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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5년(1356) 여몽 접경지대 분쟁에 대한 고찰
A Study of disputes in Goryeo-Mongol border area at fifth year of King Kongmin regined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8S1A5B5A07073685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1 년 (2018년 09월 01일 ~ 2019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오기승
연구수행기관 중앙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공민왕 5년(1356)의 여몽 접경지대 분쟁과 관련한 중요한 사건으로는 8참 공격, 쌍성총관부 지역 탈환, 고려 내 기씨 세력 숙청이라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는 대부분 각각의 사건을 분절적으로 파악하였기에, 세 사건을 하나의 연동된 흐름으로 파악하고 그 관계성을 분석하는 연구가 미진하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분석틀을 제시하기 위하여 공민왕 5년의 여몽 접경지대 분쟁과 관련하여 상기의 세 사건이 분명한 연계성을 가지고 진행된 일련의 사건이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조명하려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각 사건의 전개 과정 고찰이 미진했던 부분을 구체적으로 보완할 것이다.
    나아가 당시 쌍성총관부의 정치적 위치 및 기씨 세력이 요동과 한반도에 동시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도 착목하여 요동과 한반도를 포괄하는 좀 더 넓은 공간적 배경에서 공민왕 5년에 진행되었던 분쟁 및 이와 연관된 일련의 사건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를 규명하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를 통하여 공민왕 5년의 정치행위 및 작전활동 전체에 대하여 연계성을 가지고 포괄하는 새로운 분석틀을 제시함으로써, 이 해의 접경지역 분쟁에 대한 기존의 분절적인 사건 인식 및 분석에서 탈피할 수 있다.
    또한 본 연구에서 분석할 세 가지 주요 사건, 즉 8참 공격과 쌍성총관부 지역 탈환 및 기씨 세력 숙청과 관련된 사실관계를 한층 더 구체화시킬 수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고려 본국 내부의 흐름에만 천착하지 않고 요동 지역 및 몽골제국과 관련된 사항을 규명하여 사건 분석의 시야를 넓히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학습자들에 대해서도 고려사의 해당 시기에 대하여 이전보다 진일보한,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본다.
    또한 공민왕 5년 이후 고려의 국제관계와 관련된 사건들이 본 연구의 대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만큼, 본 연구의 결과물은 고려 말기와 조선 건국기의 국제관계 및 요동 등지의 접경문제와 관련된 후속연구와도 유효한 연계를 기대할 수 있다.
  • 연구요약
  • 공민왕 5년의 여몽 접경지대 분쟁과 관련하여 일어났던 세 가지 주요 사건(8참 공격, 쌍성총관부 지역 탈환, 기씨 세력 숙청)의 연계성을 논리적으로 조명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규명하는 것이 본 연구의 중심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각각의 사건이 가지는 디테일을 명확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8참 공격과 관련해서는, 여타 두 사건에 비하여 사건의 진행 자체에 대한 규명이 매우 미진한 상태이므로 사건과 관련된 사료 및 당대 군사편제와 공격대상인 8참을 포함한 요동-한반도 지역의 역참에 대한 선행연구 및 사료를 분석하여 본 군사원정의 윤곽을 좀 더 디테일하게 규명할 것이다.
    다음으로 쌍성총관부 지역 탈환과 관련해서는, 본 사건의 발생 배경과 공민왕의 공격 의도에 대한 규명에 중점을 둘 것이다. 이를 위해 고려 본국과 쌍성총관부의 관계가 시기에 따라 어떤 식으로 변하여 갔는가, 그리고 쌍성총관부가 여몽관계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으며 몽골제국의 요동 통제와 관련하여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선행연구와 사료를 통해 분석할 것이다.
    기씨 세력 숙청과 관련해서는 그 중심인물인 기철 등이 고려의 권신이었다는 측면에 중점을 둔 기존의 선행연구를 기반으로, 몽골제국 황실의 근각이자 고려국왕의 신하로서 양면적 정체성을 가지는 기철을 중심으로 양국을 넘나들며 요동과 고려에서 동시에 세력을 보유하던 기씨 세력의 복합적 위상을 조명할 것이다.
