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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19세기 昌寧 成氏 가문의 연행체험과 기록에 대한 연구 -成祐曾과 成仁鎬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Travel Experience to Beijing and Document of Changnyeong(昌寧) Seong Clan in the 19th Century -Focused on Seong Ujeung(成祐曾) and Seong Inho(成仁鎬)-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5S1A5A8016786
선정년도 2015 년
연구기간 1 년 (2015년 05월 01일 ~ 2016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손혜리
연구수행기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과제는 19세기 昌寧 成氏 가문의 주목할 만한 문인과 신발굴 자료를 중심으로 연행체험과 기록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成大中의 손자이자 成海應의 조카인 成祐曾(1783~1864)과 그의 아들 成仁鎬(1815~1887)는 1818년 戊寅연행과 1869년 己巳연행에 참여하여『茗山燕詩錄』과『遊燕錄』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이 두 책은 일부 자료의 일실과 소략한 분량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연구자는 조선 후기 창녕 성씨 가문의 學知와 家學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던 중 성우증과 성인호의 문집인『茗山集』과『竹澗集』을 발굴하여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무인연행과 기사연행에 관한 시문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이에 성우증의『명산집』과『명산연시록』, 성인호의『죽간집』과『유연록』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성우증과 성인호의 생애를 비롯하여 연행체험과 기록에 대한 전모를 논의하려고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결과가 학문적·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목할 만한 새로운 인물을 조명하고 신발굴 자료를 소개하여 19세기 한문학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 둘째, 성우증의『명산집』과『명산연시록』, 성인호의『죽간집』과『유연록』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분석을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성우증과 성인호의 생애를 비롯하여 연행체험과 기록에 대한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셋째,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가 공백화된 1818년 무인연행과 1869년 기사연행을 연구하는데 바탕을 마련하여 19세기 연행록 연구에 일조할 수 있다. 넷째, 사행에 이어 세직으로서의 연행은 조선 후기 창녕 성씨 가문이 서족 명문가로 자리매김하는데 영향을 미친 만큼 조선 후기 서족 명문가의 학지와 가학의 전승 양상을 확인함으로써 인접 학문 분과인 조선 후기 사회사, 제도사, 문화사 영역에 유용한 지식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과제에서는 미공개된 19세기 창녕 성씨 가문의 주목할 만한 문인과 신발굴 자료를 소개한 뒤, 1818년 무인연행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 성우증의『명산연시록』를 검토 분석하며, 1869년 기사연행에 관한 성인호의『유연록』을 검토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19세기 창녕 성씨 가문의 연행체험과 기록에 대한 1차 자료를 조사·수집·분석한다. 대상은 성우증의『명산연시록』과『명산집』, 성인호의『유연록』과『죽간집』이다. 둘째, 19세기 창녕 성씨 가문의 연행체험과 기록에 대한 2차 자료를 조사·수집·분석한다. 대상은 19세기 창녕 성씨 가문의 일원과 국내외 교유 인물의 문집으로, 成海應의『硏經齋全集』, 成憲曾의『溫陽公文集』, 成泰永의『昌寧世譜』, 李璡秀의『靑霞紫雲館遺稿』, 陶澍의『印心石屋詩文集』·『陶文毅公全集』, 陳用光의『太乙舟詩文集』등이다. 마지막으로 연구 대상의 1,2차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성우증과 성인호를 중심으로 한 19세기 창녕 성씨 가문의 연행체험과 기록에 대한 연구 결과를 도출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 과제는 19세기 전·후반에 연행을 하고 관련 기록을 남긴 成祐曾(1783~1864)과 成仁鎬(1815~1887)를 중심으로 창녕 성씨 상곡공파 가학의 전승 과정과 양상에 대해 논의하였다. 성우증과 성인호의 문집이 적지 않고 가학과 연행사적 측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지점들이 포착되며, 이들 부자의 연행이 50여 년의 간극이 있는 만큼 분량과 중요도, 시기 등을 고려하여 성우증의 생애와 연행에 대한 인식-가학의 전통과 계승을 중심으로, 19세기 전반 성우증과 청 문사들의 교유 양상과 의미, 19세기 후반 성인호와 청 문사들의 교유 양상과 의미 등으로 나누어 논의를 전개하였다.
