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요 연구의 역사는 한 세기를 넘는다. 20세기 초에 이미 여요자기의 실체가 밝혀졌으며, 1986년에는 오늘날의 河南省 寶豊縣 淸凉寺村에서 여요자기를 제작한 것이 알려지고 아울러 2000~2002년에 그 요지가 발굴됨으로서 여요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즉 기존의 문헌기 ...
여요 연구의 역사는 한 세기를 넘는다. 20세기 초에 이미 여요자기의 실체가 밝혀졌으며, 1986년에는 오늘날의 河南省 寶豊縣 淸凉寺村에서 여요자기를 제작한 것이 알려지고 아울러 2000~2002년에 그 요지가 발굴됨으로서 여요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즉 기존의 문헌기록과 전세품, 그리고 고고학적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비교․검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요의 연구 환경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요와 관련된 연구 성과는 연구 환경과 비례하여 그 수준이 높아지고 아울러 내용적으로 풍부해졌다고 보기 힘들다. 예컨대, 여요의 개념에 대한 이해부터 일치된 견해가 없다. 어떤 연구자들은 여요를 일반적으로 汝州에 있던 요장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반면 또 다른 연구자들은 여주에 있던 요장 가운데 각별히 북송말기에 조정의 명에 따라 供御用 자기를 제작하던 특정 요장—淸凉寺汝窯—이나 그곳에서 만든 자기(天靑釉瓷器)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전자의 입장에 있는 연구자의 경우, 여주에 있던 요장을 통틀어 여요로 규정하지만 그곳에서 만든 모든 자기를 여요자기로 파악하지는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여요에서 제작한 자기지만 여요자기는 아니라는 이상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러한 여요의 개념에 대한 혼란으로부터 여요의 성격에 대한 이해의 난맥상은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연구자들은 여요가 기본적으로 民窯의 성격을 띤 요장으로 이해하는 반면, 어떤 연구자들은 그것을 官窯로 파악한다. 양자는 여요를 일컫는 명칭도 달라서, 전자는 “여요”로, 후자는 “여관요”로 칭한다. 놀라운 것은, 여요가 기본적으로 民窯의 토대 위에서 운영되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 가운데에도 그것을 “여관요”로 칭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여요의 성격—개념과 명칭을 포함하여—을 둘러싼 오늘날 학계의 혼란상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혼란상은 어떻게 야기된 것일까? 이 의문을 명쾌하게 풀지 않은 상태에서 여요 연구를 진행해 나간다는 것은 어쩌면 엉킨 실타래를 풀려는 노력을 생략한 채 천을 짜려는 것과 같을 지도 모른다. 이 연구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출발한다. 그 의문을 푸는 것이 곧 이 연구의 목표인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이 연구에서는 북송말기에 여요가 성립된 이후에 여요의 성격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반추해보려 한다. 말하자면 여요의 성격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를 해보려는 것이다. 검토의 대상에 여요의 개념과 명칭에 대한 연구가 포함됨은 물론이다. 여요의 개념의 문제는 여요의 성격에 대한 이해의 혼란상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이거니와, 여요의 명칭의 문제는 여요의 성격 문제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본 연구자는 여요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세기 이후의 연구 상황을 각별히 정밀하게 들여다보려고 한다. 여요의 성격에 대한 이해의 실타래가 엉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부터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학문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연구사적 검토는 매우 힘들고 성가신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연구성과를 분석하고, 뒤얽힌 이해의 가닥들을 풀고, 나아가 각각의 연구성과를 연구사에 자리매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즈음 많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연구사적 검토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형식적인 연구사 검토에 그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피해버리기도 한다. 여요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요의 성격을 둘러싼 학계의 혼란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것은 이러한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요의 성격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사적 검토는 아마도 본 연구가 처음일 것이다.
기대효과
본 연구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여러 차례 여요와 관련된 강의를 한 바가 있다. 본 연구자는 매번 학생들로 하여금 여요와 관련된 대표적인 논문을 읽고 정리하거나 스스로 여요와 관련된 특정한 주제를 찾아서 검토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가장 곤혹스러워 ...