    이러한 개개 사건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먼저 세 사건의 전개와 관련된 면밀한 타임테이블을 복원하여 요동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사건의 시계열적 흐름을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원명교체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분석함으로써, 공민왕 5년의 접경지대 분쟁과 관련된 세 사건의 밀접한 연계성에 대한 타당한 논리와 역사적 의의에 대한 진전된 설명을 도출해 내려 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공민왕 5년(1356) 여몽 접경지대에서 일어났던 분쟁은 근본적으로 고려라는 정치체와 그 영민에 대한 통제 우선권의 향방과 관련되어 있다.
    이에 있어 소위 ‘원간섭기’라 불리는 시기의 대부분은 고려국왕이 가장 우선적인 권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원 제국 질서 내에서 고려국왕에게 부여된 중층적인 지위에 근거한다. 원 제국, 즉 카안 울루스의 질서 안에서 고려국왕은 황실의 부마로서 투하령의 주인인 한편 정동행성승상을 세습하면서 고려 내의 행성체계에서 명목상 최상위를 차지하며, 고려라는 외국의 국왕으로서 독립적 권위를 가진다. 이는 고려가 원 제국의 내부에 속하면서도 제국 직할령의 외부에 속하기도 하는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이러한 중층적 지위가 완성되는 충렬왕대 이후 고려국왕은 征東行中書省左丞相 駙馬高麗國王으로서 울루스 내의 혈연관계 및 제국의 질서와 제도라는 중층적 방면에서 고려 본국의 영역과 민호를 통할하는 최고위자의 위치를 보장받아왔다.
    다만 이러한 위치의 한계는 고려국왕의 국내에서 가지는 권위가 자체적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원 제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 질서에 근거해 있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권위상의 우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자체의 견고성이나 지속성이 다소 희박하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점이 현실화된 것은 고려 말 기씨 가문의 등장으로 인해서였다. 기씨 가문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는 배경이 된 인물은 기황후이다. 원 제국 황제의 황후로서 황실 내 배분에서 부마인 고려국왕에 비해 우위에 있는 기황후의 등장으로 인해 황실과의 친연성에서 고려 왕실이 상대적 열위에 처하는 구도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구도에서 기씨 일족은 고려 내에서는 고려국왕의 신하일지라도 제국 질서 내에서는 고려국왕을 앞서게 될 경우가 있으며, 이는 고려의 영토와 영민에 대한 고려국왕의 우선권에 큰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그 중심인물이 되는 기철은 공민왕의 즉위 이전부터 고려 내외에 아울러 세력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일단 고려 내부에서는 충혜왕 폐위 이후 및 충목왕 사후 정동행성의 수뇌역을 대행하면서 공민왕의 즉위 전부터 정동행성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고려 내에서도 정승과 부원군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한편 고려와 인접한 요동 지역에서는 요양행성의 평장정사 직위에 본인과 아들인 기사인테무르가 임명되었던 바 있다. 원 제국의 행성체계에서 평장정사는 행성승상이 있는 경우 차석, 없는 경우는 수석을 차지하는 고위직으로서 해당 행성의 민정권만이 아니라 군사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한편 고려의 옛 영토에 설치된 쌍성총관부 또한 요양행성을 구성하는 개원로 아래에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기씨 일가가 평장정사를 역임하는 동안 그 영향권 아래 들어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공민왕이 고려에서의 독점적 통할권을 안정적으로 장악하려면 원 제국 내의 질서에서 자신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기씨 가문을 배제하여야만 했다. 또한 이들이 고려 내외에서 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만큼, 이들을 안정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인사명령이 아니라 기습을 통한 정변이라는 수단을 사용해야 했다.
