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과제 검색 > 연구과제 상세정보

연구과제 상세정보

환인 오녀산성의 성격과 활용 연대 연구
The Study of the Wunu Mountain Fortress at Hengren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8-S1A5A8-2018S1A5A8031070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1 년 (2018년 05월 01일 ~ 2019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양시은
연구수행기관 충북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환인 오녀산성을 대상으로 한 본 연구는 ①오녀산성의 성격 변화(초기 도성에서 방어용 산성으로의 성격 전환), ②오녀산성의 활용 연대(초기~후기)에 대한 문제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알려진 환인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세계문화유산이면서, 고구려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중국에 소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한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어렵다. 이에 본 연구는 환인 오녀산성을 대상으로 중국측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밝혀진 몇 가지 사실을 바탕으로 오녀산성의 성격 변화와 활용 연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발굴조사 보고서에서는 산성이 고구려 초기부터 중기까지 활용되었다고 보고되어 있다. 그렇지만 초기 도성으로 활용되었던 오녀산성의 고구려 중기 건물지에서는 이상하게도 기와건물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한 환인 지역은 고구려 건국부터 멸망기까지 계속 고구려의 영토였음에도 불구하고 환인 지역 내 소재한 오녀산성의 문화층에서는 고구려 중기의 유구와 유물까지만 확인된다는 결론은 학계에 별다는 이견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이에 본 연구는 ①기와건물지의 미확인과 ②고구려 후기 유물의 존재 가능성에 초점을 두어 오녀산성의 성격 변화와 활용 연대에 대한 문제를 고고학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국내 뿐만 아니라 중국 학계에서도 그동안 본격적으로 연구된 바 없기 때문에, 이번 연구를 통해 중국 학계에 우리 학계에서도 고구려 도성과 관련한 고고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남한 내 고구려 연구 자료의 비교가 얼마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리고 중국 내 위치한 고구려 도성 내지는 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국내 학계에서 선도적으로 진행함으로써 post동북공정에 선제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기대효과
  • 환인 오녀산성에 대한 본 연구는 우선 근래 침체되어 있는 고구려 고고학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고구려 초기 도성과 관련한 문제는 영세한 문헌 자료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고고학 자료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와 고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녀산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연구는 발굴조사 보고서가 간행된 2004년을 기점으로, 보고서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이를 활용한 단편적인 검토만 있었을 뿐, 고구려 초기 도성이라는 중요도에 비해 본격적인 고고학 연구는 진행되지 못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중국 학계 또한 마찬가지인데, 오녀산성 발굴조사 보고서가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보고서에 수록된 결론을 재확인하는 정도였을 뿐 오녀산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진전된 연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본 연구는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알려진 오녀산성을 대상으로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몇 가지 의문점으로 시작된 문제 제기를 고고학적으로 검증해보고자 하는 것으로, 이러한 시도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본 연구는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활용되었던 오녀산성이 고구려 중기 이후에도 활용된 것은 분명하지만, 산성 내에서 고구려 기와 건물지가 발견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 행정 관청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오녀산성이 고구려 초기에 비해 치소와 관련하여서는 그 중요도가 현저히 낮아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산성 성격의 변화(치소성에서 방어성으로의 변화 내지는 도성에서 방어용 산성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한 성의 활용 연대 문제 또한 중국 학계에서 오녀산성의 발굴조사 보고서에 수록된 바와 같이 오녀산성이 고구려 중기까지만 활용되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을 남한 고구려 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고구려 후기까지도 사용되었음을 밝히게 된다면, 이상의 연구 결과들은 그간 중국 학계에서는 주목하지 않았던 내용들을 새롭게 밝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남한의 고구려 고고학 연구 수준이나 자료의 중요성을 중국 학계에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가 완료되면 국내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 학술지에도 논문을 투고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본 연구는 중국의 현지 조사를 계획하고 있는 바, 현지 조사를 통해 수집된 중국 내 고구려 산성과 박물관 유물의 영상 자료들은 일반인을 위한 강연이나 학생을 위한 수업 자료로 활용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련 자료를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또한 본 연구에는 대학원생을 연구보조원을 활용하여 관련 연구를 진행할 예정인데, 해당 과정을 통해 고구려를 연구하고자 하는 학생의 연구 의욕 고취 및 적절한 교육 훈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
    이 밖에도 해당 연구를 활용하여 학계와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자료 제공 및 이를 활용한 후속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하도록 하겠다.
