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과제 검색 > 연구과제 상세정보

연구과제 상세정보

『조선유인교육사연구(朝鮮流人敎育史硏究)』
A Study about History of Chosun Exiles Education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인문저술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6S1A6A4A01017929
선정년도 2016 년
연구기간 3 년 (2016년 10월 01일 ~ 2019년 09월 30일)
연구책임자 양진건
연구수행기관 제주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유인(流人)이란 “죄를 지어 유배를 당한 사람”(Daum국어사전)이라는 뜻으로 유형(流刑)에 의해 처벌을 받은 유배인(流配人)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유인(朝鮮流人)은 조선시대의 유배인을 축약한 표현으로 “조선유인교육사(朝鮮流人敎育史)”란 “조선시대 유인들에 의해 유배지에서 행해진 교육활동의 역사”를 말한다. 물론 조선시대 모든 유인(流人)들이 유배지에서 교육활동을 할 수 있었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인(流人)들 가운데서도 교육활동을 직접 함으로써 자취를 남긴 선비들만이 『조선유인교육사연구(朝鮮流人敎育史硏究)』의 대상이다.
    필자는 지난 30여년 간 지방교육사연구를 하면서 특히 조선시대 500여년동안 제주도(濟州島)를 거쳐 갔던 유인(流人)들의 교육활동을 중점적으로 탐구해왔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제주유인(濟州流人)에 국한됨으로써 그 깊이와 높이에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조선시대 유인(流人)들에 의해 행해진 교육활동의 역사 연구”를 위한 『조선유인교육사연구(朝鮮流人敎育史硏究)』 저술은 당연한 연구 진행순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조선시대 유인(流人) DB도 제대로 구축되지 못한 상태인데다 더욱이 그들 가운데 유배지에서 교육활동을 행했던 유인(流人)에 대해서는 조사는커녕 접근조차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본 연구야말로 한국교육사 연구의 폭과 깊이를 확대하기 위해 필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는 창건 이후 체제안정을 위해 형률을 정비하게 된다. 형률의 큰 원칙은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하였으나 특별히 조선의 국정에 맞는 도형(徒刑), 유형(流刑), 속형(贖刑)을 결정하였는데 특히 유형은 중죄를 범한 자에게 사형까지는 과하지 않고 원격지(遠隔地)로 보내어 종신토록 다시 귀환하지 못하게 하는 형벌로서 그 본질은 자유형과 비슷하나 사형의 환형(換刑)으로 대치되는 사형완화법으로 주로 이용되었다.
    유인(流人)들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유배지의 원근거리가 책정되었고 유형기간으로서의 형기는 원칙적으로 무기종신형이었다. 유인(流人)은 일단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으로서 감(減) 1등 된 죄인이었으며 그들의 성분은 대개가 정치범이었다. 정치범으로 단죄되어 유배된 유인(流人)은 사면령이 내리든지 아니면 정치정세의 변동이 일어나든지 하지 않으면 일생 귀향할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입국의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간 결과 학설의 대립, 학문의 파벌을 잉태시켰고 그것은 나아가 당파의 파벌로 분화되어 정권다툼으로 이어져 끝내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나 당쟁 등의 당옥(黨獄)을 초래하게 됨에 따라 유형이 남발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선조의 선비들에게 있어 유배라는 것은 그렇게 낯선 일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 유배라는 것은 때로 그들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나 규범과도 엇물려 있어 한편으로 염치와 명분의 징표가 되기도 하였다.
