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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보도사진에서 "저자성"의 문제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Problem of "Authorship" in Contemporary Photojournalism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4S1A5B5A07042154
선정년도 2014 년
연구기간 1 년 (2014년 09월 01일 ~ 2015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여문주
연구수행기관 홍익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오늘날 우리는 실재가 더 이상 픽션의 모델이 아닌 시대를 살고 있다.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이 바그다드 한복판, 후세인 궁을 소탕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긴장감 넘치는 매 순간 서구의 방송들은 “영화같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렇게 픽션은 아이러니하게도 실재의 모델이 됐고, 픽션과 얼마나 유사한지가 실재의 리얼리티를 결정하는 기준이 돼버렸다.
    서구의 현대 포토저널리즘에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르주 메리옹이나 호신 자우하르와 같은 보도사진가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 준 사진들이 그러하다. 박진감 넘치는 소탕작전을 벌였던 이라크 전쟁에서, 현실 속 미군들이 마치 할리우드 전쟁영화 속의 배우들을 흉내 내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이들은 광고나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의 이미지들, 또는 역사화나 종교화와 같은 유명한 미술사적 도상들의 조형적 코드들을 차용한 사진들로 유명해졌다.
    이른바 “저자(author)”로서의 보도사진가라는 새로운 유형에 속하는 이들은, 사진가의 주관적인 시선과 사진가의 특별한 미학을 경계하지 않고, 기꺼이 그것을 자신들의 사진 속에 투영한다. 애초 정보 전달의 목적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기 위해 제작되는 보도사진이 “예술작품”이 되고, 보도사진가가 “예술가”로서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보도사진은 여느 예술작품들처럼 미술관과 화랑에서 전시되고, 경매와 아트페어를 통해 고가에 판매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근의 이런 변화를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본 연구자는 포토저널리즘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에 있다. 그리고 사실 그 가능성은 지난 사진의 역사에서 유진 스미스, 돈 맥컬린, 로버트 카파, 위지 등과 같은 수많은 위대한 사진가들의 작업에 의해 입증됐다.
    하지만 본 연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이들 같은 거장 보도사진가들의 사진에서 예술성이란 문제-이제는 다소 진부해진-에 관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한 목적 없이 애초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사진들과, 앞서 언급한 “저자”로서의 보도사진가들의 경우처럼, 친숙한 대중문화, 그리고 미술의 외시적 코드와 장치들을 사용하는 오늘날의 특정 보도사진들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본 연구자가 보도사진의 “예술화”라는 현상과 관련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바로 후자의 경우이다. 미국의 참여미술가 마사 로슬러는 보도사진에서의 예술적 “아우라”는 자신의 데옹톨로지를 담보로 스스로를 미적 대상으로 축소시킬 위험에 있음을 경고했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왜 그런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오게 됐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는지,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데 있다.
    본 연구자는 서구 포토저널리즘에서 이런 위기상황이 한국의 포토저널리즘이라 해서 반드시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의 보도사진가들 가운데 일부는 예술가로 전향한 이들도 있고, 또 다른 일부는 현장에 남아있으면서 작품집을 만들어 출판도 하고, 미술관과 화랑에서 전시를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서구의 포토저널리즘에서 본격적으로 “예술화” 문제의 계기로 작용했던 동시대 보도사진의 미술시장으로의 편입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문제에 여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순수 예술사진과는 달리, 포토저널리즘은 사건의 정확하고 객관적인 보도와 더불어, 인간과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덕목까지 요구된다.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사진가가 자신의 주관적 미학을 희생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른다. 이때 서구 포토저널리즘에서의 이런 위기상황은, 진실에의 의지와 예술에의 의지 사이, 끝없이 갈등하고 있는 사진가들에게 자극과 동시에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또한, 만약 이 두 개의 의지 사이 균형이 깨질 때,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이 사회와 역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 어떤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기대효과
  • 사회나 정치 문제를 다룬 작업은 더 이상 현대미술의 “주류”가 아니다. 가볍고 '펀(fun)'한 스펙타클이 예술로 각광을 받는 시대, 무겁고 복잡한 이슈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도 예외는 아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적 상황들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우리 사회의 관심 밖에 놓여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얼마 전부터 다큐멘터리 사진이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미술시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경우에 해당하고, 그것마저 해외 유명 사진가들에만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얼마 전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위기를 언급한 누군가의 지적이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위기는 어쩌면, 전시 기획자 클레망 셰루(Clément Chéroux)의 표현을 빌자면, 정보(information)가 오락(entertainment)으로 변한 "인포테인먼트(infortainment)"에서 자신의 위기 상황을 모면할 “돌파구”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예술이 됐건 오락이 됐건, “저자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의 데옹톨로지를 희생시켰던 사진들에 대한 본 연구의 비판적 접근은, 보도사진과 같은 매스 미디어적 이미지의 폭력에 갈수록 둔감해지는 한국의 대중들과, 상대적으로 그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논의가 부족했던 한국의 이론가들을 자극하고, 활발한 논쟁의 이슈를 더 많이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다.