  • 연구요약
  • 환인 오녀산성을 대상으로 한 본 연구는 ①오녀산성의 성격 변화(초기 도성에서 방어용 산성으로의 성격 전환), ②오녀산성의 활용 연대(초기~후기)에 대한 문제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환인 오녀산성은 그간의 고고학 발굴조사 결과와 문헌 연구를 토대로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평지성의 활용 여부 내지는 「광개토왕비」의 기사 내용 등을 토대로 한 ‘졸본’의 위치 비정,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위나암성’의 위치 비정 등 초기 도성과 관련한 여러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초기 도성으로 활용되었음에는 큰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선행 연구에서 고구려에서 성은 군사방어 시설일 뿐만 아니라 지방 지배를 위한 기초 행정 거점으로도 사용되었음이 밝혀진 바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험준한 산 정상부 위에 방어 목적의 성을 주로 축조되었으나, 영토가 확장된 고구려 중기 이후에는 효율적인 지방 지배를 위한 중요 거점별 치소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구당서』에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5부(部) 176성(城) 69만7천호(戶)였고, 『북사』에 요동(遼東)이나 현도(玄菟) 등 수십 성(城)에 모두 관청(官司)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는 문헌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리고 『구당서』에는 고구려에서는 ‘오직 사찰, 신묘, 왕궁, 관청에서만 기와를 사용한다(唯佛寺·神廟及王宮·官府乃用瓦)’는 기록이 전한다. 이를 통해 관청이 설치되어 있던 고구려 성에서는 기와 건물지가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255개의 고구려 성 중에서 기와가 보고된 사례는 98개소에 달한다는 선행 연구 결과도 있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졸본에서 도읍을 옮긴 이후에도 신대왕 3년(167년)부터 영류왕 2년(619년)까지 총 8차례에 걸쳐 왕이 졸본에 있는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이 남아있다. 졸본 지역은 건국지로서 상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천도 이후에도 중앙 정부의 꾸준한 관리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환인에 소재한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활용된 오녀산성의 경우에는 어떠하였을까?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오녀산성에서는 고구려 중기 건물지는 확인되고 있으나, 기와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기와 건물지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해서 산성의 중요도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기와 건물지의 부존재는 고구려가 국내로 천도한 이후 오녀산성의 활용도가 고구려 초기와는 전혀 달랐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우선 오녀산성의 성격 변화 즉, 초기 도성에서 방어용 목적의 산성으로의 변화에 대해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본 연구에서는 오녀산성의 활용 연대 문제도 검토해보고자 한다. 환인 지역은 고구려가 발원해서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곳으로, 오녀산성 역시 고구려가 멸망하는 시점까지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004년에 중국에서 발간된 오녀산성의 발굴조사 보고서에서는 산성 내 문화층을 신석기시대 문화층(1층), 청동기시대 문화층(2층), 고구려 문화층(3, 4층), 금대 문화층(5층)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중 제3문화층(고구려 전기)에서는 잔석립이 일부 혼입되고 손으로 제작한 심발 계통의 토기와 철제 농공구 및 중국제 동전 등이, 제4문화층(고구려 중기)에서는 회전대를 이용하여 제작한 비교적 다양한 기종의 토기(호, 옹, 동이, 병, 반 등)와 철제 무기, 공구, 생활용구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해당 보고서에서는 제4문화층을 고구려 중기로만 한정하고 있어서, 본 연구에서는 오녀산성의 활용 시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제4문화층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오녀산성 제4문화층의 토기가 남한 지역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와 유사한 부분이 많아, 해당 문화층이 고구려 중기만이 아니라 후기까지 해당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널리 알려진 환인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세계문화유산이면서, 고구려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오녀산성은 2004년에 발간된 발굴조사 보고서를 통해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 초기(제3기 문화층)와 중기(제4기 문화층)의 유구와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구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1호 대형 건물지는 다른 고구려 전기 유적에 비해 규모와 구조적인 측면에서 월등하였는데, 문헌에 기록된 졸본의 모습이나 환인 일대의 고구려 유적 분포 양상을 함께 고려해볼 때 오녀산성이 초기 도성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오녀산성에서는 기와 건물지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서의 위상에 비추어볼 때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환인 지역은 고구려의 건국부터 멸망 시점까지 계속 고구려 영토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녀산성이 고구려 중기까지만 활용되었다는 조사단의 견해는 그간 학계에 별다른 이견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오녀산성의 활용 연대와 초기 도성에서 방어용 산성으로의 성격 변화에 주목하여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구려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된 오녀산성의 석축 성벽은 동일 시기의 적석총의 석재 가공 및 건축 기술과의 비교 및 다른 고구려 석성에 대한 최근 조사 결과와의 비교를 통해 고구려 전기가 아닌 중기에 축조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쐐기꼴 성돌로 쌓은 성벽이 다른 산성에 비해 정연하지 않은 점이나 초기 형태의 옹성문 구조가 확인되는 점 등은 