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은 도광연간의 창곡정비의 배경으로서 상평창, 사창, 의창의 문제점 즉 각 창곡에 대한 관의 개입으로 인한 관치화 경향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안휘순무 도주가 제안한 풍비의창의 설치, 운용상의 특징, 그리고 실제 도주의 제안에 호응하여 설치된 안휘 ...
논문은 도광연간의 창곡정비의 배경으로서 상평창, 사창, 의창의 문제점 즉 각 창곡에 대한 관의 개입으로 인한 관치화 경향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안휘순무 도주가 제안한 풍비의창의 설치, 운용상의 특징, 그리고 실제 도주의 제안에 호응하여 설치된 안휘성 내 풍비의창에 대한 사례분석을 했다. 다음으로는 19세기말-광서․선통연간의 창곡복구의 배경, 복구의 방향과 성격 등을 분석했으며, 아울러 광서․선통연간의 창곡복구 논의를 도광연간의 논의와 비교하여 분석해, 도광연간과 광서․선통연간의 논의의 차이점과 공통점 등을 살펴보았다. 또한 실제 안휘성 내의 창곡 복구 상황을 풍비의창뿐만 아니라 상평창, 사창, 의창(풍비의창 포함)의 복구 현황을 분석해봄으로써, 복구 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되었는지, 복구된 창곡-주로 풍비의창-이 주로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의 성격이 도광연간의 민간 자치적 성격의 풍비의창과 동일한지의 여부 등을 분석했다. 특히 복구된 창곡이 거주민 1인당 어느 정도의 비율로 비축이 이루어졌는지, 이것이 실제 재해가 발생했을 때 과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는지 등도 분석했다.
안휘성 전체 60개 주현 중 함풍연간 태평천국 전란의 피해 결과, 기존의 상평창·사창·의창은 존치율이 0%에 가까울 정도로 파멸적 상황이었다. 이러한 원인은 내란이 직접적인 요인이었지만, 다른 한편 이미 내란 이전부터 이미 창곡시스템의 운영상 상당한 이완현상이 현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란이 창곡시스템의 완전한 붕괴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내란 평정이후, 무너진 창곡시스템의 복구와 재건은 필연적인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전반적인 통치시스템이 이완된 상태에서 창곡을 복구하기 위한 물적 수단과 추진주체의 문제 등을 보면, 관창인 상평창의 복구는 실질적으로 포기한 상태에서 민간의 자율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에서 사창이나 의창의 복구에 집중된 경향이었다.
동치6년의 복구 논의를 보면, 상평창을 대신해 의창을 신민(紳民)에게 권유하여 신속하게 복구하되, 공정한 자를 선발하여 서리의 개입을 차단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함풍원년에도 의창 설립을 제안하면서, 창곡의 운영은 민간의 자율에 맡기고 관의 개입을 철저하게 배제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결국 창저복구의 지향점은 관의 개입을 배제함으로써, 창곡 운영상 발생할 수 있는 폐단을 사전에 차단하고, 아울러 복구를 민간에 맡김으로써 국가의 재정적 부담을 완화하는 대신 민간 역량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광서2년 창곡 복구의 대표적 선례로서 도광연간 안휘순무 도주(후에 양강총독으로 전임)가 창안한 풍비의창 방법을 거론하고 있다. 이렇게 상평창의 복구에 대한 언급보다 의창 또는 풍비의창 설립이 논의되고 있었다는 점은 명실상부하게 상평창의 복구를 사실상 단념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의창-사실상 19세기말의 의창은 설립 위치나 운영방법, 재원 확보 방법 등으로 고려하면 풍비의창적 성격에 가깝다-과 풍비의창이 새로운 대안으로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서·선통연간 창곡 정돈 및 복구에 대한 논의는 광서3~4년(1877~1878), 광서10년(1884), 광서24년(1898), 광서30년(1904)~선통연간(1909~1911)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공통적으로 창곡시스템의 복구 방향은 운영 과정 상 관 특히 서리의 개입 차단과 민간의 자치적 운영을 강조하고 있으며, 상평창보다는 민간재원의 동원을 통한 사창 또는 의창의 복구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의 의창은 대부분 도광연간 안휘순무가 제안하여 일부지역에 설립된 풍비의창을 가리킨다.
