발전하였다. 신의 평화운동은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us) 7세의 개혁과 더불어 11세기 서유럽에서 전개된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신의 평화운동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반(反)영주제적 혹은 반(反)봉건적 운동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K. F. 베르너(Werner)나 D. 바르텔레미(Barthélemy) 와 같은 학자들은 신의 평화운동을 카롤링거의 전통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현실방안으로 설명한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강력한 공권력의 부재와 종말론적 위기 극복과 그리스도교적 봉건 질서의 재확립을 위해 중세 교회가 주도하는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과 그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신의 평화운동은 전투원에 대한 제재뿐만 아니라 불성실한 성직자들과 폭압적인 봉건 세속 권력자들에 맞설 수 있는 사회구성원들의 단결을 이끌어내는 사회운동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봉건질서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교회의 실천 의지와 개입은 신의 평화운동을 설파하는 여러 공의회로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먼저 신의 평화운동 관련 공의회를 크게 989년 샤루 공의회로부터 1041년 나르본느(Narbonne) 2차 공의회 전까지, 그리고 이후부터 교황 우르바누스(Urbanus)2세가 주재하는 1095년 클레르몽(Clermont) 공의회까지 크게 나누어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어서 신의 평화운동이 파문과 현실적인 제재조치 등의 실천력과 선서․성유골 숭배․단식 등 하나의 종교적 전례의식의 틀을 갖춰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또한 신의 평화운동 관련 공의회에서 제안된 파문과 전개 상황에 맞춰 채택된 금지조항의 분석은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이 지닌 사회운동의 실천적 성격과 역사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켜줄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1) 연구결과의 학문적․사회적 기여도

    ① 본 연구의 결과물은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을 반영주제적 혹은 반봉건적 운동으로 파악했던 기존의 연구 경향과 이 주제에 관련된 국내 연구와 연구 결과가 충분하지 못한 현실에서 사회운동으로서의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과 그 역할을 재조명함으로써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②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과 그 역할에 관한 본 연구는 그리스도교적 봉건 사회의 정치적·사회적·종교적 특징과 그 고유성을 잘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를 바탕으로 하는 서양 중세인들의 삶과 세계관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③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가 붕괴된 서양 중세 사회의 기존 질서를 재정립하고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그리스도교적 가치관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보편적 질서 체제의 확립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사회개혁운동으로 설명될 수 있는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은 국내 서양 중세사 연구에 차지하는 의미가 크다.

    ④ 그리스도교적 봉건 질서를 통합하고 재정립하는 사회운동으로서 당시대의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시도했던 신의 평화운동은 글로벌적 네트워크와 원자화되고 있는 개인주의로 운영되는 오늘날 필요한 사회통합운동의 한 모델로 고려할 수 있다.

    2) 인력양성 방안

    ①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11세기 신의 평화운동의 성격에 관한 고찰을 통한 본 연구 결과물은 서양 중세사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정보와 연구 동기를 제공한다.

    ② 본 연구 결과물은 비단 서양 중세사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신학 연구자·정치학 연구자·사회학 연구자에게도 활용 가치를 제공한다.

    3)교육과의 연계 활용 방안

    ① 본 연구 결과물은 역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서양사 관련 교양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서양 중세 사회에 관한 지적 호기심이나 학습 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제공된다.

    ② 대학 강의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 강좌나 인문학 강좌에서도 본 연구 결과물은 충분히 학습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므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


  • 색인어
  • 샤루 공의회, 나르본느 공의회, 리모쥬 공의회, 엘느 공의회, 클레르몽 공의회, 신의 평화운동, 신의 휴전운동, 성유골숭배, 라울 글라베르, 교황 우르바누스2세, 교황 그레고리우스7세, 싸우는 사람들, 경작하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 일방신명재판, 가난한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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