본 연구자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여러 차례 여요와 관련된 강의를 한 바가 있다. 본 연구자는 매번 학생들로 하여금 여요와 관련된 대표적인 논문을 읽고 정리하거나 스스로 여요와 관련된 특정한 주제를 찾아서 검토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여요와 관련된 명칭과 그 개념의 혼란이었다. 예컨대 대부분의 논문에서 “여요”․“여관요”․“官汝窯”․“청량사여요”․“청량사요” 등과 같은 명칭을 사용하지만, 그 명칭의 개념과 그것이 가리키는 구체적인 대상이 한결같지 않으므로 그러한 혼란으로 말미암은 곤혹스러움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점은 학생들의 경우에 국한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연구자들도 여요의 개념을 규정하거나 명칭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동일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것이 여요의 성격과 관련된 연구의 현주소이다. 본 연구자는 이 연구를 통하여 그러한 혼란상을 야기한 원인을 찾고 아울러 정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크게 공헌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토대 위에서 보다 체계적인 여요 연구를 추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여요는 도자의 조형과 기술적인 측면 등에서 많은 요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북송관요가 여요의 토대 위에서 설립되었으며, 그 전통을 이은 것이 남송관요라는 것은 잘 아는 일이다. 용천요에도 여요 전통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요장들은 질적인 측면에서 당대의 중국도자산업을 선도하던 입장에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새로운 여요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은,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보면, 사실상 그러한 많은 요장들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와도 사실상 맞물려 있는 셈이다. 결국 본 연구의 초점은 여요의 성격—그 개념과 명칭을 포함하여—과 관련된 오랜 논의를 연구사적인 측면에서 진단하는 데에 맞추어져 있지만, 그 결과는 여요를 넘어 12~13세기 중국도자산업을 선도한 여러 요장들에 대한 진전된 연구에도 적지 않은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려청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12세기의 고려 비색청자는 “天下第一”의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 여요의 영향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러한 고려 비색청자를 생산한 요장의 성격을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있다. 官窯說․貢納窯說․製樣須索窯說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각 연구자들이 가리키는 관요와 공납요와 제양수색요의 개념은 한결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명하다고 보기도 힘들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 요장의 성격에 대한 연구가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여요의 경우와 같은 혼란상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연구는 그러한 혼란상을 해결하는 데에도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연구요약
이 연구의 목표는 여요의 성격과 관련된 해묵은 혼란상을 수습․정리하기 위하여 한 세기 가까이 이어져 온 여요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연구사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연구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선행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여요의 개념을 분명히 ...
이 연구의 목표는 여요의 성격과 관련된 해묵은 혼란상을 수습․정리하기 위하여 한 세기 가까이 이어져 온 여요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연구사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연구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선행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여요의 개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어떤 연구가 올바른 개념을 토대로, 어떤 연구가 잘못된 개념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서 북송말기 여요가 성립된 이후의 역대 문헌에 보이는 개념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여요의 성격에 대한 연구사를 검토하는 데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Percival David의 연구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여요자기의 실체를 규명한 주인공이다. 뒤 이어 검토할 것은 小山富士夫의 여요 연구이다. 그의 연구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요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여관요”라는 명칭이 출현하게 된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을 살펴 볼 것은 1986년 淸凉寺汝窯址가 발견되고 난 이후의 여요의 성격에 대한 연구이다. 이 이전이 주로 문헌자료와 傳世汝窯瓷器를 토대로 연구가 이루어진 반면, 이 이후에는 거기에 고고발굴자료가 추가됨으로서 여요 연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연구를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본 연구자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다음 세 가지 점에 특히 유의하려 한다. 첫째, 여요의 성격과 관련된 연구성과를 빠짐없이 찾아서 검토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제까지 많은 연구자들은 자신과 입장이 다른 연구성과의 분석에 소홀하였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자신과 입장에 비슷한 연구성과에조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는 이미 제출된 견해와 거의 동일한 주장을 되풀이한 경우도 있다. 오랫동안 이러한 상황이 별다른 개선 없이 지속된 것도 여요의 성격을 둘러싼 오늘날 학계의 혼란상을 야기한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둘째, 이제까지 여요의 성격과 관련하여 제시된 여러 견해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본 연구자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한다는 것이다. 즉 본 연구자가 가지고 있는 여요의 성격에 대한 견해나 그것의 토대가 되는 근거들을 기준으로 여러 견해들을 비판․검토하는 것을 지양하고, 각 견해에서 제시된 근거 자체의 논리적 타당성만을 분석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각각의 견해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연구사적 검토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상 그러한 방식에 입각한 것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각 연구자들이 제시한 문헌기록이나 전세실물자료 그리고 고고학적 자료들을 직접 대조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사실 많은 연구에서 제시한 문헌 기록을 원문과 대조해보면, 잘못 인용된 경우가 적지 않다. 잘못 인용한 기록을 토대로 한 주장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는 다 아는 일이리라. 전세실물자료와 고고학적 자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위해서 이미 발굴된 청량사여요지에서 출토된 여요자기 자료들과, Percival David가 여요자기의 실체와 여요의 성격을 파악할 때 무엇보다도 중시한 “大觀元年”銘輪形火照(대영박물관 소장) 등을 직접 조사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여요는 중국의 대표적인 가마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여요를 가리켜 여관요(汝官窯)로 칭한다. 여관요는 여주(汝州)에 위치한 관요(官窯)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요가 관요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견해를 처음 제출한 사람은 퍼시발 데이비드(Percival David)이다. 그의 주 ...