    공민왕 5년의 군사행동은 여몽전쟁 종결 이래 근 100년만의 무력충돌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인 행위였다. 이러한 행위는 강한 정치적 부담을 수반하는 것이며, 이 군사행동이 고려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공민왕이 이러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무력충돌을 감행한 목적은, 결국 고려의 영토와 영민에 대한 독점적 통제권을 고려국왕의 명의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즉 기씨 세력을 제거한 정변과 같은 맥락에 있는 정치행위였던 것이다. 그해 5월, 공민왕은 서쪽으로 동8참 방면, 동쪽으로 쌍성총관부 방면에 같은 날 공격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두 군사작전은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연계된 군사행동이었다.
    둘 중 먼저 수행된 8참 공격작전은 쌍성총관부 지역 확보를 위한 전초전에 가까운 것으로, 영토나 영민의 확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작전은 고려와 원 제국을 잇는 최단거리 역참로의 요지를 파괴하여 연락과 교통을 단절시키고 원 제국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통해 공민왕 5년 5월의 정변이 원 제국에 전해지는 것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쌍성총관부를 향한 군사행동을 은폐하려는 것이었다. 8참 공격부대는 6월 초순 파사부를 비롯한 3개 참을 파괴하면서 목적을 달성하였다. 실제로 원은 이미 죽은 기철을 태사도로 임명하는 사신이 6월 중순 고려군에 습격받은 뒤에야 행동에 나섰으며, 그 시점에서도 정확한 정보는 입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7월 초순에는 동쪽으로 파견된 유인우 휘하의 고려군이 현지 세력가들과 협조하여 쌍성총관부를 탈환하였다.
    원은 7월 중순 역참 파괴행위를 힐문하는 조서를 보냈다. 공민왕은 이에 사죄하는 태도를 취하는 한편으로, 기철이 반란을 기도하여 제거하였다는 공민왕 측의 입장을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원이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고려 내 기씨 세력을 제거했던 공민왕 5년 5월의 정변은 원의 추인을 받은 정당한 반란 진압 행위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공민왕은 이를 근거로 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의 영유를 인정해 줄 것을 새로이 요구하였다. 이 지역이 고려의 고토라는 명분과 함께, 쌍성총관부 세력이 기철의 일파이므로 기철 일파 제거가 정당화된 이상 쌍성총관부 공격 또한 정당하다는 논리를 동원했던 것이다. 이는 공민왕 5년 10월의 표문으로 먼저 요청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도당에서 행성체계를 경유하여 다시 요청하였다. 이때는 기존의 논리에 더하여 쌍성 지역의 금 납입을 이전과 같이 보장하겠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이후 고려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민호를 포집하고 만호부를 설치했던 것으로 보아 결국 원 제국은 고려의 쌍성총관부 지역 영유를 추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 원 제국에서 쌍성총관부 영유를 인정받으면서, 공민왕의 고려 내 기씨 세력 제거에서 시작된 공민왕 5년(1356)의 정치행위 및 군사행위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원 제국에 남아있는 기씨 세력은 건재하였으며, 이들은 이후로도 공민왕 말기까지 공민왕 정권과 정치적, 군사적으로 충돌을 이어나갔다.
  • 영문
  • Disputes arising from the Goryeo-Mongol border area at fifth year of King Kongmin’s reign are fundamentally related to the ownership of control over Goryeo's political body and its people.
    And for most of the so-called ‘Yuan intercession period’, the king of Goryeo had the first priority. This is based on the multi-layered status granted to the King of Goryeo within the imperial order. In this order(=qa’an ulus), King of Goryeo, the royal deputy of the royal estate, is the master of the territory, and in nominal top rank in the haengseong(行省) system in Goryeo, and has independent authority as the king of Goryeo. This means that Goryeo has a complex nature, which belongs to the interior of the Yuan empire but also to the exterior of the empire.
