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의 表象매체로 기능한 翎毛花草 이미지 연구
- 題詩‧題跋 외 문헌자료의 분석을 토대로
Representation of Loyalty as a Function of Bird and Flower Images
- Based on Inscription and Literary Documents
“忠의 表象매체로 기능한 翎毛花草 이미지 연구 - 題詩‧題跋 외 문헌자료의 분석을 토대로“라는 주제의 본 연구는, 그림 속 조류‧화초류의 조형이미지에 대하여, 중세문화 속에서 정치적 성격의 표상매체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영모화초 이미지의 기능을 파악하려고 한다. 특히 전 ...
“忠의 表象매체로 기능한 翎毛花草 이미지 연구 - 題詩‧題跋 외 문헌자료의 분석을 토대로“라는 주제의 본 연구는, 그림 속 조류‧화초류의 조형이미지에 대하여, 중세문화 속에서 정치적 성격의 표상매체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영모화초 이미지의 기능을 파악하려고 한다. 특히 전근대기 사회구조의 최상층부에서 강력한 구조를 견지했던 君臣關係에서 조응의 핵심적 道德槪念이었던 ‘忠’이 이미지로 표현되고 활용된 다양한 양상을 추적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翎毛‧花草’의 이미지를 연구함으로써 이로써, ‘영모화초’ 이미지의 간과된 기능과 문화사적 역할을 제시하고자 한다. ‘영모화초’란, 조류와 화목‧화훼류를 그린 그림을 범칭하는 말이며 조선시대에 사용된 공식적 회화 갈래명의 하나이다. 본 연구에서 말하는 ‘이미지(image)’란 조형이미지를 말한다. 본 연구는 ‘이미지’라고 함으로써 회화작품의 作品性보다는, 의미를 가지고 記號로 기능하는 조형이미지 즉 문화적 혹은 정치적으로 유효한 전달의미를 가지는 이미지라는 점을 뜻한다. 영모화초의 이미지들은, 특정한 동식물을 대상으로 하면서 사회문화적으로 요구되는 뚜렷한 의미를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모화초의 이미지들이 역사 속에서 거치는 의미와 기능의 변화에는 시대의 내밀한 요구 혹은 이미지 활용의 전략이라는 역사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동아시아 회화사에서 산수화나 인물화보다 화조화류의 출범은 그 유래가 더욱 오래다. 영모화초 이미지의 활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사실상 역사와 제도 속 인간의 태도에 대한 이해를 농밀하게 반영한다. 회화사의 영모화초에 대응하는 문학사에서의 詠物류의 시문에도 관심이 저조해진다. 이에, 영모화초 이미지의 역사적‧정치적 의미와 기능의 조명은 여러 갈래 문예현상에 대한 균형감 있는 총체적 이해를 위하여 필요한 작업이다. 본 연구는 ‘忠’의 表象을 연구하고자 한다. ‘忠’은 동아시아의 고대로부터 당위적 덕목인 양 간주되었지만, 사실은 전근대기가 산출했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忠’은 君臣제도에서 비롯되는 人爲的 덕목이며 군신이 스스로 요청하고 표현한 덕목이며,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역사적이다. 오늘날에는 ‘충’을 하나의 역사적 개념으로 파악하면서 객관화시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대효과
본 연구는, 첫째 전근대기에 사용된 이미지의 기능 중 전근대기 사회구조의 정점에서 활용된 양상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조형이미지의 기능에 대한 이해와 국문학계와 미술사학계의 연구방법과 관점에 형성에 도움을 주고, 조선시대 문예예술에 대한 균형잡힌 관 ...
