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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慎守勤에 대한 재평가와 그 의미
An Reevaluation of Sin Su-geun and Its Significan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7S1A5B5A07062177
선정년도 2017 년
연구기간 1 년 (2017년 09월 01일 ~ 2018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한지희
연구수행기관 숙명여자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과제에서는 연산군대의 외척이었던 거창신씨 一門의 중심인물인 慎守勤의 행적과 그에 대한 평가의 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의 國婚에서 대를 이어 왕비를 배출한 특정의 王室外戚 家門은 상대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그리고 혈연 집단적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당대의 권력과 세도를 누렸던 유력가문이었다. 조선전기에는 청주한씨, 파평윤씨, 거창신씨 가문이, 조선후기에는 안동김씨, 여흥민씨 가문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가문은 조선전ㆍ후기의 외척가문의 정치권력적 성격과 시기별 존재양상의 특징을 파악하는 데에 좋은 연구 소재가 될 수 있다.
    居昌 慎門은 연산군의 왕비와 영조 때 단경왕후로 추숭된 중종의 왕비를 연이어 배출한 유력 외척가문이었다. 그러나 단경왕후는 생전에 왕비의 지위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거창 신문이 본격적으로 외척세력을 형성했던 시기는 연산군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중종반정으로 인해 연산군의 비와 중종의 비인 두 신씨가 모두 폐비되고, 慎守勤ㆍ慎守謙ㆍ慎守英이 죽음으로 멸문을 당함으로써 이후 조선 말기에 이르도록 거창신씨는 청주한씨, 파평윤씨와는 달리 2품 이상의 고위관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가문이 되고 말았다. 참화를 당한 거창 신문은 가문 구성원들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을 남기지 못하였다. 개인 저술이나 家狀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인물들의 經世觀과 현실인식, 학문적 성향, 당대 주요 인물들과의 관계, 성품 및 일화 등을 충분히 확인하기 어렵다. 영조 15년(1739) 신수근에게 ‘信度’라는 시호가 내려질 때 대제학 李德壽가 지은 신수근의 諡狀이 그 내용의 소략함을 면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창 신문은 조선전기 외척가문들의 존재양상에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 가치가 있다. 거창 신문의 중심인물은 慎承善과 그의 아들들인 신수근 3형제 정도인데, 이는 조선후기의 외척가문들이 ‘본관—계파[一門]’ 중심의 종횡으로 연결된 부계 혈족 단위로 대거 정계에 진출했던 것과는 큰 차이점을 보인다. 거창 신문이 중종반정 때 주요 인물들이 모두 제거되면서 외척세력으로서의 생명력이 짧았던 것은, 조선후기에 기사환국과 신임옥사에서 큰 화를 당했던 안동 김문의 金壽恒—金昌集 일문이 의리실현에 철저한 입장을 고수하며, 정치ㆍ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가문의 성장을 이루어 19세기 세도가문으로 이어졌던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오로지 국혼을 배경으로 가문의 급성장을 이루었다가,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몰락했던 거창 신문의 사례는, 조선전기 외척가문들의 존재양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신수근에게 주어진 평가의 의미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를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조선전기에서 그의 생애와 관직생활, 반정으로 인한 몰락은 대략이나마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관심은 거창 신문에 속한 각 개인의 극적인 삶과, 가문의 급격했던 정치적 부침에 따른 흥미 위주의 역사인식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수근 문제는 이미 당대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중요한 사안이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조선 전ㆍ후기에 걸쳐 각 시기별 정치상황과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君臣義理의 변화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는 조선시대 외척 인물들 가운데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특히 조선후기 숙종, 영조, 정조 연간에 중앙정치권에서 공개적, 또는 공론에 따라 시행된 그에 대한 평가는 해당 시기의 미묘한 정치상황에 따라 차이점과 공통점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전체적으로는 단계적인 과정과 의미를 띠고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과제에서는 신수근의 평가문제를 검토하고 그 의미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와 관련한 조선전ㆍ후기의 주요 정치사건 및 상황들을 새로운 연구시각으로 通觀할 수 있는 연구 틀을 마련해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 과제를 통해 다음과 같은 기대효과 및 활용방안을 기대할 수 있다.
