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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의 감성학: 추, 그로테스크, 악취미
Aesthetics of Unpleasure: ugliness, grotesque, bad taste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신진연구자지원사업(인문사회)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9-S1A5A8-2019S1A5A8035172
선정년도 2019 년
연구기간 2 년 (2019년 05월 01일 ~ 2021년 04월 30일)
연구책임자 이재걸
연구수행기관 중앙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는 오늘날 추(醜, ugliness), 그로테스크(grotesque, 기괴함), 악취미(bad taste)의 이미지와 같은 ‘불쾌의 미’ 표현이 예술 및 대중문화 분야 전반에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입증하고, 그 이론적 배경을 밝히는 목적을 가진다. 불쾌(不快)를 조장하면서 생경한 경험을 제공하는 이러한 이미지들에 대중은 찬사와 경멸을 동시에 보내기도 한다. 기괴하게 과장되거나, 파괴적이면서 우스꽝스러운 불쾌의 이미지들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의 욕망까지 생산·소비하는 중요한 감성적 매개(媒介)가 되었다.
    추와 그로테스크가 일으키는 부정적인 감정은 그 자체로도 불편할 수 있지만, 그것이 깊은 인류학적 반성과 연결된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를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인류 최초의 도상 중 하나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자연의 엉뚱함과 뒤틀림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미(美)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또한 난감할 뿐이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가진 고고학적 위상을 떠나서 본다면, 이 기괴한 형상은 불쾌 혹은 ‘추의 미’라는 역설로 그 미학적 의미를 따져 물어볼 수밖에 없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불쾌의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비주류의 미술사 안에서 변증법적 진화를 이어나갔다. 때로는 산업시대의 요구에 맞춰 저속한 미적 가치를 지닌 키치(kitsch)처럼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생성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이 이미지들은 주관성의 지배를 받고 각 시대의 특수한 미학적 규범으로 변해감으로 반드시 동시대의 사회적·정신적 토대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불쾌의 이미지가 현대인에게 원초적인 즐거움을 통해 ‘변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의 역할에 걸맞은 미술사적·미학적 위상을 점검하여 그 의의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혐오와 매력을 동시에 유발하는 이 이미지들이 순수미술 영역을 뛰어넘어 텔레비전, 인터넷 방송, 연극·영화,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광고, 미용, 패션 등과 같은 대중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소위 ‘먹방’으로 알려진 과장된 식욕을 다룬 방송, 과장된 자기 비하 코미디, ‘막장’으로 불리는 황당한 전개의 드라마, 그로테스크 이미지가 가득한 영화 등 감상자에게 생경한 경험을 제공하는 콘텐츠들은 한국 대중문화 안에 가득하다. 이 현상들의 배후에는 불쾌 이미지에 대한 대중들의 관음증적 욕망과 금기(taboo)에 대한 소비 욕망도 깔려 있다. 어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외모, 행동, 심리적 패턴 등에 스며든 긴장된 정서는 바로 현실과 대중의 강력한 요구로 태어난 산물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악취미에 가까운 이 이미지들을 창작 동인(動因)으로 삼은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를 어떤 특정한 범주와 계보 안에 위치시켜 규정하기란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미술사적·미학적으로 통일된 관점도 찾아볼 수 없다. 배격과 탈주로서의 이미지를 어떤 한정된 정의나 개념으로 고립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불쾌의 이미지에 담긴 정신병적 징후와 혼란스러운 다의성에 익숙해지는 동안 그것에 대한 이론적 접근에는 크게 무관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는 특히 한국 예술문화의 격동기(激動期)에 우려되는 것으로서 관련 연구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하겠다.

    본 연구는 ‘잔인한 면은 예술이 행하는 비판적 자각의 일부’라는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입장과 같은 맥락을 유지하되, 기존의 ‘불쾌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이론적 측면에서 ‘불쾌의 감성학’을 정립한다. 나아가 이를 미술사와 현대 문화의 다양한 징후들에 적용함으로써 그 사회적, 인류학적 동인을 실천적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결국, 본 연구는 현대적 ‘불쾌의 미’에 대한 학술적 탐구와 대중문화비평이라는 융합적 전제 안에서 인용 가치가 높은 지식 콘텐츠 창출을 꾀한다고 할 수 있다.
