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분석을 통해 기생충을 비롯한 다양한 보건의료 활동들이 해방 후 한국사회와 대중의 경험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음이 드러났다. 연간 1,000만 명 이상을 대상으로 진행된 채변검사와 구충제 투약은 대중의 인식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또한 그보다 앞서 일어난 1950 ...
자료 분석을 통해 기생충을 비롯한 다양한 보건의료 활동들이 해방 후 한국사회와 대중의 경험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음이 드러났다. 연간 1,000만 명 이상을 대상으로 진행된 채변검사와 구충제 투약은 대중의 인식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또한 그보다 앞서 일어난 1950년 한국전쟁과 1960년대 초반 파독 광부 기생충 감염 사건, 전주예수병원 장폐색 아동 사망 사건들을 지나며, 장내기생충 회충은 당연한 일상의 동반자에서 수치스러운 질병으로 변화해갔다.
일차년도 사료를 검토를 통해 전후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국가 만들기(재건)의 과정에서 다양한 질병과 보건의료 문제들이 국가의 관심 대상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결핵, 한센병, 가족계획, 그리고 기생충이 있다. 특히 기생충은 1966년 기생충예방법이 제정되었으며, 가족계획은 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결핵은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되며, 국가 상위 정책 단위의 보건사업이 되었다. 1956년 보건소법에 제정되면서 국가는 보건정책을 전국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조직의 뼈대를 갖추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자원은 제한적이었다. 전후에 대단히 제한적인 자원만을 활용할 수 있었던 국가는, 다양한 민간단체, 전문가 집단, 해외 원조 등을 통하여 보건 정책을 수립하고 수행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협회’로 대표되는 활동들이 두드러졌다. 각각의 질병을 대표하는 집단, 즉 대한결핵협회(결협), 대한나협회(나협), 대한가족계획협회(가협), 한국기생충박멸협회(기협)은 정책 입안과 관련 법규 제정, 사업 수행 전반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민간단체들은 자금과 인력의 상당 부분을 정부에서 충당하고 있어, 준정부기구라 볼 수 있다. 또한 제한된 전문가 인력 풀에서 각 협회들이 인력을 교환하는 경우가 많아, 서로간의 사업 수행 양식에 있어 영향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의 사례에서 기생충 관리 사업과 가족계획 사업이 서로를 보완하는 형태의 체계로 변화해 갔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다양한 보건의료 사업들이 협회라는 매개조직, 또한 상하위정치를 통해 다양한 상호작용을 맺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1960-70년대 국가동원 체제에서 가족계획은 국민의 일상생활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정부는 군사정부 초기(1961년)부터 1979년까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가족계획을 수행했다. 이는 가족계획이 동원체제의 큰 틀 속에서 경제발전과 같은 더 큰 목표를 위한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김명숙, 2008) 군사정권은 민간부분에서 미약하게 실시해오던 가족계획을 주요 정책으로 삼아 국가 정책에 통합했으며, 중간조직(대한가족계획협회)와 말단조직(가족계획어머니회)을 이용하여 국민의 일상생활로 만드는데 주력했다. 연구결과를 통해 수집된 자료를 통해 기생충 감염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국제 정치 레짐이 어떻게 한국의 보건의료 체계 형성과 한국 사회의 경험에 영향을 주었는지, 또한 이에 국가와 민중은 어떻게 대응하고 상호작용 하며 생태적 환경을 형성하였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