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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한반도내 중국군현의 추이
The transitioof the Chinese Commanderies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중견연구자지원사업
연구과제번호 2018-S1A5A2A01-2018S1A5A2A01033349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3 년 (2018년 07월 01일 ~ 2021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공석구
연구수행기관 국립한밭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한반도에 존재했던 중국 군현은 한국고대사에서 특이한 역사적 사례에 해당한다. 여기서 중국군현의 범주는 한사군(낙랑군, 현도군,임둔군,진번군)에다가 대방군을 포함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후대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특히 낙랑군의 위치문제는 학문적인 측면 이외에도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정치.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된 낙랑군의 위치문제는 우리 상고사를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에서 벗어난 지역에 비정하는 일부 연구자와 이와 같은 견해를 신봉하기를 희망하는 대중의 욕구 분출 현상은 우리 사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논란의 진원지는 학계가 아니라 역사를 국수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부 시민단체 또는 유사 역사학자들이다. 이들은 일부의 기관과 연계하여 주장을 확산시켜 정치.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비화시키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와 같은 정치사회적 논란에 대한 학문적 대응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본 주제에 대한 학문적인 측면에서의 종합적이고도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중국군현의 존재에 대해서는 국내외 사서에 기억과 기록으로 남겨져 전하고 있다. 본 연구자는 한국고대사의 변천과정에서 나타난 중국군현의 궤적을 추적하고자 한다. 낙랑군을 대표로 하는 중국군현이 4-6세기 중국사의 전개과정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등과의 접촉과정에서 어떻게 대응하고 적응해갔는지 그 변천과정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게될 것이다.
    본 연구는 3차년에 걸쳐 연구할 계획이다. 1차년도에는 한반도내 낙랑군의 요서지역으로의 퇴출과 그 이후의 상황을 연구할 것이다. 한반도지역에 첫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 중국 요령성, 하북성지역으로 여러 차례 이동하게 된 변천과정과 이를 둘러싼 역사적, 고고학적인 상황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방법은 낙랑군에 대한 기억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분석한다. 국내의 문헌사료, 중국측 문헌사료에 나타난 낙랑군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비교해 보면 일정한 차이가 나타난다. 이와 같은 내용을 분석하여 비교 제시한다. 나아가 현재까지 조사된 고고학 자료를 참조하여 문헌사료와 대비시켜 낙랑군의 위치문제를 객관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선행연구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지 못한 부분을 선별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낙랑요서설에 대한 기존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료해석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낙랑군 요서설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해본다. 이를 통해 낙랑요서설의 문제점에 대한 새로운 연구시각과 낙랑군의 위치이동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데 연구목표를 설정하고자 한다. 필자는 종래의 연구부진의 내용을 파악하여 사료해석의 접근방식을 달리하여 본 연구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 결과는 중국군현(낙랑군, 현도군, 그 이후의 대방군)이 한반도 지역에서 요령성 요서지역 그리고 하북성 지역까지 여러 차례 이주해가는 과정을 그 위치관계와 함께 밝혀낼 것이다. 또한 313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된 낙랑군이 멸망한 이후에도 한반도 지역에 그 흔적을 어떻게 남겼고 남긴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연구할 것이다. 본 연구결과가 공간된 이후에는 재야사학자를 비롯하여 국내외 학자들과 이 문제를 토론하는 장이 열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한군현의 존재, 이동, 폐치 등과 관련하여 중국, 일본학자들을 토론의 장으로 불어 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사료된다.
