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주제는 남북조 시대 중국에서 활약한 인도의 번역승인 眞諦(Paramārtha, CE. 499-569)가 창안한 阿摩羅識(*amala-vijñāna) 개념을 그의 문헌 속에서 검토하려는 것이다. 중국불교에서 유식학의 수용과 발전은 진제의 번역과 저작 그리고 그의 섭론학파가 끼친 영향을 ...
본 연구의 주제는 남북조 시대 중국에서 활약한 인도의 번역승인 眞諦(Paramārtha, CE. 499-569)가 창안한 阿摩羅識(*amala-vijñāna) 개념을 그의 문헌 속에서 검토하려는 것이다. 중국불교에서 유식학의 수용과 발전은 진제의 번역과 저작 그리고 그의 섭론학파가 끼친 영향을 제외하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당시 중국불교에서 진제의 번역과 해석, 특히 阿摩羅識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후대에 끼친 사상사적 영향 검토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진제는 ‘때를 여읜(amala, 無垢) 識’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말라식(*amala-vijñāna)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비록 현존하는 그의 저작 중에 아말라식을 다른 8식과 병행하는 독립된 제9식이라는 기술은 찾아볼 수 없고, 따라서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지속되고 있지만, 최근 吉村誠(2007, p. 177ff.)은 진제에 의해 제기된 아말라식이 섭론학파에 의해서 제9식으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초기 섭론학파의 학자들에 의해 아말라식은 제9식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이를 독립된 식으로 확립한 것은 후대 섭론학자들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지론종 남도파에 속하는 혜원이나 천태지자의 저작 속에서 이미 아말라식이 제9식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吉村誠의 주장에 대해 大竹(2012, p. )은 원측의 저작에 인용된 진제의 구식장에 담긴 내용을 근거로 해서 그 언명의 사실성을 증명함으로써 구식장의 ‘존재’를 입증하고 이에 따라 9식설은 진제설로 귀속될 수 있다고 하는 관점을 다시 제시하고 있다.
적어도 그의 학설을 계승한 섭론학파에서 아말라식이 독립된 제9식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제9 아말라식이 전통적인 유식학파의 8식설과 충돌하게 된다. 인도의 유식학파에서는 아비달마의 6식설을 비판하면서 8식설을 제시하는데, 8식이란 眼識~意識의 6종 식(vijñāna)과 제7 染汚意(klișṭaṃ manas), 제8 알라야식(ālaya-vijñāna)으로서, 이는 무착(無著, Asaṅga, 약 4세기)의 섭대승론에서 확립된 것이지만, 총체적인 식의 숫자나 명칭에 대해서 유식학파 내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론종 논사들의 다양한 식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진제는 아말라식 개념을 인도 유식학의 핵심 주제인 삼성설에서 진실성의 해석과 관련시키기 때문에, 이 개념의 사상사적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성설의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보인다. 이 경우 아말라식을 식의 구조 하에서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본고는 그의 아말라식설과 삼성설 간의 관계를 논구하기 위해 그의 저작 중에서 특히 해설문헌적 성격을 가진 번역문헌에 주목했다. 특히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아말라식이 언급되어 있는 진제의 4종 현존 번역문헌이다. 특히 <삼무성론>에서는 <결정장론>에서 전의의 대체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아말라식이 전의 개념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삼무성론>에서 양자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면 이는 진제가 단지 전의의 대체개념으로 사용했던 <결정장론>의 용례와는 다른 의미를 아말라식 개념에 부여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결론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이제까지의 연구를 요약해서 말하자면, 전의와 구별되어 사용된 이유는 바로 이런 아말라의 무변이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닐까? 전의는 다른 상태로의 변화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전의가 Sakuma가 구분하듯이 ‘변화모델’에 서 있는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설사 ‘대체모델’의 측면에서도 낡은 상태가 소멸하고 그것은 다른 새로운 존재론적 상태로 대체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이 경우 진여청정으로 대체된다고 할 때 하나의 논리적 문제점이 생겨난다. 진여는 무위적인 것이고 무시이래 그러한 것, 즉 불변하는 것인데, 이를 변화 개념과 결부된 전의 개념으로 파악하기 곤란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진제는 궁극적 존재의 무변이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말라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의 나타남은 대체모델로 설명되기보다는 ‘現成모델’로 이해되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아말라, 즉 無垢한 것에 ‘識’ 개념을 덧붙임으로써 마치 식설의 맥락에서 설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진제가 말하는 아말라식이 자성청정심과 동의어라면, 즉 식을 보다 유연한 맥락에서 사용한 것이라면, 이를 굳이 식설의 맥락에서 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 삼성설의 맥락에서 아말라식의 설명을 고려할 때 진제의 아말라식을 제9식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식을 초월한 궁극적 존재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