    아울러 현재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보도사진가들을 비롯해 앞으로 이 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사진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과 문제의식을 갖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고 싶다. “현실적 경향”과 “창조적 경향” 사이 균형을 잡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본 연구가, 실재와 시뮬라크르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직업윤리와 예술의지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고, 건강한 포토저널리즘과 진정한 다큐멘터리 사진, 그래서 예술적 가치가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사진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하길 바란다.
    한편, 이제까지 사진에 대한 국내에서의 담론들은 벤야민이나 바르트, 또는 손탁 등의 제한된 이론들에만 기대고 있는 실정이다. 사진의 본질에 대한 가장 최근의 담론이자 또 가장 설득력 있는 필립 뒤부아(Philippe Dubois)의 “사진행위(acte photographique)”론은 아직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타당성에 대한 논의 또한 충분히 검토되지 못한 것 같다. 본 연구를 통해 그 이론적 결핍이 보충되고, 차후 관련 주제들을 다룬 또 다른 연구들을 위해 기초 자료로 활용되길 바란다.

  • 연구요약
  • 현대 포토저널리즘의 “예술화” 경향은, 사진이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것이 아직도 유효한가, 만약 그렇다면 포토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 사진, 즉 사회와 역사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갖는 사진으로서, 그것의 데옹톨로지는 사진가의 예술의지와 충돌하는 것은 아닌가, 만약 예술성이 가능하다면 그 진정한 예술적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등과 같은, 가볍지 않은 문제들을 던진다. 본 논문은 이렇게 매우 민감하지만, 오늘날 위기에 처한 현대 보도사진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안들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먼저 본 논문이 그 연구의 대상으로 상정한 시기는, 서구의 포토저널리즘이 "예술화" 경향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논의의 대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2000년 이후가 될 것이다. 프랑스의 미술사가이면서 현대사진 이론가인 미셀 푸아베르는, 과거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빈티지 보도사진이 아니라, 동시대의 보도사진이 미술시장에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2000년을 보도사진사에서 중요한 변환의 시기로 상정했다.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이미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지만, 미술시장에 동시대의 보도사진이 포섭되기 시작하면서 보도사진의 데옹톨로지나 예술과의 관계라는 민감한 문제들이 같이 제기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2. 이런 사진들의 조형적 측면에서 가장 많이 지적되고 있는 특징은 “상호도상성”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프레데릭 랑베르는 상호도상성이 정보산업에서 어떤 효과를 내고 있으며,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었다. 역사 속에서 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을 유일한 사건을 다루는 보도사진은, 대중적으로 친숙한 코드들, 예를 들어 유명한 미술사적 도상이나 매스 미디어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전용의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어디서 이미 본 듯한 “데자뷰” 현상을 유도한다. 본 연구는 랑베르의 이론을 바탕으로, 앞서 언급한 메리옹이나 자우하르와 같은 사진가들의 사진 속에서 상호도상성이 어떻게 “저자성”을 부여하는지 검토할 것이다.
