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왕 므나헴과 베가의 분열 이스라엘과 그들의 국제 관계에 대한 연구 A Study on Divided Kingdoms under Menahem and Pekah in Ancient Israel and Their Political Relationships with Neighboring States
아시리아와 고대 시리아-팔레스틴의 국가들 간의 정치-군사적 관계는 오랫동안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아시리아 왕들의 비문들은 넓게는 당시의 국제관계를 해명하는 비교할 수 없는 자료로, 그리고 좁게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정치-외교를 재구성하는데 필수불 ...
아시리아와 고대 시리아-팔레스틴의 국가들 간의 정치-군사적 관계는 오랫동안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아시리아 왕들의 비문들은 넓게는 당시의 국제관계를 해명하는 비교할 수 없는 자료로, 그리고 좁게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정치-외교를 재구성하는데 필수불가결한 비교자료로 인식되어왔다. 본 연구의 연구 주된 목ㅇ표는 아시리아 역사 문서와, 관련 성서본문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스라엘 왕 므나헴과 베가의 “분열 이스라엘”의 출현과 경쟁, 그들과 주변 국가들과의 정치-외교적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관련 고대 자료들에 근거하여 북 왕국 이스라엘의 분열과 경쟁 왕들인 므나헴과 베가의 출현 배경과 그들의 정책, 아람 왕 르신의 역할, 그리고 여로보암 2세 이후 마지막 왕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국제관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일부 영토의 소유권 변경 등의 과정을 해명하는 것이다. 이전의 성서본문 위주로 이스라엘 역사의 재건을 넘어, 관련 아시리아 문서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이스라엘의 마지막 날들의 분열과 경쟁, 그에 따른 국제관계의 형성과 파열을 비평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연구의 목표이다.
기대효과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전문영역'에서 기여할 것으로 본다. 첫째,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와 시리아-팔레스틴 국가들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역사문서들을 수집함으로써, 아시리아와 시리아-팔레스틴 국가들간의 군사-정치-상업관계와 관련된 차후 연구들을 위한 일차 문헌 ...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전문영역'에서 기여할 것으로 본다. 첫째,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와 시리아-팔레스틴 국가들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역사문서들을 수집함으로써, 아시리아와 시리아-팔레스틴 국가들간의 군사-정치-상업관계와 관련된 차후 연구들을 위한 일차 문헌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둘째, 아람-다마스커스 왕 르신의 역할과 분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므나헴과 베가의 통치를 연구함으로, 아시리아의 이 지역에서의 군사 활동의 사건 나열식 재구성을 넘어 아시리아 군사원정의 배경과 의도를 심층 분석하게 될 것이다. 셋째, 여로보암 2세에서 마지막 왕 호세아에 이르기 까지 길르앗 지방과 갈릴리 지역의 소유권 이전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사마리아 멸망 직전 이스라엘의 국력의 현주소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넷째, 아시리아 문서를 통해 베가를 제거한 이스라엘 마지막 왕 호세아가 티글랏필에셀을 알현하러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나타난 것을 확인하는데, 이는 차후 유다 왕 므낫세의 바벨론 방문과 다른 유다 왕들의 아시리 왕들 앞으로의 호출을 해명하는데도 빛을 비출 것이다.