    첫째, 향후 조선전기 왕실외척 ‘가문’의 존재양상(인적 네트워크, 정치적 성향, 사회경제적 지위 등)에 대해 연구의 폭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본 연구과제는 조선전기의 유력한 외척가문과 인물들의 개별 연구가 축적되는 출발이 될 수 있으며, 개별 연구들의 종합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경우 조선후기 또는 한국사의 다른 시대의 왕실외척과의 비교 연구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또한 왕실외척 가문의 계보, 혼맥과 학맥, 인적 구성, 관력과 혈연권력, 문화ㆍ경제적 여건, 가학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조선시대 양반사회를 움직인 ‘실질적 변수’의 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국왕과 신하를 매개하는 중간자적 지위에서 국왕을 보좌하는 세력으로 존재했던 ‘외척’은, 조선의 지배계층을 이해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연구주제라고 생각한다.
    둘째, 조선시대의 민감한 정치문제인 ‘척신정치’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앞 시기의 특정 외척가문이나 인물에게서 불거져 나온 문제들은 그것이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일수록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신수근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조선전기의 인물 연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시기별로 신수근에 대한 평가의 문제들을 검토하고 그것의 정치적 의미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조선전ㆍ후기에 걸쳐 그와 관련된 정치적 상황 및 사건들, 예컨대 신비복위소와 추복논의, 사림과 훈구 및 노론과 소론의 대립, 辛巳獄事, 庚申處分, 君臣義理, 五晦筵敎 등을 새로운 연구 시각에서 통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 그동안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단경왕후의 복위ㆍ추복논의 과정에서의 ‘地位’ 규정문제가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신씨는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폐출되었다가 죽었기 때문에, 엄격히 신씨에 대한 논의는 ‘追崇’과 관련된 것이어야지 복위나 추복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와 후대의 일반적인 인식은, 신씨가 중종이 즉위하는 날에 法駕를 타고 경복궁 내전으로 들어가 궁인들의 하례를 받은 것에서, 이미 중종의 정처로서 坤位에 있었던 것으로 마땅히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즉 중종의 즉위 때 이미 왕비가 된 것이었고, 책봉이 되지 못했으므로 결과적으로 폐비가 되었다는 인식이었다. 따라서 전후의 신씨의 복위 또는 추복논의들이 ‘책봉’이나 ‘추숭’의 개념에서 전개되지 못했던 이유가 이 연구를 통해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조선의 왕실외척 연구는 왕후를 대상으로 한 인물사 연구와 상호 보완적 측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왕비의 궁중 내 위상이 원자의 생산이나 왕실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넘어, 친정 가문의 권력적 요소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만큼, 왕비 개인의 삶만을 독립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충분치 못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실외척을 둘러싼 당대 정치상황이 충분히 검토된 연구토대 위에서 왕후의 인물사 연구도 좀 더 진전된 형태를 띨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섯째, 왕실외척 가문과 인물들에 관한 연구가 축적됨으로써 일반 대중들과 교육현장에서 나타나는 이에 대한 관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조선시대의 왕후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서들이 과도할 정도로 쏟아지고 있고, 대중 매체의 사극 제작도 매우 활발하다. 따라서 고증의 불철저와 그에 따른 오류, 역사의식의 결여 및 사실에 대한 왜곡 등의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이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다 깊이 공유함으로써 연구기반을 마련하고, 적극적인 연구를 통해 성과를 축적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한다. 본 연구과제는 그 과정의 일환이며, 이러한 연구결과물들이 쌓일 때 앞의 문제들은 스스로 해결방향을 찾을 것으로 생각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과제는 다음과 같은 목차에 의해 2단계로 진행될 것이다.