본 연구는, 첫째 전근대기에 사용된 이미지의 기능 중 전근대기 사회구조의 정점에서 활용된 양상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조형이미지의 기능에 대한 이해와 국문학계와 미술사학계의 연구방법과 관점에 형성에 도움을 주고, 조선시대 문예예술에 대한 균형잡힌 관점을 제공한다. 둘째, 본 연구의 결과는 공예사의 문예연구 특히 도자사의 연구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준다. 도자사 연구는 도자기 형태와 재질을 중심으로 해오다가 최근에 문화적 활용의 측면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때 도자기의 문양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 고급도자기는 대개 왕실 혹은 고위관료층에서 사용되었고, 국가번영의 기반이 되는 충의 표현을 보여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상술한 조선초기 청화백자의 매죽 유행에 대한 정치적 이해가 한 예이다. 매죽이 청렴한 관료상의 상징이었던 것을 이 연구에서 밝히고자 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동안 학계의 연구가 부진했던 조선초기-원(元)의 문화적 연계성, 정치적 문화정책의 연관성을 제출하여, 조선전기 문화에 대한 이해에 기여한다. 원대 초기 서예로서의 송설체의 영향은 정설처럼 알려져 있지만 송설 조맹부의 회화에서 사용된 정치적 메타포가 조선전기 회화예술이나 제화시 등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연구된 바 없다. 조맹부 뿐 아니라 원대 문학이나 저술의 상당량이 조선시대 문화형성에 활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기존연구에서 누락시킨 중요한 부분을 채움으로써 조선전기 문화이해에 탄력과 심도를 제공한다. 넷째, 고전문화의 컨텐츠 개발에 다양한 근거자료를 제시한다. 온갖 자연물상이 ‘忠’이라는 덕목을 발휘하는 다양한 양상의 비유를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연구요약
“忠의 表象매체로 기능한 翎毛花草 이미지 연구 - 題詩‧題跋 외 문헌자료의 분석을 토대로”라는 본 연구주제는, 다음의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1) ‘忠’의 속성과 君臣의 문예를 배경으로 파악한다. 한 사람의 최고 권력자[君]에게 집중하는 구조를 바탕으로 한 ‘忠’의 도덕은 인위적 속 ...
“忠의 表象매체로 기능한 翎毛花草 이미지 연구 - 題詩‧題跋 외 문헌자료의 분석을 토대로”라는 본 연구주제는, 다음의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1) ‘忠’의 속성과 君臣의 문예를 배경으로 파악한다. 한 사람의 최고 권력자[君]에게 집중하는 구조를 바탕으로 한 ‘忠’의 도덕은 인위적 속성의 개념이다. 본 연구는 이미지의 속성을 해석하는 데 일차적 목적을 두고 충의 성격이 문예물에 역사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반영되는지 살피고자 한다. 2) ‘君이 聖恩을 표현하는 이미지의 내용을 살핀다. 왕이 신하에게 그림을 그려준 경우, 화원화가를 통하여 그림을 전해준 경우, 왕실을 치장한 이미지 등이 이에 포함된다. 왕이 스스로 蘭‧竹‧梅 등을 그려서 신하에게 하사한 경우가 적지 않다. 金麟厚가 仁宗으로부터 墨竹을 하사받은 사례는 모범이 되어, 조선후기에 이로도록 충의 메타포로 존중되고 거듭 판각되었다. 왕이 신하들에게 나누어준 歲畵는 왕의 하사라는 점에서 신하에게는 충성의 약속으로 표현된다. 왕실을 장식한 조형이미지가 다양한데 일례로 ‘鳳凰朝陽’은 賢臣을 구하는 왕실의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 3) 신하가 충성을 표현하고자 사용한 영모화초의 이미지를 탐색한다. 그림에 관련된 모든 기록, 화가에게 자신 혹은 자신의 그룹을 표현하게 한 기록적 글을 살피면서, 영모화초의 이미지가 자신의 충성스런 면모를 비유하였는지 찾는다. 조선초기 契會圖 하단의 <梅><竹>을 그린 것과 조선초기 고급 청화백자의 문양으로 매죽이 그려진 것은 元에서 정착한 충절이미지 ‘歲寒三友- 松竹梅’와 관련을 깊고, 특히 조선초기 청렴하고 충성스런 인격의 의미로 사용된 것을 문헌으로 밝힐 수 있다. 이 외에도 신하의 입장에서 충성을 표현하는 매체는 다양하여, 매[鷹], 蜀葵의 向日, 기러기의 隨陽, 오리[鴨] 한 쌍 외에, 趙光祖의 충성을 읊은 胡蝶夢의 나비가 愛君의 메타포로 사용된 예 등이 발견된다. 이러한 시문의 양상과 이미지의 적절한 비교를 시도하고자 한다. 끝으로 ‘敎化의 아이콘화 – 서사물의 시각적 조형화’를 따로 다루고자 한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티프가 서사의 주제와 서사의 시간을 압축하면서 도상(아이콘)으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조선시대 ‘충(忠)’을 표현하는 영모화초의 주제는 ‘매죽(梅竹)’ 외에도 난(蘭), 규화(葵花), 새 매[鷹], 혹은 국(菊) 등으로 다양하다. ‘매죽’은 조선전기 시각문화 즉 회화나 도자 등에 부각되어 등장하였으며, 이는 중국에서 명나라 초기 황실의 회화작품과 도자에 성행한 ‘세한 ...
