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축 명제의 성격과 역할을 해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는 나폴레옹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검사하지만, 나폴레옹에 관한 모든 보고들이 착각과 속임수 같은 것들에 의거하고 있는지 여부는 검사하지 않는다. 그 검사에는 끝이 있다. ...
본 연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축 명제의 성격과 역할을 해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는 나폴레옹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검사하지만, 나폴레옹에 관한 모든 보고들이 착각과 속임수 같은 것들에 의거하고 있는지 여부는 검사하지 않는다. 그 검사에는 끝이 있다. 증거의 정당화는 어디선가 멈춰야 한다. 우리가 더 이상 근거를 파고 들어갈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는데, 그 지점을 비트겐슈타인은 ‘강바닥’, ‘암석’, ‘밑바닥’, ‘축’ 등의 다양한 메타포로 부르고, “나는 몸이 있다”, “이것은 내 손이다”와 같은 명제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명제들은 경험 명제인가? 경험 명제가 아니라면 그것들과 경험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들이 언어놀이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그동안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축’에 대한 논쟁은 주로 두 갈래로 진행되어 왔다. 하나는 축이 명제냐 아니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축이 언어놀이의 토대냐 아니냐는 것이다. 축의 명제성 논쟁은 축이 경험적 명제냐 아니냐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한편으로는 축 명제들이 경험 명제인 것처럼 또는 경험 명제들의 형식을 지닌 명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증거의 정당화는 끝에 이르게 되는데, 그 끝에는 행위가 놓여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근거 지어지지 않은 행위 방식이라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축 명제들을 경험 명제라고 보는 것인가? 경험 명제가 아니라면 그것은 경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런데 이러한 명제들이 경험 명제이건 아니건 그것은 우리의 경험 명제들의 체계 내에서 독특한 논리적 역할, 즉 문법적 규칙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그러한 명제들이 어떻게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다른 한편으로 축의 성격과 관련하여 토대 논쟁이라 부를 수 있는 논쟁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축 명제가 의심과 정당화의 요구로부터 면제되고 우리의 사고와 행위, 조사와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근본토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확신의 밑바닥 벽은 집 전체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고 말한다. 밑바닥 벽이 집 전체를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 전체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통상적인 의미의 토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토대론에서 토대가 집짓기의 주춧돌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축 명제는 주춧돌이 아니라 오히려 축 명제를 둘러싸고 있는 명제들에 의해서 확고해지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축 명제는 분명 어떤 기초의 역할을 하는데, 그 자체 확실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언어놀이 안에서의 역할에 의해서 확고해진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사유와 행위의 어떤 밑바닥으로서 상정되는 어떤 것인가? 그것들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우리의 사유와 행위의 조건들인가? 본 연구의 목적은 이러한 물음들을 통해서 축 명제의 성격과 역할을 해명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이 고립된 언어가 가능하다고 말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해보는 데 있다. 축 명제를 고립된 언어 논쟁과 연결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역으로 축 명제의 성격과 역할을 좀 더 분명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축 명제를 둘러싼 논쟁들을 살펴보고 축 명제와 경험, 본능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한다.
기대효과
축 명제와 관련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들은 상당히 흥미롭다. 확실성에 관하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여정에서 마지막 고찰들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생각들이 담겨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 ‘제3의 비트겐슈타인 ...
축 명제와 관련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들은 상당히 흥미롭다. 확실성에 관하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여정에서 마지막 고찰들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생각들이 담겨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 ‘제3의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불러야 할 새로운 생각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한 생각들의 중심에 축 명제가 놓여 있다. 본 연구는 축 명제를 둘러싼 지금까지의 논쟁들을 통해 축 명제의 역할과 축 명제와 경험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살펴 볼 것인데, 이를 통해 축 명제에 대한 논쟁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고립된 언어의 가능성과 연결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고찰들을 이해하는 좀 더 풍성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연구요약
“나는 몸이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나는 몸이 아프다”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의 말뜻도 역시 확신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몸이 있다”는 명제에 ...