  • 기대효과
  • 본 연구가 지향하는 목적을 이룬다면 학술적·비평적 의미에서 크게 두 가지의 구체적인 성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첫째,
    본 연구를 통해 일반적으로 ‘부정적 미’ 개념에 머무르는 추와 그로테스크의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할 것이다. 더불어 그것들의 현대적 의미와 차별성을 올바로 정립하여 정체성이 분명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무엇보다도 추와 그로테스크는 기괴함과 난폭성 그리고 이질성과 비합리성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일종의 변칙적인 쾌(快)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것들이 표현하는 노골적인 페티시(Fetish)와 성(性) 취향, 변덕스러움, 병적이거나 기형적인 것에 대한 강한 집착 등은 강력한 대상 앞에서 느끼는 좌절과 불쾌가 쾌로 전환되는 숭고(Sublime)나 비극의 연민과 공포를 통해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카타르시스(Catharsis)와 같은 미학적 개념들 안에서 쾌를 향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미학적 절차와 근거를 통해 이러한 결과를 도출하는지에 관한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본 연구는 이 문제를‘불쾌의 감성학’을 정립함으로써 해소하고, 그것의 미학적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밝혀 창작자에는 이론적 정당성을 주고, 감상자에게 비평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현재의 한국 대중문화는 기상천외한 캐릭터들과 행위들이 넘쳐난다. 난잡하고 엉뚱하고 디오니소스적 인물, 고통에 ‘성스러움’을 투사하는 순교적 혹은 가학적 인물, 신비로운 잡종형 생명체, 악마적 본성의 이중인격체, 뱀파이어와 좀비의 초월적 신체, 외계적 망상과 분열적 웃음 등을 소재로 취한 작품들은 한국 대중문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본 연구에서 생산될 ‘불쾌의 담론’은 정신분석학, 사회·대중심리학과 연계하여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될 것이다. 주체에게 끊임없이 위협을 상기하게 하는 것에 흥미를 갖는 현상의 배후에는 단순히 창작자들의 미적 취향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본 연구는 젊은 세대나 소외 집단이 가지는 기존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 삶에 팽배한 위기의식과 이로 인한 권태, 변질한 욕망의 추구 등과 같은 정신적 태도는 불쾌 이미지 출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상정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대중문화 비평은 반-자본주의적 낭만주의 성격을 띠는 프랭크 리비스나 토마스 엘리엇 등이 포함된 <대중사회론>이 강세를 보였다. 이들은 대중과 엘리트 간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며, 대중문화는 현실 도피의 수단 혹은 상징적 조작으로 대중의 소외감을 거짓으로 충족시켜준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취향이 상실된 전제주의적 집단화 경향을 유도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관점은 추와 그로테스크의 긍정적, 능동적 동인 안에서 재고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카니발 대중문화론의 경우, 대중은 대중문화를 허위와 가식을 깨는 공간으로 파악할 수 있고, 소외를 부추기는 억압의 대상으로부터 짜릿한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여길 수 있다는 측면에서 ‘대중 주체’의 위상도 강화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불쾌 이미지가 대중 정서에 어떤 순기능과 역기능을 하는지 고찰할 것이다. 이를 통해 미술 비평은 물론, 문학, 영화, 게임, 문화 비평 영역에서 활용 가능한 비평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연구 주제와 관련한 저서의 출판(현재 저술 중)은 개인과 집단의 심리적 동향과 문화적 특성을 진단함에 있어서 ‘불쾌의 감성학’이 가지는 긍정적 의의와 관련하여 대중적 인식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본 연구는 이상의 기대 효과와 활용 방안을 기본으로 학문적 성과를 대중 사회로 환원한다는 실리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요약
  • 로저 프라이, 클라이브 벨, 클레멘트 그린버그 등과 같은 형식주의 예술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는가?”의 내용적 문제보다는 “어떻게 했는가?”라는 형식적 문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작품의 전체라는 개념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을 ‘독특한 조직’으로 인정하는 데서 성립되었고, 이 조직들 사이의 긴밀한 조화는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미적 평가를 위한 다양한 시도 안에 ‘온전한 형식 vs 몰형식’이라는 대결 구도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전해주는 추와 그로테스크의 역사는 세속화와 해방의 역사다. 물론 “추는 우주의 조화에 이바지한다.”(스콜라 철학)와 같은 긍정론이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미술은 보통 ‘추의 미술사’, ‘그로테스크 미술사’, ‘비주류 미술사’ 등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예술적 면모를 갖추어 왔다. 이 맥락 안에서 추와 그로테스크는 미의 결핍이 아니라, 그 자체로 특별한 미학적, 인류학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설명된다.