    (1) 행적과 당대 평가
    ① 연산군 시기의 정치활동 : 慎守勤의 출세 배경은, 그의 부친인 慎承善이 臨瀛大君의 사위가 되어 세조의 지원으로 고위직에 오르고, 성종 연간에 딸이 세자빈에 간택된 데 있었다. 신수근은 宣慰使로 평안도에 파견되었다가 ‘便宜四事’를 건의하였다. 또한 도승지 시절에 사림들과 대립하다가 무오ㆍ갑자사화를 주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과 ‘소문’에 대하여 당대와 후대의 견해 차이가 큰 만큼, 보다 치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신수근의 현실인식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② 반정과 논란 : 신수근 형제가 반정에의 동참을 거부하면서도 사전에 모의를 고변하지 않았던 이유를, 군주에 대한 의리와 역사의식을 중심으로 논의해본다. 晋城大君의 부인인 신씨는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왕비에 책봉되기 전에 폐출당하였다. 중종 10년 金淨ㆍ朴祥의 慎妃復位疏에서 신씨 폐출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논거로 신수근의 죄의 문제를 거론한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수근의 생전과 사후 사림들의 인식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점에서 신비복위소는 중요한 소재이다.
    ③ 훈구와 사림의 평가 : 『연산군일기』, 『중종실록』에서 신수근 형제에 대한 평가는 부정일변도이다. 실록청 총재관이 각각 成希顔과 李芑라는 사실은 실록 편찬 당시 반정세력의 정치적 개입을 짐작케 해준다. 신수근 형제에 대한 南袞, 李耔, 李荇 등의 부정적인 시각은 조선후기 관료ㆍ문인들에 의해 비판되고 있으므로,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것이다. 신수근 사후 신진사림들의 인식이 부정적이지 않으며, 사림들이 재등용되던 인종 연간에 신원, 복관되는 것을 비중 있게 다룰 것이다. 신수근의 신원ㆍ복관은 신씨의 복위에 큰 걸림돌이 제거된 것임을 논의한다.

    (2) 재평가의 과정과 의미
    ① 숙종 연간의 신씨 追復논의 : 신수근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는 일은 신씨의 복위가 이루어질 때 가능하였다. 김정ㆍ박상ㆍ趙光祖 등의 신씨복위론은 宋浚吉, 宋時烈, 金壽恒-金昌協 부자를 통해 계승되었음을 논의한다. 숙종 24년(1698) 신씨의 추복논의는 李世白-李宜顯 부자, 尹趾善-尹趾完 형제, 南九萬, 權尙夏, 崔錫鼎, 尹拯 등을 중심으로 검토한다. 현실정치와 유학자적 책무 사이에서 갈등하고, 노ㆍ소론 간 견해 차이를 드러내는 것을 주의깊게 볼 것이다. 선왕의 폐비를 후세의 자손이 함부로 추복할 수 없다는 원칙과, 희빈 장씨가 폐비로 있던 시기적 특수성을 검토하고, 신수근 논의는 김정ㆍ박상의 상소에서 진전되지 못했음을 밝힌다.
    ② 영조 연간의 贈職ㆍ贈諡 : 영조 15년(1739) 신씨의 추복논의가 숙종의 때와는 성격이 다름을 살펴본다. 端敬王后의 추복으로 인해, 신수근은 영의정 益昌府院君이 추증되고, ‘信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李德壽가 쓴 諡狀, 李瀷이 쓴 延諡宴의 서문, 영조의 비망기 등을 통해 신수근의 君臣義理에 대한 평가에 주목한다. 영조가 세제 시절 자신의 建儲ㆍ代理와 관련해 목숨을 잃었던 노론 4대신의 신임의리를 인정해주는 영조 16년 庚申處分과 관련해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慎後聃이 영조 21년에 戊申亂의 여얼로 처단된 李穡의 생질임에도 불구하고, 영조 51년에 ‘古今同忠’을 써서 내려주는 은전에서, 탕평정치기 신수근에 대한 영조의 평가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③ 정조 연간의 旌閭와 군신의리 : 정조 23년 신수근의 마을에 旌門을 세워주어 그의 충성과 의리를 표창하였는데, 국구를 충신으로 정려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정조는 辛壬義理, 壬午義理, 『明義錄』 의리를 통합한 새로운 군신의리를 천명하고자 하였고, 군주의 정당한 의리 천명에 적극 호응하는 군신간의 신뢰와 화합을 강조하였다. 정조의 ‘大義理’ 정립을 위한 중요한 시점에 신수근의 충의에 대한 포장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특히 정조가 재위 말년 右賢左戚의 노선을 포기하고 喬木世家를 척신으로 삼아 정치적 지원세력을 양성하려 했던 정국에서 외척 신수근의 군신의리을 통해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논의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조선전기의 왕실외척 인물에 대해 당대에 주어졌던 평가가 조선후기에 극단적으로 변화한 예는 흔치 않은 일이다. 영의정 신승선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처남, 중종의 장인으로 연산조 때 가장 권세 있는 외척이었던 신수근은, 당대에는 권세를 탐하고 국왕에게 아첨하는 외척, 무능한 관료, 포악하고 남을 해치기 좋아하여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자로 평가되었으나, 영ㆍ정조 시기에 이르러 조선 최고의 충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신수근 사후 230여년 만에 이루어진 그 같은 변화는 정치세력의 변동 및 정국의 추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몇 가지 요인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결과였다. 신수근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고 그 결과의 변화가 있게 한 요인들로, 반정과 관련한 신수근의 독특한 행적, 유학자들의 단경왕후 추숭 노력, 그리고 영ㆍ정조의 군신의리 강조 등을 들 수 있다.