    선비들의 유소(儒疏), 성균관생들의 권당(捲堂), 공관(空館)에서부터 언관과 사관들의 간언(諫言)과 직필(直筆) 등 세속적 명리나 일신의 편안을 결연히 버릴 수 있었던 태도들의 연장선상에 유배가 놓여 있었던 예는 비일비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유인(流人)들이 유배적 상황을 낯설어 하거나 개탄해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교육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전제로 한 학자관료인 사대부(士大夫)로서 학문적 소양으로 정치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학자이면서 정치인이었고 정치인이면서 또한 학자였다. 따라서 그들이 유배되거나 정계에서 은퇴할 시는 학자적 측면이 부각되기 마련인데 특히 정치적 우승투쟁(優勝鬪爭)의 결과로 야기된 유배의 경우에는 그러한 학자적 생활이 더욱 치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 『조선유인교육사연구(朝鮮流人敎育史硏究)』 저술 집필의 목적은 조선시대 유인(流人)들 가운데 유배지에서 교육활동을 했었던 유인(流人)들과 그들의 활동 내용을 밝혀내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한국교육사연구의 중요한 성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 기대효과
  • 유배 및 유인에 대한 저서로는 『유배, 그 무섭고도 특별한 여행』, (염은열, 꽃핀자리, 2015)나 『유배, 권력의 뒤안길』,( 전웅, 청아출판사, 2011)이나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안대회, 이종묵, 북스코프, 2011), 『남해 유배지 답사기』,(박진욱, 알마, 2015),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박석무, 한길사, 2003) 등등 여러 권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본격적인 학술서적이라기 보다는 교양도서 수준이며 그조차도 유인들에 의해 유배지에서 행해진 교육활동에 대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유인으로는 다산 정약용을 을 다룬 저서들이 압도적이며 그 가운데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정민, 문학동네, 2012) 같은 교육활동 관련 역작도 있다. 그런가하면 『정약용의 교육개혁 사상』,(임재윤, 전남대출판부, 1999)도 오래되었지만 중요한 저서이다.
    이러게 보듯이 “조선시대 유인들에 의해 유배지에서 행해진 교육활동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조선유인교육사연구(朝鮮流人敎育史硏究)』 류의 저서는 아직까지 없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조선유인 또는 조선유인교육활동에 대한 DB가 구축되지 못한 상태이며 나아가 유인교육(流人敎育)이 한국교육사연구에 생소한 개념이기도 하고 그것이 비형식(非形式) 교육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형식(形式), 정식(正式)교육 연구에 천착을 해왔던 한국교육사연구의 입장에서는 아직 미답의 영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선유인교육사연구(朝鮮流人敎育史硏究)』의 집필은 한국교육사 연구의 확장을 위해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큰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다른 연구를 촉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도가 크리라 믿는다. 조선유인의 개인적인 교육활동이나 교육사상을 밝혀낼 수 있음은 물론 특정 지역의 유인 분포를 통해 유인교육의 경향이나 내용을 파악함으로써 그 지역의 교육적 특징은 물론 다른 지역과의 교육적 차별 성 등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교육사 연구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도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교육사연구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의 견고한 중앙집권적 행태에 대한 도전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고대부터 중앙집권적 정치제도가 확립되어 오늘날까지 장구하게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중앙중심이고 지방경시의 병폐가 누적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되고 서울의 중앙은 자기가 전체인 것처럼 착각해 왔으며 지방에 대해 중앙사대주의를 조성해 왔다.
    따라서 유인교육사연구는 중앙사대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모든 것을 중앙에 집중시킴으로써 지방을 철저히 소외시켜 왔던 중앙집권적 정치로 인해 우리나라 역사 연구의 내용은 중앙정치사 중심일 수밖에 없었으며 종래의 지방사 마저도 중앙정치사의 연장으로서 중앙통사에 오를만한 사건이나 내용에 관심이 한정되었다. 물론 중앙정치사가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 역사를 전제로 하는 한 그것은 역사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교육사연구라는 것도 이러한 일부의 역사에 줄곧 천착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의 역사란 평범한 국민들이 날마다 겪으면서 활동하는 일상사회생활의 역사를 의미한다. 평범한 국민들이 날마다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는 실생활의 역사, 평범한 국민들의 희로애락이 직접 얽혀 있는 실생활의 역사, 평범한 국민들이 살아 움직이는 실생활의 역사가 중앙정치사보다 덜 중요할 이유가 조금도 있을 수 없다. 이런 평범한 국민들의 실생활의 역사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방교육사이다. 『조선유인교육사연구(朝鮮流人敎育史硏究)』의 집필은 그러한 노력의 연장이 될 것이다.