    첫째, 아직까지 학계에 소개된 바 없는 성우증의 생애와 저술을 자세하게 밝힌 뒤 1818년 무인연행에 참여하고 저술한『명산연시록』과『명산록』을 중심으로 연행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이 집안은 17~18세기에 성완과 성몽량, 성대중이 제술관과 서기로 대를 이어 일본사행에 참여하고,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성우증과 아들 성인호가 중국연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성우증의 조부 성대중과 백부 성해응은 연행하는 사신들과 조카를 전송하는 送序에서 중국의 정세를 잘 관찰하고 돌아와 국가와 백성에 도움이 될 것을 당부하였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성우증 역시 훗날 연행하는 사신을 전송하면서 훌륭한 사신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覘國과 專對, 華國을 제시하고, 그 중에서도 覘國의 임무를 가장 강조하였다. 覘國은 ‘나라를 엿본다’는 뜻이니, 상대국의 상황을 관찰하여 국력을 평가하고, 기밀을 염탐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는 것을 말한다. 급변하는 중국 정세의 파악, 그것도 조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점국을 강조한 것은 비단 성우증만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기에 활동한 金祖淳과 柳本學 등이 청의 쇠퇴를 염려하고 중국의 사세를 잘 관찰할 것을 강조했다면, 성우증은 한걸음 더 나아가 청의 쇠퇴로 인한 요동 지역으로의 이동이 조선의 서북쪽 변경과 직접 맞닿게 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당시 청의 지리서와 사료 등을 살펴보면 실제 청이 요동으로 퇴각하여 조선과 직접 대치하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의 쇠퇴가 조선에 미칠 영향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하고 대책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정세를 예민하게 통찰하고 대비책을 모색함으로써 사신으로서 점국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世職으로서의 일본 사행을 충실히 수행한 선조들의 식견과 인식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둘째, 성우증은 연행을 통해 陳用光과 陶澍 등 중국 문사들과 海外 神交를 이루었다. 화려한 궁실과 거마, 풍부한 물산과 사람 등 기이한 장관이 많았지만 그보다는 이들과의 교유가 得意處였다고 평가한 만큼 그 양상과 의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우증과 청 문사들의 교유는 1818년 겨울부터 1821년까지 이어진다. 성우증은 1819년 봄 도주를 만나 「급사 운정 도주에게 드리다(贈陶給事雲汀澍)」2수를 지어 주었다. 첫째 수에서는 도주의 높은 기상과 뛰어난 필력을 서술하고, 둘째 수에서는 역량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도주가 이 시에 차운하여 「성진사가 보내온 시에 다시 차운하여 답하다(次韻再答成進士見贈)」2수를 지었으니, 1수에서는 조선에서 온 젊은 문사의 학문과 기세를, 2수에서는 ‘동남 땅 인재[東南美]’ ‘일월처럼 빛난다[日月光]’고 하여 성우증의 詩才를 칭찬하였다. 성우증이 귀국한 후 보낸「급사 도주에게 편지를 보내다(與陶給事澍書)」에서는 진정한 시벗으로 자신을 대우해 준 도주의 후의에 감사해 하며 그와의 만남으로 인한 벅찬 감동을 오롯이 표출하였다. 도주도 성우증에게「고려 진사 명산 성우증이『인심석옥집』에 쓴 시에 차운하여 답하다(次韻答高麗進士成茗山祐曾題印心石屋集)」를 지어 성우증의 시재를 칭찬하고 이별의 아쉬움을 그렸다. 한편 성우증이 조선으로 돌아온 후 보낸「시어사 진용광에게 부치다(寄陳侍御用光)」에서는 성우증과 진용광의 우정이 잘 포착된다. 그리고「어사 진용광에게 편지를 쓰다(與陳御史用光書)」에서는 이들의 우정이 더욱 빛을 발휘한다. 성우증은 진용광과의 교유를 회고하며 문장이 바르고 덕의가 충만한 ‘정신적 사귐(神交)’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성우증이 청의 문사들과 주고받은 시는 대부분 상대방의 인품과 시재를 칭찬한 뒤 이별의 아쉬움과 그리움의 정서를 표출하였다. 의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진정성이 드러나 우정이 빛을 발한 경우가 더 많다. 청의 문사들은 한 목소리로 성우증의 시재를 칭찬하였으며, 종종 책과 글씨를 보내오고 십여 폭에 달하는 글을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성우증에게 있어 이들과의 교유는 得意處이자 神交라 하기에 충분하다.