오녀산성 석축 성벽의 축조 시기가 고구려 중기에서도 약간 이를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보고서에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편년된 제4기 문화층 출토 고구려 토기를 남한 지역의 고구려 토기와 비교해본 결과, 일부 토기는 평양 천도 이후인 5세기 중후반 내지는 6세기 이후로 편년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제4기 문화층 토기의 전체적인 양상은 고구려 후기 토기 양상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고구려 후기까지 오녀산성이 활용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중심 연대는 국내 도읍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오녀산성에는 고구려 후기까지도 기와 건물지가 조성되지 않았는데, 이는 국내로의 천도 이후 오녀산성이 초기 도성에서 방어용 산성으로 그 성격이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중기 이후 고구려에서는 중요 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치소성으로 활용된 고구려 성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오녀산성에서는 제4기 문화층에서도 기와 건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어서, 지방 지배를 위한 치소성 보다는 높고 험준한 자연 지형을 이용한 국내 도성 방어를 위한 방어용 산성으로 재편된 것으로 보인다. 오녀산성은 평양 천도 이후에도 고구려의 건국지라는 상징성을 지닌 졸본 방어를 위해 유지는 되었으나, 도성으로 향하는 주 방어선에서 멀어지면서 방어용 산성으로서의 활용도는 국내 도읍기에 비해 낮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 영문
  • Wunu Mountain Fortress, which is a well-known early Koguryo capital, is a world heritage site of UNESCO and a very important historical site in history of Koguryo. This study examined the question of the period of the utilization of the fortress and the change of character from the early capital to the defensive fortress. In particular, this paper noted two facts that have been identified in that fortess. The first is likely to have been used in the late Koguryo Kingdom, unlike the Chinese excavation report, and the second is that the roof tiled-building was not discoverd, even though it is a very important fortress in Koguryo.
    According to the analysis, the same typed potteries excavated from Acha Mountain Fortress in South Korea, which is presumed to be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were found in Wunu Mountain Fortress. Therefore Wunu Mountain Fortress was able to reveal that it was utilized not only during the mid-Koguryo Kingdom period but also in the late period.
    Meanwhile, roof tiled-building wes not established in Wunu Mountain Fortress until the late Goguryeo Kingdom. This shows that the characteristic of Wunu Mountain Fortress has shifted from the first capital of Koguryo to the defensive fortress for the moved new capital city.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널리 알려진 환인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세계문화유산이면서, 고구려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오녀산성은 2004년에 발간된 발굴조사 보고서를 통해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 초기(제3기 문화층)와 중기(제4기 문화층)의 유구와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구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1호 대형 건물지는 다른 고구려 전기 유적에 비해 규모와 구조적인 측면에서 월등하였는데, 문헌에 기록된 졸본의 모습이나 환인 일대의 고구려 유적 분포 양상을 함께 고려해볼 때 오녀산성이 초기 도성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오녀산성에서는 기와 건물지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서의 위상에 비추어볼 때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환인 지역은 고구려의 건국부터 멸망 시점까지 계속 고구려 영토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녀산성이 고구려 중기까지만 활용되었다는 조사단의 견해는 그간 학계에 별다른 이견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오녀산성의 활용 연대와 초기 도성에서 방어용 산성으로의 성격 변화에 주목하여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구려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된 오녀산성의 석축 성벽은 동일 시기의 적석총의 석재 가공 및 건축 기술과의 비교 및 다른 고구려 석성에 대한 최근 조사 결과와의 비교를 통해 고구려 전기가 아닌 중기에 축조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쐐기꼴 성돌로 쌓은 성벽이 다른 산성에 비해 정연하지 않은 점이나 초기 형태의 옹성문 구조가 확인되는 점 등은 오녀산성 석축 성벽의 축조 시기가 고구려 중기에서도 약간 이를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보고서에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편년된 제4기 문화층 출토 고구려 토기를 남한 지역의 고구려 토기와 비교해본 결과, 일부 토기는 평양 천도 이후인 5세기 중후반 내지는 6세기 이후로 편년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제4기 문화층 토기의 전체적인 양상은 고구려 후기 토기 양상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고구려 후기까지 오녀산성이 활용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중심 연대는 국내 도읍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오녀산성에는 고구려 후기까지도 기와 건물지가 조성되지 않았는데, 이는 국내로의 천도 이후 오녀산성이 초기 도성에서 방어용 산성으로 그 성격이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중기 이후 고구려에서는 중요 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치소성으로 활용된 고구려 성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오녀산성에서는 제4기 문화층에서도 기와 건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어서, 지방 지배를 위한 치소성 보다는 높고 험준한 자연 지형을 이용한 국내 도성 방어를 위한 방어용 산성으로 재편된 것으로 보인다. 