    3. 한편, 각자만의 개별적인 “양식화”를 보여주는 사진미학으로 기존의 포토저널리즘과 분명히 구별되는 사진가들도 있다. 앙투완 다가타, 스탠리 그린, 또는 뤽 들라예 등이 그에 속한다. 이런 개별적 양식화 가운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되는 경향이 있다. “탐미주의”가 그것이다. 현대 포토저널리즘의 예술화 경향에 있어서 이것은, 수잔 손탁이 말한 “타인의 고통”이라는 보다 민감한 문제와 관련된다. 실제로 몇몇 보도사진가들의 작업에서 그들이 어떤 사건들에 대해 취하는 미적 거리가 때론 과격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본 연구자는 그런 반응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4. 상호도상성이든 개별적 양식화이든, 이런 유형의 보도사진들은 독자에게 강한 각인력을 남기게 되지만, 결국 독자가 기억하는 것은 “작품”으로서의 사진이지, 정작 사진이 전달하는 사건의 내용이 아닌 경우가 많다. 본 연구자는 첫째, 어떤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이 사진가들로 하여금 단순히 에이전시에 소속된 직업사진가에서 하나의 “저자”로서 거듭나도록 만들었으며, 둘째 그들의 사진 작업에서 어떤 측면들이 “저자성”을 부여하도록 작용하고 있는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그것이 갖는 조건들에 대하여 기술적이고, 도상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조형적이고 양식적인 측면으로도 접근해 보고자 한다. 셋째, 그 예술화를 허용하는 제도적 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제도론적 접근도 병행할 것이다. 어느 시기부터, 또 어떤 맥락에서 보도사진이 예술작품으로서 미술관과 화랑에서 전시됐으며, 미술시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는지 조사할 것이다.
    5. 마지막으로 현대미술에서 나타나고 있는 ‘의사-포토저널리즘’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사진 작업은 미술의 언어를 전용하는 현대 포토저널리즘과 무관하지 않은 경향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미술은, 마이클 프리드나 필립 뒤부아가 주목했던 것처럼, 현대미술 자체가 사진적이 됐다고 할 만큼 사진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문제적인 매체의 중심에 있다. 아마도 그 가운데서 ‘의사-포토저널리즘’은 가장 새로운 현대미술의 형태이자, 형식은 ‘사이비’이지만 또 다른 리얼리티를 드러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적이고, 바로 그런 측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업이기도 하다. 본 연구는 에릭 보들레르나 브루노 세라롱그, 뤽 들라에 등,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들에 주목할 것이다. 이들의 작업은 문자 그대로 실재와 시뮬라크르를 넘나들면서 현대 포토저널리즘의 예술화 경향이 야기하는 여러 가지 논쟁적 문제들을 끄집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주제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오늘날 연출된 ‘예술사진’이든 순수한 ‘보도사진’이든, 서로 차용의 대상, 제작방식, 작품의 전시와 유통 등이 분리되지 않고 섞이면서, 보도사진과 예술작품 사이 경계가 와해되는 매우 혼란스러운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 실재와 시뮬라크르가 전복된 사회에서, 현대 포토저널리즘의 ‘예술화’ 경향은, 사진이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것이 아직도 유효한가, 만약 그렇다면 포토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 사진, 즉 사회와 역사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갖는 사진으로서, 그것의 데옹톨로지는 사진가의 예술의지와 충돌하는 것은 아닌가, 만약 예술성이 가능하다면 그 진정한 예술적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등과 같은, 가볍지 않은 문제들을 불러일으킨다. 본 연구는 이렇게 매우 민감하지만, 오늘날 위기에 처한 현대 보도사진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안들을 검토해 보고자 했다. 본 연구는 이렇게, 애초 예술가로서 시작했든 보도사진가로 활동하다 예술가가 된 경우든, 그 의도와는 별개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 특히 타인의 고통을 다룬 사진의 경우, 서로 다른 본질과 데옹톨로지를 갖는 사진들이 흥미롭게도 동일한 문제제기를 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것은 현실을 인식하고, 증거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사진가의 의지이자, 동시에 그 의지를 과연 실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이며,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 이미지를 통해 사람들이 사건을 접함으로써 그 사건을 기억하고, 나아가 역사의식을 형성하게 될 때 발생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관한 것이다.