    본 연구결과의 타당성이 입증된다면 그 내용은 국민의 역사교육과 역사의식 고취에 일정부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정치.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된 상고사분야의 논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게될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한국고대사의 전개과정에서 낙랑군을 대표로하는 중국군현이 어떻게 기억되고 기록되었는지 또한 중국군현이 어떻게 동북아시아의 역사속에서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종합적이고 구체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낙랑군 요서설을 비판적인 측면에서 검토할 것이다. 이를 위해 사료해석의 새로운 측면을 제시하고, 고고학자료 등에 대한 검토를 통해 낙랑군의 위치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의 주요 내용은 3차년에 걸쳐 연구될 것이다. 1.2차년도에는 한반도내 중국군현(낙랑군,현도군, 이후의 대방군)이 요서지역으로의 퇴출과 그 이후의 상황을 연구할 것이다. 한반도지역에 첫 중국군현이 설치된 이후 중국 요령성, 하북성지역으로 여러 차례 이동하게 된 변천과정과 이를 둘러싼 역사적, 고고학적인 상황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방법은 중국군현에 대한 기억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분석한다. 국내의 문헌사료, 중국측 문헌사료에 나타난 중국군현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비교해 보면 일정한 차이가 나타난다. 이와 같은 내용을 분석하여 비교 제시한다. 나아가 현재까지 조사된 고고학 자료를 참조하여 문헌사료와 대비시켜 중국군현의 위치문제를 객관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3차년도에는 낙랑군이 멸망이후 한반도에 잔존한 흔적을 고구려사의 발전과정 나아가 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흔적을 찾아 분석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 다뤄질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중국군현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검토한다. 여기서는 중국군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제기될 것이다. 먼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한 국내역사서는 중국군현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했는지 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현(낙랑군,대방군)과 고구려, 백제, 신라등과의 접촉기록을 검토할 것이다. 또한 중국측의 역사서는 중국군현을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검토할 것이다. 관련내용을 기록한 주요 사서에 나타나고 있는 기본사료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를 실시할 것이다.
    둘째로, 낙랑요서설이 어떻게 나타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검토한다. 이를 위해 먼저 연구현황을 파악한다. 이 과정에서 실학자들의 낙랑군연구 상황까지도 소급하여 낙랑요서설에 대한 연구 상황과 사학사적인 위치관계를 개괄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실학자들의 연구현황을 제시하여 낙랑요서설의 학설사적 위치관계를 점검할 것이다. 학자들의 논거제시에 나타난 사료해석의 문제점을 도출해낸다. 또 하나는 이와 같은 바탕위에서 요서 낙랑설의 주요 논거로 활용되는 고고학 자료에 대한 검토를 실시할 예정이다. 이 부분은 기존 학계에서 그다지 검토되 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낙랑요서설 주장자의 입장이 고고학 자료의 진위문제와 엇물려서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분석을 통해서 사료에 나타난 의미, 사료작성자의 의도 등을 추적함으로서 낙랑요서설의 학술적 문제점을 밝혀낼 예정이다.
    중국군현이 3-5세기의 동북아시아 역사의 변천과정에서 어떻게 변화, 적응해 갔는지 그 변천과정을 검토한다.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중국 요서지역, 하북성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 과정과 그 위치 등을 구체적으로 비정하고 제시할 것이다. 이 변천과정과 관련하여 근래 이 지역에서 조사된 관련 고고학 자료에 대한 검토도 진행할 것이다. 낙랑군을 제외한 다른 중국군현의 추이를 검토, 정리할 예정이다. 특히 현도군, 대방군의 이주 상황을 정리하여 한반도에서 만주지역으로 옮겨진 이후의 추이를 연구할 것이다. 종래 학계에서는 현도군, 대방군의 추이에 대한 연구가 미진했다. 3차년도 연구는 서기 313년 낙랑군이 멸망 후 중국 요서 지역으로 이동해 간 이후 한반도 지역에 남겨진 낙랑군 관련 흔적을 찾아내 연구하고자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1.2018년도 추진 실적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퇴출된 이후의 상황을 추적하였다. 평양지역에 존재하던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에 의해 쫒겨나 대릉하 하류인 랴오닝성 금주시 지역으로 옮겨가 설치되었다. 낙랑군은 전연, 후연시기 이 지역에 존재하다가 북연 시기에 이르러 랴오닝성 조양시 지역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전연ㆍ후연ㆍ북연시기 행정군으로 존재한 낙랑군의 실체를 낙랑태수(樂浪太守), 조선현령(朝鮮縣令) 등의 관직과 낙랑공(樂浪公), 낙랑왕(樂浪王)등의 관작 명칭을 통해 확인하였다. 북위시기인 462년경에 樂浪郡은 樂良郡으로 개명되었다. 낙랑군은 444년에 설치되었다가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폐치되었고, 이후 정광(520~525년)에 복치(復置)되었다. 낙랑군은 537년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이때는 허베이성 보정시 지역으로 옮겨져 설치되었다. 한편 낙랑군은 허베이성 천진시 지역에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북위시기 행정군으로 존재한 낙랑군의 실체를 낙랑태수, 낙랑중정 등의 관직을 통해 확인하였다.
