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새롭게 발굴한 중국측 자료를 근거로 1943년 12월 1일 발표된 카이로선언에서 전후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되게 한다’는 내용을 결정하게 된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카이로회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
본 연구는 새롭게 발굴한 중국측 자료를 근거로 1943년 12월 1일 발표된 카이로선언에서 전후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되게 한다’는 내용을 결정하게 된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카이로회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객석이 참석하여 개최한 회의였다. 이 회의를 통해 3개국 원수는 전후 한국문제에 대해 “위의 3대국은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과정을 거쳐 자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에 합의하고, 이를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선언으로 발표하였다. 즉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은 자유 독립되게 한다’는 것으로, 이는 전후 한국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요한 회의였다. 그러나 카이로선언에 대해 엄청난 역사적 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다.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한다’는 것을 제안한 것이 누구였는가, 또 한국문제가 카이로선언에 포함되게 된 과정을 둘러싸고 잘못된 연구들에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이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을 독립시키자고 제안하고 주장한 것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그의 보좌관 홉킨스라고 하면서, 장개석은 카이로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거나, 중국은 한국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주로 미국측 자료만을 가지고 연구한 것이다. 카이로회의는 미국· 영국· 중국 3개국이 참석한 회의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카이로회의와 카이로선언을 연구함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것은 3개국의 자료를 모두 수집하고, 이를 근거로 연구하여야 하는 것이 연구자의 기본적인 자세가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기존의 연구에서는 주로 미국측의 자료만을 근거로 하여 카이로회의와 카이로선언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그의 보좌관이었던 홉킨스의 역할만 부각된 것이다. 본 연구자는 지난 해 카이로회의와 관련된 중국측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중국측 자료를 보면, 중국측이 카이로회의에 대해 어떻게 준비하고, 카이로회의에서 어떠한 제안과 주장을 하였는지가 소상하게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중국측은 카이로회의를 앞두고 미국과 영국측에 제안할 내용에 대해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였다. 중국측은 준비과정에서 일본에게 빼앗긴 만주와 대만을 비롯한 팽호도를 돌려받는다는 것과 더불어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안하는 것을 철저하게 준비하였고, 최근 공개된 장개석의 일기에도 한국독립문제를 거론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중국은 카이로회의에서 한국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문제가 카이로선언에 포함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1월 23일 저녁 장개석은 부인 송미령과 함께 루스벨트를 찾아가 저녁을 함께 하면서 한국독립문제를 제안하였고, 루스벨트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루스벨트는 장객석이 제안한 한국독립문제에 대해 동의하고, 이를 그의 보좌관인 홉킨스에게 초안으로 작성하도록 명령하였다. 홉킨스가 초안을 작성하였고, 이를 중국과 영국측에 보여주었다. 이때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인 인도와 남양군도의 영국령을 고려하여, 한국을 독립되게 한다는 내용에 대해 반대하였다. 영국은 심지어 한국독립문제를 선언에 포함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장개석의 비서였던 왕총혜가 영국의 외무차관 카도간과 격론을 벌여가며 관철시켰고, 이러한 노력에 의해 한국독립문제가 카이로선언에 포함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중국측의 자료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기존에 미국측의 자료만을 가지고 카이로회의와 카이로선언에서 한국독립문제를 거론하고 포함시킨 것은 루스벨트와 그의 보좌관 홉킨스의 역할이었다는 것은 자료를 충분히 섭렵하지 못한데 따른 결론임을 알 수 있다. 이에 기존의 카이로선언에 대한 연구가 자료의 활용이나 논거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카이로선언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기대효과
본 연구자가 제안한 연구가 성공적으로 추진된다면, 한국독립운동사는 물론이고 국제정치학과 국제외교사 연구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크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
본 연구자가 제안한 연구가 성공적으로 추진된다면, 한국독립운동사는 물론이고 국제정치학과 국제외교사 연구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크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된 것이 자율적이냐 타율적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명확안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8·15해방은 연합국이 일본과 싸워 승리한 부산물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8·15해방에 대해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 보다는 연합국이 일제를 패망시킴으로써 얻어진 부산물이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카이로회의에서 전후 문제가 다루어진다고 할 때, 독립운동 세력이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아도 미국· 영국· 중국의 연합국들이 모여 한국을 독립시켜 주자고 결의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카이로회의에서 한국독립문제를 선언에 포함시키는 것을 두고 영국이 