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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효제(孝悌)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Filial Piety and Brotherly Love of King Sejong the Great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4S1A5A2A01011124
선정년도 2014 년
연구기간 1 년 (2014년 05월 01일 ~ 2015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조남욱
연구수행기관 부산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가 지향하는 바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1) 유교국가 건설을 이상으로 하는 조선시대 초기의 불안한 상황에서 세종이 그 유교문화가 추구하는 도덕정치 구현에 선구적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이태조의 첫 시정교서에서는 효제충신의 유교 덕목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제1·2차 왕자의 난이 보인 바와 같이 그 왕실 자체 내에 있어서도 그러한 덕목을 실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세종은 태종의 제3남이었으니 애초부터 왕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므로 그가 세자를 거쳐 군주의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서는 왕실내의 갈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모든 난제들을 원만히 해결하면서 유교적 성군정치를 전개할 수 있었던 저변을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2) 그 저변의 핵심 요인으로는 유교의 기본 덕목인 효도와 우애 정신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논증하려는 것이다. 만일 세종에 있어서 부왕 태종의 교화의식에 부응하는 효도 정신이 없었다면 그의 학문은 방향을 달리하여 세자의 자리에 오르기 어려웠을 것이며, 또한 우애감이 약화되었다면 신하들의 주장에 따라 장형 양녕대군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차형 효령대군도 척불운동에 따라 곤경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에도 유의하여 그러한 사실을 심층적으로 파악한다. 3) 군주의 도덕성이 정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의 정치사회에서도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왕조시대의 정치현상은 군주의 역량에 따라 그 모든 것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정치에서 지목되는 애민정신이나 인간 존중의 정치, 평화 공존의 사회, 도덕국가 건설 등의 힘은 바로 그 자신이 일찍부터 견지했던 부모 공경의 효행과 형제 사랑의 우애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다. 4) 그러한 위정자의 기본적 도덕의식은 오늘날의 정치사회를 정화시키고 인류문화를 향상시키는 데에 적극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이 연구의 마지막 목표이다. 평화 사회를 지향하는 소통과 통합의 공동체의식은 위로부터의 도덕성 추구와 모범적 행위, 그리고 교화의식의 확장에서만이 기대될 수 있는 것이기 이기 때문이다.
  • 기대효과
  • 이 연구에서는,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충녕대군 세종이 장형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와 동시에 그 자리에 오르고 곧 조선왕조의 제4대 군주로 등극하는 격변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왕실과 정국 불안의 분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의 기본 덕목인 효도와 우애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기반에서 정치권력의 안정을 비롯한 평화 공존에의 유교 정치문화 발전의 결과를 낳게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방향에서 전개되는 이 연구 과제의 기대 효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갈등상황, 즉 부왕 태종 부부의 불화와 모후의 반대 및 양녕대군의 연금 조치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불안 정국을 전환하기 위한 세종의 도덕의식과 지혜로움이 심층적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2) 그의 내면에 있어서는 태종의 양녕 세자에 대한 교화의식과 유교문화 융성이라는 시대적 과제의식을 포괄하는 태도를 적극 추구하면서 특히 그 성공의 원동력으로서는 유교에서 강조하는 효도와 우애 정신의 부단한 궁행이 지목된다는 점을 밝혀낸다. 여기에는 왕조시대 왕실 구성원들의 상호 관계는 당대의 정치안정 여부와 직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성이 전제되어 있다. 3) 세종이 정치 현장에 등장하는 그 초기의 어려웠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세종 이해에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최근까지의 연구들은 주로 세종이 남긴 치적이나 업적 부분을 논거로 삼는 성격의 것이었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결과를 낳게 할 수 있었던 기조는 어떻게 조성되는 것이었던가?’ 하는 측면을 주목하여 연구의 차별화를 꾀하는 것이다. 4) 이러한 연구 결과는, 학문적으로 조선시대 초기 유교문화가 발달하는 저변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오늘날의 다방면에서 세종대왕을 칭송하며 문화 융성을 모색하는 데에 힘을 더하고 그 수준을 높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효과를 말할 수 있다.