여요는 중국의 대표적인 가마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여요를 가리켜 여관요(汝官窯)로 칭한다. 여관요는 여주(汝州)에 위치한 관요(官窯)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요가 관요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견해를 처음 제출한 사람은 퍼시발 데이비드(Percival David)이다. 그의 주장은 1937년에 발표된 논문 “A Commentary on Ju Ware”에 담겨 있다. 그가 핵심적인 근거 자료로 제시한 것은 고리 모양의 화조(火照)였다. 그렇지만 그는 여요를 여관요로 칭하지 않았다. 여관요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사람은 고야마 후지오(小山富士夫)였다. 당시 그는 이른바 북방청자(北方靑瓷)를 여요자기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퍼시발 데이비드의 논문을 접한 후 사실상 자신의 견해가 틀렸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견해를 폐기하는 대신 퍼시발 데이비드가 여요자기로 지목한 자기에 여관요자기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문제의 화조가 위조품으로 밝혀짐으로써 사실상 “여관요”라는 명칭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청량사여요지(淸凉寺汝窯址)가 발견될 무렵까지 사용된 “여관요”라는 명칭은 사실상 형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6년에 청량사여요지가 발견되면서 여요가 곧 북송관요라는 견해를 중심으로 관요설이 다시 부상하였지만, 그것이 “여관요”라는 명칭에 객관적 타당성을 부여해 주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많은 연구자들이 관요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관요”라는 명칭의 출현이 오히려 여요 연구상에 혼란을 야기했을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북송말기에 여요가 성립되고부터 줄곧 이 가마의 명칭은 “여요”였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석연치 않은 계기로 “여관요”라는 명칭이 출현한 이후 여요의 개념과 명칭을 둘러싼 혼란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객관적 타당성이 담보되지 않은 “여관요”라는 명칭을 버리고, 아울러 여요에게 본래의 명칭, 즉 “여요”라는 명칭을 되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문
The Ru ware is a representative and renowned Chinese porcelain. Some people call this Ru ware Ruguan ware. The Ruguan ware probably means the official ware made in Ruzhou (汝州). It was Percival David who originally presented the view that Ru ware had ...
The Ru ware is a representative and renowned Chinese porcelain. Some people call this Ru ware Ruguan ware. The Ruguan ware probably means the official ware made in Ruzhou (汝州). It was Percival David who originally presented the view that Ru ware had the nature of an official ware. His assertion was suggested in his thesis, “A Commentary on Ju Ware” published in 1937. What he presented as core base material was a round-shaped test piece (輪形火照) with the letters “Da Guan Yuan Nian (大觀元年).” However, he did not call the Ru ware Ruguan ware. It wan was Koyama Fujio (小山富士夫) who made the name of Ruguan ware. Koyama Fujio perceived Northern celadon as Ru ware, but he admitted that he was wrong after he read the thesis of Percival David. Nonetheless, instead of discarding his view, he gave the new name of “Ruguan ware” to the ware which Percival David had designated as Ru ware. However, the name of Ruguan ware lost the ground for its existence, as the round-shaped test piece with the letters “Da Guan Yuan Nian” was revealed as an imitation. And thus, the name of Ruguan ware used until Ru kiln site at Qingliangsi was discovered was just nominal. As Ru kiln site at Qingliangsi was found in 1986, the theory of the official ware emerged again, centered on the view that the Ru kiln is Northern Song official kiln. However, it is difficult to regard it as granting objective validity to the name of Ruguan ware. The reason is that many researchers hold an opposition to the theory of official ware. My basic view is that the emergence of the name of Ruguan ware rather have caused just some confusion to the research of Ru ware. Since the Ru kiln was established at the end of Northern Song, the name of the kiln site was Ru kiln. After the name of Ruguan ware appeared with a doubtful reason in the 20th century, confusion surrounding the concept and name of the Ru ware began. I think there is a need to return the name of Ru ware, which is the original name, abolishing the name of Ruguan ware whose objective validity was not secured.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汝窯는 중국의 대표적인 名窯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여요를 가리켜 汝官窯로 칭한다. 여관요는 汝州에 위치한 官窯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요가 관요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견해를 처음 제출한 사람은 Percival David이다. 그의 주장은 1937년에 발표된 논문 “A Commentary o ...
