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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제(正德帝)의 남순(南巡)과 남경(南京)
The Southern Tour of Zhengde Emperor and Nanjing in Ming dynast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3S1A5A2A01019381
선정년도 2013 년
연구기간 1 년 (2013년 05월 01일 ~ 2014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조영헌
연구수행기관 고려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중국 근세 수도론(首都論)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특히 명대 남경이 수도(首都)에서 배도(陪都, auxiliary capital) 혹은 부도(副都, second capital)로 그 위상이 하락된 이후 어떤 기능을 수행했고 또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밝혀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수도와 배도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황제 순행(巡幸)을 분석함으로써 기존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명대 양경제(兩京制)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이전 시대인 원(元), 이후 시대인 청(淸)과의 비교 관점에서 파악해보고자 한다.
    남경이 중국의 수도로 기능했던 시기는 삼국시대의 오(吳), 동진(東晋), 송·제·양·진의 남북조(南北朝) 시대, 남당(南唐)과 명초(明初), 그리고 민국시대의 남경국민정부(南京國民政府) 기간으로 정리될 수 있다. 북경(北京, 수도 기간 903년)이나 장안(長安, 수도 기간 1077년)만큼 오랜 기간 수도의 자리에 있지는 않았으나 약 450년 동안 수도였던 남경은 늘 장안, 북경, 낙양(洛陽), 개봉(開封)과 함께 중국의 ‘5대 고도(古都)’ 가운데 하나로 불리어왔다.
    하지만 남경이 수도였던 시기의 중국은 남과 북이 대치 국면을 이루는 일종의 분열기라는 점이 주목된다. 크게 보면, 첫째는 육조시대(六朝時代, 3∼6세기)에, 둘째는 간헐적이지만 명대 이후 중화민국에 해당하는 14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남경은 남북 대치의 국면에서 남쪽 세력의 근거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곧 남경이 남과 북을 아우르는 전국적인 수도로 기능하는데 일정한 한계점이 있던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명초 남경이 수도로 확정되는 과정 역시 그다지 간단하지 않았다. 남경에 공식적으로 ‘경사(京師)’의 칭호가 부여된 것은 명조가 개창된 지 10년이 지난 1378년의 일이었다. 그 사이 남경은 개봉, 봉양(鳳陽), 북경 등의 도시들과 경합을 벌였다. 그리고 ‘경사’의 칭호를 부여받은 지 40여년 만인 1421년 남경은 다시 ‘경사’의 지위를 북경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수도 북경과 배도 남경이라는 양경(兩京) 구조가 다시 확립된 셈이다.
    이후 수도 남경을 전제로 강남 경제의 안정적 유지가 최우선 과제였던 이른바 ‘남경체제(南京體制)’는 그 생명력을 잃었다. 덩달아 남경의 위상 역시 ‘배도(陪都)’ 혹은 ‘유도(留都)’로 하락하였다. 명목상 남경은 북경과 함께 ‘양경(兩京) 체제’를 형성하여 명말까지 이어지지만, 그 정치적 위상은 점차 하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 중심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강남에서 북경까지 곡물을 안정적으로 운송하는 조운(漕運)이 중요해졌고, 그 와중에 강남 경제 중심지로서의 주도권 역시 대운하에 인접하고 미곡 유통의 중심적 역할을 감당했던 소주(蘇州)로 이전되었다.
    그렇다면 명대 북경 천도 이후의 남경을 종합적으로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가? 천도 이후 남경은 강남 지역의 여러 도시군 가운데 하나로 전락한 것인가? 그렇다면 명조는 왜 이처럼 유명무실해 보이는 남경을 명말까지 배도(陪都)로 인정하고 그 위상을 수도와 같은 ‘경(京)’으로 유지했던 것일까? 수도와 배도라는 타이틀 속에서 명조는 서북 지역에 치우친 북경에 수도를 두면서도 제국을 통합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을 구사했던 것은 아닐까?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감으로써, 종국적으로 남경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원·명·청의 세 시대 6백여 년 동안 수도로 기능했던 북경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첫째, 북경 수도론 연구에 대한 기여
    본 연구의 주된 분석 지역은 남경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수도 북경과 대응하는 양경제의 한 축인 남경이다. 특히 명의 수도 북경과 배도 남경의 관계성이 제국의 통합적 운영에 기여하는 바가 규명된다면, 이는 원·명·청으로 이어지는 북경 수도론이라는 거대 담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북경 수도론에 있어 수도 북경과 이를 보완하는 배도의 관계성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인데, 원의 대도-상도 관계, 청의 북경-성경-승덕 관계와 비교할 때 명의 북경-남경 관계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사실만 지적될 뿐 구체적인 특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이러한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고려할 때, 명대 남경의 위상 연구는 그 공백을 메꾸는 것일 뿐 아니라, 북경을 정치적 중심으로 제국을 통치하던 후기 중화제국의 수도론 연구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한다.