격렬하게 반대하였다는 사실은 8· 15해방이 단순하게 연합국 승전에 따른 부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이것을 토대로 한국독립운동의 성과에 대한 이해를 재해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후 3년만인 1948년에 대한민국이란 독립국가를 수립하게 된 원인을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였을 때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연합국들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을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하거나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최고 5년간 한국을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하고, 신탁통치가 끝나면 한국을 독립국가로 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이는 카이로선언을 통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한다’는 데 합의한 약속을 지킨 결과이다. 이 약속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문제가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격렬한 반대,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함으로써 신탁통치는 좌절되었다. 이로써 일제가 패망한 지 3년만인 1948년에 자주독립국가로 대한민국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본 연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피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국제정치학이나 국제외교사 연구에도 철저한 자료를 통해 제2차세계대전 중 한국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국제정치학이나 국제외교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도 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이를 연구에 활용해 왔다. 그러나 카이로회의와 카이로선언에 대해서는 미국측 자료 이외에 중국측 자료를 거의 활용하지 못하였다. 이에 본 연구는 중국측의 자료를 새롭게 발굴하여 연구에 활용함으로써, 국제정치학이나 국제외교사 연구에 충분한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토대로 마련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구요약
본 연구의 핵심내용은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의한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카이로선언에 “위의 3대국은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과정을 거쳐 자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한다”는 한국독립문제가 들어가게 된 것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 ...
본 연구의 핵심내용은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의한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카이로선언에 “위의 3대국은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과정을 거쳐 자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한다”는 한국독립문제가 들어가게 된 것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가? 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다루기 위해 먼저 1942년부터 연합국들 사이에서 전후 한국을 ‘국제공동관리’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난 사실과 이에 대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반응을 살펴볼 것이다. 1942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일부 인사들이 전후 한국을 ‘국제공동관리’하자는 논의가 일어나고, 미국의 일부 언론들이 이를 보도하였다. 그리고 1943년 3월에는 영국 외무상 이든이 미국을 방문하여 루스벨트와 전후 문제를 논의하면서 한국을 ‘국제공동관리’하에 두자고 하였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국제공동관리’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43년 2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국제공동관리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1943년 5월에는 중경에 있는 한인들이 모두 모여 국제공동관리를 반대하는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장개석을 면담하고, 중국은 국제공동관리에 대해 반대해 줄 것과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은 즉시 독립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는 사실도 다룰 것이다. 둘째는 카이로회의에 대한 중국측의 사전준비 사항을 다루고자 한다. 중국은 카이로회의를 앞두고 중국군사위원회와 중국국방최고위원회에서 카이로회의에서 중국측이 제안할 내용에 대해 사전에 준비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와 중국국방최고위원회에서 준비한 사항에 ‘한국독립문제’가 주요한 항목으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카이로회의를 앞둔 장개석의 일기에도 ‘한국독립문제’가 기록되어 있음을 언급할 것이다. 셋째는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문제가 포함되게 된 과정을 다룰 것이다. 1943년 11월 23일 저녁 장개석이 부인 송미령과 함께 루스벨트와 저녁만찬을 하면서, 한국독립문제를 루스벨트에게 제의하였고, 루스벨트는 이에 동의하여 그의 보좌관인 홉킨스에게 초안으로 작성하도록 명령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홉킨스가 작성한 초안을 가지고 영국의 외무차관 카도간, 미국의 홉킨스, 중국의 왕총혜가 협의한 내용도 주요하게 다루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측이 한국독립문제를 선언서에 포함시키는 것에 반대하였지만, 중국의 왕총혜가 카도간과 설전을 벌여가며 설득하였고, 결국 영국측의 양해를 얻어 한국독립문제가 카이로선언에 포함되게 되었다는 내용도 자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1943년 12월 1일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었다. 카이로선언은 미· 영· 중 3국 정상들이 회담을 갖고, 합의한 내용을 발표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카이로선언에 대한 연구는 미· 영· 중 3국의 자료를 섭렵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 ...