    셋째, 성인호는 1869년 기사연행에 부사의 자제군관으로 참여하여 옥하관에 머물며 유리창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王瑔, 卓秉炎, 馬蕃康, 王恩錫 등 청의 문사를 만나 교유하였다. 청의 문사들은 왕전과 탁병염을 중심으로 학연과 지연 등의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그룹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우련 탁병염에게 주다(贈卓友蓮丙炎)」에서는 탁병염의 문장을 극찬하고, 고사를 들어 그와의 친분을 강조하였다. 5구의 아래 ‘형제가 모두 서화에 능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라는 세주가 붙어 있다. 즉 탁병염 형제가 그림과 글씨에 능한 사실과 이들이 명문대가 출신으로 가학을 계승하고 빛낸 사실을 특기하였다. 마지막 두 구에서는 이별의 아쉬움을 달랠 길 없어 시를 지어주기만 한 심경을 읊었다. 가장 많은 시를 주고받으며 절친하게 지냈던 왕전에게는 연작시「학손 왕전의 증별시에 차운하다(次王鶴蓀贈別韻)」4수를 지어주며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계주 명사 王晉之와의 교유는 매우 흥미롭다. 날이 밝으면 곧 떠날 조선 사신과의 짧은 만남이 아쉬운 왕진지는 소매에 매화 그림 한 폭과 떡 두 덩이를 품고 조선 사신의 숙소를 방문하였다. 다음날 떠나야 하는 조선 사신들도 하루를 더 묵으며 왕진지와 우정을 돈독히 하였으니 ‘千里心交’이자 ‘天涯知己’라고 할 만하다. 이날의 흥취와 여운이「행차가 계주에 이르러 죽방 왕진지가 준 매화그림 시에 차운하다(行到薊州, 次王竹舫晉之贈梅畵韻)」에 잘 묘사되어 있다. 특히 이 시는 “그대 올 때 매화도 함께 왔는데, 매화가 오니 나는 돌아가야 하네. 천리에서 서로 그리워하여, 그림 속 매화에 꽃이 피리라(君來梅共來, 梅來我將廻. 千里相思地, 花發畵中梅)”라고 하여 이별을 앞둔 정회가 담담하면서도 애절하게 표출된 수작이다.
    이어 그는 기사연행을 회고하면서「연행을 추억하며(憶燕行)」를 지었다. 삼천리를 왕복하며 추위와 싸워야 하는 연행의 노정은 험난했지만 청의 문사 및 3사신과 주고받은 시와 술은 연행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의주와 대동강을 지나면서 들은 생황 노래와 燕薊지역에서 보았던 달, 그리고 연경의 유리창에서 구경했던 수많은 서점과 가게 등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이제는 모두 아련한 추억이 되었음을 회상하였다. 성인호가 체험한 연행의 의미에 대해서 잘 요약한 시라고 볼 수 있다.
  • 영문
  • This research project will investigate aspect and inheritance process of hereditary learning focused on Sŏng, U-chŭng(成祐曾) and Sŏng, In-ho(成仁鎬) based on documents of Yŏnhaeng(燕行, diplomatic mission). Father and son’s Yŏnhaeng had a gap between 50 years, so there are some points which are captured aspects of hereditary learning and history of Yŏnhaeng.
    This research has three main parts, research on the Sŏng, U-chŭng’s entire life and recognition about Yŏnhaeng focused on tradition and succession of hereditary learning, research on the aspect and meanings of companionship between Sŏng, U-chŭng and scholars in the Qing dynasty in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and research on the aspect and meanings of companionship between Sŏng, In-ho and Scholars in the Qing Dynasty in the late 19th Century.
    First, Sŏng, U-chŭng emphasized mission of Ch'ŏmguk(覘國, investigation of state affairs) to be an excellent envoy. He was not the only one person that emphasized mission of Ch'ŏmguk which could directly affect Chosŏn. Kim, Cho-sun(金祖淳) and Ryu, Pon-hak(柳本學) who were contemporary people were concerned about the decline of the Qing and highlighted observation of situation in China. But Sŏng, U-chŭng was seriously worried about outposts of Chosŏn resulted from the decline of the Qing. In actuality, the Qing dynasty has only a slim chance of confrontation with Chosŏn. It is important that he examined influence on Chosŏn resulted from the decline in the Qing from various angles and presented countermeasure. The background was that it had a decisive effect on knowledge and awareness of ancestors.