    실록에는 자세하게 기술되지 않았으나, 야사를 통해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진 신수근의 반정모의 거부와 죽음에 대한 내용은 훗날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하는 핵심 근거였다. 대략 세 차례에 걸친 반정세력의 동참 권유를 신수근은 명백히 거부하였고, 반정 당시 죽음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훗날 그의 행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영조 때 성호 이익이 말한 대로 야사의 전승이 아니었다면 성사되기 어려운 은전들이 절개를 지킨 충신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그에게 여러 형태로 주어졌다.
    또한 신비복위론이 제기되지 않았다면 신수근의 재평가는 시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정ㆍ박상의 상소로부터 비롯된 신씨의 복위[추복]론은 조광조가 이를 정론으로 인정하면서 사림에게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부부의 도리를 중시하고, 나아가 군주를 위협해 왕비를 폐위시킨 패역한 신료들을 징계함으로써 정당한 유교적 대의와 명분을 밝혀야 한다는 요구는 조선후기 사림들에게 중요한 논의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숙종 24년의 신씨의 위호 추복논의가 성사되지 못한 것은 당시에 희빈 장씨가 폐비된 상태로 있었던 특수한 정치상황 때문으로, 그것은 불과 42년 뒤인 영조 15년에 군신이 한뜻이 되어 단경왕후 추숭을 일사천리로 결정한 것에서 증명되었다. 반정 당시 신씨가 폐출되었던 이유가 그 아버지인 신수근의 죄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으므로, 신씨의 복위[추복]의 당위성이 강조되려면 연산군 때 부귀와 권세를 누린 외척 신수근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들이 희석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김정ㆍ박상의 상소를 시작으로, 숙종 때 신규의 상소, 영조 때 김태남의 상소는 신수근의 죄를 종사에 관계된 것이 아니며 『주례』의 의친법에 따라 용서될 만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신씨가 왕비로 추숭되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였다. 따라서 단경왕후 추숭작업과 맞물려 신수근의 연산군 때의 행적과 죄에 대한 논란은 재평가의 결정적인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단경왕후의 추숭에 따른 국구 신수근에 대한 증직ㆍ증시의 은전을 넘어서, 신수근을 조선 최고의 충신으로 재평가한 데에는 군주 주도의 군신의리를 정립하고자 했던 영ㆍ정조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영조가 집권 전반기에 국왕권의 절대적 위상을 강화하는 조처들을 취하는 과정에서 재위 15년에 신수근을 통해 강직한 절개를 가진 충신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던 것이고, 그것은 이후 경신처분과 신유대훈 등으로 이어지면서 국왕이 주도적으로 해석, 규정하는 군신의리를 정립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자신감에 영조는 재위 말년에 신수근을 충절의 상징인 정몽주에 비견하며 조선 최고의 충신으로 포장하였고, ‘고금동충’ 네 글자를 써서 내려주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도 국왕의 정당한 의리 천명에 적극 호응하는 군신간의 신뢰와 화합을 강조하면서, 갑자년 양위구상에 따라 척신을 친위세력으로 양성하려던 정국에서 신수근을 국구로서는 최초로 충신으로 정려하였다. 이같이 18세기 탕평정국에서 영ㆍ정조에 의해 행해진 신수근의 충성과 절의에 대한 평가 및 은전은, 국왕 주도의 새로운 군신의리가 강조되는 가운데 왕권의 추이와 정국변동과 관련하여 진행되었다.