    둘째, 명대 정치사에 대한 재조명
    정덕제의 남순에 나타난 황제의 ‘이동성’과 원의 유산을 강조하는 본 연구를 통해 명대 정치사에 대한 활발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리라 예상된다. 통치권자의 권력 행사 방식에 따라 “의례적 왕권(ritual kingship)”과 “사적 왕권(personal kingship)”을 구분할 때, 명조의 황제권은 대체로 유교적 명분과 관료제를 중시하는 “의례적 왕권”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명초 홍무제와 영락제 이래 잔존하던 몽골의 유산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는 상황에서, 유교적 명분론으로 훈육된 관료들이 바라본 정덕제와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필요하다. 특별히 수도인 북경을 떠나 북변으로의 친정과 남경으로의 순행을 진두지휘했던 정덕제에 대해서도 그 복합적인 의도 및 효과에 대해서 “의례적 왕권”이 아니라 “사적 왕권”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따라서 비록 정덕제 이후로 명 정치사의 흐름은 확실히 “의례적 권력”으로 기울어가지만, 정덕제의 남순과 그의 행적을 새로운 각도에서 분석함으로써 명대 정치사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논쟁을 야기하리라 기대한다.

    셋째, 황제 순행에 대한 전후 시대와의 연관성
    정덕제의 순행은 그 이후에 진행된 청 강희제와 건륭제의 남순과 그 경로는 유사하지만, 구체적인 목적과 방식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선 시대 유목 군주들이 순행과도 차별되는 특징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정덕제의 남순에 담겨 있는 순행의 다양한 의도와 효과들을 밝혀낼 수 있다면,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황제 순행에 대한 이해를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특별히 청대 황제 남순과의 비교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줄 것이다.

    넷째, 대운하의 도시 생활사 연구에 자극
    항주와 북경을 잇는 대운하는 1415년 본격적으로 재개통되고 1421년 북경 천도가 완료되었기에, 사실상 명대 대운하를 이용하여 순행을 진행하면서 기록을 남겼던 황제는 정덕제가 유일했다. 따라서 정덕제 남순에 관한 실록, 정사, 문집, 지방지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본다면, 16세기 초기 대운하의 운영 실태와 대운하 연변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기존의 시각과는 다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황제가 방문했던 종교 사원 및 종교적 행위를 도시의 사묘(祠廟) 문화와 연결해 봄으로써, 향후 대운하의 종교 문화 전파와 도시 네트워크의 관련성을 모색하려는 최근의 연구 경향성에도 큰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1) 남순의 명목적 목적이었던 반란 진압에 대한 재평가
    정덕제의 남순을 촉발시킨 계기는 1519년(정덕14년) 강서성(江西省)에서 발생한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의 반란이었다.
    문제는 정덕제가 수백 명의 호종 인원과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경을 출발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주신호가 왕수인(王守仁)에 의하여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달되면서 발생했다. 사실상 남순의 가장 큰 명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덕제는 남경까지 도착했다. 따라서 북경 출발 직후부터 대학사 양정화(楊廷和)를 비롯하여 수많은 관리들이 황제의 귀환을 줄기차게 요청했고, 이러한 요구를 묵살했던 정덕제의 남행에 대한 평가 역시 여색과 주흥을 위한 객기에 가까운 유람이라고 평가해왔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적지 않다. 먼저 남순을 결정하기 이전에도 수차례 북변의 선부(宣府)에 나아가 군대를 지휘했던 정덕제는, 남순 직전에도 양화진(陽和鎭)에서 몽골 부흥의 아버지라 불리는 다얀 칸(Dayan Khan, r.1487-1524)의 군대와 싸워 승리를 획득한 바 있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진행된 남쪽으로의 친정이므로, 비록 반란의 주모자인 주신호는 체포되었더라도, 주신호와 연루된 광범위한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이 혼란해진 남방 지역을 안정시키는데 있어 황제의 순행을 반드시 기이한 유람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남순 과정에 주신호에 연루된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처벌하며, 이동하는 행궁에서 북변 방어와 관련된 문제를 끊임없이 처리할 뿐 아니라, 남경을 출발하기 전 주신호를 접수하여 직접 호송해오는 과정, 남경에서 환도하자마자 바로 치안이 불안했던 선부로 직접 나아갔던 행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정덕제의 남순을 통해 남경을 중심으로 한 남방 지역의 치안과 기강이 한결 강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남순 과정과 일정에서 파악할 수 있는 황제의 행동 분석
    정덕제는 북경을 출발해서 남경에 도착하기까지 123일, 다시 남경에서 약 9개월, 그리고 다시 남경에서 북경까지 약 115일을 소요했다. 그 과정에 정덕제의 행실에 대한 󰡔명실록󰡕의 기록은 대단히 흥미롭다. 그 가운데는 정덕제의 남순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문인들이 남긴 기이한 행적에 대한 기록이 많지만, 예외도 존재한다.