  • 연구요약
  • <연구목적> 조선시대의 성군 세종대왕에 대한 연구는 주로 그가 남긴 치적과 과업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게 했던 내면적 요인으로서의 정신적 측면과 그가 세자교체의 과정을 거쳐서 성군이 될 수 있었던 배경 등과 연계한 연구 내용은 보기 어렵다. 이러한 측면이 간과된다면, 세종대왕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기본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고 본다. 논제와 관련한 연구 목적은, ① 태종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난 그가 어떻게 평가되어 왕이 될 수 있었나 하는 점을 밝혀보려는 것, ② 세종 즉위 전후에 발생한 왕실내의 갈등과 난맥상을 어떠한 도덕적 태도로 극복하며 정치 안정의 기조를 이룰 수 있었던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 ③ 그러한 도덕성이 어떻게 정치문화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상호 관계성을 파악하기 위함이며, ④ 그러한 사실은 과연 오늘날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평가해 보려는 것 등이다. <연구내용> 조선왕조의 건국은 유교사상을 그 이념으로 하는 것이었으나 제1·2차 왕자의 난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왕실 내에서는 효행이나 우애의 덕목조차도 지키기 어려웠다. 그러나 1418년 세종이 조선의 군주로 등극하면서부터는 그러한 분위기는 일신되었다. 앞의 연구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중점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청소년기 세종의 가치관 형성을 파악하는 것, Ⓑ 세자 교체의 주요 원인으로서 ‘효제’의 문제가 작용했음을 확인하는 것, Ⓒ 세자 교체 사건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왕실 구성원 사이의 갈등과 난맥상을 확인하며, 그 중심에 선 세종의 입장을 살피는 것, Ⓓ 그 난맥상 해결을 위한 세종의 부단한 효행 부분을 살피는 것, Ⓔ 양녕, 효령의 두 형에 대한 우애의 참모습을 확인하는 것, Ⓕ 세종의 효제의식이 정치문화 발전으로 이어지는 연계성을 파악하며, 그 전체를 평가해 보는 과정 등이다. <연구방법> 이 연구의 추진 전략은 세종 앞에 전개된 시대 상황을 직시하여 그 얼개를 풀어나가는 원리는 무엇이고 또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던가 하는 점을 논증하는 데에 있다. 이와 병행하는 연구 방법은 문헌연구의 형태로서 『태종실록』과『세종실록』을 논거로 하는 실증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특히 세종 효제관련의 언행이나 판단의식 등과 관련한 기사는 면밀히 검토 분석하여 그 도덕성의 확장이 정치발전의 차원에까지 이르는 내밀함을 밝히는 데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당대의 유신들과 달리 세종에게는 어떠한 권위주의나 유불의 경계를 넘어 부단히 효성과 우애의 마음이 작동했다는 사실을 규명하면서, 그 전체에 대한 평가과정을 밟는 형식을 취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논문은 조선시대 성군으로 칭송되는 세종대왕 李裪(1397〜1450)의 효도와 우애 모습에 대하여 왕자시절부터 재위 32년간을 대상으로 왕조실록에 근거하여 그 배경과 실제 및 의의 등의 관점에서 살펴본 것이다.
    인간존중의 사회를 추구한다면, 자식다운 태도로서의 부모 공경과 형제들 사이의 우애의식은 그 어느 것에 앞서는 최초의 덕목으로 중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덕 중시의 유교국가 건설을 이상으로 하던 조선 초기에 있어서는 왕자들 사이의 분란으로 인하여 그 기본 덕목인 孝悌의 실현조차 담보하기 어려웠다.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든 태종 때에 이르러서는 세자 양녕대군의 비행이 계속되자 그는 ‘擇賢’의 명분으로 세자교체를 단행하여 3남 충녕대군 세종을 세자로 삼고 곧 즉위시켰으나, 그 과정에서는 왕실내의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었다. 태종은 후대의 왕권 확립과 왕실의 안전성 확보 차원에서 처남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왕자들의 화목을 눈물로 강조했지만 그 앞날은 왕비의 세자교체 반대론에서 나타나듯이 평탄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부왕과 모후의 불화에 휩싸이거나, 두 형들의 섭섭함을 넘어 나타난 신하들의 끈질긴 배척운동에도 동요하지 않은 채, 그렇게 꼬이던 형국 속에서도 효도와 우애를 하나로 아우르는 도덕적 맥락을 견지하면서 왕실의 안정성과 유교정치문화의 기반을 확장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실제 상황을 다각적으로 고찰한 이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게 되었다. 첫째 세종은 일찍부터 왕자로서의 사명감 속에 ‘무엇이 도덕적으로 가장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충만했었다는 점, 둘째 왕실에서 효도와 우애의 길을 상실하면 곧 왕조의 앞날을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었다는 점, 셋째 그의 효제 실천은 어떠한 상대적 이해논리의 관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기 관리로서의 영역의식을 넓히며 구성원들을 도와가는 선제적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효제의 양상은 도덕적 의미 구현에의 본질주의와 선구자적 교화의식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 등이다.