  • 영문
  • Sin Sugeun, a maternal relative of royal family from King Sungjong to King Yunsangun, had been perceived as a person flattering to the king and coveting power at the times, incompetent bureaucrat, violent, and a person to trigger Muosahwa[戊午士禍], however, he was reevaluated as the best loyalist in the period of Youngjo and Jungjo in Joseon. The story of his rejection on the depose a king conspiration and death was the core evidence to be reevaluated later, which was the momentum to provide him with various types of a special favor within the frame of loyalist who kept the fidelity. In addition, Sin Sugeun’s sins were defined to be forgiven according to Euichin[議親] Law in Joorye[周禮] and not to be related with a country upon Sin’s restoration theory from Kim Jung and Park Sang’s appeal.
    What his image was changed into the loyalist as to be Jung MongJoo since Queen Dangyeong’s showing respect was due to the will of both Youngjo and Jungjo who tried to establish Kun-Sin-Euli[君臣義理] with the initiative by the king. Youngjo empathized the image of loyalist with strong fidelity by Sin Sugeun and that was continued to Gyungshinchuboon[庚申處分] and Shinyoodaehoon[辛酉大訓] to progress on the establishment of Kun-Sin-Euli by the king. Also, Jungjo empathized trust and harmony among king and vassals to respond the fair announcement of Euli and he commended Sin Sugeun as the loyalist for the first time as the King's father-in-law amid the political situation that developed maternal relatives as close group according to abdication of the throne Thinking in Gapja[甲子] Year.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성종~연산군 때의 왕실외척인 신수근은, 당대에는 권세를 탐하고 국왕에게 아첨하는 외척, 무능한 관료, 포악하고 남을 해치기 좋아하여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되었으나, 영ㆍ정조 시기에 이르러 조선 최고의 충신으로 재평가되었다. 신수근의 반정모의 거부와 죽음에 대한 내용은 훗날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된 핵심 근거였고, 절개를 지킨 충신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여러 형태의 은전들이 주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김정ㆍ박상의 상소로부터 비롯된 신씨의 복위[추복]론은 조광조가 이를 정론으로 인정하면서 훗날 사림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신씨 복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수근의 죄는 종사에 관계된 것이 아니며 『주례』의 의친법에 따라 용서될 만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단경왕후의 추숭 이후 신수근이 정몽주와 비견되는 충신으로 포장되었던 것은, 군주 주도의 군신의리를 정립해나가고자 했던 영ㆍ정조의 의지가 작용했던 결과였다. 영조는 국왕권의 절대적 위상을 강화하는 속에서 동왕 15년에 신수근을 통해 강직한 절개를 가진 충신의 이미지를 강조하였고, 그것은 이후 경신처분과 신유대훈 등으로 이어지면서 국왕이 주도적으로 해석, 규정하는 군신의리를 정립하는 데로 나아갔다. 정조 역시 국왕의 정당한 의리 천명에 적극 호응하는 군신간의 신뢰와 화합을 강조하고, 갑자년 양위구상에 따라 척신을 친위세력으로 양성하려던 정국에서 신수근을 국구로서는 최초로 충신으로 정려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영의정 신승선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처남, 중종의 장인으로 연산조 때 가장 권세 있는 외척이었던 신수근은, 당대에는 권세를 탐하고 국왕에게 아첨하는 외척, 무능한 관료, 포악하고 남을 해치기 좋아하여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자로 평가되었으나, 영ㆍ정조 시기에 이르러 조선 최고의 충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신수근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고 그 결과의 변화가 있게 한 요인들로, 반정과 관련한 신수근의 독특한 행적, 유학자들의 단경왕후 추숭 노력, 그리고 영ㆍ정조의 군신의리 강조 등을 들 수 있다. 