    주목할 만한 행적으로 의진(儀眞)에 도착한 정덕제가 돼지에 대한 사육과 취식을 금지했던 “금저령(禁猪令)”이 있다. 당시 대학사 양정화는 이러한 금령이 황제의 성인 “주(朱, zhu)”와 돼지의 “저(猪, zhu)”가 발음상 같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당시 정덕제는 돼지고기가 불결하여 병을 일으킨다는 언급을 한 바 있는데, 이는 이슬람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 정덕제의 호종단과 남경에는 귀부(歸附)했던 무슬림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정덕제가 남경에 도착하기 직전인 의진에 도착하자마자 “금저령”을 내린 것은 즉흥적인 기행이라기보다는 이 명령에 영향을 받을 대상, 즉 남경과 그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무슬림 및 금의위 군사들을 위무하기 위한 대단히 정치적인 행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3) 최종 목적지인 남경 체류 기간의 행적 파악
    정덕제는 남경에서 거의 9개월 가까이 머물렀다. 이 9개월 동안의 󰡔명실록󰡕을 보면 놀라운 정도로 황제의 행적에 대한 구체적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물론 남경에 도착했을 때 태묘(太廟)를 찾아가 제사를 지냈고, 9개월 후 남경을 출발하기 앞서 효릉(孝陵)에 배알했던 기록은 있지만, 그 중간의 행적이 묘연하다.
    유일하게 포착되는 행적은 1520년(정덕15) 6월의 어느 날 밤 황제가 주위에 알리지 않고 우수산(牛首山)에 행차하여 하루를 묵었던 일이다. 수도인 북경에서 황제의 빠른 귀환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와중에 정덕제가 남경에서 별다른 일 없이 9개월 가까이 체류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남경 지역의 지방지와 호종했던 관료들이나 남경 출신 관료들의 문집 등을 분석하여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과제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명의 11번째 황제 正德帝(치세 1506-1521)가 수행했던 南巡(southern tour)의 목적과 남순 일정을 구체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남순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덕제의 남순이 기존의 평가처럼 단순히 황제 개인의 쾌락을 위한 소모적인 여행이 아니라 副都(second capital) 南京의 전략적 중요성을 확인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순찰의 성격이 강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元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했던 明의 洪武帝나 永樂帝처럼 정덕제 역시 南巡을 통해 보다 광범위하고 자유로운 황제권을 행사하고 싶었으며, 당시 마이너리티였던 무슬림 등 외국인에 대한 포섭의 의도까지 포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영문
  • The aim of this research is to provide the new interpretation of the Ming’s 11themperor, theZhengde’s southern tour. In order to do so, this paper specifically re-evaluated the purpose and the schedule of the Zhengde’s southern tour. The research found that the Zhengde emperor’s southern tour should not be simply seen as a leisure to please emperor himself, but rather it has a significant patrol characteristic to ensure the second capital, Nangjing and its strategic importance. Furthermore, just like the Ming’s Hongwu and Yongle emperors, who inherited the political legacy of Yuan, the Zhengde emperor also wanted to achieve re-evaulated emperor’s power and able to impose it more freely through his southern tour. Additionally, the paper confirmed that the Zhengde’s intention to subsume minorities such as Muslims and other foreigners at the tim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明朝의 11번째 황제 正德帝(치세 1506-1521)가 수행했던 南巡(southern tour)의 목적과 남순 일정을 구체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남순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기존에 정덕제의 남순에 대해서는 단순히 황제 개인의 쾌락을 위한 소모적인 여행이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따라서 “황당천자(荒唐天子)”의 객기에 가까운 유람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明實錄󰡕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을 통해 진행했던 본 연구를 통해, 정덕제의 남순에는 수도 북경의 副都(second capital)였던 南京의 