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1930년대부터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중국의 만주나 간도, 하얼빈, 상해 등 조선인 밀집 지역을 배경을 집필된 소설을 대상으로, 유맹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재중조선인 집단의 자아상을 살핀 것이다. 유맹이란 본래 중국에서 사용되는 집단명사로 흔히 유민(wan ...
이 논문은 1930년대부터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중국의 만주나 간도, 하얼빈, 상해 등 조선인 밀집 지역을 배경을 집필된 소설을 대상으로, 유맹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재중조선인 집단의 자아상을 살핀 것이다. 유맹이란 본래 중국에서 사용되는 집단명사로 흔히 유민(wandering people)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문맥상으로 그 의미는 유랑민(displaced)과 부랑자(degenerate)로 나뉜다. 유맹은 유민(游民)이라는 의미에서 그저 빈둥거리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며 나쁜 짓을 일삼는다는 악한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한 개념이다. 특히 유맹은 민족주의 지사나 사회주의 혁명가 등 정치적 이상주의자와 결합하는 경우 기회주의적 변절자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글에서는 재중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유맹의 서사를 통해 망명이나 이주 등 다양한 목적에서 중국으로 옮겨간 조선인 집단이 정치적 이상주의나 개척자로서의 열정이 다했을 때 직면했던 위기의식의 표출 양상을 찾아내려 하였다. 세부 논점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정치적 이상주의가 소진되던 시기 이국행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사 군상이 유맹 집단으로 전이하게 되는 상황을 살핀다. 많은 조선인들이 청년 투사로서, 민족 지사로서, 개척자로서 중국으로 건너갔으되, 모두가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재중조선인 소설에 등장하는 유맹의 서사는 낯선 땅에서 이민족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는 조선인들의 이야기이되, 삶의 목적을 잃고 공동체에서 이탈한 부랑자가 되어 떠도는 조선인들의 이야기이다. 이에 유맹은 조선인 내부에 실제 존재했거나 혹은 그렇게 될까 두려워했던 변절자, 낙오자, 패배자 등 온갖 부정적인 자아상을 내포한 키워드가 된다. 김태준 「연안행」(1947), 최명익, 「심문」(1939), 요코미츠 리이치 「상하이」(1932), 안수길 「토성」(1942) 등의 소설을 살폈다.
두 번째는 유맹의 유형을 도시적 룸펜과 개척지의 부랑자로 나누어 논의하였다. 사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력하되 사회의 위선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청년층은 전형적인 도시룸펜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도시의 룸펜과 달리 만주나 간도 등 개척지 유맹의 군상은 국경지대의 밀수입자, 경찰첩자, 브로커, 아편상인, 호인의 심부름꾼 등이 되어 살아가는 부랑자들로 나타난다. 이들은 민족주의자에게 있어서나 사회주의자에게 있어서나, ‘조선민족이라기엔 부끄러운 부류들’로 인식되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유맹의 탄생이 정치적 이상주의나 개척자로서의 열정을 대신한 자리에 들어선 세속적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고 했을 때, 이러한 유맹의 자아상을 문학적으로 수용하는 대목은 작가의 자의식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서술자 자신이 유맹의 일원이기에, 지사의 땅에서 자라난 자기 분열의 맹아 앞에서 불안은 시작되는 것이다. 김광주 「남경로의 상공」(1935), 「포도의 우울」(1933), 안수길, 「북향보」(1941), 현경준 「유맹」(1940) 등의 작품을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는 국가나 민족 대신에 돈을 섬기는 유맹의 공포가 악의 자질과 연결되는 양상을 설명하였다. 유맹은 기존의 정치적 당위나 도덕윤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기에 그 자체로 ‘통제 불가능한 야수성’이나 ‘악’과 등가에 놓이게 된다. 내부에 자리 잡은 악을 어떻게 통제할 것이냐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안수길이나 현경준 등의 소설에 등장하는 자치촌락 구성이라는 주제는 비단 만주국 체제에의 협력이라는 차원이라기보다는, 유맹으로 전락해가는 조선인 군상에 일정한 소속집단을 부여해야 한다는 위기감의 차원에서 해석해볼 여지가 생긴다. 김동인 「붉은 산」(1932), 안수길 「원각촌」(1941)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