조선시대 ‘충(忠)’을 표현하는 영모화초의 주제는 ‘매죽(梅竹)’ 외에도 난(蘭), 규화(葵花), 새 매[鷹], 혹은 국(菊) 등으로 다양하다. ‘매죽’은 조선전기 시각문화 즉 회화나 도자 등에 부각되어 등장하였으며, 이는 중국에서 명나라 초기 황실의 회화작품과 도자에 성행한 ‘세한삼우(歲寒三友)’와 유사한 코드의 매체였다. ‘세한삼우도’라는 화제(畵題)로 ‘송죽매(松竹梅)’를 칭하는 고정된 명칭도 명대 초기에 이루어진 문화였다. 세한삼우는 절개와 지조를 가진 충성스런 군자의 의미였다. 세한삼우도가 명대 초기 황실에서 중시된 것은 원대의 잔재를 청산하는 시대적 요구와 상통하였고, 이러한 식물코드는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를 일으킨 조선초기 왕실에서 유효하였다. 조선초기는 ‘매죽’의 이미지를 사용하였는데 그 의미활용은 고려시대의 묵죽문화와는 달리 유가적 충절군자의 비유체였다. 명나라 초기의 세한삼우나 조선초기의 매죽은 그 이미지가 청나라 말기나 조선말기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이들의 의미는 변화한다. 명대중기를 지나면서 조선후기를 접어들면서 충절의 의미가 퇴색하고, 세한삼우류나 매죽류는 각각 수복(壽福)의 기복적 의미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러한 후기의 변화는 조선전기 매죽의 이미지가 보여준 충의 매체적 속성이 시대적 특징이었으며 나아가 회화예술이 기능적 필요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영문
Among many subjects of bird and flower paintings and patterns used in Joseon, there were several symbolic images for loyalty such as orchid, chrysanthemum, hawk and so on. Images of plum blossom and bamboo were conspicuously used in the early Joseon. ...
Among many subjects of bird and flower paintings and patterns used in Joseon, there were several symbolic images for loyalty such as orchid, chrysanthemum, hawk and so on. Images of plum blossom and bamboo were conspicuously used in the early Joseon. These images must be connected to chinsese suihansanyou or three friends in the cold season, which was composed of pine tree, bamboo and plum blossom. Suihansanyou’s composition were traditionally formed but employment of the image of three plants under the title of Suihansanyou in court painting and pattern of royal porcelain appeared in the early Ming. Many scholars at that time praised Suihansanyou as faithful friends in the hard times. It would be said that the image of loyality was needed in the early Ming Dynasty because of the vestiges from the Mongol Yuan and that it was similar to the early Joseon after the change of dynasty. The image itself was used in the late Joseon and late Ming, but the meaning was changed into longevity and happiness.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세한삼우’란 송(松), 죽(竹), 매(梅)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칭하는 말이며, 추운 계절을 버티는 식물로서의 세 벗의 뜻으로 알려져 있다.‘세한삼우’라 불리면서 상기의 세 식물로 정착되어 회화나 문양으로 부각된 시기는 중국 명나라의 초기였다. '세한삼우=송죽매'라는 ...