연구요약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고대문헌에 기초하는 연구이다. 그러므로 국가들 간의 정치와 교역관계, 그리고 구체적으로 르신의 역할, 베가와 므나헴의 경쟁과 정책에 대한 해명은 기본적으로 문서자료와 고고학적 유적, 유물들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이들 나라들에 대한 정치- ...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고대문헌에 기초하는 연구이다. 그러므로 국가들 간의 정치와 교역관계, 그리고 구체적으로 르신의 역할, 베가와 므나헴의 경쟁과 정책에 대한 해명은 기본적으로 문서자료와 고고학적 유적, 유물들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이들 나라들에 대한 정치-군사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일차적인 중요 고대 문헌들을 수집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1) 본 연구는 관련 성서본문에 대한 주석 작업 외에 아시리아의 역사자료에 대한 포괄적이며 조직적인 수집과 분석을 진행한다. 이는 후속 연구를 위한 일차적 자료제공이라는 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문서 분석을 기초로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연구한다. (2) 므나헴과 베가의 통치는 각각 언제 부터인가? 성서자료에서 베가에 대해 주어진 데이터는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통치 동안에 두개의 상호 충돌하는 계수 방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의 계산 방식은 그에게 20년이란 긴 통치기간을 할당하는 것이다(왕하 15:27). 다른 계산 방식은 베가가 유다의 아자리야(웃시야) 52년(기원전 740년)에 통치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베가는 왕좌에 오르기 위해 2년간 다스리고 있던 브가히야를 살해했으며(왕하 15:23, 25), 브가히야의 부친 므나헴은 사마리아에서 10년간 통치했다(왕하 15:17). 므나헴 10년과 브가히야 2년 후 통치자인 베가가 732/731년까지 다스릴 수 있는 기간은 20년일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본 연구는 아시리아 문서와 성서의 증언을 토대로 베가와 므나헴의 통치 시작연대, 그리고 그들의 지역분할 통치의 가능성 등을 검토하게 될 것이다. (3) 베가와 르신은 어떤 관계인가? 베가는 요단 동편의 길르앗 지역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길르앗 지역을 장악하고 난 후 르신과 동맹을 맺었는지, 르신이 장악한 지역에서 르신의 도움으로 사마리아의 경쟁 왕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경우든 므나헴과는 달리 베가는 일관되게 르신을 지도자로 하는 반-아시리아 동맹군 편에 섰다(왕하 15:37). 열왕기하 15:37에서 르신은 아람의 “왕”으로 베가는 단지 르말리야의 “아들”로 호칭된다. (4) 므나헴의 선택은 무엇인가? 므나헴은 이스라엘의 혼란기에 사마리아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므나헴이 친-아시리아 세력인 예후 왕조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킨 샬룸을 죽였을 때, 샬룸은 단지 한 달 통치하고 있었다(왕하 15:13-14). 사마리아의 통제권이 미치지 않는 요단 동편에서는 여전히 독립적인 군력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므나헴은 사마리아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립하고, 원지에 여전히 존재하는 반대세력 혹은 경쟁 세력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반-아시리아 세력인 르신과 베가의 압박이 다가오는 긴급한 상황에서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다스리고 있던 므나헴의 선택을 연구한다. 므나헴은 예후 이래 지속된 친-아시리아 세력임을 표명하고 그의 통치 내내 이 정책을 지속한다. (5) 베가 치하에서의 이스라엘의 정책과 그 결말은 어떠한가? 베가는 자신의 힘이 커지고 브가히야가 백성들의 민심을 잃었을 때 자신의 출신지이기도 한 길르앗 사람들의 도움으로 브가야를 제거할 수 있었다. 베가는 기원전 732년에 아람 왕 르신과 반-아시리아 동맹을 맺는다. 티글랏필에셀은 베가를 직접 처단하지 않는다. 이미 사마리아에는 친-아시리아 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므로 그들의 손에 베가를 맡겼다. 호세아가 아시리아인의 지원 약속 하에 베가를 죽이고 아시리아 왕에 의해 왕으로 임명받은 후 그는 티글랏필에셀을 알현하러 남부 바벨론 지역으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기원전 750년 경 시리아-팔레스틴을 관할하던 아시리아 총독 샴시일루의 통치 후반기와 아시리아에서의 왕위계승으로 인한 혼란은 시리아-팔레스틴의 억압받던 국가들의 생존전략에 영향을 끼친다. 아람-다마스커스와 같은 나라들은 지역에서의 주도권 회복을 계획했고 ...
