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 연구의 목표는 데리다(Jacques Derrida)와 아감벤(Giorgio Agamben)에 의한 벤야민(Walter Benjamin)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Critique of Violence」에 대한 해석의 차이점을 밝혀 이들의 해석의 차이는 데리다의 개혁적 입장과 아감벤의 혁명적 입장에 의한 것임 ...
1. 본 연구의 목표는 데리다(Jacques Derrida)와 아감벤(Giorgio Agamben)에 의한 벤야민(Walter Benjamin)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Critique of Violence」에 대한 해석의 차이점을 밝혀 이들의 해석의 차이는 데리다의 개혁적 입장과 아감벤의 혁명적 입장에 의한 것임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데리다는 「법의 힘: “권위의 신비한 토대” 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에서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표출되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divine violence)’과 나찌의 ‘최종 해결(final solution)’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능한 공모’에 대하여 우려를 드러내며 이러한 우려에 반응하는 것이 자신의 해체 작업의 ‘과업’이자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감벤은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에서, 이러한 데리다의 독해를 ‘극히 위험한 오해(misunderstanding)’라고 판단한다. 나아가 생명정치에 비판적인 아감벤의 관점에서 보면, 벤야민의 ‘신적 폭력’은 이러한 ‘가능한 공모’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데리다는 신적 폭력을 ‘법을 해체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아감벤은 신적 폭력을 ‘법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데리다는 ‘해체’를 ‘개선’으로 이해하며, ‘해체적인’ 신적 폭력은 ‘정립된 법’을 개선하여 ‘다시 정립(refounding)’ 하는 것으로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감벤의 ‘파괴적인’ 신적 폭력은 ‘정립된 법’을 ‘탈정립(deposition)’하는 것이다. 즉, 데리다와 아감벤의 차이는 ‘법’을 ‘다시 정립하기’와 ‘탈정립하기’의 차이이다. 요약하면, 본 연구의 핵심은 데리다와 아감벤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데리다의 ‘다시(re-)’와 아감벤의 ‘탈(de-)’을 분석하여 그것들이 ‘생명정치’와 관련된 정치적인 함의를 분석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구체적인 목표는 첫째, 데리다의 벤야민 논문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벤야민 읽기와 아감벤의 벤야민 읽기에 근거하여 데리다의 논거에 반박을 제기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벤야민에 대한 ‘오해’는 그의 ‘해체’적 ‘텍스트 읽기’의 논리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둘째, 데리다에 대한 반박의 논거로서 제시되는 벤야민과 아감벤의 ‘탈’이 내포한 혁명적인 면모를 제시하는 것이다. 아감벤이 ‘파괴’ 또는 ‘탈정립’을 통하여 노출시키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현실성’(actuality)을 가능하게 하는 유보된 ‘(비)잠재성’((im)potentiality)이다. 데리다는 ‘현실성’에 근거한 ‘다시 정립하기’를 주장하는 것이고 아감벤은 벤야민의 ‘탈’을 통하여 ‘현실성’아래에서 ‘(비)잠재성’을 읽어내고 그 혁명성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셋째, 아감벤의 ‘탈정립’으로 노출된 ‘(비)잠재성’에 의한 정치기획은 ‘현실성’에 기초한 생명정치기제와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을 때, 그 ‘혁명성’이 잘 드러나며 데리다로 하여금 우려하게 하는 ‘최종 해결’과 ‘신적 폭력’의 ‘공모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데리다가 우려하는 ‘최종 해결’과 ‘신적 폭력’의 ‘공모의 가능성’은 그가 ‘해체’적 입장에서 벤야민을 독해한 결과이다. 본 연구는 오히려 ‘신적 폭력’은 극단적인 생명정치의 예인 ‘최종 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정치기제의 정립을 ‘탈정립’시킨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더 나아가 본 연구는 ‘해체’의 ‘차이적 오염’에 의하여 ‘최종해결’과 ‘신적 폭력’의 ‘공모 가능성’을 우려하는 데리다와는 정반대로, ‘차이적 오염’에 기초한 독해는 오히려 ‘신적 폭력’을 생명정치로 ‘오염’시키는 결과에 이르게 됨을 밝힌다.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위해, 생명정치의 작동기제를 ‘탈정립’시키는 ‘신적 폭력’에 대한 논의는 ‘해체’의 텍스트적인 ‘차이적 오염’에 대한 논의보다 더 긴급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기대효과
1. 첫째, 본 연구는 학문적으로 아감벤의 벤야민 해석을 통하여, 현대정치사적 측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나찌의 ‘최종 해결’과 벤야민의 ‘신적 폭력’사이의 ‘가능한 공모’라는 데리다의 위험한 ‘오해’를 불식시킨다. ‘신적 폭력’과 ‘최종 해결’의 ‘공모의 가능성’은 ‘차 ...
