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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조선초 관복(冠服) 정비와 문화의 재정립
The Reconsideration of Cultural Order : The Reorganization of Official Uniform System in the Late Koryŏ Dynasty and the early Chsŏn Dynast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학문후속세대양성(박사후국내연수)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8-S1A5B5A01-2018S1A5B5A01029991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2 년 (2018년 07월 01일 ~ 2020년 06월 30일)
연구책임자 김윤정
연구수행기관 서울시립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고려 말~조선 초 복식(服飾) 문화의 변화와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고려 말~조선 초 관복제의 정비 양상을 ‘호풍(胡風)’,즉 원(몽골) 복식의 지양과 ‘화풍(華風)’, 즉 명 복식의 지향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여, 고려・조선이 화(華)와 이(夷)로 불리는 타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명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14세기는 한반도에서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중원에서는 원(몽골)에서 명으로의 왕조교체가 이루지며, 전근대 한중관계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 일차적으로 ‘자신’과 ‘타인’에 대한 구분을 전제로 형성된 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대외관계는 타자와의 접촉을 통하여 자신을 재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려는 원(몽골)과의 관계는 속에서 때로는 국체(國體)의 위협을 받으며 자기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그 어느 시기보다 치열하게 하였다. 이후 명이 그 자리를 대치하자, 고려・조선은 ‘보편문화’라는 명과 ‘동이(東夷)’로서의 자신의 문화 사이에서 긴장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 대외관계는 단순히 정치외교사적 문제를 넘어선 자기정체성의 확인과 성장의 측면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14세기 대외관계의 변화는 비단 정치외교사적 관점뿐만 아니라, 문화사적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3세기에 등장한 원(몽골)은 한 세기 가량 동아시아 사회에서 상국(上國)이자 중화(中華)로 받아들여졌으나, 새롭게 등장한 명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세움으로써 문화 종주국으로 위치를 재정리하는 작업들을 진행하였다. 고려말~조선초까지 한국 사회 역시 명의 문화를 수용하고 기존의 ‘호풍’을 금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슈였다. 따라서 고려말~조선초 대외관계의 변화는 기존과 같이 ‘화이관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뿐만, 고려・조선, 나아가 동아시아 사회의 새로운 문화지형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할 필요성이 있다.
    문화사적 관점에서 고려말~조선초의 대외관계를 조명함에 중요한 문화적 지표가 되는 것이 바로 관료들이 착용하는‘관복’이다. 고려말~조선초 관복문화의 변화에 관해서는 역사학 분야보다도 의류학의 복식사 분야에서 주목받은 주제였다. 다만 분과 학문의 특성상 시기별 형태의 특성에 주목하고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 등에 대해서는 면밀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각기 다른 관복들이 하나의 체제로 구축되는 과정에 대한 계기적 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 하에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세부적인 연구목표를 가진다.
    첫째, 고려말~조선초 복식 문화의 변화상에 대하여 밝힌다. ‘명 복식 영향’으로만 평가되는 14세기 복식문화의 변화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위해, 본 연구에서는 일차적으로 고려말~조선초에 관복제의 정비와 각종 복식 금령(禁令)에서 규정하고 있는 복식의 모습을 복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원(몽골) ․ 명 복식과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즉, 소위 ‘호풍’ 가운데 어떠한 양식들이 조선에까지 전승이 되었는지, ‘화제(華制)’ 가운데 수용된 것들은 어떤 것들이며 그 모습은 어떠했는지 등에 대하여 구체적인 파악을 한다.
    둘째, 복식 문화의 변화 이면에 존재하는 사회적 맥락을 분석한다. 고려말~조선초 관복제의 정비와 호복(胡服)의 금지는 고려 ․ 조선 내의 사회적 필요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과 동시에 원(몽골) ․ 명과의 외교관계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복식의 변화에는 고려 ․ 조선의 개혁과 사회 제도 정비의 과정과 함께 원(몽골) ․ 명과의 외교관계 역시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말~조선초 복식 문화의 변화를 시기별 외교관계의 쟁점과 더불어 이해하고, 아울러 조선초 문물 정비라는 큰 범주 속에서 이를 고찰한다.