“나는 몸이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나는 몸이 아프다”와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의 말뜻도 역시 확신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몸이 있다”는 명제에 관한 나의 확실성은 ‘몸’으로 하는 우리의 언어놀이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는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증거에 기초해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해 말하는 언어놀이의 실천적 습득을 나타낸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축 명제들의 확실성은 그것이 어떤 특권적인 인식적 지위를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 당연시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확고한 것이 확고하게 있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 명백하거나 분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위에 놓여 있는 것들이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축 명제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토대로서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명제가 어떤 때는 경험에 의해 검사될 수 있는 것으로, 어떤 때는 검사의 규칙으로 취급될 수 있다. 축이 명제냐 아니냐는 논쟁은 그것이 마치 우리가 축 명제의 집합을 이미 손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미리 결정된 적합한 문맥 속에서 확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어떤 경험 명제들이 우리의 실천에서 축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실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축 명제의 확실성은 세계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 언어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세계 속의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 축 명제는 언어놀이의 성립조건으로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언어놀이를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축 명제는 우리의 경험에서 추론한 것이 아니며, 이 때문에 경험은 축 명제의 근거가 아니며 그것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그런데 모얄-섀록은 축과 경험의 관계가 정당화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인과적 관계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확실히 비트겐슈타인은 그 관계가 정당화 관계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인과적 관계 역시 주장하지 않는다. 축과 경험의 관계를 인과 관계로 보는 오해는 더 깊은 오해를 낳는다. 모얄-섀록은 언어가 우리의 원초적 표현들의 복잡한 발전, 우리가 인간의 삶의 형태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하게 만들어진 발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본능의 극복이라고 또는 본능으로부터 출현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토대, 기초, 기원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말하는 축은 언어놀이의 기원이 아니라 언어놀이를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원초적 반응을 추리의 산물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생리학적 반응에 한정지어서는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자연적, 본능적이라 부르지만, 이것을 인과적인 것으로, 생리학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의미가 쓰임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에 어긋난다. 낱말의 의미가 그 낱말에 대응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낱말의 쓰임이라면, 축 명제가 어떤 근본적인 실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은 비트겐슈타인의 것이 아니다. 규칙 따르기의 올바름과 그름은 경험적 일반화의 결과가 아닐 뿐 아니라 본능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참여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그것을 자연적 현상이라 말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러한 행위의 일치가 인과적, 생리학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 삶의 과정, 역사 속에서 전개되어 온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놀이가 사유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으므로 비트겐슈타인은 대신에 언어놀이가 본능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가 어떤 무엇에, 그것이 사유건 본능이건, 토대하고 있다는 그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이 글은 비트겐슈타인의 축 명제에 대한 연구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규칙을 따르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다. “어떻게 나는 규칙을 따를 수 있는가?”는 물음에 대해 논거들을 다 소진했다면 우리는 어떤 단단한 암석에 도달한 것인데, 이 지점에 도달하면 우리는 “나는 ...
이 글은 비트겐슈타인의 축 명제에 대한 연구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규칙을 따르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다. “어떻게 나는 규칙을 따를 수 있는가?”는 물음에 대해 논거들을 다 소진했다면 우리는 어떤 단단한 암석에 도달한 것인데, 이 지점에 도달하면 우리는 “나는 그저 그렇게 행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암석을 비트겐슈타인은 ‘축’이라 부른다. 그것들은 더 이상 의심되지 않는 것들이다.
본 연구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축 명제는 언어놀이의 토대인가? 2. 축 명제가 언어놀이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놀이의 성립조건으로서 말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언어놀이의 작동조건인가? 3. 축 명제는 경험명제인가, 경험 명제가 아니라면 그것들과 경험의 관계는 무엇인가? 축 명제는 본능적인 어떤 것인가?
축 명제는 그 자체로 명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위에 놓여 있는 것들이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축은 어떤 하나의 사실로서 세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축이다. 축 명제는 이런 점에서 언어놀이의 성립 조건이라기보다는 언어놀이의 작동 조건으로서 말해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문을 돌아가게 하는, 언어놀이가 작동하게 하는 축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이러한 축 명제는 경험에서 추론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에서 끄집어 낼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경험은 언어놀이의 근거가 아니다. 축 명제의 확실성은 우리의 원초적 반응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본능적인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축이 본능이라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이성적 추리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언어가 본능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본 연구는 이로부터 축 명제가 강한 역사성과 사회성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축 명제가 언어놀이를 작동하게 하는 것이라면, 축 명제가 축 명제가 추론이나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면, 그런데도 우리의 원초적 반응에 가까운 어떤 것이라면, 축 명제는 강한 사회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또한 동시에 역사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축 명제는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에서 함께 삼켜지는 것들이다. 우리가 축 명제를 전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은 각 개인이 그것을 확신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학과 교육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교육과 학습 과정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된 공동체의 산물이다. 축 명제는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다. 축 명제가 언어놀이를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문
This paper examines the problem of hinge propositions of Ludwig Wittgenstein. For him, obeying a rule is a practice. “How am I able to obey a rule?” If we have exhausted the justifications for this question, then we have reached bedrock. Then we are i ...
This paper examines the problem of hinge propositions of Ludwig Wittgenstein. For him, obeying a rule is a practice. “How am I able to obey a rule?” If we have exhausted the justifications for this question, then we have reached bedrock. Then we are inclined to say that “This is simply what I do.” This bedrock is called ‘hinge’ by Wittgenstein. The hinge is in deed not doubted. Key details of the paper may be summarized as follows.
1. Are hinge propositions a foundation of the language game? 2. What are hinge propositions’s role in the language game? Are the hinges a making conditions of the language games, or a operating conditions of the language games? 3. Are hinge propositions an experiential proposition, or else, what relationship do the hinges have with it? Are the hinges a kind of instinct?