1. 첫째, 본 연구는 학문적으로 아감벤의 벤야민 해석을 통하여, 현대정치사적 측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나찌의 ‘최종 해결’과 벤야민의 ‘신적 폭력’사이의 ‘가능한 공모’라는 데리다의 위험한 ‘오해’를 불식시킨다. ‘신적 폭력’과 ‘최종 해결’의 ‘공모의 가능성’은 ‘차이적 오염’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데리다가 ‘차이적 오염’으로 둘 사이를 ‘오염’시키기 때문에 발생한다. 벤야민의 ‘신적 폭력’은 ‘최종 해결’과의 ‘공모의 가능성’을 ‘말살’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최종 해결’로 이르게 되는 생명정치작동 기제를 ‘파괴’시킨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성’에 근거한 ‘행위’ 중심 기획에 초점을 둔 데리다의 ‘다시 정립하기’ 논의에 선행되어야 하는 아감벤의 ‘(비)잠재성’에 근거한 ‘무의’라는 행위를 하지 않는 행위를 통하여, ‘현실성’에 기초한 작금의 생명정치기제에 본격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진정한 정치행위’가 가능할 수 있다. ‘벌거벗은 삶’의 지루한 ‘생존’만을 생산하는 작금의 생명정치기제에 대항하여 생명정치의 작동으로부터 해방된 가능성으로 충만한 ‘삶’을 ‘구원’하는 정치기획이 가능하다.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 새로운 다른 대안적인 ‘덜 폭력적인’ 정치체계의 ‘발명’ 또는 ‘다시 정립하기’는 결국 ‘벌거벗은 삶’을 구출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기획에 의해 ‘다시 정립된’ 정치체제도 결국 ‘덜 폭력적인’ 생명정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 체제 내에서도 ‘벌거벗은 삶’은 생산되고 지루한 ‘생존’은 지속될 것이다. 또한 본 연구는 연구자들의 비판적 독해능력 향상 및 본 연구에서 제시되는 논점들에 대한 후속 연구들을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연구요약
1. 데리다와 아감벤의 해석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벤야민 논문의 핵심 어구는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rechtsetzend)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파괴적(rechtsvernichtend)이고, 전자가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후자는 이것들을 경계 없이 파괴한다”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정립 ...
1. 데리다와 아감벤의 해석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벤야민 논문의 핵심 어구는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rechtsetzend)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파괴적(rechtsvernichtend)이고, 전자가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후자는 이것들을 경계 없이 파괴한다”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정립’(setzung)에는 이미 “경계를 설(정)립하는 기구”가 작동한다. ‘정립’과 더불어 구분, 경계 나누기가 설정된다. ‘법정립적’인 ‘신화적 폭력’은 경계들을 설정하며, ‘법파괴적인’ 신적 폭력은 이것들을 파괴시킨다. 신적 폭력은 ‘법파괴적’(rechtsvernichtend)이란 벤야민의 독어 표현에서, ‘vernichtend’란 단어는 ‘소멸’ ‘파멸’의 의미를 지니는 접두사 ‘ver’와 ‘부정’을 의미하는 ‘nicht’로 구성되어 있는 이중 부정이다. 이 말은 닫힌 논리에 의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은 부정을 부정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이 말은 신적 폭력은 신화적 폭력에 의하여 ‘부정된 것을 부정한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신적 폭력’은 ‘신화적 폭력’의 정립을 위해 동원된 ‘폭력’(부정)을 파괴(부정)한다. 아감벤이 읽어내는 벤야민의 의도는 신적 폭력은 신화적 폭력에 의한 ‘경계의 설정’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정초적(founding) 폭력의 구조”를 언급하여 정초에는 폭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정초에는 데리다가 말하는 “시초의 폭력”이 발생한다. 데리다는 ‘시초의 폭력’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폭력’을 줄일 수 있는 ‘덜 치명적인,’ ‘덜 나쁜’ 폭력구조를 ‘발명’할 것을 주장한다. 이에 비해 아감벤은 ‘시초의 폭력’을 생산하는 구조를 ‘파괴’ 또는 ‘탈정립’할 것을 주장한다. 생명정치에 비판적인 아감벤은 ‘시초의 폭력’을 생명정치에 의한 삶의 포획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아감벤은 생명정치 작동 메커니즘을 ‘파괴’ 또는 ‘탈정립’시키려는 것이다. 벤야민과 아감벤은 ‘폭력’ 또는 ‘파괴’라는 용어를 쓰지만, 벤야민이나 아감벤이 주장하는 ‘파괴’ 또는 ‘탈정립’은, 정립에 동원된 ‘폭력적인’ ‘폭력’을 거부하기 또는 물러서기라는 ‘행위 아닌 행위’인 ‘무위’(in-opera-tive)라는 ‘비폭력적’인 방식을 취한다. 