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87년 이후는 제도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민주주의 질서의 확립, 일상적/문화적 층위에서의 민주화 담론의 시작으로 압축 설명될 수 있다. 이 87년 이후 민주화 경험의 핵심에 자리 잡은 공간적 표상은 '광장'이다.
광장은 개인, 사회, 공동체, 국가가 만나 ...
한국 사회에서 87년 이후는 제도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민주주의 질서의 확립, 일상적/문화적 층위에서의 민주화 담론의 시작으로 압축 설명될 수 있다. 이 87년 이후 민주화 경험의 핵심에 자리 잡은 공간적 표상은 '광장'이다.
광장은 개인, 사회, 공동체, 국가가 만나고 교차하며 다양한 정치적 역동과 관계가 형성되는 장소, 제도와 규범이 만들어지는 공간, '치안으로서의 정치'의 공간이 아닌 일상의 재편인 '정치적인 것'의 실현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표면적으로 광장의 시민들은 대규모의 군집, 하나의 동질적 집단으로 가정되지만 실상 광장은 무수한 정치적 분할면을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광장의 '시민 주체'는 역사적 기술과 공식적 언표를 통해 가시화될 때 '표준화된 남성'을 가정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 젠더, 계층 등의 위계 구조 속 하위주체들은 은연중 배제된다. 광장의 '시민'은 표면적으로는 국민 동원 체제의 권위를 벗어난 것처럼 보였으나 여전히 또 다른 위계와 권위의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과거 자신의 존재를 가시화하거나 목소리를 드러낼 수 없었던 주체(agent)는 여전히 '광장'에 등장하지 못한 채 은폐되거나 비가시성의 차단막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87년 이후 광장의 확장은 새로운 광장의 주체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주노동자, 종군위안부, 여성, 페미니스트, LGBT 등의 새로운 젠더 주체는 젠더 이슈를 광장의 주요 문제로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를 추동해낸 배경에는 2000년대 이후 디지털 리터러시 영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온/오프라인의 공간을 복합적으로 연결하고 활동의 주체나 공간을 채우는 주제 면에서 이전에 가시화되지 않았던 목소리들을 이끌어낸 새로운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본 연구는 1987년 이후 물리적, 정치적 공간으로서 광장의 역사성을 젠더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광장의 의미를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한다. 광장의 의미를 탐색하고 재구축하는 하위 주제로는 '역사와 계보', '공간과 문화', '상징과 이미지', '하위주체와 정체성' 등을 설정하였다. 광장의 역사적 의미를 계보학적으로 탐색하고 물리적, 정치적 공간으로서 광장의 의미와 위상, 기제 등을 살펴보는 동시에 시위, 폭력, 공동체 등 광장의 문화적 구성을 분석하게 될 것이다. 또한 광장에 등장했던 수많은 상징과 이미지들이 어떤 표상성을 지니고 있고 어떤 정치적 역할을 해냈는지, 그리고 그것이 통시적으로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펴보고 광장의 주체를 비정상성, 비가시성 등의 측면에서 되짚어보는 분석 작업을 이어가려 한다.
한국에서의 광장 연구는 공간성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접근법으로 한 도시학적 분석과 조망이 주를 이루어왔다. 또한 촛불집회 이후 광장의 의미를 분석하려는 시도들이 진행되기도 하였는바, 이는 광장의 저항성을 복원해낸 주체로서 ‘시민의 완전한 복권’을 쟁취한 넥타이 부대를 광장이 생산해낸 새로운 집단성으로 지목해낸다. 이러한 광장에 대한 기존 해석은 광장의 형성기 전후나 특정 시기를 중심으로 연구됨으로써 광장 연구의 계보를 부분적으로밖에 조망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는 광장의 공간성, 광장의 주체, 광장의 역사 등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불가능하게 하고, 광장을 균질적 의미를 갖는 공간으로 분석, 이해함으로써 광장에서 비가시화되는 주체들의 광장 경험을 분석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광장을 물리적 공간으로 한정함으로써 온라인으로까지 확장된 광장의 공간성을 오히려 제한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본 연구팀은 이러한 한계를 딛고 광장의 행위주체를 중심으로 광장의 차이를 역사화하기 위해 보다 광장의 다면적 요소를 연구 대상으로 포함시키고, 구술사의 영역으로까지 방법론을 확장시키려고 한다. 이를 통해 여러 행위주체의 이데올로기와 욕망이 뒤섞이는 혼종적 공간으로서의 광장을 읽어내고 분석할 수 있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공간성 연구의 영역을 사회학, 문학, 역사학으로까지 확장시켜 분과학문 연구에 그치지 않고 보다 본격적인 융복합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