‘세한삼우’란 송(松), 죽(竹), 매(梅)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칭하는 말이며, 추운 계절을 버티는 식물로서의 세 벗의 뜻으로 알려져 있다.‘세한삼우’라 불리면서 상기의 세 식물로 정착되어 회화나 문양으로 부각된 시기는 중국 명나라의 초기였다. '세한삼우=송죽매'라는 개념은 송대(宋代)에 이미 있었으나 문인문화 속에서 정착되어 활용되지는 않았다. 이는 소식(蘇軾), 왕십붕(王十朋) 등의 송대학자들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한편‘송죽매’를 하나의 세트로 지식인들이 시문이나 그림의 주제를 활용한 것은 원나라 황실의 관료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남송 양보지(楊補之)의 <송죽매도>를 감상했다고 했다. 한편 ‘송죽매’가 세트로 그려진 것은 남송말기의 조맹견(趙孟堅,)의 유명한 두 작품이 있으나 ‘세한삼우도’라는 세트이미지의 시각적 사용은 명대 15세기에 되어야 본격화된다. 선덕년간(宣德年間) 황실에서 사용된 청화백자에 송죽매가 시문된 예들이 풍부하며, 동시대 활동한 황실화가 변문진(邊文進)이 송죽매를 배경으로 백금(百禽)를 그린 <삼우백금도> 도 좋은 예이다. ‘세한삼우도’라는 제목의 명칭도 명대에 등장한다. 명대 관료 왕직(王直), 서유정(徐有貞) 등의 글에서 ‘세한삼우도’가 제목으로 정착된 명대초기 문화를 읽을 수 있다. 이로 보아 오늘날 조맹견의 송죽매 그림을 세한삼우도라 명명한 것은 명대초기였다고 판단된다. 한반도에서서 그려진 ‘세한삼우’라면 고려말기에 그려졌던 흔적이 일본 소재 해애(海崖)의 비단그림으로 전해질 뿐이며 문헌상으로는 세한삼우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고, 조전초기의 관료 서거정(徐居正)만이 세한삼우의 존재를 인식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전기 미술문화에서는 ‘매죽’의 세트가 눈에 띄게 부상하였다. 세한삼우를 다루는 언어담론도 형성되지 않았다. 묵매와 묵죽의 두 화목은 이미 송나라에 시작되어 원대에 이르러 크게 발달하였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와 이색(李穡) 등이 묵죽과 묵매를 감상한 글을 남겼는데 이들은 개성적 인격으로 그 의미를 읊었다. 이는 조선초기 서거정(徐居正)이 묵매와 묵죽을 세한의 지조식물로 의미화한 점과 크게 다르다. 묵죽과 묵매의 의미가 유가적 군자의 충절과 지조로 정착되고 강화된 것은 중국의 원나라 황실의 관료사회였다. 한편 서우공(徐禹功)의 <설중매죽도권(雪中梅竹圖卷)> 가 원말과 명대초기 학자들에게 칭송된 일도 주목된다. 한반도에서의 ‘매죽’이미지는 1398년 타계한 박익(朴翊)의 묘지, 조선초기 안견의 그림 ‘매죽도’의 기록 및 서거정의 매죽도 제화시의 “매화는 담박하고 대는 빼어나서(梅能淡泊竹檀欒), 고상한 절조 맑은 품격이 백중간이네(雅節淸標伯仲間). 죽우와 매형은 서로 벗 삼을 만하지(竹友梅兄堪作伴). 세한의 사귐에 어긋나지 않으니(歲寒交道不蹉跎).”로 드러난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모임을 기록한 그림 계회도(契會圖)에 장식처럼 삽입된 매죽 이미지는 그 활용 의도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청렴함으로 나라에 충성스런 관료의 정체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조선초기 고급의 청화백자도자기에 매・죽의 조합이 시문되어 유행한 양상도 충절의 덕목의 의미였으며 조선왕실에서 군신간에 요구한 정치적 도덕을 표현하기 적절한 이미지 기호이자 명대 초기 부상한 참신한 시문으로 수용된 시각문화로 판단된다. 한편 중국의 명대 중반기로 접어들면 세한삼우의 송죽매가 담보했던 비덕(比德)의 속성이 급격히 변화되었다. 명대 초기의 관료문인들은 세한삼우에 드는 송죽매를 최고의 식물로 칭송하며 그 청렴한 지조를 높이 기렸으나 명나라가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충절의 주장은 그 유효성이 상실되어 갔던 것으로 나타난다. 세한삼우의 이미지들은 명나라 사회의 변화 속에서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 현실적 기복, 수복(壽福)의 매체로 그 성격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중국에서 세한삼우가 충절, 변치 않는 지조의 비유체로 형성되고 기능한 것은, 원명교체(元明交替)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활용된 시각문화였다는 해석을 허락해준다. 또한 한국에서도 조선말기 매화와 대나무가 수복의 매체로 사용되고 그려진 예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매죽이 충절의 군자로 정치적 상징체로 부상하고 활용된 것은 명대전기와 조전전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부합된 미술문화였다.