데리다와 아감벤의 대비는 데리다의 ‘시초의 폭력 구조’를 ‘덜 폭력적으로’ ‘다시 정립하기’ ‘행위’와 아감벤의 ‘시초의 폭력 작동 구조’를 ‘파괴’ 또는 ‘탈정립’시키는 ‘무위’로 이해될 수 있다. 심층적으로, 그들의 차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인 ‘현실성’과 ‘(비)잠재성’에 의하여 구분될 수 있다. 아감벤이 이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성’의 핵심은 현실성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 잠재성이 아니라, ‘현실성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는’ 잠재성의 측면에 있다. 현실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현실성으로 나아가지 않을 잠재성’이 자신의 ‘...않을’ 잠재성을 유보해야한다. 즉 어떤 행위는 그 행위를 하지 않을 잠재성이 유보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잠재성은 자신의 무능력과 관련을 갖는다.” 그러므로 “모든 잠재성은 비잠재성이다.’ 데리다의 ‘(불)가능성’의 예에 따라, 이것은 ‘(비)잠재성’이라 불릴 수 있다. ‘정립’된 것을 ‘다시 정립하자’는 데리다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성’에 기초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에 아감벤의 정립된 것을 ‘파괴’하는 ‘탈정립’은 ‘현실성’아래에서 ‘(비)잠재성’을 구출해낸다. 본 연구는 ‘현실성’에 의한 ‘생명정치’ 기획에 내재된 ‘폭력’에 ‘비폭력적’ ‘폭력’을 가하는 ‘무위’를 통하여, 이미 ‘현실성’의 생명 정치체계에 포획된 ‘벌거벗은 삶’을 해방시켜 ‘(비)잠재성’에 의한 가능성으로 충만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정치 기획을 벤야민과 아감벤의 저작에서 읽어낸다. 이미 ‘생명정치’ 체계에 포획되어 작동의 고리로 작동하는 ‘벌거벗은 삶’은 생명정치체계에 단순히 포획되지 않기라는 ‘무위’의 행위를 통하여 생명정치 작동을 중지시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벤야민과 아감벤은 ‘신적 폭력’이 인간의 역사에서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감벤은 ‘신적 폭력’적인 ‘무위의 행위’를 통한 “인간의 실천” 또는 “정치적 행동”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외부로부터 해방자로 오는 ‘타자의 도래’를 기다리고 그 이후에 ‘행위’를 하는 데리다의 ‘해체’의 기획과는 상반되는 자세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본 연구의 목표는 데리다의 정치 기계 작동 개선을 위한 정초를 개혁적으로 “다시 정립하기”와 아감벤의 정치 기계 작동을 중지시키기 위한 정초를 혁명적으로 ‘탈정립하기’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점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데리다와 아감벤에 의한 벤야 ...
본 연구의 목표는 데리다의 정치 기계 작동 개선을 위한 정초를 개혁적으로 “다시 정립하기”와 아감벤의 정치 기계 작동을 중지시키기 위한 정초를 혁명적으로 ‘탈정립하기’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점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데리다와 아감벤에 의한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Critique of Violence」읽기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이 저작에서 본 연구의 핵심 주제인 ‘정립’과 ‘탈정립’의 대비가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법의 힘: 권위의 신비한 토대 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에서 벤야민의「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Critique of Violence」에서 표출되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과 나찌의 ‘최종 해결’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능한 공모’에 대하여 우려를 드러내며 이러한 우려에 반응하는 것이 ‘과업’이자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감벤은 이러한 데리다의 독해를 ‘극히 위험한 오해’라고 판단한다. 아감벤이 해석하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은 이러한 ‘가능한 공모’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데리다와 아감벤의 첨예하게 대비되는 지점은 벤야민의 ‘신적 폭력’에 대한 해석이다. 데리다는 신적 폭력을 ‘해체적인 것’으로 이해하며 아감벤은 신적 폭력을 ‘파괴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데리다는 ‘해체’를 ‘개선’으로 이해하며, ‘해체적인’ 신적 폭력은 ‘정립된 것’을 개선하는 것으로 주장하려는 것이다. 아감벤의 ‘파괴적인’ 신의 폭력은 ‘정립된 것’을 ‘파괴’ 또는 ‘탈정립’하는 것이다. 아감벤의 ‘파괴’ 또는 ‘탈정립’은 정립에 동원되기라는 ‘시초의 폭력’을 거부하기라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은 폭력처럼 보이지 않는다. 즉, 데리다와 아감벤의 차이는 개혁적인 ‘다시 정립하기’와 정립을 포함한 혁명적인 ‘탈정립(파괴)하기’의 차이이다.