    셋째, 문화적 변화 속에서 고려 ․ 조선인들이 타자와 자신의 문화를 규정하는 양상을 확인한다. 기존에 고려사회에 널리 확산되었던 원(몽골) 복식과 고려말부터 새롭게 수용한 명 복식은 모두 ‘외래문화’였다. 따라서 이러한 ‘외래문화’가 유입되고 수용되어 확산되는 과정은 고려 ․ 조선에게 ‘외래’와 ‘고유’의 재인식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기존에 ‘중화’로 여겼던 원(몽골)을 ‘오랑캐’로 규정해가는 과정에서, 명 복식의 수용이 ‘중화’와 ‘오랑캐’의 중요한 지표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늘 ‘동이’이자 ‘소중화’로 존재하며 ‘오랑캐’와 ‘중화’의 경계에 위치하는 고려 ․ 조선이 타자와 구분되는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분하는 양상을 밝혀보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수의 성공적인 수행을 통하여 다음의 4가지 측면에서 관련 연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첫째, 고려말 조선초 정치와 외교를 계기적으로 조명하는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기존의 고려 ․ 조선의 교체 및 원(몽골) ․ 명의 교체에 관한 연구들은 해당 시기들을 구분하거나 발전론적 시각에서 그 차이점을 부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본 연구에서는 관복이라는 새로운 소재에 주목하여 그것의 상징성을 궁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시기별로 관복의 외형에서 드러나는 차이점과 공통점이 확인될 것이고, 그것에 반영된 당시 정치와 외교, 문화 인식의 연속과 차이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둘째, 원형 민족주의(proto-nationalism)로서의 문화정체성의 형성의 과정을 밝히는 중요한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고려와 조선의 관복제의 변화 양상을 통해 타자인 원(몽골)과 명의 문화에 대한 인식을 분석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과정에서 타자와 구분되는 자신의 문화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는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기존의 대외관계사 연구들이 국가의 위상 혹은 대외정책, 화이관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면, 본 연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곧 자기 문화에 대한 재인식의 계를 마련했다는 점으로 시각을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정체성의 형성의 문제는 근대의 민족주의(nationalism)과는 구분되는 전근대 사회의 자기정체성의 일환으로써 원형 민족주의(proto-nationalism)에 해당하는 것으로, 현재까지도 동서양의 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민족주의(nationalism)의 기원과 양상에 하나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셋째, 문화를 통한 역사 읽기를 통하여 전근대 사회에 대한 문화사 연구의 시각과 방법 제시할 수 있다. 복식은 서양사 ․ 동양사 분야에서 정치 ․ 경제 ․ 외교 ․ 사상 등 다양한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중요한 역사 연구의 대상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부르주아 사회 특징을 귀족, 일서민과 구분되는 그들의 복식(의복 양식, 단추, 무늬, 모자 등)을 통해서 해석하거나, 프랑스 혁명 주도세력들이 복식을 통하여 자신들의 혁명적 지향을 상징하였다는 연구들은 오늘날 서양사 학계의 문화사 연구에서도 큰 귀감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전근대사 연구에서는 크게 활용되고 있지 못하고, 복식은 단지 일회성 소재 혹은 거대 담론을 설명하는 부분적 예시 정도로만 이용되고 있다. 본 연구는 관복이라는 소재를 집중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향후 한국사학계에서의 문화사 연구의 필요성을 환기하고, 이에 대한 시각과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넷째, 고려말 조선초 관복 관련 자료에 대한 종합적 정리를 통한 향후 활용을 도모할 수 있다. 오늘날 연구자들과 일반 대중들이 전근대 사회의 복식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않는 것에는 해당 자료들에 대한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복식사 학계에서는 대중서와 온라인 서비스 등을 통하여 복식 관련 사료들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을 높이고 있으나, 여전히 학계에서 사용되는 전문적인 용어들과 그것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고려말~조선초의 관복에 관한 문헌자료 및 시각자료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향후 연구자들이 연구와 교육에 활용이 용이하도록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관련하여 역사학 분야와 의류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와 분석을 바탕으로, 문헌사료를 비롯한 고고학적 출토물과 회화자료까지도 사료로 활용여 고려말~조선초 문화지형을 도출해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고려말~조선초에 이루어진 관복제의 변화와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재인식을 명제(明制)의 수용(1년차)과 몽골풍의 지양(2년차)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하고자 한다.