1943년 12월 1일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었다. 카이로선언은 미· 영· 중 3국 정상들이 회담을 갖고, 합의한 내용을 발표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카이로선언에 대한 연구는 미· 영· 중 3국의 자료를 섭렵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 글은 미국측 자료를 근거로 이루어진 종전의 연구성과를 검토하고, 지금까지 활용되지 못한 중국측 자료를 통해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이 결정된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중국에도 카이로회의와 관련된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카이로회의 직후인 1943년 12월 劉自勤이 펴낸 『開羅會議全貌』, 1981년 장개석의 비밀문서인 總統府機要檔案을 정리하여 편찬한 秦孝儀의 『中華民國重要史料初編 : 對日抗戰時期』와 장개석의 비서로 카이로회의에 참석하였던 王寵惠가 작성한 『開羅會議日誌』 등이 그것이다. 이들 자료에는 루스벨트와 장개석이 회담을 교섭하는 과정을 비롯하여, 중국이 회의에 앞서 준비한 내용, 카이로회의 일정 및 논의 과정 등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카이로회의는 1943년 6월 루스벨트가 장개석에게 제의하여 이루어졌다. 이후 양측은 장소· 시기· 참석자 등을 교섭하고,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의를 갖기로 하였다. 중국은 회의를 앞두고 군사위원회와 국방최고위원회에서 각각 회의에서 제안할 사항을 준비하였는데, 모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제안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장개석도 회의에 임하면서 일기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주요 사항으로 기록해 놓았다. 준비과정에서부터 중국은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제안한다는 방침이었다. 장개석은 11월 23일 저녁 부인 송미령과 함께 루스벨트 숙소를 찾아가 4시간 가까이 만찬을 가졌다. 이때 장개석은 만주· 대만을 중국에 반환한다는 문제와 함께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고, 루스벨트는 이에 찬동하였다. 루스벨트는 보좌관 홉킨스에게 장개석과 합의한 내용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고, 홉킨스에 의해 초안이 마련되었다. 홉킨스는 루스벨트에게 초안을 보여주고 수정을 받았다. 그리고 11월 24일 송미령과 왕총혜에게 이를 가지고 왔다. 왕총혜는 중국어로 번역하여 장개석에게 보여주었고, 장개석은 초안에 동의하였다. 영국측에는 25일 초안이 전달되었다. 11월 26일 3국의 실무자인 왕총혜, 영국 외무차관 카도간, 주소미국대사 해리만이 초안을 두고 협의하였다. 이때 영국측이 ‘한국독립’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영국측은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한다’는 문구 대신에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고칠 것을 주장하였다. 심지어 영국측은 ‘내각에서 한국문제를 토의한 일이 없다’거나 ‘소련의 반대가 있을 것’ 등의 이유를 대며, 한국독립에 대한 문구를 완전히 빼버리자고 하였다. 이에 대해 왕총혜가 ‘한국독립’ 문제는 ‘중국과 원동방면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강력히 반발하였고, 양측 사이에 격렬한 논란이 벌어졌다. 해리만이 중국측의 의견에 동조하고, ‘소련과 협의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초안대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3국 정상들이 동의하면서, 한국독립 문제가 카이로선언에 포함되게 되었다. 카이로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제기한 것은 장개석이었고, 장개석을 움직인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카이로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개석을 찾아갔다. 1943년 7월 26일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과 부사령 김원봉이 장개석을 면담하고,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관철시켜 줄 것을 부탁하였다. 장개석은 ‘한국의 완전 독립을 돕겠다’고 약속하였고, 그 약속을 지켰다.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것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장개석을 통해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영문
Cario Declaration guaranteed Korean independence was announced on December 1, 1943. The leaders of the United States, Great Britain. and China adopted the so-called Cario Declaration in Cario. Cairo Conference was held by Roosevelt's proposal to Jian ...