  • 영문
  • This paper is King Sejong(Leedoo-李裪, 1397〜1450) of filial piety, brotherhood, and about having taken stock of it. Filial piety and virtue of close to the Joseon Dynasty, early due to relative difficulty of the Princes did not be practical.
    King Taejong was Prince Yangnyeong suddenly deposed the country in the 1418 years. And Choongnyung(忠寧-King Sejong's prince days name) great force of creating a new crown prince in his third son, he was. But the mother of Choongnyung was opposed to it.
    Nevertheless, the King Sejong did everything he could for his parents are indeed. He was politically to exclude an atmosphere where people overcame and respectful to protect the two of his brothers and lived until the end. Most importantly, they are brother and sister and brothers maintained a very good relationship with. These attitudes in Confucian culture of politics soon became engines for development.
    I checked with the following information in this study. First, King Sejong was early in the ‘What was most morally correct?’ considerate and so much for considering that in order to make good the effort. Second, he was the royal family and politics for stability of filial piety and brotherliness among them the value of the most treasured the fact that. Third, the morality of such, he was the need to reinforce the ability of no conflict, whilst constantly breaking up his pursuit of fact.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논문은 조선시대 성군으로 칭송되는 세종대왕 李裪(1397〜1450)의 효도와 우애 모습에 대하여 왕자시절부터 재위 32년간을 대상으로 왕조실록에 근거하여 그 배경과 실제 및 의의 등의 관점에서 살펴본 것이다.
    인간존중의 사회를 추구한다면, 자식다운 태도로서의 부모 공경과 형제들 사이의 우애의식은 그 어느 것에 앞서는 최초의 덕목으로 중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덕 중시의 유교국가 건설을 이상으로 하던 조선 초기에 있어서는 왕자들 사이의 분란으로 인하여 그 기본 덕목인 孝悌의 실현조차 담보하기 어려웠다.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든 태종 때에 이르러서는 세자 양녕대군의 비행이 계속되자 그는 ‘擇賢’의 명분으로 세자교체를 단행하여 3남 충녕대군 세종을 세자로 삼고 곧 즉위시켰으나, 그 과정에서는 왕실내의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었다. 태종은 후대의 왕권 확립과 왕실의 안전성 확보 차원에서 처남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왕자들의 화목을 눈물로 강조했지만 그 앞날은 왕비의 세자교체 반대론에서 나타나듯이 평탄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부왕과 모후의 불화에 휩싸이거나, 두 형들의 섭섭함을 넘어 나타난 신하들의 끈질긴 배척운동에도 동요하지 않은 채, 그렇게 꼬이던 형국 속에서도 효도와 우애를 하나로 아우르는 도덕적 맥락을 견지하면서 왕실의 안정성과 유교정치문화의 기반을 확장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실제 상황을 다각적으로 고찰한 이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게 되었다. 첫째 세종은 일찍부터 왕자로서의 사명감 속에 ‘무엇이 도덕적으로 가장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충만했었다는 점, 둘째 왕실에서 효도와 우애의 길을 상실하면 곧 왕조의 앞날을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었다는 점, 셋째 그의 효제 실천은 어떠한 상대적 이해논리의 관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기 관리로서의 영역의식을 넓히며 구성원들을 도와가는 선제적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효제의 양상은 도덕적 의미 구현에의 본질주의와 선구자적 교화의식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 등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 결과>
    ‘세종대왕의 효제에 관한 연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은 얼개로 담아냈다. 즉 서론에 이어 1) 부왕과 모후 불화 속의 효행(①부왕과 모후의 불화 현상 ②부왕 태종에 대한 효성 ③모후에 대한 효성), 2) 형제 갈등 위험 속의 우애(①형제 갈등 발생의 위험성 ②장형 양녕대군 공경 ③효령대군 공경과 성녕대군 사랑 ④누이와 이복형제에 대한 우애), 3) 세종 효제의 특징과 의의(①효행과 우애의 일치의식 및 교화적 의미 ②왕실 안정과 정치문화발전 기반 구축) 등의 순차를 거쳐 결론을 맺은 형태이다. 이제 그 종합적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세종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왕자로서의 사명감 속에 ‘무엇이 도덕적으로 가장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충만했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부왕이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독서에 정진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었고, 기회만 되면 그러한 학문 활동에서 얻은 실력을 발휘하여 왕실의 효제문화를 제고시키고자 노력했으며, 세자 양녕대군의 미진함에 대해서는 간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택현’의 명분을 따라 세자와 군주의 자리에 오르면서는 그러한 도덕적 정의감 추구의 문제의식이 국가경영의 맥락으로 승화하여 정치문화 발전에의 동인이 되기도 했다.