영문
This paper aims to analyze the opposing political positions between Derrida’s reformative ‘re-founding’ politics and Agamben’s revolutionary ‘de-posing’ politics. Derrida proposes to reform operational mechanism of politics but Agamben proposes to de ...
This paper aims to analyze the opposing political positions between Derrida’s reformative ‘re-founding’ politics and Agamben’s revolutionary ‘de-posing’ politics. Derrida proposes to reform operational mechanism of politics but Agamben proposes to depose the operational mechanism of politics. For this purpose, this paper begins with Walter Benjamin’s essay of “Critique of Violence” since in their respective reading of this essay, the contrast between Derrida’s political program of ‘re-founding’ and Agamben’s ‘de-posing’ can be clearly exposed. In his “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 Derrida reads Benjamin’s essay and expresses his concerns about the ‘possible implication’ that could arise between Benjamin’s ‘divine violence’ and ‘Nazi’s final solution’ and claims that it would be contemporary ‘task’ and ‘responsibility’ to respond to these concerns. But Agamben shows his deep disagreement with Derrida’s reading by saying that Derrida’s reading is ‘a dangerous misunderstanding.’ Agamben claims that Benjamin’s ‘divine violence’ destroys any ‘implication’ between divine violence and Nazi. What makes them stand on the opposing sides is their contrasting interpretations on Benjamin’s ‘divine violence.’ Derrida interprets ‘divine violence’ in relation with ‘deconstructive approach.’ But Agamben analyzes ‘divine violence’ as ‘destructive.’ With ‘deconstructive’ ‘divine violence,’ Derrida proposes reformation of ‘founding’ violence because he understands deconstruction in terms of reformation. On the contrary, Agamben’s ‘destructive’ ‘divine violence’ destructs what was founded or derails it. Agamben’s destruction or deposition has a strategy of refusing of any foundational violence served as the ‘founding violence’ of any political system. This ‘destructive’ violence does not appear as a violence. The difference between Derrida and Agamben is that between reformative ‘re-founding’ and revolutionary ‘deposing’ including ‘founding’ itself.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본 연구는 데리다의 정치 기계 작동 개선을 위한 정초를 개혁적으로 “다시 정립하기”와 아감벤의 정치 기계 작동을 중지시키기 위한 정초를 혁명적으로 ‘탈정립하기’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점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데리다와 아감벤에 의한 벤야민의 「 ...
본 연구는 데리다의 정치 기계 작동 개선을 위한 정초를 개혁적으로 “다시 정립하기”와 아감벤의 정치 기계 작동을 중지시키기 위한 정초를 혁명적으로 ‘탈정립하기’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점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데리다와 아감벤에 의한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Critique of Violence」읽기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이 저작에서 본 연구의 핵심 주제인 ‘정립’과 ‘탈정립’의 대비가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법의 힘: 권위의 신비한 토대 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에서 벤야민의「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Critique of Violence」에서 표출되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과 나찌의 ‘최종 해결’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능한 공모’에 대하여 우려를 드러내며 이러한 우려에 반응하는 것이 ‘과업’이자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감벤은 이러한 데리다의 독해를 ‘극히 위험한 오해’라고 판단한다. 