    Second, diplomatic mission in the year of Muin(1818) was Tŭkŭich'ŏ(得意處) and companionship with scholars in the Qing dynasty for Sŏng, U-chŭng. Their companionship lasted from 1818 to 1821. He met Do Ju(陶澍) and Jin, Yong-gwang(陳用光) who were well-known in the Qing dynasty. Sŏng, U-chŭng met Do Ju in 1819, and gave two pieces of serial poetry titled「贈陶給事雲汀澍」. In poems, he expressed Do Ju’s high spirit and the force of his written style and felt sorry for him in such a situation that he could not receive high praise. Do Ju also gave two pieces of serial poetry titled「次韻再答成進士見贈」for him. In poems, he praised Sŏng, U-chŭng as his study and poetic genius.
    After his return to Chosŏn, he sent a letter(「與陶給事澍書」) to Do Ju, and he wrote him that he appreciated great kindness and expressed an overflowing joy at that time. Do Ju also wrote a poem titled「次韻答高麗進士成茗山祐曾題印心石屋集」. In poems, he praised Sŏng, U-chŭng as poetic genius and expressed the deep sadness of parting. Sŏng, U-chŭng sent two letters(「寄陳侍御用光」,「與陳御史用光書」) to Jin, Yong-gwang, and he wrote him that their relationship was filled with joy called true relationship(神交).
    They exchanged poems which were related to compliments of personality and poetic talent, and expressed wishfulness and longing for saying goodbye. They are not always ceremonial, they are much more sincere and truthful. It is not that short time to be to hail fellow of three or four years. It is sufficient to say that their relationship is Tŭkŭich'ŏ as well as true relationship.
    Third, Sŏng, In-ho met scholars in the Qing dynasty on a diplomatic mission in the year of Kisa(1869) as Chajegun'gwan(子弟軍官) of Pusa(副使). During his stay in Ok'agwan(玉河館) and Yurich'ang(琉璃廠), he met Wangjŏn(王瑔), T'akpyŏngyŏm(卓秉炎), Mabŏn'gang(馬蕃康), and Wang Ŭnsŏk(王恩錫). These people build personal network based on regionalism and school relationship, revolved around Wangjŏn and T'akpyŏngyŏm they became a group.
    In the Poem titled「贈卓友蓮丙炎」, they highly praised the bookcraft of T'akpyŏngyŏm and emphasized how close to him. Under five lines, there put in a footnote such as both brothers are good at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In other words, it gives a special word of mention to the brothers that do well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and succeed to hereditary learning. The last two lines recited his mind that could not put up with inconvenience. While with a feeling of regret, he gave four pieces of serial poetry to Wangjŏn, titled「次王鶴蓀贈別韻」as a present.
    Meanwhile, on the way back Chosŏn, their relationship that he made between Wangjinji who was the prominent person of the time in Jizhou(薊州) is very interesting. Because of short-term relationship, Wangjinji felt sorrow of parting. So he visited accommodation of Chosŏn envoy with a piece of an ume flower painting and two packs of rice cake in his sleeve. Chosŏn envoy that must depart for their country tomorrow was moved by the affectionate act of Wangjinji. So they decided to stay one more day. That day, they stayed with Wangjinji and built a strong relationship. In that respec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was indeed true friendship, so called Ch'ŏnaejigi(天涯知己).
    The pleasure and lingering imagery of that day were well described on two poems titled「行到薊州, 次王竹舫晉之贈梅畵韻」and「贈王竹舫」. Especially the poem titled「行到薊州, 次王竹舫晉之贈梅畵韻」is a masterpiece which is well expressed in the wrench of parting pathetically and frankl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 과제는 19세기 전·후반에 연행하고 기록을 남긴 成祐曾(1783~1864)과 成仁鎬(1815~1887)를 중심으로 昌寧 成氏 桑谷公派 가학의 전승 과정과 양상에 대해 규명하였다. 성우증과 성인호의 문집이 적지 않고 가학과 연행사적 측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지점들이 포착되며, 이들 부자의 연행이 50여 년의 간극이 있는 만큼 분량과 중요도, 시기 등을 고려하여 성우증의 생애와 연행에 대한 인식-가학의 전통과 계승을 중심으로, 19세기 전반 성우증과 청 문사들의 교유 양상과 의미, 19세기 후반 성인호와 청 문사들의 교유 양상과 의미로 나누어 논의를 전개하였다.