    둘째, 세종은 효도와 우애의 길을 상실하면 곧 왕조의 앞날을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만일 부모 섬김에의 효도의식이 약화되면 선대정치의 계승발전을 기하기 어려운 것이고, 형제 사이의 우애의식이 간과되면 이미 부왕이 겪은 바와 같은 왕실의 화란이 일어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부왕 태종은 네 왕자 모두를 앉혀놓고 형제간 화목의 중요성을 눈물로 가르쳤으며, 모후는 ‘아우를 세자로 삼으면 화란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하면서 세자교체를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는 눈물의 나날을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세종은 부왕과 모후의 눈물에 내재한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마침내 효도와 우애 합일의 맥락을 굳게 지키며 그 모든 불안 요소를 해소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세종 효제의 궁행은 그 어떠한 상대적 이해논리를 따르는 형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관리영역을 넓히며 상대를 도와가는 선제적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원래 도덕적 행위란 상대의 반응을 계산하여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공감과 화응의 정도를 높여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기반 조성은 자기 영역의식의 확장으로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22세의 젊은 나이로 등극한 세종에 있어서는 그 영역의식이 왕실의 여러 구성원은 물론 조정 신하나 백성들까지 포괄할 정도로 확대되었으며 사상적으로는 유교를 넘어 불교의식까지 수용할 정도였다. 그로 인하여 그는 부왕과 모후 사이의 불화를 녹여내면서 두 형들과 이복형제에 이르기까지 공경과 사랑의 분위기를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부모형제의 혼령 위안에는 유교나 불교의 차이를 두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넷째, 세종 효제의 양상은 도덕적 의미 구현의 본질주의와 선구자적 교화의식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참된 효성과 올바른 우애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본질적 의미 확인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니, 그러한 모습은 종종 부왕으로부터 효자라는 칭송을 낳게도 했지만, 특히 모후와 부왕의 간병행위로부터 상례로서의 역월제에 대한 반성과 변경 및 자기 생신 때의 독특한 발언, 정선공주의 장례의식 조정, 그리고 효성을 담은 성녕대군 위로의 불사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내면성 추구는 그 누구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면 과제 해결의 현장에서나 여러 가지 의례의 확인과정에서 스스로 찾아내고 교정해가도록 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끈질긴 양녕대군 배척의 여론에 대해서도 ‘형제간의 만남이 어찌 義에 해롭다는 것인가?’라는 말로 맞서면서 그 우애를 견지해가는 것이었으니, 그러한 본질주의의 지향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을 낳게 하는 교화적 의미까지 담보되고 있었다. 나아가 그 여러 방면의 효제의식 정립은 세종시대 정치사회문화 발전의 기저로 작용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리라 후대의 군주들에게도 하나의 선행적 모델로 수용되어 왕조의 안정성 제고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활용 방안>
    이 연구 결과의 활용 방안은 다음과 같다.
    1) 세종대왕에 대한 학술적 연구정보 확장 및 홍보활동의 기본 자료로 활용한다.
    2) 조선시대 전기 유교정치문화 전개 양상의 특성을 파악하는 주요자료로 활용한다.
    3) 조선조 정치사상사 서술의 보완 및 전통윤리의 선구적 실천 사례로 활용한다.
    4) 현대인의 인성교육 활동 및 각종의 지성적 연찬 자료로 활용한다.
  • 색인어
  • 세종대왕, 세종 孝悌, 효도와 우애, 태종, 세종 모후, 양녕대군, 효령대군, 성녕대군, 유교정치문화, 왕실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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