    낙랑 주민은 북연의 멸망 직전인 432년경에 대거 북위 영역으로 옮겨졌다. 대표적인 것이 허베이성 진황도시 지역으로 옮겨진 상황이다. 이 지역에는 이주해 온 낙랑 주민 등을 중심으로 하여 낙랑군 속현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낙랑군 소속이 아니라 다른 행정구역에 소속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예로서, 북평군 조선현, 요서군 함자현, 낙랑(군)수성(현) 등이 있다. 그리고 천진시 지역에는 연국 낙랑 낙도현 등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2. 2019년도 추진실적
    314년 대방군 멸망 이후의 추이를 고찰하였다. 요서 지역으로 옮겨간 대방군과 멸망한 자리에 남겨진 대방군에 대한 문제이다. 대방군에 살던 주민들은 낙랑군에 뒤이어 4세기 전반 요서지방으로 옮겨갔다. 그곳에 대방군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후 대방군은 전연ㆍ후연ㆍ북연시대까지 존속하였다. 북위 시대에 들어와 대방군은 폐지되고 대방현이 설치되었다. 대방현은 영주 낙량군(樂良郡) 소속(요령성 조양시 지역)이었다. 이후에는 이주해가서 남영주 영구군 소속(현 하북성 보정시 지역)으로 존재하였다. 대방현은 명목상으로나 존재할 정도로 규모가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였다. 대방현은 556년 북제 시대에 이르러 행정구역 개편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고구려는 대방군을 멸망시킨 이후 즉시 직접적인 행정지배를 추진하지 않았다. 이 지역에는 잔존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일부는 독자 세력을 형성하면서 존재하다가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그 세력은 지역의 특수성에 바탕을 두고서 벽돌무덤이라는 묘제를 채용하였으며, 일부 세력가는 대방태수와 같은 관직을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대방군은 멸망했지만, 이후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대방군 관련 인식이 기억되고, 계승되었다. 대방군 관련 관직과 작위 명칭이 고구려, 백제,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다. 한반도 중북부지역이라는 대방군의 위치인식은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까지 계승되었다. 한편 전라도 남원지역의 과거 역사에 대방군을 끌어다가 편입하려는 시도가 고려시대 이후에 나타났다. 물론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요서 지역으로 이주해 살다가 중원의 역사 속에 용해된 대방․낙랑군 주민은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 땅에 남겨진 대방군은 그 계승인식이 후대까지 이어지다가 우리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 흡수되었다.
    3. 2020년도 추진 실적
    현도군의 위치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였다.『삼국지』동옥저전의‘以沃沮城爲玄菟郡’이라는 기록에 대한 사료비판을 시도하였다. 검토 결과 이 기록은 당시 상황을 전하는 사료로 믿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문제가 된 것은 동옥저의 과거 역사를 기록한 부분이었다. 사용된 용어(불내성, 옥저성)가 잘못된 기록이었음을 입증하였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불내성은『삼국지』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명칭이다. 각종 사서에 따르면, 불내성은 옥저지역 또는 고구려 국내성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났다.『삼국지』동옥저전에서 불내성을 옥저 지역에 위치했다고 기록한 것은 편찬자의 잘못이었다. 편찬자가 본래의 불이현을 글자가 비슷한 불내성으로 잘못 기록했다고 파악하였다. 필자는 고구려 국내성 지역에 위치한다고 파악하였다. 실제로『삼국지』를 보면 동옥저전에, 그리고 예전에도 불내성관련 관직을 열거하였다. 이는 『삼국지』찬자가 불내성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증거에 해당한다. 실제 불내성(국내성 지역)은 한나라 시기 현도군과 연결되는 곳이었다.
    둘째로, ‘以沃沮城爲玄菟郡’ 기록은 성립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옥저성이란 용어는 『삼국지』편찬 당시의 지명이고, 현도군은 한 대의 지명인데, 시대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명칭이 서로 결합되었다. 따라서 문제가 있다. 또한 문구상으로 그 해석이 성립할 수 없다. 현도군은 옥저성이 아니라 고구려지역과 연결되어야 한다.