    첫째, 1818년 무인연행에 참여한 성우증은 훌륭한 사신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覘國의 임무를 강조하였다. 급변하는 중국 정세의 파악, 그것도 조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점국을 강조한 것은 성우증만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기에 활동한 金祖淳과 柳本學 등이 청의 쇠퇴를 염려하고 중국의 사세를 잘 관찰할 것을 강조했다면, 성우증은 청의 쇠퇴로 인한 요동 지역으로의 이동이 조선의 서북쪽 변경과 직접 맞닿게 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실제 청이 요동으로 퇴각하여 조선과 직접 대치하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중요한 것은 청의 쇠퇴가 조선에 미칠 영향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하고 대책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정세를 예민하게 통찰하고 대비책을 모색함으로써 사신으로서 점국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世職으로서의 일본 사행을 충실히 수행한 선조들의 식견과 인식이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성우증은 연행을 통해 陳用光과 陶澍 등 중국 문사들과 海外 神交를 이루었다. 화려한 궁실과 거마, 풍부한 물산과 사람 등 기이한 장관이 많았지만 그보다는 이들과의 교유가 得意處였다고 평가한 만큼 그 양상과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성우증은 1819년 봄 도주를 만나「贈陶給事雲汀澍」2수를 지어 주었다. 1수에서는 도주의 높은 기상과 뛰어난 필력을 형상하고, 2수에서는 역량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도주가 이 시에 차운하여「次韻再答成進士見贈」2수를 지었으니, 1수에서는 조선에서 온 젊은 문사의 학문과 기세를, 2수에서는 성우증의 시재를 칭찬하였다. 성우증이 귀국한 후 보낸「與陶給事澍書」에서는 진정한 시벗으로 자신을 대우해 준 도주의 후의에 감사해 하며 그와의 만남으로 인한 벅찬 감동을 표출하였다. 도주도 성우증에게「次韻答高麗進士成茗山祐曾題印心石屋集」을 지어 시재를 칭찬하고 이별의 아쉬움을 그렸다. 진용광에서 보낸「寄陳侍御用光」과「與陳御史用光書」에서는 두 사람의 우정이 더욱 빛을 발한다. 성우증은 진용광과의 교유를 회고하며 문장이 바르고 덕의가 충만한 神交였다고 평가하였다.
    성우증이 청의 문사들과 창수한 시는 대부분 상대방의 인품과 시재를 칭찬한 뒤 이별의 아쉬움과 그리움의 정서를 표출하였다. 의례적인 부분도 있지만 서로에 대한 진정성이 오롯이 표출되어 우정이 빛을 발한 경우가 더 많다. 청의 문사들은 한 목소리로 성우증의 시재를 칭찬하였으며, 종종 책과 글씨를 보내오고 십여 폭에 달하는 글을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성우증에게 있어 이들과의 교유는 得意處이자 神交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셋째, 성인호는 1869년 기사연행에 참여하여 유리창을 왕래하면서 王瑔·卓秉炎·馬蕃康·王恩錫 등 청의 문사를 만나 교유하였다. 이들은 왕전과 탁병염을 중심으로 학연과 지연 등의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연경에서 그룹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贈卓友蓮丙炎」에서는 탁병염의 문장을 극찬하고, 고사를 들어 그와의 친분을 강조하였다. 5구의 아래 ‘형제가 모두 서화에 능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라는 세주가 붙어 있다. 즉 탁병염 형제가 그림과 글씨에 능한 사실과 이들이 명문대가 출신으로 가학을 계승하고 빛낸 사실을 특기하였다. 가장 많은 시를 창수하며 절친하게 지낸 왕전에게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연작시「次王鶴蓀贈別韻」4수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계주 명사 王晉之와의 교유는 매우 흥미롭다. 날이 밝으면 떠날 조선 사신과의 짧은 만남이 아쉬었던 왕진지는 소매에 매화 그림 한 폭을 품고 밤에 조선 사신의 숙소를 방문하였다. 다음날 떠나야 하는 조선 사신들도 하루를 더 묵으며 왕진지와 우정을 돈독히 하였으니 ‘千里心交’이자 ‘天涯知己’라고 할 만하다. 이날의 흥취와 여운이「行到薊州, 次王竹舫晉之贈梅畵韻」에 잘 묘사되어 있다. 특히 이 시는 “君來梅共來, 梅來我將廻. 千里相思地, 花發畵中梅.”라고 하여 이별을 앞둔 정회가 담담하면서도 애절하게 잘 표출된 수작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과제는 다음의 기대효과가 있다. 첫째, 성우증과 성인호의 생애와 저술을 고구하여 19세기 전후반에 주로 활동했던 역량 있는 문인을 발굴하고 조명하여 학계에 소개하였다. 조선 후기 서족 명문가인 창녕 성씨 상곡공파 중에서도 文運의 정점을 이루고 높은 학적 평가를 받았던 성대중은 손자인 성우증을 ‘천 리를 달릴 망아지’라 하였고, 성해응은 세상에서 인정한 사람이 적었는데 조카 성우증을 두고는 문장의 경지를 안다고 칭찬하였다. 