    As a result, after the era of the King Chungryul, when this multi-layerd status was completed, the King of Goryeo was guaranteed the position of the highest official through the territory of Goryeo and its people by the ulus system and the imperial order both.
    The limitation of this position, however, was that the authority of King of Goryeo was not based on itself, but based on the imperial order centered on the Yuan empire. Since such superior authority was relative only, there was a fundamental problem that its robustness and persistence were rather thin.
    This problem was realized due to the emergence of Ki clan in the late Goryeo. The figure that became the background of the Ki clan’s rise in earnest is The Empress Ki. She was a spouse of the emperor of Yuan who had an advantage over the king of Goryeo in royal order of Yuan empire. This resulted in the composition of the Goryeo royal family in relative inferiority to the Ki clan in affinity with the imperial family. In this scheme, even though the Ki clan are subordinates of the king of Goryeo within Goryeo, their status may overtake the king of Goryeo in the Imperial order. This situation was a serious threat to the king of Goryeo's priority over the territory and people of Goryeo.
    The main character, Ki Chul was a persone who had powers both in and out of Goryeo before the appointment of King Kongmin. In Goryeo, he acted as the chief executive of JeongdongHaengseong(征東行省) after the dethronement of King Chung Hye and the death of King Chung Mok. In addition, He obtained position that a minister of Goryeo and the noble title of Buwongun(府院君). Meanwhile, in the Liaodong region adjacent to Goryeo, he and his son had appointed the position of the Pyungjangjungsa(平章政事) in the LiaoyangHaengseong(遼陽行省). In the Haengseong system of the Yuan empire, Haengseongseungsang(行省丞相) is the chief of the this system. And Pyungjangjungsa is the vice chief. But if Haengseongseungsang is not exist, Pyungjangjungsa became the chief of the system. It was a powerful position not only to rule over the people of the region, but also to exercise military power in that region.
    On the other hand, the SsangsungChongguanbu(雙城摠管府), which was installed on the territory of Goryeo, was also organized under LiaoyangHaengseong, so it was under the influence of the person of Ki clan who appointed Pyungjangjungsa.
    Therefore, in order for the King Kongmin to dominate the monopolistic sovereignty in Goryeo, he had to exclude Ki clan, who could stand above himself in the order within the Yuan empire. In addition, since they were building strong power inside and outside Goryeo, to remove them stably, they had to use the means of political upheaval by means of surprise attack rather than official personnel orders.
    The military action at the fifth year of King Kongmin(1356) reign was unusual. Because it was a new armed conflict nearly 100 years after the war between Goryeo and Mongol empire(=Yuan empire) ended. This is accompanied by a strong political burden. This is even more so since this military action began with the preemptive strike of Goryeo. The purpose of the King Kongmin, who took such political burdens and carried out armed conflict, was to secure, in the name of the king of Goryeo, the exclusive control of the territory and people of Goryeo. In other words, it was a political act carried out in the same context as Ki clan removed.
    In May 1356, King Kongmin ordered an attack on the same day in the direction of eight Yam to the west and ssangsung to the east. These two military operations were linked military actions aimed at one purpose.
    The attack to eight Yam that the first of these two attacks was close to the outpost action to secure the SsangsungChongguanbu Area. This attack was not aimed at securing territory or people. The attack aimed to break contact and traffic, and to concentrate the empire's attention by destroying important points of the shortest road connecting the Goryeo and the Yuan empires. This was to delay the transfer of the political affairs of May 1356 to the original empire as much as possible, and to conceal military action towards the SsangsungChongguanbu. The attacking unit to eight Yam achieved its goal in early June by destroying three Yam, including the Passaboo(婆裟府). Indeed, the Yuan empire took action only after the dispatched envoy was attacked by the Georyo army in mid-June. The envoy who was attacked was an envoy trying to appoint Ki Chul, who was already dead, to Taesado(太司徒). But even at that point the Yuan empire was unable to obtain accurate information. Later, in early July, Goryeo army under Yu In-woo(柳仁雨), dispatched to the east, cooperated with local forces and recaptured Ssangsung Area.