    『삼국지』에서 현도군 관련 기록에 대한 편찬자의 인식을 비교 검증하였다. 그 결과 『삼국지』 동옥저전과 고구려전의 표기방식은 차이가 나타났다. 고구려전은 고구려의 과거 역사가 아니라『삼국지』가 편찬되던 시기의 고구려 상황을 기록하였다. 고구려와 현도군의 관계를 간접적인 교류 관계 정도로 기록하였다. 반면에 동옥저전에서는 직접적인 예속관계로 설명하였다. 문제는 동옥저전에 있었다. 동옥저전 편찬자는 현도군이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는 『한서』지리지 기록을 참조하지 않았다. 현도군에 대하여 기록한 역사서를 분류해보면 문제가『삼국지』동옥저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옥저지역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고 기록한 역사서는『삼국지』와 이를 참조한『후한서』에 불과하다. 다른 대부분의 역사서는 현도군의 설치는 고구려지역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검토과정을 거쳐 동옥저전의‘以沃沮城爲玄菟郡’사료는 편찬자의 정보 부족, 인식 부족에 의한 잘못된 기록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삼국지』기록을 바탕으로, 현도군의 위치를 옥저지역과 관련된 것으로 논의한 기존 견해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영문
  • 1.2018.
    This article has attempted to trace the situations of Pyeongyang-based Lolang commandery
    after it was ousted by Koguryo from the Korean peninsula. The commandery eventually was
    relocated at what is now lower regions of Dalonghe in Jinzhou city of Liaoning province.
    Lolang commandery survived through the dynasties of former and later Yen, but believed to
    have moved again to Chaoyang city area in Liaoning province during Northern Yen era. The
    administrative details of the commandery throughout the three Yen dynasties were ascertained
    in this paper by investigating its government posts and aristocratic titles.
    During Northern Wei times, the commandery changed its name from Lolang to Loliang.
    Loliang commandery was established in 444, but discontinued due to political environments,
    and then reappeared circa-525, which by this period populated merely 1008 inhabitants. The
    name Lolang was reused in 537, and moved again to present-day Baoding city zone in Hebei
    province, shrinking to a village-sized population of 203. Meanwhile, Lolang commandery also
    appears to have existed in Beijing district as well.
    The Lolang locals seemed to have been largely taken from northern Yen to northern Wei
    just before the former’s downfall. The traces of these people could be found all over the Wei
    territory, namely in the area of Laorong prefecture in Liaoning province. In these regions, new
    prefectures belonging to Lolang commandery were made based on the relocated people.
    Prefectures of Joseon, Hamja, Soosung, and Nakdo were identified accordingly from the study
    2.2019.
    The situation after the collapse of Daebang County in 314 was studied. The trend of
    Daebang County, who moved to the Liaoxi area, was considered. Daebang County moved to
    Liaoxi area in the first half of the fourth century. It is a new administrative organization. Later,
    Daebang County continued to exist until the period of QiánYān, HòuYàn, and BukYàn. In the
    Northern Wei Dynasty, Daebang County was abolished and Daebang village was established.
    Daebang village which existed like that, disappeared from history in 556 during the Northern
    Period.
    The Korean Peninsula, where Daebang County was located, existed after the 4th century
    when the remaining forces formed their own forces and were absorbed by Koguryeo. Meanwhile, Daebang County was destroyed, but Daebang County-related government posts and noble title were used in Baekje until the 6th and 7th centuries. Daebang County was awarded during the Goryeo Dynasty, and there was a phenomenon of trying to link the history of Namwon to the old Daebanggun
    3. 2020.
    The background and purpose of the installation of Xuantu Commandery were
    reviewed again, and a specific location was suggested. I paid attention to the fact that
    Xuantu Commandery was installed one year later than the other three-Commandery.
    This was linked to the current economic policy of Han, the salt iron monopoly system.
    A large amount of firewood is required in order to smoothly carry out the salt iron
    monolith. In this process, the Han government established Xuantu Commandery
    for the background and purpose of smoothly securing and transporting firewood
    needed for salt and iron production. Therefore, a county fortress related to Xuantu
    Commandery was installed in the Yalu River basin with the Baekdusan Forest in the
    background. It was determined that county fortress related to the prefectural military
    would have been established in the area around the base of their power while
    coexisting with the original Koguryeo powers.