Cario Declaration guaranteed Korean independence was announced on December 1, 1943. The leaders of the United States, Great Britain. and China adopted the so-called Cario Declaration in Cario. Cairo Conference was held by Roosevelt's proposal to Jiang Jieshi in June, 1943. Both sides promised to hane a conference in Cairo, Egypt from November 22 until 26. Chinese Military Commission and the Supreme Dependence Commission prepared papers for the conference respectively and wrote in it that China would propose Korean liberty and independence at the same time.China had a plan to propose Korean independence. With his wife Song Meiling, Jiang had a dinner with Roosevelt in Roosevelt's lodgings for 4hours on November 23. At this time Jiang proposed Roosevelt to return Manchuria and Taiwan and to make Korea liberal and independence after Japanese defeat. roosevelt also consented these proposals. Roosevelt han a secretary Hopkins record what he agreed on with Jiang, so a draft was prepared by Hopkins. Hopkins had this draft amended under instruction of Roosevelt and then brought this dragt to Wang Chung hui on November 24. This draft wan delivered to Great Britain on November 25. Wang, Britjsh vice foreign minister Cadogan, and the U. S. ambassador to Soviet Union Harriman discussed this draft on November 26. At this time an unexpected dispute happened as Cadogan made an objection to korean independence. Great Britain insisted a phrase of "to make Korea escape from Japanese control" instead of "to make Korea liberal independence state". In addition, Great Britain asserted to remove a phrase about Korean independence under the pretext of that British Cabinet didn't discuss Korean problem or the Soviet Union would oppose. On the other side, Wang repelled it strongly undfr the raeson of that a prpblem of Koraen independence was very important on the side of China and the Far East. In the fierce dispute, the draft fixed as it was as Harriman instisting no debate with the Soviet Union consented Chinese opinion. The problem of Korean independence was included in Cairo Declaration along with a consent of tripartite summits.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본 연구는 미국과 영국의 자료를 근거로 이루어진 종전의 연구성과를 검토하고, 지금까지 활용하지 못한 중국측의 자료를 통해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이 제의 논의 결정된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중국에도 카이로회의와 관련한 자료들이 적지 않다. ...