    The Yuan empire sent inquiries to Goryeo in mid-July asking about the destruction of the Yam. Therefore, King Kongmin took an apology to the Yuan empire. On the other hand, King Kongmin asked for the Empire to accept the explanation of King Kongmin that Ki-Chul had attempted to rebellion against the king and removed him. The Yuan empire accepted this request. Thus, the removal of Ki clan in May 1356, was recognized by the Yuan empire as a legitimate act of suppressing rebellion.
    And on the basis of this, King Kongmin also newly requested that the Yuan Empire recognize the Goryeo's possession of the Ssangsung Area.
    Along with the justification that this area was the former territory of Goryeo, King Kongmin suggested a logic that since the Ssangsung Chongguanbu is a party of Ki Chul, if the removal of the Ki-Chul is justified, the attack on the SsangsungChongguanbu is justified too. It was first requested in October 1356, and the following year it was requested again through the Do-dang(都堂). In this time, in addition to the existing logic, Goryeo added a condition to guarantee the payment of gold in the Ssangyong area. Afterwards, Goryeo gathered people around this area and established a manhobu(萬戶府) in this area, indicating that the Yuan empire approved the territory of the Ssangyong area of Goryeo.
    Finally, in 1356, the civil and military acts of the King Kongmin, which began with the elimination of Ki clan in Goryeo, were successfully concluded as the Yuan empire recognized Goryeo's possession of the Ssangsung area. However, Ki clan, who remained in the original empire, continued in political and military conflict with King Kongmin's regime until the late period of King Kongmi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공민왕 5년(1356) 여몽 접경지대에서 일어났던 분쟁은 근본적으로 고려라는 정치체와 그 영민에 대한 통제 우선권의 향방과 관련되어 있다. 이전 시기의 대부분은 고려국왕이 가장 우선적인 권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원 제국 질서 내에서 고려국왕에게 부여된 중층적인 지위에 근거한다. 원 제국, 즉 카안 울루스의 질서 안에서 고려국왕은 황실의 부마로서 투하령의 주인인 한편 정동행성승상을 세습하면서 고려 내의 행성체계에서 명목상 최상위를 차지하며, 고려라는 외국의 국왕으로서 독립적 권위를 가지고 고려 내의 최고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권위는 원 제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 질서에 근거해 있는 것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 문제점이 현실화된 것은 고려 말 기씨 가문의 등장으로 인해서였다. 기황후의 등장으로 인해 황실과의 친연성에서 고려 왕실이 상대적 열위에 처하는 구도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구도에서 기씨 일족은 고려 내에서는 고려국왕의 신하일지라도 제국 질서 내에서는 고려국왕을 앞서게 될 경우가 있으며, 이는 고려의 영토와 영민에 대한 고려국왕의 우선권에 큰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그 중심인물이 되는 기철은 공민왕의 즉위 이전부터 고려의 고위직 뿐 아니라 요양행성의 평장정사까지 역임하며 요동과 한반도 양측에서 세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에 공민왕은 1356년 5월 기습적인 정변으로 고려 내의 기씨 세력을 제거하고 무력행사에 나섰다. 이 해의 군사행동은 여몽전쟁 종결 이래 근 100년만의 무력충돌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인 행위였다. 이러한 행위는 강한 정치적 부담을 수반하는 것이며, 이 군사행동이 고려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공민왕이 이러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무력충돌을 감행한 목적은, 결국 고려의 영토와 영민에 대한 독점적 통제권을 고려국왕의 명의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즉 기씨 세력을 제거한 정변과 같은 맥락에 있는 정치행위였던 것이다.