    I specifically presented the relics of county fortress related to Xuantu Commandery.
    It was found in the flat land formation built along the Yalu River. In the case of
    Yangmin's old castle, it was noted that the west wall, south wall, and north wall were
    made of earth walls. In addition, the Changbaek Samdoo Old Castle was presented,
    based on the Koguryeo Jeokseok tomb built in the fortress. I think there will be
    prefectural counties in the Yalu River basin. From this point of view, I think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the Yalu River Basi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1. 2018년도 추진 실적
    2018년도에 추진한 연구내용은 연구계획서에 제시한 바대로 충실하게 이행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연구를 종료하고 그 결과물은 2019년 12월 6일 경희대학교와 고구려발해학회가 추진한 논문발표회에서 발표하였다(발표 제목 : 고구려 시기 요서 지역으로 쫒겨간 낙랑군). 발표된 내용을 수정하여 연구 결과물을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인 『백산학보』제 115호(2019.12.30. 논문제목 : 요서지역으로 옮겨간 낙랑군의 추이)에 게재하였다.
    2. 2019년도 추진실적
    2019년도에 추진한 연구내용은 연구계획서에 제시한 바대로 충실하게 이행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연구를 종료하고 그 결과물은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인 『백산학보』제 119호(2020.8.30. 논문 제목 : 옮겨간 대방군과 남겨진 대방군)에 게재하였다.
    3. 2020년도 추진 실적
    2020년도에 추진한 연구내용은 당초 제시한 연구계획서(한반도에 남겨진 낙랑군의 잔존흔적에 대한 추이)와 차이가 있다. 이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현도군 문제가 중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여 2019년도 연구결과보고서 작성 시에 연구계획의 변경내용을 제시하여 보고한 바 있다.
    2020년도에 추진한 연구내용은 연구계획서에 제시한 바대로 충실하게 이행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연구를 종료하고 그 결과물은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인 『한국고대사연구』제 102호(2021.06.30. 논문 제목 : 현도군 위치 옥저지역설을 비판한다-『삼국지』사료 비판-)에 게재하였다.
    한편 『삼국지』기록의 문제점을 발표한 이후에 그 대안을 학계에 제시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어 후속 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목적은 옥저지역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는『삼국지』기록에 문제가 있다면 현도군이 실제로 존재했던 위치는 과연 어느 곳이냐 하는 문제였다. 후속 연구가 무리없이 진행되어 그 연구 결과를 연구재단 등재지인『고구려발해연구』제 70집(2021.07.30. 논문 제목 : 현도군 설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게재하였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낙랑군(제 1차년도) , 대방군(제 2차년도)을 비롯한 중국 군현이 한반
    도 지역에서 요령성 요서지역 그리고 하북성 지역까지 여러 차례 이주해가는 과정
    을 문헌자료, 고고학 자료 등을 추적하여 그 위치 관계 등을 규명하였다. 또한 3차
    년도 과제에서는 현도군의 위치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하였다. 현도군이 옥저지역
    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의 문제점을 도출해냈다. 아울러 현도군이 설치된 위치는 옥저
    지역이 아니라 압록강 유역이라는 것을 그 근거와 함께 제시하였다. 연구 결과는 기
    존 학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된 연구 결과에 해
    당한다.
    본 연구 결과가 공간된 이후, 그 내용은 국민의 역사교육과 역사의식 고취에 일정
    부분 기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정치.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된 상고사
    분야의 논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나아
    가 재야사학자를 비롯하여 국내외 학자들과 이 문제를 토론하는 장이 열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특히 한군현의 존재, 이동, 폐치 등과 관련하
    여 중국, 일본학자들을 토론의 장으로 불어 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사료된다.
    이는 장차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역사 왜곡,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응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본 연구 결과는 차후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자 하는 학문 후속세대를 지도할 수 있는 기초자료로서 기능하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역사학과 학생, 시민교육에도 환류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 색인어
  • 현도군, 옥저, 고구려, 불내성, 삼국지, 대방군, 요서, 북위, 전연, 후연, 북연, 남원시, 낙랑군, 전연, 후연, 북연, 낙랑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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