    1년차 연수에서는 고려말~조선초 관복제의 정비 과정을 명제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연구하고자 한다. 고려말 공민왕대 대명(對明) 외교가 개시되면서부터 고려가 명의 복식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이후 명과의 관계가 경색되자 명에 신료의 공복을 추가적으로 지속적으로 요청해줄 것을 요구하여 받아왔다. 이로써 기존에 고려 관인 사회에 널리 착용되고 있던 원(몽골) 복식은 명 복식으로 교체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새로운 외교관계의 구축 외에도 새로운 문화 종주국으로 명을 인정하고 고려의 문화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관복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명제가 중요한 원형(原型)이 된 것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대인 백관의 공복제와 제복제 제정시에서는 한결같이 명제에 의거하고 있음을 명시하였다. 태종대부터는 명에 왕과 왕세자의 관복을 직접 요청하여 받가 하면, 국가 예제 전반의 정비 속에 관복색(冠服色)을 설치하여 기존에 제정된 관복들을 명제와 비교하며 재정비하였다. 이러한 관복제는 세종대를 기점으로 정리되어 갔으며, 문종~단종대를 거쳐 성종대에 이르러 완성된 체계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고려말~조선초 관복제 정립의 과정은 새로운 중화 문물인 명의 관복 문화를 수용하는 동시에 기존의 관복제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관복제를 창출하는 과정이었다. 고려말과 조선초의 관복제를 당대 명의 관복제와 비교해 보면, 고려말~조선초 일련의 관복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고려 ․ 조선은 그 준거의 틀을 명이라고 명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것의 운영 양상은 명의 그것과 동일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관복제의 구체적인 양상과 정립 과정의 논의들은 당대 동아시아 사회의 보편문화로 받아들여지던 중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와 나아가 고려 ․ 조선의 자기 문화정체성의 규정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2년차 연수에서는 고려말~조선초 관복제의 정비 과정을 ‘호풍(胡風)’으로 대변되는 몽골풍의 지양이라는 측면에서 연구하고자 한다. 고려말 입성론(立省論), 국왕의 유배 등 원(몽골)의 권위가 고려의 국체 자체를 위협하고 양국관계에 균열이 발생하자, 고려는 그간 널리 확산되었던 원(몽골) 복식을 착용하는 것 역시 재고(再考)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공민왕대 대명외교가 시작되어 명의 문화를 수용함에 따라, 원(몽골)의 문화는 지양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우왕대 일시적으로 호풍이 다시 장려되기도 하였으나, 특히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속 우왕과 친원(親元)세력들이 호복과 호악(胡樂)을 즐기는 것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러 지난 한 세기간 중화 문물이었던 원(몽골)의 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초 호풍 청산의 명 건국 이후 문화의 기준이 변화한 것과 연동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명의 복식문화가 확산됨에도 과거 100여 년 간 생활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으며 널리 확산되었던 호복을 일시에 소거하는 것을 불가능하였다. 조선 중종대까지도 호복 착용이 논란이 지속되었고, 명 역시도 한동안 과거 원(몽골) 복식의 유재(遺財)들이 존재하였다. 이는 명초 ‘구축호로(驅逐胡虜), 회복중화(恢復中華)’라는 기치 하에 동아시아의 문화 종주국으로써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문화 정리 사업’ 과정에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고려말 조선초에 복식문화에서 호풍을 청산의 논의는 복식을 통해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해가고 있는 문화적 구분짓기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조선에서 금지하고 정리하고자 하였던 호복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선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널리 착용된 흑립과 조선 관복 가운데 융복(戎服)의 철릭은 원(몽골)의 복식 가운데 일부가 변용된 것이다. 이렇듯 호복에 대한 부정적 논의가 진행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호복이 ‘국속’의 일부로 자리잡았다는 점은 ‘호복’이라는 것이 조선초 명과 조선의 정통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과거 ‘중화 문물’인 원(몽골)의 문화를 ‘오랑캐의 잔재’로 인식에서의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고려 말~조선 초 복식(服飾) 문화의 변화와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고려 말~조선 초 관복제의 변화가 소위 ‘호풍(胡風)’이라 불리는 원(몽골) 복식의 지양과 ‘화풍(華風)’이라 불리는 명 복식의 지향의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고려・조선이 화(華)와 이(夷)로 불리는 타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명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고려말(공민왕~우왕대)의 관복제 변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공민왕대 처음 명과의 외교관계가 시작되었으나, 이후 원(元)과의 관계, 요동(遼東) 문제 등을 둘러싸고 경색되었고, 명과의 이러한 관계는 우왕 즉위 이후까지 지속되었다가 1385년에 가서야 전환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명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경주하던 상황에서 고려와 명 사이에 지속적으로 화두가 된 것 가운데 관복이었다. 고려는 사신 살해 사건, 고려의 요동 정탐 의혹 등 양국 사이에 민감한 외교 사안이 발생한 시기마다 총 3차례에 걸쳐 명에 관복을 요구하였다.