  • 영문
  • Today a very confused aspect has appeared in contemporary photography : the boundary between photojournalism and art is blurring. In fact, it was avant-gardists in the first decades of last century who tried to use in their experimental works the photographic images from newspaper or magazines. However, the situation is reversed. If the artists have appropriated those images of mass media, contemporary photojournalists considered generally as belonged to “non-art world” are not reluctant now to borrow from art its aesthetic language imposing some “authorship”. And their photographs are being presented on the wall of museums or galleries, and then sold in art market at a high price. In our society where the reality and the simulacra have been reversed, this tendency of “aestheticizaion” of photojournalism brings up many questions. Can the photojournalism still reveal the reality? If this seems to be difficult today, the deontology of photojournalism very closely related with society and history, dose not collide with the artistic volition of photographer? If it could be an art, where can we find its artistic values? This study consists in answer to those delicate but very important questions that contemporary photography in crisis should not easily ignore. Therefore, this study focus on the fact that photographers either in the field of photojournalism or in the art world, dealing with events, in particular, the events related with the “pain of others” meet finally with the same points even though they have different nature and deontology. First, it’s about the will of photographers that tries to be conscious of and to bear witness of reality. It’s about also the constant doubt and questioning concerning that they can really realize their will. And it’s about finally various influences to the spectators who experience indirectly the events by photographs ; how will the spectators understand, remember the events, and how they form their historical conscious about the event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보도사진의 이미지는 1960년대 앤디 워홀, 게르하르트 리히터, 아르눌프 라이너, 말콤 모를레이, 마사 로슬러 등과 같은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5년, 바젤의 쿤스트뮤지엄(Kunstmuseum)에서 있었던 Covering the Real전이 부각시켰던 문제처럼, 오늘날 보도사진과 미술의 관계는 단순히 보도사진 이미지의 미술적 전용이란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과거 ‘비예술’, 혹은 적어도 본질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미적 차원을 결여한다고 여겨져 왔던 보도사진이 미술제도권 내에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전시되고 판매되고 있으며, 동시에 활발한 미적 담론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미와 윤리 사이 매우 민감한 문제가 제기된다. 실제로 일어났던 특정한 사건을 보도하는 사진은 사실의 증거 혹은 증언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보도사진의 그러한 본연의 역할(déontologie)이 전통적으로 미적 영역에 속했던 예술과 교차하게 될 때, 보도사진의 생산과 수용의 형태와 방식은 불가피하게 변질될 수밖에 없게 된다. 미와 윤리 사이의 갈등은 사진이 증거의 매체로써 정보산업의 핵심이 되면서 예견됐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말과 텍스트를 대신한 매체로서 사진 이미지는 사진 속의 어떤 사건을 말 그대로 시각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그것을 일종의 ‘관조’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실제로 오늘날 정보산업은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건(évènement)을 스펙타클(spectacle)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본다(voir)’는 행위 자체 속에는 사실 ‘관음증(voyeurisme)’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특히 문제의 사진이 타인의 고통을 다룬 것일 경우, 그것이 하나의 심리적, 정서적 쾌로서, 관음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될 사진들이 있다. 최근 서구의 현대 포토저널리즘에서, 조르주 메리옹이나 호신 자우하르와 같은 보도사진가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 준 사진들이 그러하다. 박진감 넘치는 소탕작전을 벌였던 이라크 전쟁에서, 현실 속 미군들이 마치 할리우드 전쟁영화 속의 배우들을 흉내 내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이들은 광고나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의 이미지들, 또는 역사화나 종교화와 같은 유명한 미술사적 도상들의 조형적 코드들을 차용한 사진들로 유명해졌다. 이른바 “저자(author)”로서의 보도사진가라는 새로운 유형에 속하는 이들은, 사진가의 주관적인 시선과 사진가의 특별한 미학을 경계하지 않고, 기꺼이 그것을 자신들의 사진 속에 투영한다. 애초 정보 전달의 목적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기 위해 제작되는 보도사진이 “예술작품”이 되고, 보도사진가가 “예술가”로서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보도사진은 여느 예술작품들처럼 미술관과 화랑에서 전시되고, 경매와 아트페어를 통해 고가에 판매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근의 이런 변화를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보도사진이 예술작품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그 가능성은 지난 사진의 역사에서 유진 스미스, 돈 맥컬린, 로버트 카파, 위지 등과 같은 수많은 위대한 사진가들의 작업에 의해 입증됐다. 