도광연간 관은 사창과 의창을 점점 비효율적인 상평창에 대한 대체물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1823년 안휘순무 도주에 의해 의창건립이 촉진되었는데, 그 기본적 방향은 관료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도주가 의창개혁에 관해서 12개조로 구성된 장정을 발표했는데, 기존 건륭18년 직예총독 방관승이 제정한 의창조규 7조와 비교해보면, 도주의 의창(풍비의창)은 민간 시설적 색채가 강하고, 향촌 공동체를 중시하고 있으며, 특히 지연과 혈연적 조건에 따르고 있다. 곡식 마련은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고, 관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다. 요컨대 풍년에 여유 식량을 비축하여, 흉년에 분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도주는 적곡량을 보고하는 것은 그 치안상의 보호를 요청하는 것에 국한시키고, 관의 감독을 받지 않음으로써 관의 개입을 차단했다. 이러한 조치는 도광연간 의창의 비효율성의 원인이었던 관창화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안휘성의 지방지와 신보, 당안사료 등을 조사해보면, 기존 연구와 달리 도광연간 풍비의창을 설립한 지역이 추가적으로 발견된다. 기존 연구에서는 도광연간 안휘성의 풍비의창은 기껏해야 2개 지역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원인은 안휘성 전체 60개 주현을 대상으로 전수조사 하지 않고, 일부 지역을 샘플로 분석했기 때문이다. 도광연간 안휘성 내 풍비의창 설립 상황을 보면, 회녕현1, 태호현5, 숙송현1, 무호현1, 서성현1, 무위주1, 봉대현1, 숙주1, 광덕현1개로 도합 13개가 설립되었지만(이상은 지방지 자료에 근거), 여기에 도주의 보고서에 나타난 청양현, 동릉현, 망강현, 회원현, 무원현까지 포함시킨다면 18개의 풍비의창이 설립되었다. 설립 시기별로 보면, 설립시기를 알 수 없는 것은 제외하면 도광4·5년, 도광25·26년 무렵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설리 이후 10년도 되지 않는 시기에 민간 자치적 성격은 후퇴하기 시작하여, 관리의 관여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도광14년 전국적으로 의창 관리자에 의한 다양한 폐단이 발생해, 창곡이 없거나 본래 대여가 설립 목적이었지만 평조에도 이용하는 등 문제가 발생해 풍비의창도 점차 형해화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서·선통연간 풍비의창이 창곡 복구를 위한 대안적 모델로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당시 논의자들 대부분이 국가의 창곡시스템 관리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간 자치적 성격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광서·선통연간 안휘성에서 복구된 풍비의창을 보면, 동성현(동치11), 태호현(의창19개), 영국현(풍유적곡창), 남릉현, 서성현, 봉양현, 회원현, 수주, 숙주, 곽산현, 광덕현, 건평현, 함산현, 천장현(11좌)로 명확하게 풍비의창이란 명칭으로 복구된 지역도 있지만, 설립 위치의 세밀화·분산화 경향과 운영방법 등을 고려하면 의창이란 명칭으로 복구된 지역의 창곡 역시 풍비의창으로 간주할 수 있다. 안휘성 총60주현 중 43개 주현에서 창곡(상평창, 사창, 의창·풍비의창 포함)이 복구되었는데, 이중 풍비의창은 14개, 의창5개로 상평창이나 사창에 비해 압도적인 수치를 차지하고 있다. 기존 연구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동치 이후 의창을 풍비의창과 동질의 성격의 창곡으로 파악한다면, 실제 풍비의창의 설립은 이 수치를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의 추산에 따르면 안휘성 내에서 의창은 7개 지역에서 재건되었다. 따라서 만약 의창을 풍비의창으로 볼 수 있다면, 실제 풍비의창의 설립은 60개 주현 중 총 20개 주현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그 근거는 광덕주 건평현의 풍비의창을 보면 지방지에는 의창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안휘순무의 보고(당안사료)에는 풍비의창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풍비의창과 의창을 동질의 창곡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연구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안휘성에서 풍비의창을 제외하면, 의창은 청 전반기에 거의 설립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같은 성격의 사창이 보급되었고 동치 이후 사창이 쇠미해진 이후 풍비의창이 임의로 설치되었다고 한 주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사창은 청 전반기에 10개 주현에 설치되어, 이중 청말까지 7개 주현에 존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37개 주현에 설치되어 이중 청말까지 7개 주현에서 사창이 존속하고 있었다. 