  • 연구요약
  • 유인(流人)들의 교육활동은 일련의 계몽활동에 비견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의미하는 계몽활동이란 근대 이성주의 소산으로서의 계몽주의적 활동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깨우침과 관련된 제반 가르침의 활동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개념이다. 원래 계몽(Aufklärung)이란 환하게, 명료하게 한다는 행위가 그 행위 이전의 상태가 어둡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때 결국 계몽은 어두운 상태를 빛으로 비추어 밝게 만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어두운 상태란 곧 조선조 체제의 제주도 모순상황, 즉 억압, 지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빛이란 유인(流人)들이 행한 교육활동을 의미한다. 결국 계몽이란 유인(流人)들의 교육활동을 통해 유배지의 모순적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일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깨우침과 관련된 가르침의 활동이라는 의미에서 계몽적 교육활동은 이미 옛부터 일상적인 삶 속에서 실천되고 이해되어 왔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Socrates의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선위성(先位性)을 가정하고 가르침이란 전생에 이미 알고 있었으나 육체를 입고 출생함으로써 전부 망각해 버린 것들을 상기시키는 일이라는 문답법(問答法)과 또한 성실한 질문을 통해 한 사람의 영혼 속에 이미 잠들어 있는 것을 깨우쳐 밝히고자 하는 산파술(maieotike)이 그 대표적인 교육방법이다. 문답법과 산파술은 학습자의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진리를 깨우치도록(egeirein) 교사가 관여하는 밥법이다. 여기서 이미 만남, 계속성과 질적인 변화와 같은 깨우치는 과정의 본질적 요소들이 나타난다.
    따라서 본 『조선유인교육사연구(朝鮮流人敎育史硏究)』의 연구내용은 크게 5가지로 대별된다.

    1) 조선시대를 전기, 중기, 후기, 말기로 구분하고 시대적 특징과 유배형과의관계를 밝혀낸다.
    2) 각 시기에 전국에 걸쳐 유배를 당한 유인(流人)들 가운데 유배지 현지에서 교육활동 했던 사람들을 선별하여 그 DB를 완성한다.
    3) 전기, 중기, 후기, 말기의 각 시기별 유인(流人)들의 교육활동 내용을 정리하고 그 특징과 차이들을 규명한다.
    5) 연구의 결과와 전망들과 한국교육사연구와의 관련성을 제안한다.

    조선시대의 시기는 특정 사건이 아닌, 정치세력 변천과 경제적 변화를 중심으로 그 시기를 3시기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유인(流人)들의 특징을 볼 때 말기를 더두어 4시기로 나누고자 한다.

    □ 전기 : 14세기 후반 - 16세기 중반 (개국공신주도에서 훈구의 득세와 사림의 견제 대두)
    □ 중기 : 16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 (사족지배체제의 형성·발전)
    □ 후기 : 18세기 중반 - 19세기 후반 (지배질서 붕괴와 민중의 성장)
    □ 말기 :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개화기)

    전기는 조선 건국세력간의 정치운영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과 조선의 각종 제도가 정비되고 농민생활이 안정되어가지만, 이에 대한 제반 모순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방향이 모색되던 시기다. 전기는 다시 성종 연간을 기준으로 전·후로 구분된다.
    중기는 사화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은 사림이 서원과 향약, 수리시설 축조 등을 통해 향촌에서 그들의 경제기반을 강화하여 중앙정치의 실권을 잡은 데서 시작한다. 중기는 효종 연간을 기준으로 역시 전·후기로 구분된다.
    후기는 왕권주도의 정치질서가 실패로 끝난 후 세도정치를 통해 붕당질서와 지배질서는 붕괴되고, 성리학이 아닌 실학·서학·동학 등 새로운 사상적 대안이 모색되고, 민중에 의한 변혁이 역사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로 세도정치를 기점으로 전·후기로 구분된다.