이들은 현실 속의 사건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냉철한 역사의식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진가 특유의 시선으로 그 사건들에 접근함으로써 그것을 단순한 기록으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진정한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본 연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이들 같은 거장 보도사진가들의 사진에서 예술성이란 문제-이제는 다소 진부해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한 목적 없이 애초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사진들과, 앞서 언급한 “저자”로서의 보도사진가들의 경우처럼, 친숙한 대중문화, 그리고 미술의 외시적 코드와 장치들을 사용하는 오늘날의 특정 보도사진들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본 연구가 보도사진의 “예술화”라는 현상과 관련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바로 후자의 경우이다. 미국의 참여미술가 마사 로슬러는 보도사진에서의 예술적 “아우라”는 자신의 데옹톨로지를 담보로 스스로를 미적 대상으로 축소시킬 위험에 있음을 경고했었다. 실제로 서구의 미술계에서 최근 포토저널리즘의 이런 예술화 현상과 관련해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왜 그런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오게 됐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는지,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데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프랑스에서 지난 15여 년간 줄곧 제기돼왔던 포토저널리즘을 둘러싼 논쟁은, 그 분야가 갖는 특수성, 즉 ‘데옹톨로지’에 대한 논쟁이었지만, 그것은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포토저널리즘의 책임이나 윤리에 대해 다시 확인하자는 진부하고 원론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보도사진가의 “사진행위”가 ‘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을 때, 대중의 사회적 문제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상호도상성이든 개별적 양식화이든, 이런 유형의 보도사진들은 독자에게 강한 각인력을 남기게 되지만, 결국 독자가 기억하는 것은 ‘작품’으로서의 사진이지, 정작 사진이 전달하는 사건의 내용이 아닌 경우가 많다. 본 연구는 첫째, 어떤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이 사진가들로 하여금 단순히 에이전시에 소속된 직업사진가에서 하나의 ‘저자’로서 거듭나도록 만들었으며, 둘째 그들의 사진 작업에서 어떤 측면들이 ‘저자성’을 부여하도록 작용하고 있는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그것이 갖는 조건들에 대하여 기술적이고, 도상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조형적이고 양식적인 측면으로도 접근해 보았다. 셋째, 그 예술화를 허용하는 제도적 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제도론적 접근도 병행했다. 어느 시기부터, 또 어떤 맥락에서 보도사진이 예술작품으로서 미술관과 화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특히 미술시장이나 경매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는지를 조사했다. 이때 미술계라는 전문가 그룹이 어떤 기준으로 미적이고 예술적인 가치를 판단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언표화되지 않은 암묵적 기준들, 예를 들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요인들이 작동하지는 않았는지도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예술계에 의해 공식적 경로로든 비공식적 경로로든 특정한 사진작업들로부터 취합해 통용되는 일련의 미적, 예술적 기준들은, 역으로 보도사진가들에게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피드백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나 정치 문제를 다룬 작업은 더 이상 현대미술의 “주류”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가볍고 '펀(fun)'한 스펙타클이 예술로 각광을 받는 시대, 무겁고 복잡한 이슈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도 예외는 아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적 상황들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우리 사회의 관심 밖에 놓여 있다. 한국에서도 얼마 전부터 다큐멘터리 사진이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미술시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경우에 해당하고, 그것마저 해외 유명 사진가들에만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얼마 전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위기를 언급한 누군가의 지적이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위기는 어쩌면, 전시 기획자 클레망 셰루(Clément Chéroux)의 표현을 빌자면, 정보(information)가 오락(entertainment)으로 변한 "인포테인먼트(infortainment)"에서 자신의 위기 상황을 모면할 “돌파구”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그것이 예술이 됐건 오락이 됐건, “저자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의 데옹톨로지를 희생시켰던 사진들에 대한 본 연구의 비판적 접근이, 보도사진과 같은 매스 미디어적 이미지의 폭력에 갈수록 둔감해지는 한국의 대중들과, 상대적으로 그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논의가 부족했던 한국의 이론가들을 자극하고, 활발한 논쟁의 이슈를 더 많이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현재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보도사진가들을 비롯해 앞으로 이 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사진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과 문제의식을 갖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고 싶다. “현실적 경향”과 “창조적 경향” 사이 균형을 잡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본 연구가, 실재와 시뮬라크르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직업윤리와 예술의지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고, 건강한 포토저널리즘과 진정한 다큐멘터리 사진, 그래서 예술적 가치가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사진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색인어
  • 포토저널리즘, 의사-포토저널리즘, 전용, 상호도상성, 저자성, 타인의 고통, 예술화, 사진행위, 예술의지, 직업윤리, 실재, 허구, 시뮬라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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