    고려말에 관복을 요청하고 받은 것은 과거 고대 이래의 조공책봉과정에서 관복을 하사하는 전통의 맥락에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반도 국가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중국의 일방적인 것이었던 반면에, 고려말에는 고려측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더욱이 고려에서 일반적으로 받던 관복 이외에 추가적인 관복들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고려에서는 이에 입각하여 국왕과 신료의 관복 전반을 명의 관복제에 입각하여 새롭게 정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의례 행위는 당시 명이라는 문화의 중심이 생김에 따라 그에 따른 새로운 문화적 표본을 참조하여 고려의 관복제를 새롭게 정비하고자 한 시도였다.
    두 번째로, 조선 건국 이후의 관복제 정비 과정을, 특히 특히 여러 종류의 관복 가운데 면복(冕服)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 태조는 상국(上國)인 명에 의거하여 제복의 등급을 정하는 제도 정비를 하였으나, 당시 실제 정비된 내용은 신료들에게는 면복을 착용하지 않도록 하는 명의 제복제와는 무관한 ‘조선식 면복’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면복은 태종대 두 차례에 걸친 면복의 요청과 사여 과정에서 개편이 된다. 정통성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건문제에게 면복을 요청하여 받았고, 이후 ‘정난의 변’으로 영락제가 등극하자 건문제의 고명과 인장을 반납하여 새로운 면복을 요청하여 받게 된다. 태종의 면복 사여는 태종의 중요한 치적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며, 이때 이후로 국왕의 면복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받을 때에 인장과 더불어 받는 상징적인 물품이 되었다.
    한편 태종~세종대를 거치며 태조대까지 모든 품관의 제복으로 착용하던 면복은 국왕과 세자의 전유물로 자리잡게 됨으로써, 면복은 군주의 지위를 상징하는 관복이 되었다. 즉, 조선초 명에 관복을 요청하여 반영하는 것이 대외적으로는 명과의 우호적이고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구축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왕실과 백관을 구분하는 위계 질서의 확립에 일조하였다.
    마지막으로 고려말~조선초에 ‘호풍’이 정리되어 가는 과정과 그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호(胡)’로 명명되는 문화들로, 복식을 지칭하는 ‘호복’뿐만 아니라, 음악을 지칭하는 ‘호악(胡樂)’, 언어를 지칭하는 ‘호어(胡語)’, 그리고 그들의 문화 전반을 지칭하는 ‘호풍(胡風)’・‘호속(胡俗)’ 등이 있음을 주목하여 집중적으로 검토한 결과, 호복에 대한 인식 변화되고 생성된 개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복은 ‘오랑캐의 복식’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만큼, 이는 오랑캐와는 구분되는 비(非)오랑캐, 즉 중화라는 것이 전제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조선)과 중국(명)에서 자문화 중심의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호복의 문제가 연동되는 것이다. 이에 조선초(태종~세종)과 명초(영락~선덕)에 이루어진 예제 정비 과정에서 소위 ‘오랑캐스러움’이라는 것이 어떻게 규정되었다.
    한편, 호복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금지 조치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조선, 명 사회 내에서 과거 몽골복식 가운데 일부 요소들이 지속적으로 착용되고 있고 이에 관해서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즉, ‘오랑캐스러움’은 당대인의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하여 선택적으로 판별되고 있었고, 이러한 취사선택의 과정이 이루어졌기에 발생한 결과였다.