    말기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光武), 왕을 황제(皇帝)라 일컬어 표면으로는 독립국가로서 새 출발을 하는 듯하였으나, 외세(外勢)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여전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각종의 정당·사회·교육단체 및 언론기관 등이 생겨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던 시기로 구분된다.
    이러한 유인교육(流人敎育)에 대한 교육사상적인 입장이 『조선유인교육사연구(朝鮮流人敎育史硏究)』의 밑바탕을 이루면서 교육사적인 내용들이 정리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유인교육(流人敎育)이란 유배지에서 이루어지는 유배인의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 제반 교육활동을 의미한다고 일단 정의를 내렸다. 여기서 직접적이라는 것은 유배지 현지 주민들을 직접 가르치고 제자를 양성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간접적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교육활동은 없다 하더라도 유배인의 무게나 위상 때문에 유배생활 당시는 물론 유배생활 이후에도 현지 주민들에게 영향을 주거나 혹은 유배인 본인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교육적 영향을 의미한다. 대개의 유인교육은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이 혼재되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유인교육은 유배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유배인들의 제반 교육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입국의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간 결과 학설의 대립, 학문의 파벌을 잉태시켰고 그것은 나아가 당파의 파벌로 분화되어 정권다툼으로 이어져 끝내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나 당쟁 등으로 유배가 남발되었다. 그래서 조선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유배라는 것은 그렇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유배 체험이 없는 조선 지식인은 지식인으로서의 경력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관습처럼 유배를 체험하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정치생활의 한 부분으로 유배를 받아들이는 일도 없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선조의 선비들에게 있어 유배라는 것은 그렇게 낯선 일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 유배라는 것은 때로 그들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나 규범과도 엇물려 있어 한편으로 염치와 명분의 징표가 되기도 하였다.
    원래 조선의 유배는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국사범들에게 해당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사형완화법으로 이용되었다. 사형완화라고 해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유배를 통해 유배인들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절망, 고독, 빈궁을 맛보게 됨으로써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충격을 만나게 됨은 물론 언제라도 처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실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유배인의 대부분은 현실의 집착을 거세당하고 그 어떤 종류의 희망도 갖지 못한 채 절망의 나락에 빠져든다. 이제 그들의 미래는 죽는 일 뿐이라는 자기 상실을 처절히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비분강개한 절망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을 만큼 암담할 뿐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유배인들은 비록 유배의 비운을 당할망정 누구보다도 군왕에 대한 충성을 간절하게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충성 표현 속에는 반드시 군왕이나 정치적 동료들로부터 다시 추천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충성의 표시는 특별한 뜻이기보다는 유배인들의 관례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그들의 충성심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충성의 표시라는 것이 결국은 자신들의 처지를 달래기 위한 관례적인 메커니즘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충성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그 자신의 억울한 처지, 비분강개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현실을 과장시켜 줌으로써 철저하게 소외당한 자신을 달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처지를 달래기 위한 이러한 충성의 표시는 다른 한편으로 일종의 특권화된 권위 의식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고려 말 정몽주가 거제도에 유배를 당했을 때 그곳 섬의 선비들은 기침소리까지, 수저 잡는 손짓까지 정몽주를 닮기 시작했다는 전설은 그러한 유배인의 권위가 유인교육적 영향으로 크게 작용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충성 표현을 한들 군왕이나 정치적 동료들로부터 다시 추천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유배인들 스스로가 잘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정으로 돌아가 권력에 복귀하고 싶은 태도를 갖기 보다는 일단 유배와 유배지의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체념과 동시에 현지 적응의 방법과 희망을 만들어 낸다.