야사를 통해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진 신수근의 반정모의 거부와 죽음에 대한 내용은 훗날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하는 핵심 근거였다. 대략 세 차례에 걸친 반정세력의 동참 권유를 신수근은 명백히 거부하였고, 반정 당시 죽음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훗날 그의 행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영조 때 성호 이익이 말한 대로 야사의 전승이 아니었다면 성사되기 어려운 은전들이 절개를 지킨 충신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그에게 여러 형태로 주어졌다. 또한 신비복위론이 제기되지 않았다면 신수근의 재평가는 시도되기 어려웠다. 김정ㆍ박상의 상소로부터 비롯된 신씨의 복위[추복]론은 조광조가 이를 정론으로 인정하면서 사림에게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부부의 도리를 중시하고, 나아가 군주를 위협해 왕비를 폐위시킨 패역한 신료들을 징계함으로써 정당한 유교적 대의와 명분을 밝혀야 한다는 요구는 조선후기 사림들에게 중요한 논의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숙종 24년의 신씨의 위호 추복논의가 성사되지 못한 것은 당시에 희빈 장씨가 폐비된 상태로 있었던 정치상황 때문으로, 그것은 불과 42년 뒤인 영조 15년에 군신이 한뜻이 되어 단경왕후 추숭을 일사천리로 결정한 것에서 증명되었다. 반정 당시 신씨가 폐출되었던 이유가 그 아버지인 신수근의 죄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으므로, 신씨의 복위[추복]의 당위성이 강조되려면 연산군 때 부귀와 권세를 누린 외척 신수근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들이 희석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김정ㆍ박상의 상소를 시작으로, 숙종 때 신규의 상소, 영조 때 김태남의 상소는 신수근의 죄를 종사에 관계된 것이 아니며 『주례』의 의친법에 따라 용서될 만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신씨가 왕비로 추숭되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였다. 이로써 신수근의 연산군 때의 행적과 죄에 대한 논란은 재평가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국구 신수근에 대한 증직ㆍ증시의 은전을 넘어서, 그를 조선 최고의 충신으로 재평가한 데에는 군주 주도의 군신의리를 정립하고자 했던 영ㆍ정조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영조가 집권 전반기에 국왕권의 절대적 위상을 강화하는 조처들을 취하는 과정에서 재위 15년에 신수근을 통해 강직한 절개를 가진 충신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던 것이고, 그것은 이후 경신처분과 신유대훈 등으로 이어지면서 국왕이 주도적으로 해석, 규정하는 군신의리를 정립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자신감에 영조는 재위 말년에 신수근을 충절의 상징인 정몽주에 비견하며 조선 최고의 충신으로 포장하였고, ‘고금동충’ 네 글자를 써서 내려주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도 국왕의 정당한 의리 천명에 적극 호응하는 군신간의 신뢰와 화합을 강조하면서, 갑자년 양위구상에 따라 척신을 친위세력으로 양성하려던 정국에서 신수근을 국구로서는 최초로 충신으로 정려하였다. 이같이 18세기 탕평정국에서 영ㆍ정조에 의해 행해진 신수근의 충성과 절의에 대한 평가 및 은전은, 국왕 주도의 새로운 군신의리가 강조되는 가운데 왕권의 추이와 정국변동과 관련하여 진행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기대효과 및 활용방안을 기대할 수 있다. 첫째, 본 연구는 조선전기의 유력한 외척가문과 인물들의 개별 연구가 축적되는 출발이 될 수 있으며, 개별 연구들의 종합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경우 조선후기 또는 한국사의 다른 시대의 왕실외척과의 비교 연구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둘째, 조선시대의 민감한 정치문제인 ‘척신정치’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기별로 신수근에 대한 평가의 문제들을 검토하고 그것의 정치적 의미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조선전ㆍ후기에 걸쳐 그와 관련된 정치적 상황 및 사건들을 새로운 연구 시각에서 통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 신씨의 복위 또는 추복논의들이 ‘책봉’이나 ‘추숭’의 개념에서 전개되지 못했던 이유가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조선의 왕실외척 연구는 왕후를 대상으로 한 인물사 연구와 상호 보완적 측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왕실외척 가문과 인물들에 관한 연구가 축적됨으로써 일반 대중들과 교육현장에서 나타나는 이에 대한 관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신수근, 외척, 단경왕후, 거창 신문, 군신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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