    고려말~조선초에 걸친 관복의 정비 과정은 동북아시아에서 ‘오랑캐’와 ‘비오랑캐’를 구분하는 문화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명=한족=중화, 원=몽골족=오랑캐라는 당위적 인식은, 원명교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 그 인식이 만들어졌다. 동북아의 정세변화는 조선과 명의 양자 필요성에 의하여 ‘오랑캐 문화’에 대한 생각을 동의해가게 되었다. 조선초에 명-조선-오랑캐라는 문화의 층위에 따른 지형이 만들어져 갔고, 이 배경에는 조선초/명초에 문화 정리작업을 통하여 정립된 화이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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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고려 말~조선 초 관복제의 변화 과정을 통하여 ‘胡風’과 ‘華風’ 규정되어 가는 것을 고찰함으로써 문화 정체성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먼저 고려말의 관복제 변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공민왕대 처음 명과의 외교관계가 시작되었으나, 곧이어 경색되었는데, 이 시기 명과의 관계 회복을 논하는 과정에서 관복이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사신 살해 사건, 고려의 요동 정탐 의혹 등 양국 사이에 민감한 외교 사안이 발생한 시기에, 고려는 총 3차례에 걸쳐 명에 관복을 요구하다. 이를 통하여 고려는 관복제를 개편을 단행하였다. 공민왕~우왕대 명에 지속적으로 관복을 요청한 결과, 사여의 과정을 통해, 고려에서는 이에 입각하여 국왕부터 백관에 이르기까지 제복뿐만 아니라 공복까지 관복 전반에 관한 일련의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고려말에 관복을 요청하고 받은 것은 과거 고대 이래의 조공책봉과정에서 관복을 하사하는 전통의 맥락에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반도 국가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중국의 일방적인 것이었던 반면에, 이 시기는 고려측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더욱이 고려에서 일반적으로 받던 제복 이외에 조복, 공복 등을 요구하여 받았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일련의 의례 행위는 당시 명이라는 문화의 중심이 생김에 따라 그에 따른 새로운 문화적 표본을 참조하여 고려의 관복제를 새롭게 정비하고자 한 시도였다.
    다음으로 조선 건국 이후의 관복제 정비 과정을, 특히 여러 종류의 관복 가운데 면복(冕服)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건국 이후 집권체제 구축 과정에서 관료질서를 정비하는 차원에서 관복제 정비의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 태조는 제복제를 정비하여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그런데 당시 상국인 명에 의거하여 제복의 등급을 정하는 제도 정비를 하였으나, 실제 명에서는 백관들은 면복을 착용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에서는 신료들에게는 면복을 착용하도록 규정하는 등 명의 제도와는 무관하게 운영하였다. 조정에서는 관복의 표본을 제공하고 있는 명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조선식 관복’ 제정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졌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복은 태종대 두 차례에 걸친 면복의 요청과 사여 과정에서 개편이 된다. ‘왕자의 난’을 거친 태종과 ‘정난의 변’으로 등극한 영락제는 모두 정통성의 문제를 면복의 요청과 하사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태종의 면복 사여는 태종의 중요한 치적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며, 이때 이후로 국왕의 면복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받을 때에 인장과 더불어 받는 상징적인 물품이 되었다. 즉, 조선초 명에 관복을 요청하여 반영하는 것이 대외적으로는 명과의 우호적이고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구축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왕실과 백관을 구분하는 위계 질서의 확립에 일조하였다.
    마지막으로 고려말~조선초에 ‘호풍’이 정리되어 가는 과정과 그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胡’로 명명되는 문화들로, 복식을 지칭하는 ‘호복’뿐만 아니라, 음악을 지칭하는 ‘胡樂’, 언어를 지칭하는 ‘胡語’, 그리고 그들의 문화 전반을 지칭하는 ‘胡風’・‘胡俗’ 등이 있음을 주목하여 집중적으로 검토한 결과, 호복에 대한 인식 변화되고 생성된 개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복은 ‘오랑캐의 복식’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만큼, 이는 오랑캐와는 구분되는 非오랑캐, 즉 중화라는 것이 전제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조선)과 중국(명)에서 자문화 중심의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호복의 문제가 연동되는 것이다. 이에 조선초와 명초에 이루어진 예제 정비 과정에서 소위 ‘오랑캐스러움’이라는 것이 어떻게 규정되었다.
    한편, 호복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금지 조치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조선, 명 사회 내에서 과거 몽골복식 가운데 일부 요소들이 지속적으로 착용되고 있고 이에 관해서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즉, ‘오랑캐스러움’은 당대인의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하여 선택적으로 판별되고 있었고, 이러한 취사선택의 과정이 이루어졌기에 발생한 결과였다.