아감벤이 해석하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은 이러한 ‘가능한 공모’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데리다와 아감벤의 첨예하게 대비되는 지점은 벤야민의 ‘신적 폭력’에 대한 해석이다. 데리다는 신적 폭력을 ‘해체적인 것’으로 이해하며 아감벤은 신적 폭력을 ‘파괴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데리다는 ‘해체’를 ‘개선’으로 이해하며, ‘해체적인’ 신적 폭력은 ‘정립된 것’을 개선하는 것으로 주장하려는 것이다. 아감벤의 ‘파괴적인’ 신의 폭력은 ‘정립된 것’을 ‘파괴’ 또는 ‘탈정립’하는 것이다. 아감벤의 ‘파괴’ 또는 ‘탈정립’은 정립에 동원되기라는 ‘시초의 폭력’을 거부하기라는 방식을 취한다. 이것은 폭력처럼 보이지 않는다. 즉, 데리다와 아감벤의 차이는 ‘다시 정립하기’와 ‘탈정립(파괴)하기’의 차이이다. 본 연구의 구체적인 목표는 첫째, 데리다의 ‘오해’에 대하여 아감벤의 벤야민 읽기에 근거하여 데리다의 논거에 반박을 제기하는 것이다. 둘째, 데리다의 벤야민에 대한 ‘오해’는 그의 해체적 정치학의 논리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셋째, 데리다에 대한 반박의 논거로서 제시되는 아감벤의 정치학의 ‘혁명적’ 면모를 제시하는 것이다. 데리다에 대한 아감벤의 반론은 아감벤의 저작 전체를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감벤의 정치학은 기존의 정치학이 강조하는 현실성에 근거한 ‘행위’ 중심의 논의가 보여주지 못한 ‘(비)잠재성’이 표출되는 ‘무위’-행위를 하지 않는 행위-를 통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판단된다. 이 연구의 방법으로 본 연구자는 이러한 상반된 주장에 대한 분석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첫 번째 방식은 데리다의 벤야민 해석을 벤야민과 아감벤에 의한 벤야민 해석을 통하여 반박 또는 비판하는 방어적이며 소극적인 방식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아감벤의 정치학에 대한 주장을 통하여 데리다의 벤야민 해석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데리다 정치학의 문제점을 밝히는 공세적이며 적극적인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두 가지 접근 방식은 모두 데리다에 의한 벤야민 해석의 문제점을 노출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아감벤에 의하여 제시되는 새로운 정치학의 가능성을 드러낼 것이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학문적,사회적 기여도: 첫째, 본 연구는 학문적으로 아감벤의 벤야민 해석을 통하여, 현대정치사적 측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나찌의 ‘최종 해결’과 벤야민의 ‘신적 폭력’사이의 ‘가능한 공모’라는 데리다의 위험한 ‘오해’를 밝힌다. ‘신적 폭력’과 ‘최종 해결’의 ‘공모 ...
학문적,사회적 기여도: 첫째, 본 연구는 학문적으로 아감벤의 벤야민 해석을 통하여, 현대정치사적 측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나찌의 ‘최종 해결’과 벤야민의 ‘신적 폭력’사이의 ‘가능한 공모’라는 데리다의 위험한 ‘오해’를 밝힌다. ‘신적 폭력’과 ‘최종 해결’의 ‘공모의 가능성’은 ‘차이적 오염’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데리다가 ‘차이적 오염’으로 둘 사이를 ‘오염’시키기 때문에 발생한다. ‘차이적 오염’은 층위나 서열이나 범주를 무조건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벤야민의 ‘순수한’ ‘신적 폭력’은 ‘최종 해결’과의 ‘공모의 가능성’은 말 할 것도 없고 ‘최종 해결’로 이르게 되는 생명정치작동 기제를 ‘파괴’시킨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성’에 근거한 ‘행위’ 중심 기획에 초점을 둔 데리다, 지젝, 고진 등의 정치학 논의에 선행되어야 하는 아감벤의 ‘(비)잠재성’에 근거한 ‘무의’라는 행위를 하지 않는 행위를 통하여, ‘현실성’에 기초한 작금의 생명정치기제에 본격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진정한 정치행위’가 가능할 수 있다. 인력양성방안 및 교육과 연계활용: 본 연구는 항상 같은 문제점으로 귀착하게 될 고진, 지젝, 데리다의 주장에서 읽히는 ‘현실성’에 근거한 ‘행위’ 중심의 논의로부터 벗어나 ‘무위’라는 ‘행위 아닌 행위’가 지닌 폭발적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벤야민과 아감벤의 ‘파괴’ ‘단절시키기’란 표현을 보면, ‘현실성’에 근거한 행위의 적극성이나 공격성이 감지될 수 있지만, 이는 행위에 동원되기를 거부하기라는 ‘비폭력적인’ 방식이 ‘현실성’의 ‘행위’의 측면에서 보여 지는 측면이다. ‘무위’는 결국 ‘행위’에 동원되기 적극적으로 거부하여 행위에 요구되는 수단-목적의 연결고리를 ‘파괴’시키고 ‘단절’시킨다. ‘무위’는 바틀비의 행위에서 드러나듯, 행위를 하지 않는 적극적 행위이다. 이것은 지젝이 주장하는 ‘수동적 능동’이다. 지젝은 이러한 물러섬의 행위를 통하여 헤게모니적 주장을 부정함으로써 그 공간 내부에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고 주장한다. 이 새로운 공간은 ‘다시’ ‘새롭게’ ‘독창적으로’ 다른 것들이 정립될 수 있는 토대 또는 터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