기원전 750년 경 시리아-팔레스틴을 관할하던 아시리아 총독 샴시일루의 통치 후반기와 아시리아에서의 왕위계승으로 인한 혼란은 시리아-팔레스틴의 억압받던 국가들의 생존전략에 영향을 끼친다. 아람-다마스커스와 같은 나라들은 지역에서의 주도권 회복을 계획했고 이스라엘이나 유다 같은 나라들은 아시리아의 지지 약화로 인한 내부 정치의 재편성 가능성에 대해 염려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두 양상이 혼재되어있었다. 여로보암(ll)는 샴시일루의 존재와 그로 인한 아람-다마스커스의 약화의 열매를 얻었고, 므나헴 역시 아람 왕 르신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의 통치권을 위협받아 아시리아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통치권을 향한 경쟁이 지속되었고 이는 친 아람-다마스커스 파당과 친-아시리아 파당으로 나위게 된다.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이 된 베가는 반-아시리아 연합의 지도자인 르신 쪽에 서고, 아시리아의 지지를 받은 호세아는 베가를 죽이고 다시 왕이 된다. 본 논문의 목적은 티글랏필에셀 시대에 있었던 시리아-팔레스틴 국가들의 반-아시리아 동맹을 파악하고 나아가 르신의 활동, 므나헴과 베가의 관계 등을 탐문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티글랏필에셀의 역사문서들은 필부불가결한 일차적 자료이다. 그 문서들에는 티글랏필에셀의 서방원정과 르신, 므나헴, 베가, 사마리아, 이스라엘, 아하스가 그 이름을 올린다. 그러나 베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해결해야할 난점이 있다. 배가의 마지막 통치 기간이 732/731년이라는 것은 아시리아 문서에 의해 고정된다. 그러나 성서는 그가 20년 통치했다고 하면서도 브가히야 이후 통치했다고 말한다. 731년부터 20년을 계산하면 751년경이 되는데, 이 시기는 브가히야와 므나헴은 물론 여로보암 통치 후반기에 이른다. 브가히야 이후에 처음 통치했다고 하면 베가에게는 5년도 할당되기 어렵다. 어떤 학자들은 20년 할당이 잘못된 것이라 보고 어떤 학자들은 분할통치시기가 있었다고 본다. 본 논문은 아시리아 문서인 에포님 역대기와 왕실문서들과 관련 성서본문들을 분석함으로써 르신의 역할, 베가의 통치연한 문제, 므나헴과 베가의 관계, 분할 이스라엘의 존재 가능성을 탐구한다.
영문
The death of Assyrian Turtanu Šamši-ilu around 750 BCE and internal struggles in Assyria affected formations of strategies for survival in Syria-Palestine states. Some states took opportunity of their freedom form Assyrian interference, and others f ...
The death of Assyrian Turtanu Šamši-ilu around 750 BCE and internal struggles in Assyria affected formations of strategies for survival in Syria-Palestine states. Some states took opportunity of their freedom form Assyrian interference, and others feared weakening of their own rulership due to decrease of Assyrian supports. Rezin of Aram-Damascus formed Anti-Assyrian alliance, and Tyre, some of Philistine states, Israel of Pekah participated. Menahem of Israel and Ahaz of Judah continued to stand side with Assyria. This article investigates the formation of anti-Assyrian movement in Syria-Palestine during the rule of Tiglathpileser(III), and mainly to reconstruct the relations between Rezin and Israel, and between Menahem and Pekah. Assyrian inscriptions are incompatible data for the purpose. The Eponym Chronicle gives the information about locations of Assyrian main army in Syria-Palestine during Tiglathpilesr’s campaigns. The annals and summary inscriptions describe his military activities in more details. In these inscriptions appear Rezin of Aram-Damascus, Menahem of Samaria, Ahaz of Judah, Pekah of Israel, and their relations with Assyria. Biblical materials are also main sources, but cause some difficulty for the reconstruction of the relations, proving two ways of counting the length of Pekah’s ruling. One way is to allow 20 year ruling to Pekah(2 Kings 15:27), placing his beginning of rule in 752/751 BCE, the year Jeroboam II was still king of Israel. Another way is to allow 6 years, accepting the biblical report that Pekah ruled after Pekaiah, son of Menaham. Both ways are acceptable if Pekah ruled at the certain part of Israel while Jeroboam, Mehanem and Pekaiah rule in Samaria. Based on biblical evidences and relevant Assyrian inscriptions, this article investigates the rules of Menahem and Pekah, the existence of divided Israel during its final days, the role of Rezin in the division.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기원전 750년 경 시리아-팔레스틴을 관할하던 아시리아 총독 샴시일루의 통치 후반기와 아시리아에서의 왕위계승으로 인한 혼란은 시리아-팔레스틴의 억압받던 국가들의 생존전략에 영향을 끼친다. 아람-다마스커스와 같은 나라들은 지역에서의 주도권 회복을 계획했고 이 ...