청말까지 존속한 사창의 수치만 보면 큰 차이가 없지만, 청 전반기에 광범위하게 설치된 사창이 청말에는 쇠미해지고, 대신 의창(풍비의창)이 설립된 원인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 전반기 의창의 설치가 저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창은 실제 더욱 광범위한 지역에서 설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말에는 오히려 사창보다는 의창(풍비의창 포함)이 더욱 광범위한 지역에서 설치되었으며, 이는 청말 창곡의 복구 방향-관의 개입 차단과 민간의 자치적 운영-이라는 점에서 사창보다는 의창이 보다 적합한 창곡제도였기 때문은 아닌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풍비의창 설립의 대표적 사례로서 안경부 동성현 북향 풍비의창을 보면, 도광연간에 설립되었지만 함풍연간 태평천국의 난을 겪은 이후 모두 소실되었다. 광서초 안휘순무의 지시에 의해, 토지 소유면적에 근거해 강제적으로 풍비의창곡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재건되었는데, 이후 재해로 인해 식량문제가 발생하자 창곡을 방출하여 시장 가격보다 싸게 판매(평조)했다. 이후 토지를 매입하거나 현금을 전장에 예치해 이자수입을 통해 향후 미곡구입 자금으로 활용하도록 했으며, 또한 평조 시 각 향촌에서 납부한 미곡의 양에 따라 구입할 수 있는 미곡의 양도 할당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당초 도주의 구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한편 풍비의창은 주로 안휘성 남부지역보다 북부지역에서 복구가 집중되고 있다. 남부지역은 양자강 양안의 쌀 생산지역과 편리한 수운망 덕분에 비교적 용이하게 식량을 외지에서 수급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북부지역은 본래 토지가 척박하고 자연재해가 남부지역보다 빈발하는 지역이었고, 이에 대비하기 위한 시설로서 풍비의창을 설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풍비의창이 민간 자치적 성격의 창곡이지만, 실제 복구 과정에서는 지방관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지방관의 관여는 풍비의창 설립 초기에 관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보이며, 그 이면에는 안휘성 신사의 비협조적 태도가 있었다.
기존 사창․의창에 대한 관의 개입 정도가 심화되고 있는 추세였는데, 예컨대 기존에 사창을 민간에서 운영하는 창고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실제 건립 과정에서 나타나는 관의 주도성-창곡의 확보에서 창곡의 실제 운영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관의 개입, 그리고 사창곡에 대한 관의 관리․감독과 중앙정부로의 재정보고, 지방관 교대 시 상평창과 함께 사창도 그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사창은 사실상 관창적 성격의 창고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관의 개입 소지가 큰 사창보다는 국가의 정책적 방향에 보다 근접하는 풍비의창(의창)이 주로 복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자연재해 발생 시 풍비의창의 효용성은 사료상의 제약으로 인해 자연재해 발생 시 풍비의창 곡식을 이재민에게 얼마나 방출했는지, 방출한 이후 창곡을 재비축했는지 등은 명확하게 파악하기 곤란했다. 그러나 실제 복구된 풍비의창(의창포함)의 비축량이 1인당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보면, 재해발생 시 풍비의창곡이 어느 정도 효용성이 있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19세기말은 무엇보다 창곡시스템의 복구가 시급한 과제였다. 빈발하는 자연재해에 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정장치를 마련한다는 차원이기도 했지만, 풍비의창의 복구는 한편으로 태평천국 내란 이후 현저해진 지방 엘리트층의 지방사무에 대한 참여를 배경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이들의 역량을 능동적으로 동원함으로써 국가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려는 일환으로서도 추진되었다. 19세기말 국가의 구황능력의 쇠퇴와 이를 만회 또는 보완하려는 수단으로서 풍비의창의 복구를 강조한 셈이고,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적 대안이자 선례로서 풍비의창이 부각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