汝窯는 중국의 대표적인 名窯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여요를 가리켜 汝官窯로 칭한다. 여관요는 汝州에 위치한 官窯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요가 관요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견해를 처음 제출한 사람은 Percival David이다. 그의 주장은 1937년에 발표된 논문 “A Commentary on Ju Ware”에 담겨 있다. 그가 핵심적인 근거 자료로 제시한 것은 “大觀元年”銘輪形火照였다. 그렇지만 그는 여요를 여관요로 칭하지 않았다. 여관요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사람은 小山富士夫였다. 당시 그는 이른바 北方靑瓷를 여요자기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Percival David의 논문을 접한 후 사실상 자신의 견해가 틀렸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견해를 폐기하는 대신 Percival David가 여요자기로 지목한 자기에 여관요자기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大觀元年”銘輪形火照가 위조품으로 밝혀짐으로써 사실상 “여관요”라는 명칭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淸凉寺汝窯址가 발견될 무렵까지 사용된 “여관요”라는 명칭은 사실상 形骸化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6년에 청량사여요지가 발견되면서 여요가 곧 北宋官窯라는 견해를 중심으로 官窯說이 다시 부상하였지만, 그것이 “여관요”라는 명칭에 객관적 타당성을 부여해 주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많은 연구자들이 관요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관요”라는 명칭의 출현이 오히려 여요 연구상에 혼란을 야기했을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북송말기에 여요가 성립되고부터 줄곧 이 窯場의 명칭은 “여요”였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석연치 않은 계기로 “여관요”라는 명칭이 출현한 이후 여요의 개념과 명칭을 둘러싼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제 객관적 타당성이 담보되지 않은 “여관요”라는 명칭을 버리고, 아울러 여요에게 본래의 명칭, 즉 “여요”라는 명칭을 되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汝窯는 중국의 대표적인 名窯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여요를 가리켜 汝官窯로 칭한다. 여관요는 汝州에 위치한 官窯라는 의미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역대의 어느 문헌이나 고고학 자료에서도 북송시기에 여주에 관요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는 점 ...
汝窯는 중국의 대표적인 名窯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여요를 가리켜 汝官窯로 칭한다. 여관요는 汝州에 위치한 官窯라는 의미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역대의 어느 문헌이나 고고학 자료에서도 북송시기에 여주에 관요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왜 여관요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일까? 이 연구는 이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여요가 관요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견해를 처음 제출한 사람은 Percival David이다. 그의 주장은 1937년에 발표된 논문 “A Commentary on Ju Ware”에 담겨 있다. 그가 핵심적인 근거 자료로 제시한 것은 “大觀元年”銘輪形火照였다. 그렇지만 그는 여요를 여관요로 칭하지 않았다. 여관요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사람은 小山富士夫였다. 당시 그는 이른바 北方靑瓷를 여요자기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Percival David의 논문을 접한 후 사실상 자신의 견해가 틀렸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견해를 폐기하는 대신 Percival David가 여요자기로 지목한 자기에 “여관요”자기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大觀元年”銘輪形火照가 위조품으로 간주됨으로써 사실상 “여관요”라는 명칭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부터 淸凉寺汝窯址가 발견될 무렵까지 사용된 “여관요”라는 명칭은 사실상 形骸化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6년에 청량사여요지가 발견되면서 여요가 곧 北宋官窯라는 견해를 중심으로 官窯說이 다시 부상하였지만, 그것이 “여관요”라는 명칭에 객관적 타당성을 부여해 주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많은 연구자들이 관요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관요”라는 명칭의 출현이 오히려 여요 연구상에 혼란을 야기했을 뿐이라는 것이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북송말기에 여요가 성립되고부터 줄곧 이 요장이나 그곳에서 만든 자기의 명칭은 “여요”였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석연치 않은 계기로 “여관요”라는 명칭이 출현한 이후 여요의 개념과 명칭을 둘러싼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제 객관적 타당성이 담보되지 않은 “여관요”라는 명칭을 버리고, 아울러 여요에게 본래의 명칭, 즉 “여요”라는 명칭을 되돌려줄 필요가 있다. 이 연구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