전략적 중요성을 확인하는 대단히 중요한 순찰의 성격이 강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덕제가 남순 직전 북변 방어를 위해 취했던 행동과 남순 과정에서 취했던 군사적 결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정덕제의 남순을 통해 남경을 중심으로 한 남방 지역의 치안과 기강이 한결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 나아가 元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했던 明의 洪武帝나 永樂帝처럼 정덕제 역시 南巡을 통해 보다 광범위하고 자유로운 황제권을 행사하고 싶었으며, 당시 마이너리티였던 무슬림 등 외국인에 대한 포섭의 의도까지 포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정덕제의 남순을 명초 영락제의 양경 순행 및 쿠빌라이 칸 이래 원 황제들의 양도 순행과의 일정한 관련성 속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커진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 결과 정덕제의 남순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정덕제의 남순은 단순히 황제가 女色과 酒興을 추구하는 소모적인 여행으로만 볼 수 없으며, 수도 북경의 副都(second capital)였던 南京의 전략적 중요성을 확인하는 대단히 중요한 순찰의 성격이 강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덕제는 남순 직전에도 陽和鎭에서 몽골 부흥의 아버지라 불리는 다얀 칸(Dayan Khan, r.1487-1524)의 군대와 싸워 승리를 획득한 바 있었다. 또한 남순 과정에 朱宸濠에 연루된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발각·처벌하며, 이동하는 行宮에서 북변 방어와 관련된 문제를 끊임없이 처리할 뿐 아니라, 남경을 출발하기 전 주신호를 접수하여 직접 호송해오는 과정, 남경에서 환도하자마자 바로 치안이 불안했던 선부로 직접 나아갔던 행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정덕제의 남순을 통해 남경을 중심으로 한 남방 지역의 치안과 기강이 한결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 정덕제는 남순을 통해 元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했던 明의 洪武帝나 永樂帝처럼 보다 광범위하고 자유로운 황제권을 행사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당시 마이너리티였던 무슬림 등 외국인을 포섭하고 라마 승려 등을 중용했던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최근 명 황실의 성격에 대한 재평가를 내리는 연구, 즉 정덕제가 元의 유산 속에서 더 尙武的이며 세계적인 황제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고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정덕제의 남순을 명초 영락제의 양경 순행 및 쿠빌라이 칸 이래 원 황제들의 양도 순행과의 일정한 관련성 속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더 커진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다음과 같은 활용이 가능하다.


    첫째, 북경 수도론 연구를 풍성하게 할 수 있다. 본 연구의 주된 분석 지역은 남경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수도 북경과 대응하는 양경제의 한 축인 남경이다. 특히 명의 수도 북경과 배도 남경의 관계성이 제국의 통합적 운영에 기여하는 바가 규명된다면, 이는 원·명·청으로 이어지는 북경 수도론이라는 거대 담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명대 정치사에 대한 재조명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정덕제의 남순에 나타난 황제의 ‘이동성’과 원의 유산을 강조하는 본 연구를 통해 명대 정치사에 대한 활발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리라 예상된다. 정덕제 이후로 명 정치사의 흐름은 확실히 “의례적 권력”으로 기울어가지만, 정덕제의 남순과 그의 행적을 새로운 각도에서 분석함으로써 명대 정치사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논쟁을 야기하리라 기대한다.

    셋째, 황제 순행에 대한 전후 시대와의 연관성 확인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진시황과 한무제의 순행 이래 유목민인 북위 황제들의 순행, 그리고 원과 청의 황제들의 순행에 이르기까지 황제 순행은 국가 통일의 과시, 경유 지역민에 대한 안위(安慰), 정치적 본거지에 대한 통제, 종교적 회유, 명승지에 대한 유람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정덕제의 순행은 그 이후에 진행된 청 강희제와 건륭제의 남순과 그 경로는 유사하지만, 구체적인 목적과 방식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중국의 전통적인 황제 순행에 대한 이해를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특별히 청대 황제 남순과의 비교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줄 것이다.
  • 색인어
  • 정덕제, 남순, 남경, 원의 유산, 무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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