연구 결과; 한반도에서의 ‘매죽’이미지는 1398년 타계한 박익(朴翊)의 묘지와 조선초기 안견(安堅) ‘매죽도’기록 및 서거정의 매죽도 제화시에서“세한의 사귐에 어긋나지 않으니(歲寒交道不蹉跎).”의 의미화로 드러난다. 조선초기 고급의 청화백자도자기에 매・죽의 조합이 시문되어 유행한 양상도 주목된다. 아울러 조선시대 관료들의 모임을 기록한 그림 계회도(契會圖)에 장식처럼 삽입된 매죽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전기 매죽이미지가 정치적으로 ‘충’을 표현한 매체였다는 것을 이 논문이 연구한 결과이다. 이러한 논의를 받쳐주는 자료가 중국의‘세한삼우’이다. 송(松), 죽(竹), 매(梅)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칭하는 세한삼우는 추운 계절을 버티는 세 벗이란 뜻이며, 이들이 ‘세한삼우’라 불리면서 회화나 문양으로 부각된 시기는 중국 명나라 초기였다. ‘송죽매’가 세트로 그려진 것은 남송 말기 조맹견(趙孟堅)의 두 작품이 있으나 ‘세한삼우도’라는 세트이미지의 사용은 명대 15세기에 되어야 본격화되어 선덕년간(宣德年間) 황실에서 사용된 청화백자에 송죽매가 시문되었고 화원화가는 송죽매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세한삼우도’의 명칭은 명대초기의 관료 왕직(王直), 서유정(徐有貞) 등의 글에서 명시된다. 한반도에서는 고려말기에 그려졌던 흔적으로 일본 소재 해애(海崖)의 <세한삼우도> 외에 서거정(徐居正)이 세한삼우의 존재를 인식했던 기록 하나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전기 시각문화에서는 ‘매죽’의 세트가 눈에 띄게 부상하였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서 보면 ‘송죽매국(松竹梅菊)’의 명칭이 빈번하게 사용되며 사우(四友)로 칭해졌고 세한삼우를 다루는 언어담론는 형성되지 않았다. 묵매와 묵죽의 두 화목은 송나라에 시작되어 원대에 이르러 크게 발달하였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와 이색(李穡) 등이 묵죽과 묵매를 감상한 글을 남겼는데 이들은 개성적 인격으로 그 의미를 읊었다. 이는 조선초기 서거정(徐居正)이 묵매와 묵죽을 세한의 지조식물로 의미화한 점과 크게 다르다. 묵죽과 묵매의 의미가 유가적 군자의 충절과 지조로 정착되고 강화된 것은 중국의 원나라 황실의 관료사회였다. 한편 서우공(徐禹功)의 <설중매죽도권(雪中梅竹圖卷)> 가 원말과 명대초기 학자들에게 칭송된 일도 주목된다. 중국의 명대 중반기로 접어들면 세한삼우의 송죽매가 담보했던 비덕(比德)의 속성이 급격히 변화되었다. 명대 초기의 관료문인들은 세한삼우에 드는 송죽매를 최고의 식물로 칭송하며 그 청렴한 지조를 높이 기렸으나 명나라가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충절의 주장은 그 유효성이 상실되어 갔던 것으로 나타난다. 세한삼우의 이미지들은 명나라 사회의 변화 속에서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 현실적 기복, 수복(壽福)의 매체로 그 성격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세한삼우가 충절, 변치 않는 지조의 비유체로 형성되고 기능한 것은, 원명교체(元明交替)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활용된 시각문화였다. 또한 한국에서도 조선말기 매화와 대나무가 수복의 매체로 사용되고 그려진 예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즉 매죽이 충절의 군자로 정치적 상징체로 부상하고 활용된 것은 명대전기와 조전전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부합된 미술문화였다. 연구 활용방안; 첫째, 전근대기 회화의 속성에 대한 이해를 다층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회화가 하나의 작품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기능으로 활용된 매체였다는 점을 이해하게 하고, 나아가 전근대개 시각문화에 대한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둘째, 영모화초 혹은 화조화에 대한 구체적 실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이들이 주제로 한 식물, 조류, 동물이 자연 속 그 자체를 그린 그림이라거나 장식적 속성을 넘어서는 특별한 의미로 활용되었음을 알게 한다. 한편 ‘사군자’의 도덕성의 의미는 사용자의 필요를 기반으로 활용된 것임을 알게 한다. 셋째, 연구의 궁극적 목표가 각종 동식물의 매체적 속성 및 활용된 상징체제라는 점에서, 다양한 상징의미체로서 동식물에 대한 전통 이미지의 콘텐츠 구성에 도움을 준다. 영모화초화의 다양한 주제의 상징성과 활용예를 살피는 것은 궁극적으로 동식물을 이용한 캐릭터 제작이나 패턴 제작에 구체적이고 풍부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