    고려말~조선초에 걸친 관복의 정비 과정은 동북아시아에서 ‘오랑캐’와 ‘비오랑캐’를 구분하는 문화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떤 명=한족=중화, 원=몽골족=오랑캐라는 당위적 인식은, 원명교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 그 인식이 만들어졌다. 동북아의 정세변화는 조선과 명의 양자 필요성에 의하여 ‘오랑캐 문화’에 대한 생각을 동의해가게 되었다. 조선초에 명-조선-오랑캐라는 문화의 층위에 따른 지형이 만들어져 갔고, 이 배경에는 조선초/명초에 문화 정리작업을 통하여 정립된 화이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를 통하여 수행된 결과는 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첫째, 고려말 조선초 정치와 외교의 연속과 차이의 시각을 제공한다. 기존의 고려 ․ 조선의 교체 및 원(몽골) ․ 명의 교체에 관한 연구들은 해당 시기들을 구분하거나 발전론적 시각에서 그 차이점을 부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래에 원-명의 연속성 혹은 고려-조선의 연속성을 주목하는 연구 시각들이 제시되고 있는 가운데 본 연구에서는 관복이라는 새로운 소재에 주목하여 그것의 상징성을 궁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시기별로 관복의 외형에서 드러나는 차이점과 공통점이 확인될 것이고, 그것에 반영된 당시 정치와 외교, 문화 인식의 연속과 차이를 밝히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둘째, 문화를 통한 역사 읽기로써 문화사 연구의 시각과 방법 제시한다. 복식은 서양사 ․ 동양사 분야에서 정치 ․ 경제 ․ 외교 ․ 사상 등 다양한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중요한 역사 연구의 대상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부르주아 사회 특징을 귀족, 일서민과 구분되는 그들의 복식(의복 양식, 단추, 무늬, 모자 등)을 통해서 해석하거나, 프랑스 혁명 주도세력들이 복식을 통하여 자신들의 혁명적 지향을 상징하였다는 연구들은 오늘날 서양사 학계의 문화사 연구에서도 큰 귀감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전근대사 연구에서는 크게 활용되고 있지 못하고, 복식은 단지 일회성 소재 혹은 거대 담론을 설명하기 위한 부분적 예시 정도로만 이용되고 있다. 본 연구는 관복이라는 소재를 집중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향후 한국사학계에서의 문화사 연구의 필요성을 환기하고, 이에 대한 시각과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본 연구를 토대로 향후 연구의 시기와 소재를 보다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할 계획이다. 복식은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물질문화에 포함되는 것으로 물질문화의 생산과 활용, 소비, 이후의 재생산 등의 과정에 대한 보다 폭넓은 연구를 위하여 다양한 연구 주제의 모색이 필요하다. 이는 미술사 분야와의 연계 가능성이 충분히 가능한 주제인 만큼, 새로운 문화 연구의 트렌드를 양성함으로써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과의 학문적 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 분야이다.
    셋째, 고려말 조선초 관복 관련 자료에 대한 종합적 정리를 통한 복식자료의 활용을 기대한다. 오늘날 연구자들과 일반 대중들이 전근대 사회의 복식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않는 것에는 해당 자료들에 대한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복식사 학계에서는 대중서와 온라인 서비스 등을 통하여 복식 관련 사료들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을 높이고 있으나, 여전히 학계에서 사용되는 전문적인 용어들과 그것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고려말~조선초의 관복에 관한 문헌자료 및 시각자료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역사학 분야의 연구와 접목시킴으로써, 향후 연구자들이 연구와 교육에 용이하게 활용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오늘날 복식사의 활용 분야는 실로 넓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일반 대중들의 수요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많은 컨텐츠들이 제공되고 있으며, 이때에 복식은 반드시 포함되고 있다. 이에 따라 복식의 고증에 대한 필요성이 높게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하여 수행된 다양한 자료의 수집과 검토, 이것의 분석은 향후 학계(역사학, 복식사)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활용에 일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원형 민족주의(proto-nationalism)로서의 문화정체성의 형성의 이해를 도모한다. 본 연구는 고려와 조선의 관복제의 변화 양상을 통해 타자인 원(몽골)과 명의 문화에 대한 인식을 분석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과정에서 타자와 구분되는 자신의 문화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는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기존의 대외관계사 연구들이 국가의 위상 혹은 대외정책, 화이관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면, 본 연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곧 자기 문화에 대한 재인식의 계를 마련했다는 점으로 시각을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정체성의 형성의 문제는 근대의 민족주의(nationalism)과는 구분되는 전근대 사회의 자기정체성의 일환으로써 원형 민족주의(proto-nationalism)에 해당하는 것으로, 현재까지도 동서양의 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민족주의(nationalism)의 기원과 양상에 하나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색인어
  • 고려, 조선, 원(몽골), 명, 관복(冠服), 명제(明制), 호복(胡服), 화[華, 중화], 이[夷. 오랑캐], 문화정체성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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