중국 문사 陳用光은 성우증을 전별하는 서문에서 “나이가 바야흐로 한창이고 뜻이 매우 예리하며, 가는 길이 바르고 힘쓰는 것이 부지런하다.”고 하였으며, 巫宜稧는 “박학한 참군자요 경에 통달한 대유로다.”라는 시를 써 주었다. 성우증이 죽자, 포천의 원로와 문도들은 “文昌星이 떨어졌으니 성씨 가문의 文脈뿐만 아니라 한 고장의 문운이 쇠하였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이상을 통해 성대중과 성해응의 평가가 단순히 가문의 젊고 재주 있는 인물을 격려하고 칭찬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며, 진용광과 무의계의 발언 또한 외국에서 온 젊은 문사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만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둘째, 성우증과 성인호의 연행은 창녕 성씨 상곡공파 서족 가문의 學知 생성과 家學의 전승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다. 이 집안은 3대를 이어 일본 사행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世職으로서의 일본 사행은 이들 가문이 조선 후기 서족 명문가로 공고히 자리매김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기왕에 잘 알려진 일본 사행뿐만 아니라 중국 사행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은 것이다. 즉 성우증의 6대조인 成後龍이 1669년(현종 10) 三節年貢使에 참여하여『燕行日記』를 저술하였고, 1818년에는 성우증이 연행에 참여하여『명산연시록』을 남겼다. 연행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성우증의 동생 成翼曾도 1847년(헌종 13) 冬至兼謝恩使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869년(고종 6) 동지겸사은사에 성우증의 아들 成仁鎬가 참여한 뒤『遊燕錄』을 저술하여 현재 전하고 있다. 연행이란 색다른 해외 체험을 통해 일국 너머로 시야가 확대되면서 사고와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우증과 성인호의 연행과 기록은 한 개인의 체험과 기록이라는 의미를 넘어 한 가문의 해외 체험을 통한 인식의 양상과 의미를 파악하는데 유용하다.
    셋째, 1818년 무인연행과 관련하여 현재 전하는 연행 기록이 없는 만큼 유일하게 전하는 성우증의 연행 관련 기록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명산연시록』이 일부 낙질되어 전모를 확인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명산집』에 수록된 送序 및 중국 문사들과 주고받은 시문과 척독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연행에 대한 인식을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정사 이승보의 연행 관련 시문이 남아 있긴 하지만 한 권의 독자적인 책을 이루지 못한데다 분량 또한 많지 않아 성인호의『유연록』과 『죽간집』에 수록된「유연시잡영」의 자료적 가치가 더욱 부각된다. 이상을 통해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연행록 연구의 공백으로 남겨진 1818년 무인연행 및 1869년 기사연행과 관련하여 한 서족 문사의 시선과 기록을 통해 연행록 연구의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미공개된 19세기 창녕 성씨 가문의 주목할 만한 인물과 신발굴 자료를 학계에 소개하여 조선 후기 창녕 성씨 가문의 학적·문학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서족 명문가인 창녕 성씨 상곡공파의 學知와 家學 전승의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동안 관련 자료가 없어 공백으로 남겨졌던 1818년 무인연행과 3종의 기록이 전하긴 하지만 아직까지 연구 사례가 없는 1869년 기사연행에 관한 1차 자료 및 방계 자료를 검토하고 분석하여 19세기 전반과 후반의 연행록 연구를 보완함으로써 19세기 연행록의 史的 전개 흐름과 양상을 확인하는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과제를 통해 3대째 이어 온 세직으로의 일본 사행을 통해 생성된 조선 후기 창녕 성씨 가문의 개명적 지식과 실학적 사고가 중국 연행을 통해 19세기에 전승된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 조선 후기 한 서족 가문이 명문가로 공고하게 자리잡는 과정을 확인함으로써 조선 후기 사회사, 제도사, 문화사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울러 사행을 통한 한일, 연행을 통한 한중 교유의 실상과 특징, 의미 등을 고구함으로써 한중일 교류사에서도 일정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색인어
  • 성우증, 성인호, 19세기, 연행, 연행록, 중국 인식, 가학, 학지, 계승, 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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