오녀산성은 평양 천도 이후에도 고구려의 건국지라는 상징성을 지닌 졸본 방어를 위해 유지는 되었으나, 도성으로 향하는 주 방어선에서 멀어지면서 방어용 산성으로서의 활용도는 국내 도읍기에 비해 낮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중국 요녕성 환인시에 소재한 오녀산성을 대상으로 ①오녀산성의 성격 변화(초기 도성에서 방어용 산성으로의 성격 전환)과 ②오녀산성의 활용 연대(고구려 초기~후기)에 대한 문제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연구를 수행한 결과 당초 목표한 바와 같이 오녀산성의 활용 연대는 중국측 발굴조사 보고서인 『五女山城』(2004)의 결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구려 건국 후부터 4세기말~5세기초까지만 활용된 것이 아니라, 427년 평양 천도 이후까지도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남한에서 출토된 고구려 후기 토기와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의 형태적 비교를 통해, 오녀산성의 토기 역시 평양 천도 이후에도 활용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
    다만 고구려 후기의 토기가 수량적인 측면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지 않은 점은, 평양 천도 이후 오녀산성의 방어적 중요도가 국내성 시기에 비해 떨어졌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는 오녀산성이 자리한 환인 지역의 경우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었던 집안 지역으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었지만, 평양 도성기에는 요하 – 봉성(오골성) - 압록강(단동) - 서해안 – 평양이라는 주요 교통로에서 벗어나 있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편, 오녀산성이 고구려 초기에 활용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五女山城』(2004)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현존 석축 성벽은 고구려 초기가 아니라 국내성 도성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적석총의 축조 기술 등을 고려해볼 때, 고구려 초기의 오녀산성에는 별도의 인공 석축 성벽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녀산성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절벽은 별도의 인공 성벽 없이 충분히 방어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오녀산성 내에서 발견된 길이 13.8m, 너비 6~7.2m 규모의 초석 건물지(1호 대형 건물지)가 주목된다. 해당 건물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 전기의 건물지 중에서 최대 규모이다. 또한 다른 초기 유적에서는 초석 건물지 자체가 확인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오녀산성이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활용되었된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렇지만 고구려에서는 ‘오직 사찰, 신묘, 왕궁, 관청에서만 기와를 사용한다’는 『구당서』의 기록과는 달리, 오녀산성에서는 기와 건물지가 발견되지 않았다. 고구려에서 기와 건축물이 등장한 국내 도성기(고구려 중기)에도 기와 건물지가 조영되지 않았다는 점은 고구려가 국내로 천도한 이후 오녀산성의 활용도가 고구려 초기와는 전혀 달랐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오녀산성이 고구려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더라도, 국내 지역으로 천도한 이후부터는 접근이 쉽지 않은 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지방 지배를 위한 치소성의 역할 보다는 방어용 산성으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연구 성과는 현재 논문 작성을 완료한 상태이며, 국내 중요 학술지에 투고할 예정으로 있다.
    환인 오녀산성에 대한 본 연구는 고구려 고고학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오녀산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연구는 발굴조사 보고서가 간행된 2004년을 기점으로, 보고서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이를 활용한 단편적인 검토만 있었을 뿐, 고구려 초기 도성이라는 중요도에 비해 본격적인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는 중국 학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알려진 오녀산성을 대상으로 고고학적인 검토의 시도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해당 연구는 남한의 고구려 고고학 연구 수준이나 자료의 중요성을 중국 학계에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국내 학술지 논문 게재 후에는 중국 학술지에도 논문을 투고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본 연구 과정에서 수집한 중국 내 고구려 산성과 박물관 유물의 사진 자료들은 일반인을 위한 강연이나 학생을 위한 수업 자료로 활용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련 자료를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또한 본 연구에는 대학원생을 연구보조원을 활용하여 관련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구려를 연구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연구 의욕 고취 및 적절한 교육 훈련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밖에도 해당 연구를 활용하여 학계와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자료 제공 및 이를 활용한 후속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할 예정이다.
  • 색인어
  • 오녀산성, 도성, 고구려, 졸본, 성
  • 연구성과물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