    특히 원악의 유배인들은 더 이상 조정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중형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경우 현지 목사나 향리의 배려로 유폐를 모면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현지 주민들과의 접촉이 가능했다. 따라서 그들은 주민들과 권위적으로 관계하기보다 현지와 화합함으로써 독특한 유배문화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가 하면 유배인들은 교육자 또는 자기완성자로서 현지 주민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현지의 학문 향상과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기도 했다. 원래 조선조의 선비들은 개인의 인격과 학문적 소양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전제로 한 학자관료(士大夫)로서 학문적 소양으로 정치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학자이면서 정치인이었고 정치인이면서 또한 학자였다. 따라서 유배되었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학자적 기능은 여전히 가능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많은 유배생활을 서재생활로 전환하여 치열한 학자적 생활을 전개한 유배인들도 많았다. 그래서 유배인들은 현지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학자로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한 많은 양의 지적 유산을 유배지에 남기게 되는 것이다. 이제 유배인들은 현지 주민들과의 동화를 통해 그들을 가르침으로써 죄수라기보다 교육자 또는 자기완성자로서 여러 성과를 남긴다. 그런가 하면 유배지에 동반한 가족들을 가르치거나 유배지에 가족을 만들어 그 가족들이 유배인의 지적 유산을 계승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유배인의 다양한 교육활동을 유인교육(流人敎育)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11개의 장으로 나누어 다양하면서도 특이한 유배인들의 유인교육활동을 살펴보았다.

    Ⅰ. 朝鮮時代 流人敎育의 意味와 實際
    Ⅱ. 流人配享의 敎育史
    Ⅲ. 默齋 李文楗의 流人幼兒敎育活動
    Ⅳ. 桐溪 鄭蘊의 流人敎育活動
    Ⅴ. 芝山 曺好益의 流人敎育活動
    Ⅵ. 尤菴 宋時烈의 流人敎育活動
    Ⅶ. 秋史 金正喜의 流人敎育活動
    Ⅷ. 勉庵 崔益鉉의 流人敎育活動
    Ⅸ. 讀書와 流人敎育活動
    Ⅹ. 近代 流人敎育活動
    Ⅺ. 濟州流人敎育列傳
  • 영문
  • A Study on the Educational History of The Exile in Joseon Dynasty

    The definition of "Education of the Exile" is "direct or indirect educational activities" of the exiles. Being direct here means teaching local residents of the exile area directly and training their students. Indirect means the educational influence given to the families of those who are exiled, or who are exiled, not only during exile but also after exile because of the weight or status of the exile, even if there is no direct educational activity. Most manned education is often done by a mixture of direct and indirect. Therefore, it can be defined that manned education is a whole range of educational activities for the exiled people.
    As a result of the strong push for the policy of Confucian entry from the early days of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the conflict of academic theory, the faction of academic studies was instigated and further spread to the faction of the party, resulting in bloody saga or partisan strife that led to a power struggle. So for Joseon intellectuals, exile was not so strange. In a sense, it could be said that Joseon intellectuals, who had no experience of exile, did not have a career or condition as intellectuals. In other words, some people experienced exile like political customs.
    In other words, intellectuals in the Joseon Dynasty accepted exile as part of their political life. For this reason, exile was not so strange to Joseon's scholars. For them, exile sometimes contradicted the values and norms of their lives, while also being a sign of shame and cause.
    Originally, the exile of Joseon belonged to state-run criminals who received more than a year in prison and was generally used as a capital punishment mitigation method. The easing of capital punishment does not mean that you are spared your death. On the contrary, the exile has often led to the shock of being isolated from society by experiencing the despair, solitude and poverty that the exiles had never experienced before, and because they could be executed at any time, they felt more pain than death.
    Thus, most of the exiles are driven by the obsession of reality and fall into the abyss of despair without any kind of hope. Now they realize their loss to the world that their future is nothing but death. Their unseemly despair was nothing but gloomier than to be confronted by anything Ironically, however, the Jews were more loyal to the king than anyone else, even though they were doomed by exile.
    Amid such expressions of loyalty, it certainly hopes to be recommended again by military kings and political colleagues. Therefore, such an expression of loyalty is more of the customary attitude of the exiles than of the special meaning. This does not mean that there is a problem with their loyalty, but a sign of loyalty is a customary mechanism to appease their situation after all. The more you show such loyalty, the more you can appease yourself completely alienated by exaggerating your own unjust situation, the reality you can't sustain without non-divisions.