본 연구는 미국과 영국의 자료를 근거로 이루어진 종전의 연구성과를 검토하고, 지금까지 활용하지 못한 중국측의 자료를 통해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이 제의 논의 결정된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중국에도 카이로회의와 관련한 자료들이 적지 않다. 카이로회의 직후인 1943년 12월 '카이로회의전모'라는 소책자가 발간된 것을 비롯하여, 카이로회의에서 장개석의 비서로 활동한 왕총헤가 카이로회의 전과정을 기록한 '카이로회의 일지'등 수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다. 카이로회의는 1943년 6월 루스벨트의 제의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루스벨트와 장개석 사이에 회담 장소, 참석자, 시기 등을 두고 교섭이 이루어졌고,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 영 중 3국의 영수가 참석하기로 결정되었다. 중국은 회의을 앞두고 중국측이 제안할 내용에 대해 사전 준비를 하였다. 사전준비는 국방최고위원회비서청과 군사위원회참사실 두 곳에서 별도로 작성하였는 데, 두 곳 모두에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중국이 준비과정에서부터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하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장개석을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청한 때문이었다. 임시정부는 루스벨트와 장개석 사이에 회담이 추진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개석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1943년 7월 26일 면담이 이루어졌다.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부사령 김원봉이 통역 안원생을 대동하고 장개석과 만났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장개석에게 미국과 영국이 주장하는 국제공동관리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 관철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전후 문제를 논의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국제공동관리로 한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요청에 대해 어려움이 많겠지만, 한국의 독립을 지지 관철하기 위해 함써 싸우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사전준비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부터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한다고 준비한 것이다. 장개석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한 것이다. 장개석은 11월 23일 저녁 부인 송미령과 함께 루스벨트 숙소를 찾아가 만찬을 가졌다. 이때 일본이 패망하면 일본이 차지한 만주 대만 팽호도 등의 영토는 중국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대체로 장개석의 제안에 대해 동의하였다. 루스벨트와 장개석이 협의한 내용을 근거로 초안이 작성되었다. 초안은 만찬장에 배석하였던 루스벨트의 보좌관인 홉킨스가 작성하였다. 홉킨스는 루스벨트의 검토를 받고, 이를 24일 중국측에 전달하였다. 왕총혜는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장개석에게 보여주었다, 장개석은 루스벨트와 협의한 내용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면 만족해 하였다. 영국은 실무자가 늦게 도착한 관계로 25일에 홉킨스로부터 초안을 받았다. 영국은 초안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초안이 중국측에 먼저 전달되었다는 것과 중국측에 주는 선물이 너무 많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영국은 한국의 자유 독립국으로 한다는데 대해 불만을 가졌다. 11월 26일 초안을 가지고 3국의 실무자들이 모여 협의를 가졌다. 여기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두고 논란이 일어났다. 영국이 '한국의 자유 독립국으로 한다'는 문구 대신에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으로 수정을 요구한 것이다. 왕총혜가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일본의 대륙침략은 한국을 병탄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며, 이를 선언에 포함시키는 것은 '중국 및 원동방면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논리였다. 논란은 격렬했다. 영국측은 '내각에서 한국문제를 토의한 일이 없다'는 것과 '소련의 반대가 있을 것'이라는 이유를 대며, '한국독립에 대한 문구를 아예 빼버리자'고 한 것이다. 한국독립문제를 둘러싸고 중국과 영국 사이에 대립과 파란이 일어났을 때, 미국측 실무자인 해리만이 '소련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소련과 협의할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초안대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협의를 마친 실무자들은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 송미령이 회담하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3국 영수 앞에서 초안을 낭독하였다 이때 루스벨트가 '소련의 의견을 헤아릴 것 없다'고 하였고, 3국 영수들이 모두 동의를 표시하였다. 이로써 카이로선언이 채택되었고, 그 안에 한국독립문제가 들어가게 되었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한중 공동항전의 상징적 사례로 활용할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은 20세기 전반기에 똑같이 일제의 침략을 받고 이를 물리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중은 상호 연계 연합 등을 통해 일제를 상대로 공동항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한중 공동항전의 대표 ...
- 한중 공동항전의 상징적 사례로 활용할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은 20세기 전반기에 똑같이 일제의 침략을 받고 이를 물리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중은 상호 연계 연합 등을 통해 일제를 상대로 공동항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한중 공동항전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사례가 바로 카이로선언이다. 지난 2014년 7월 중국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한중 공동으로 70주년 기념식을 하자고 제의한 일이 있었다. 이때 한국에서 답변을 못했다고 한다. 향후 한중의 우호관계를 이야기 할 때, 또는 공동항전을 연구할 때 중요한 사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의 승전국 지위를 이해하는 데 활용 올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전승70주년 기념식, 또 중국에서 개최될 70주년 기념식에 한국도 참석하느냐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한국이 불참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은 전승국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한국은 식민국 국가 중 유일하게 연합국이 전후의 독립을 보장한 나라다. 그것이 바로 카이로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