It is not because it is intrinsically obvious or convincing, but because it is held fast by what lies around it. It doesn't exist as a fact in this world, but it is in itself because it is not doubted any more. Metaphorically, If I want the door to turn, the hinges must stay put. From this point of view, The hinge is not a making conditions of the language games, but operating conditions of it. It is the framework or scaffolding which allows us to operate the language games. The hinges aren't derived from experience. We may derive it from experience, but experience is not the ground for our language games. The certainty of hinge propositions is quite similar to a primitive reaction. Wittgenstein said that these reactions are instinctive. It doesn't mean that the hinges are instinct. It means that language did not emerge from some kind of ratiocination. It does not say that language is the outcome of instinct, or emerged from instinct. Thus, the central assertion of the research is that hinge propositions have a strong sociality and historicity. Again, if hinge propositions are a operating conditions of the language game, if the hinges are not the outcome of ratiocination and reasoning, nevertheless the certainty of hinge propositions are similar to a primitive reaction, these propositions should be have a strong sociality and historicity at the same time. If not, hinge propositions don't play a certain role in the language game. Hinge propositions swallow the consequence down together with what it learns. ‘We are quite sure of it’ does not mean just that every single person is certain of it, but that we belong to a community which is bound together by science and education. Hinge propositions are pass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through learning and training processes. They are the products of society and history which they enable the language games to operate. That's why hinge propositions enable the language games operate.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이 글은 비트겐슈타인의 축 명제에 대한 연구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규칙을 따르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다. “어떻게 나는 규칙을 따를 수 있는가?”는 물음에 대해 논거들을 다 소진했다면 우리는 어떤 단단한 암석에 도달한 것인데, 이 지점에 도달하면 우리는 “나는 ...
이 글은 비트겐슈타인의 축 명제에 대한 연구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규칙을 따르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다. “어떻게 나는 규칙을 따를 수 있는가?”는 물음에 대해 논거들을 다 소진했다면 우리는 어떤 단단한 암석에 도달한 것인데, 이 지점에 도달하면 우리는 “나는 그저 그렇게 행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암석을 비트겐슈타인은 ‘축’이라 부른다. 그것들은 더 이상 의심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 자체로 명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위에 놓여 있는 것들이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축은 어떤 하나의 사실로서 세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축이다. 축 명제는 이런 점에서 언어놀이의 성립 조건이라기보다는 언어놀이의 작동 조건으로서 말해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문을 돌아가게 하는, 언어놀이가 작동하게 하는 축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이러한 축 명제는 경험에서 추론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에서 끄집어 낼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경험은 언어놀이의 근거가 아니다. 축 명제의 확실성은 우리의 원초적 반응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본능적인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축이 본능이라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이성적 추리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언어가 본능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축 명제는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에서 함께 삼켜지는 것들이다. 우리가 축 명제를 전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은 각 개인이 그것을 확신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학과 교육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교육과 학습 과정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된 공동체의 산물이다. 축 명제는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다. 축 명제가 언어놀이를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우리의 규칙 따르기 실천은 우리의 언어적 활동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이 원초적 반응을 추론의 산물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순전히 생리학적인 반응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자연적, 본능적이라 부르지만, 이것을 인 ...
우리의 규칙 따르기 실천은 우리의 언어적 활동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이 원초적 반응을 추론의 산물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순전히 생리학적인 반응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자연적, 본능적이라 부르지만, 이것을 인과적인 것으로, 생리학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인과적 과정 또는 어떤 생리학적인 과정을 통해 고통과 고통의 표현, 고통의 기호가 결합된다는 결과를 낳는다. 축 명제는 강바닥 위에서의 물의 운동에 의해 딱딱하게 굳은 퇴적된 명제이며, 퇴적 작용은 역사와 사회를 필요로 한다. 축 명제는 학습과정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된 인간 공동체의 산물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실천에서 수행하는 특수한 규범적 역할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산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공동체는 생물학적인 본능의 공동체가 아니라 과학과 교육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공동체이다. 축 명제는 학습된 것, 학습 이후에 또는 학습과 함께 오는 것이다. 축 명제는 아무런 교육과 훈련 없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놀이를 위한 선행적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훈련의 과정에서 삼켜지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세계상을 구성하며, 그것들이 의심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힘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온다. 축 명제의 확실성은 사회적 확실성이다. 그 확실성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온다.우리의 삶은 명령하고 물음을 묻고 이야기하고 잡담하는 언어놀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러한 언어놀이가 사라지면 공동체도 사라진다. 언어놀이와 독립한 공동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전승된 배경들, 축 명제들이 공동체의 세계관을 형성하며 언어놀이를 돌아가게 한다. 축 명제를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어놀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축 명제는 우리의 사고와 언어의 운동 축, 언어놀이의 작동 조건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축 명제는 우리의 모든 탐구와 정당화가 멈추는 지점이며,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판단들의 체계를 구성한다. 축 명제와 관련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들은 상당히 흥미롭다. [확실성에 관하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여정에서 마지막 고찰들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생각들이 담겨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 ‘제3의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불러야 할 새로운 생각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한 생각들의 중심에 축 명제가 놓여 있다. 본 연구는 축 명제를 둘러싼 지금까지의 논쟁들을 통해 축 명제의 역할과 축 명제와 경험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살펴 볼 것인데, 이를 통해 축 명제에 대한 논쟁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고립된 언어의 가능성과 연결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고찰들을 이해하는 좀 더 풍성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