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고려 말~조선 초 복식(服飾) 문화의 변화와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고려 말~조선 초 관복제의 변화가 소위 ‘호풍(胡風)’이라 불리는 원(몽골) 복식의 지양과 ‘화풍(華風)’이라 불리는 명 복식의 지향의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
본 연구는 고려 말~조선 초 복식(服飾) 문화의 변화와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고려 말~조선 초 관복제의 변화가 소위 ‘호풍(胡風)’이라 불리는 원(몽골) 복식의 지양과 ‘화풍(華風)’이라 불리는 명 복식의 지향의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고려・조선이 화(華)와 이(夷)로 불리는 타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명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고려말(공민왕~우왕대)의 관복제 변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공민왕대 처음 명과의 외교관계가 시작되었으나, 이후 원(元)과의 관계, 요동(遼東) 문제 등을 둘러싸고 경색되었고, 명과의 이러한 관계는 우왕 즉위 이후까지 지속되었다가 1385년에 가서야 전환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명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경주하던 상황에서 고려와 명 사이에 지속적으로 화두가 된 것 가운데 관복이었다. 고려는 사신 살해 사건, 고려의 요동 정탐 의혹 등 양국 사이에 민감한 외교 사안이 발생한 시기마다 총 3차례에 걸쳐 명에 관복을 요구하였다.
고려말에 관복을 요청하고 받은 것은 과거 고대 이래의 조공책봉과정에서 관복을 하사하는 전통의 맥락에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반도 국가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중국의 일방적인 것이었던 반면에, 고려말에는 고려측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더욱이 고려에서 일반적으로 받던 관복 이외에 추가적인 관복들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고려에서는 이에 입각하여 국왕과 신료의 관복 전반을 명의 관복제에 입각하여 새롭게 정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의례 행위는 당시 명이라는 문화의 중심이 생김에 따라 그에 따른 새로운 문화적 표본을 참조하여 고려의 관복제를 새롭게 정비하고자 한 시도였다.
두 번째로, 조선 건국 이후의 관복제 정비 과정을, 특히 특히 여러 종류의 관복 가운데 면복(冕服)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 태조는 상국(上國)인 명에 의거하여 제복의 등급을 정하는 제도 정비를 하였으나, 당시 실제 정비된 내용은 신료들에게는 면복을 착용하지 않도록 하는 명의 제복제와는 무관한 ‘조선식 면복’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면복은 태종대 두 차례에 걸친 면복의 요청과 사여 과정에서 개편이 된다. 정통성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건문제에게 면복을 요청하여 받았고, 이후 ‘정난의 변’으로 영락제가 등극하자 건문제의 고명과 인장을 반납하여 새로운 면복을 요청하여 받게 된다. 태종의 면복 사여는 태종의 중요한 치적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며, 이때 이후로 국왕의 면복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받을 때에 인장과 더불어 받는 상징적인 물품이 되었다.
한편 태종~세종대를 거치며 태조대까지 모든 품관의 제복으로 착용하던 면복은 국왕과 세자의 전유물로 자리잡게 됨으로써, 면복은 군주의 지위를 상징하는 관복이 되었다. 즉, 조선초 명에 관복을 요청하여 반영하는 것이 대외적으로는 명과의 우호적이고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구축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왕실과 백관을 구분하는 위계 질서의 확립에 일조하였다.
마지막으로 고려말~조선초에 ‘호풍’이 정리되어 가는 과정과 그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호(胡)’로 명명되는 문화들로, 복식을 지칭하는 ‘호복’뿐만 아니라, 음악을 지칭하는 ‘호악(胡樂)’, 언어를 지칭하는 ‘호어(胡語)’, 그리고 그들의 문화 전반을 지칭하는 ‘호풍(胡風)’・‘호속(胡俗)’ 등이 있음을 주목하여 집중적으로 검토한 결과, 호복에 대한 인식 변화되고 생성된 개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복은 ‘오랑캐의 복식’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만큼, 이는 오랑캐와는 구분되는 비(非)오랑캐, 즉 중화라는 것이 전제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조선)과 중국(명)에서 자문화 중심의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호복의 문제가 연동되는 것이다. 이에 조선초(태종~세종)과 명초(영락~선덕)에 이루어진 예제 정비 과정에서 소위 ‘오랑캐스러움’이라는 것이 어떻게 규정되었다.
한편, 호복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금지 조치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조선, 명 사회 내에서 과거 몽골복식 가운데 일부 요소들이 지속적으로 착용되고 있고 이에 관해서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즉, ‘오랑캐스러움’은 당대인의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하여 선택적으로 판별되고 있었고, 이러한 취사선택의 과정이 이루어졌기에 발생한 결과였다.
고려말~조선초에 걸친 관복의 정비 과정은 동북아시아에서 ‘오랑캐’와 ‘비오랑캐’를 구분하는 문화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명=한족=중화, 원=몽골족=오랑캐라는 당위적 인식은, 원명교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 그 인식이 만들어졌다. 동북아의 정세변화는 조선과 명의 양자 필요성에 의하여 ‘오랑캐 문화’에 대한 생각을 동의해가게 되었다. 조선초에 명-조선-오랑캐라는 문화의 층위에 따른 지형이 만들어져 갔고, 이 배경에는 조선초/명초에 문화 정리작업을 통하여 정립된 화이론이 자리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