기원전 750년 경 시리아-팔레스틴을 관할하던 아시리아 총독 샴시일루의 통치 후반기와 아시리아에서의 왕위계승으로 인한 혼란은 시리아-팔레스틴의 억압받던 국가들의 생존전략에 영향을 끼친다. 아람-다마스커스와 같은 나라들은 지역에서의 주도권 회복을 계획했고 이스라엘이나 유다 같은 나라들은 아시리아의 지지 약화로 인한 내부 정치의 재편성 가능성에 대해 염려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두 양상이 혼재되어있었다. 여로보암(ll)는 샴시일루의 존재와 그로 인한 아람-다마스커스의 약화의 열매를 얻었고, 므나헴 역시 아람 왕 르신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의 통치권을 위협받아 아시리아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통치권을 향한 경쟁이 지속되었고 이는 친 아람-다마스커스 파당과 친-아시리아 파당으로 나뉘게 된다.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이 된 베가는 반-아시리아 연합의 지도자인 르신 쪽에 서고, 아시리아의 지지를 받은 호세아는 베가를 죽이고 다시 왕이 된다. 본 논문의 목적은 티글랏필에셀 시대에 있었던 시리아-팔레스틴 국가들의 반-아시리아 동맹을 파악하고 나아가 르신의 활동, 므나헴과 베가의 관계 등을 탐문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티글랏필에셀의 역사문서들은 필부불가결한 일차적 자료이다. 그 문서들에는 티글랏필에셀의 서방원정과 르신, 므나헴, 베가, 사마리아, 이스라엘, 아하스가 그 이름을 올린다. 그러나 베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해결해야할 난점이 있다. 배가의 마지막 통치 기간이 732/731년이라는 것은 아시리아 문서에 의해 고정된다. 그러나 성서는 그가 20년 통치했다고 하면서도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 이후 통치했다고 말한다. 731년부터 20년을 계산하면 751년경이 되는데, 이 시기는 브가히야와 므나헴, 샬룸, 스가랴의 통치시대를 넘어 여로보암 통치 후반기에 이른다. 브가히야 이후에 처음 통치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베가에게는 5년도 할당되기 어렵다. 베가 통치 이후 북왕국의 멸망 722년까지에는 호세아의 통치 9년을 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20년 할당이 잘못된 것이라 보고 어떤 학자들은 분할통치시기가 있었다고 본다. 베가의 단독 통치는 5-6년, 이전 왕들이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일부를 다스린 시기가 약 15년 있었다면 20년 통치와 브가히야를 이은 통치가 모순되지 않게 된다. 본 논문은 아시리아 문서인 에포님 역대기와 왕실문서들, 그리고 관련 성서본문들을 분석함으로써 르신의 역할, 베가의 통치연한 문제, 므나헴과 베가의 관계, 분할 이스라엘의 존재 가능성을 탐구한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본 연구는 아시리아 문서와 성서자료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에포님 역대기를 볼 때 티글랏필에셀의 즉위 이전에는 북부 시리아에서 반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 왕은 군대를 파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티글랏필에셀의 즉위와 함께 다시 아시리아 ...