    그해 5월, 공민왕은 서쪽으로 동8참 방면, 동쪽으로 쌍성총관부 방면에 같은 날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 두 군사작전은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연계된 군사행동이었다. 둘 중 먼저 수행된 8참 공격작전은 쌍성총관부 지역 확보를 위한 전초전 성격의 작전이었다. 이는 영토나 영민의 확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고려와 고려와 원 제국을 잇는 참로를 파괴하여 연락을 단절시키고 원 제국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통해 공민왕 5년 5월의 정변이 원 제국에 전해지는 것을 지연시키고 쌍성총관부를 향한 군사행동을 은폐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성공한 이후 7월 초순에는 동쪽으로 파견된 고려군이 현지 세력가들과 협조하여 쌍성총관부를 탈환하였다.
    이에 원은 뒤늦게 7월 중순 역참 파괴행위를 힐문하는 조서를 보냈다. 공민왕은 이에 사죄하는 태도를 취하는 한편으로, 기철이 반란을 기도하여 제거하였다는 공민왕 측의 입장을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원이 이것을 수락하면서 기철 제거를 비롯한 정변은 정당한 반란 진압 행위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공민왕은 이를 근거로 쌍성총관부 지역의 영유를 인정해 줄 것을 새로이 두 차례에 걸쳐 요구하였다. 이 지역이 고려의 고토라는 명분과 함께, 쌍성총관부 세력이 기철의 일파이므로 기철 일파 제거가 정당화된 이상 쌍성총관부 공격 또한 정당하다는 논리를 동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원 제국에서 쌍성총관부 영유를 인정받으면서, 공민왕의 고려 내 기씨 세력 제거에서 시작된 공민왕 5년(1356)의 정치행위 및 군사행위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원 제국에 남아있는 기씨 세력은 이후로도 공민왕의 정권과 충돌을 이어나갔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결론적으로 공민왕 5년(1356) 여몽 접경지대에서 일어났던 분쟁은 모두가 근본적으로 고려라는 정치체와 그 영민에 대한 통제 우선권의 향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이 해의 사건들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지점이다. 고려 내 기씨 세력 제거 이후 공민왕은 원 제국에 대응하기 위하여 8참을 공격하여 연락로를 차단하였고, 이로 인해 원은 고려의 정변과 쌍성총관부 공격에 대한 대응이 늦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원과의 교섭에서 공민왕이 기철 일파 제거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은 이후 쌍성총관부를 기철 일파로 분류하여 이 지역 영유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하는 논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 5년의 세 가지 주요 사건은 분절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분명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본 연구에서 분석한 세 가지 주요 사건, 즉 8참 공격과 쌍성총관부 지역 탈환 및 기씨 세력 숙청과 관련된 구체적 사실관계 규명과 관련하여 기존 연구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한층 더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들 사건 사이의 연관관계를 분석한 결과를 통해 공민왕 5년의 접경지역 분쟁과 관련하여 기존의 분절적인 사건 인식 및 분석을 탈피할 수 있었다. 이 해 공민왕이 수행했던 정치행위 및 작전활동 전체에 대하여 연계성을 가지고 포괄하는 해석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이후의 연구자들에 대해서도 고려사의 해당 시기에 대하여 이전보다 진일보한,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한편 본 연구의 결과물은 공민왕대를 포함한 고려 말기와 이어지는 조선 건국기의 국제관계 및 접경문제에 관련된 후속연구와도 밀접하게 연계시킬 수 있다. 고려 왕실과 기씨 가문의 분쟁은 공민왕 말기까지 이어지며, 그 뿌리는 공민왕 5년의 분쟁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는 후일 우왕대 이후 고려와 북원, 고려와 명, 그리고 이후 새로이 건국한 조선과 명의 관계 및 접경한 요동 지역에 대한 정책과도 지속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의 결과물은 차후 여말선초, 공간적으로는 요동과 한반도의 접경 지역과 관련된 후속연구와 특히 밀접하게 연계하여 새로운 논의를 전개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다.
  • 색인어
  • 공민왕, 기철, 인당, 강중경, 유인우, 쌍성총관부, 8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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