    But this display of loyalty to appease their situation also serves as a symbol of a privileged sense of authority on the Legend has it that when Jeong Mong-ju was exiled to Geo-je Island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scholars on the island began to resemble Chung Mong-ju with the sound of coughing and the gesture of catching spoon-feeding, which is a case in point that such a exile's authority played a major role due to his educational influence.
    But the exile himself was well aware that it was never easy to be recommended again by the monarch or his political colleagues, no matter how loyal they expressed. So rather than go back to adjustment and have an attitude of wanting to return to power, they give up by accepting the realities of exile and exile, while at the same time creating ways and hopes for local adaptation.
    In particular, the exile of original music knew better than anyone else that it was a medium term that could no longer be returned to adjustment. In that case, he was able to contact local residents because he had to avoid being buried due to the local pastor's consideration and the Therefore, they set the stage for creating a unique culture of exile by integrating with the local community rather than having an authoritative relationship with the residents.
    In addition, the exile has greatly contributed to the improvement of learning and cultural development in the region by setting an example of life for local residents as educators and self-fulfilling people. Originally, scholars in the Joseon Dynasty were scholars, politicians, and scholars because they made it a rule to govern others based on academic discipline based on the premise that they would govern others after brushing up on individual personalities and academic skills. Therefore, being exiled means that the function of a politician has been lost, but on the other hand, the scholarly function has still been possible.
    Therefore, there were many exiles who developed a fierce scholarly life by converting many exile life into study life. That is why the exile leaves a large amount of intellectual heritage based on Confucian culture as scholars while contacting local residents. Now, by teaching them through assimilation with local residents, the exiles leave many achievements as educators or self-fulfilling rather than prisoners. In some cases, the families of the exiles are taught and the families of the exiles are created to inherit the intellectual heritage of the The diverse educational activities of these exiles are called “Education of the Exile”.
    To that end, the study was divided into 11 chapters to look at the various and unusual activities of exiles.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원악의 유배인들은 더 이상 조정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중형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경우 현지 목사나 향리의 배려로 유폐를 모면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현지 주민들과의 접촉이 가능했다. 따라서 그들은 주민들과 권위적으로 관계하기보다 현지와 화합함으로써 독특한 유배문화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가 하면 유배인들은 교육자 또는 자기완성자로서 현지 주민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현지의 학문 향상과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기도 했다. 원래 조선조의 선비들은 개인의 인격과 학문적 소양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전제로 한 학자관료(士大夫)로서 학문적 소양으로 정치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학자이면서 정치인이었고 정치인이면서 또한 학자였다. 따라서 유배되었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학자적 기능은 여전히 가능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많은 유배생활을 서재생활로 전환하여 치열한 학자적 생활을 전개한 유배인들도 많았다. 그래서 유배인들은 현지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학자로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한 많은 양의 지적 유산을 유배지에 남기게 되는 것이다. 이제 유배인들은 현지 주민들과의 동화를 통해 그들을 가르침으로써 죄수라기보다 교육자 또는 자기완성자로서 여러 성과를 남긴다. 그런가 하면 유배지에 동반한 가족들을 가르치거나 유배지에 가족을 만들어 그 가족들이 유배인의 지적 유산을 계승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유배인의 다양한 교육활동을 유인교육(流人敎育)이라고 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조선시대 교육의 유형을 확장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그동안 조선시대 교육은 변방의 교육, 특히 유배지의 교육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형편이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는 조선시대 교육사 연구만이 아니라 한국교육사의 지평을 확대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지역의 교육과 향토교육에도 활용할 가치가 있으며 서울중심, 도시중심의 교육을 극복할 수 있는 역사적 대안이 될 것이다.
  • 색인어
  • 유배, 유형, 유배인, 유인교육, 조선시대, 김정희, 정온, 이문건, 송시열, 조호익, 최익현, 김윤식, 이승훈, 박영효
  • 연구성과물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