본 연구는 아시리아 문서와 성서자료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에포님 역대기를 볼 때 티글랏필에셀의 즉위 이전에는 북부 시리아에서 반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 왕은 군대를 파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티글랏필에셀의 즉위와 함께 다시 아시리아의 우위성이 지역에서 확보된다. 그의 서방 원정은 기원전 743년부터 시작 되었다. 그는 원정 동안 시라아-팔레스틴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았거나 부여했는데 르신과 므나헴이 그 이름을 올린다. 므나헴은 이전 찬탈자인 샬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티글랏필에셀에게 은 1천 달란트를 선물을 바친다(왕하 15:19-20). 흥미로운 것은 아시리아 문서에서 므나헴은 이스라엘(비트-후므리)이 아니라 “사마리아”의 왕으로 불린다. 예언자 호세아가 이스라엘과 에브라임 사이를 구분한 것(호 5:5b)도 므나헴의 이스라엘이 분열되어 있음을 추정케 한다. 르신이 언제부터 반-아시리아 성향을 보였는지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통치 초기에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쳤다(744-740, 738년). 자신의 힘을 결집하기까지 그리고 과중한 조공으로 인한 내부의 불만이 충분히 표출될 때까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베가는 여전히 조공 목록에 나오지 않는다. 베가는 아시리아인의 관점에서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734년부터 조공 공여 목록에 르신도 베가도 보이지 않는다. 아람-다마스커스의 르신을 우두머리로, 두로의 히람, 친-아시리아 므나헴 정권을 무너뜨린 통합 이스라엘의 베가, 아라비아의 삼시, 아스클론의 미틴티, 가자의 하눈누가 반란에 참여했다. 베가는 이미 르신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조공을 바친 왕 중에는 유다의 아하스가 들어있다. 아마 르신과 베가의 위협 때문에 아시라아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티글랏필에셀은 블레셋(에포님 역대기 734-733년의 ana KURpilišta)과 두로를 공격한 후, 갈릴리 지역을 공격하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당시 갈릴리 지역이 베가의 이스라엘 땅에 속했는지 이미 르신이 장악하고 있었는지 아시리아 문서는 명백하게 말하지 않는다. 길르앗 성읍은 하사엘(카-자-알-리)의 왕국, 즉 아람-다마스커스에 속한 곳으로 언급한다. 그러므로 이 지역이 베가의 통치하에 있었을 때조차 그는 르신의 꼭두각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티글랏필에셀은 베가의 이스라엘로 이동한다. 아시리아 문서들에 의하면 베가를 폐위시킨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베가의 즉위는 백성의 의도라기보다는 아람-다마스커스의 무력에 의한 쿠데파의 결과이기 때문에 사마리아를 다스린 짧은 기간 동안 베가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다시 아시리아의 지지를 받는 호세아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호세아가 장악한 이스라엘의 영토는 사마리아와 그 주변, 즉 에브라임 산지에 불과했다. 아시리아는 아람-다마스커스를 멸망시킨 후 르신이 통제하던 요단 동편과 이스르엘 평원, 갈릴리 지역을 합병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생존은 했으나 이스라엘의 지원하던 아람-다마스커스가 아시리아에 합병됨으로써 지원세력을 항구적으로 잃게 되었고 갈릴리 지역과 트랜스요르단을 아시리아에게 넘겨주었으며 많은 백성을 포로로 내어준 조그만 나라로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722년 아시리아의 공격으로 인한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멸망이 아니라 점진적인 몰락으로 이어졌음이 드러난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전문영역'에서 활용될 것이다. 먼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와 시리아-팔레스틴 국가들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역사문서들을 수집함으로써, 아시리아와 시리아-팔레스틴 국가들간의 군사-정치-상업관계와 관련된 차후 연구들을 위한 일차 문헌을 제공한다. 둘째, 르신의 역할과 분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므나헴과 베가의 통치를 연구함으로, 아시리아의 이 지역에서의 군사 활동의 사건 나열식 재구성을 넘어 아시리아 군사원정의 배경과 의도를 보다 폭넓고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길을 열 것이다. 셋째, 본 연구의 결과는 여로보암 2세에서 마지막 왕 호세아에 이르기 까지 길르앗 지방과 갈릴리 지역의 소유권 이전의 역사를 보다 깊이 분석하는 차후 연구의 바탕이 될 것이다. 넷째, 베가의 제거와 함께 이스라엘 지역이 공격을 받고 많은 포로가 잡혀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멸망 10년 전에 이미 백성의 수가 많이 줄어든 소국으로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디아스포라 역사를 해명하는데, 또 멸망 직전 이스라엘의 상황을 연구하는 동기로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