    기호, 언어, 의미 등과 밀접하게 교류하는 예술적 인식을 토대로 현대미학을 설명하는 수잔 랭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일반적으로 ‘작품에 감정이 담겨있다’, ‘작품에 예술적 생명이 있다’라는 것은 ‘작품에 살아 있는 형식이 있다’는 의미라고 말하면서 형식의 문제를 ‘조직들 사이의 긴밀한 조화’의 문제에서 예술의 정신 혹은 예술의 속성 문제로 확장해 말한다. 랭거에게 예술의 첫 번째 문제는 생명력, 생명성, ‘살아있는 형식(Living form)’이다. 어떤 모양새에 대한 윤리적·사회적 잣대는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생명의 본질이라는 주제 앞에선 한없이 초라한 것이다. “현대 예술에서는 조화를 이상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추를 보는 일이 통용될 수 없다”고 강조하며 “예술은 추한 것으로서 저주받는 요인들을 자신의 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아도르노의 고언도 미학이 ‘불쾌의 미’를 미와 함께 적극적으로 미학의 근본 요소로 등재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랭거의 메시지와 공명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불쾌 담론의 긍정론의 연장선에서 다음과 같은 세부 주제에 접근할 것이다.

    1. <로젠크란츠의 ‘추의 미학’, 그 이후>
    : 로젠크란츠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추 개념의 동시대적 차별성을 구축한다.
    2. <그로테스크와 현대문명>
    : 정신분석학과 축제 이론을 중심으로 그로테스크 발전사를 정리하고, 특히 미하일 바흐친의 대화주의(Dialogism)와 카니발 이론을 포스트모던한 그로테스크 이론으로 보고, 이로부터 21세기 그로테스크 이론의 지평을 넓힌다.
    3. <불쾌 이미지의 윤리적 문제>
    : 예술적 창의성과 ‘위반적 미술’의 관계 고찰하면서 나아가 ‘예술 표현의 자유와 한계’ 문제를 다룰 것이다.
    4. <하위문화 이미지의 미학적 전략>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게임, 패션, 광고, 인터넷 1인 방송 등에 나타나는 불쾌 이미지의 사례를 분석한다.

    물론, 의도적으로 공포와 불안을 조성하기 위해 창조되는 이미지는 감상자의 기대심리에 철저히 부응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보다 깊고 내밀한 두려움을 조명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의적일 수 있다. 다만, 이 이미지가 그 불안들과 다양하게 그리고 아주 정교하고 밀접한 방식으로 유대를 맺고 있음은 틀림없다. 가상공간에서 괴물과 전투를 벌이고, 드라마 속 엽기적인 말투에 고스(Goth)적 희열을 느끼고,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코스프레하는 일에 열중하며, ‘건전한 문화’를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되길 좋아하는 컴퓨터광들의 모호한 충동 등은 비단 예술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재현’과 ‘실재’의 구분을 교란시키는 내밀함, 섬뜩한 신체적 현존을 제시하는 이미지가 만연하는 한국 신생대중문화의 역동성 안에서‘불쾌의 감성학’은 새롭고 긍정적인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오늘날 추(醜, ugliness), 그로테스크(grotesque, 기괴함), 악취미(bad taste)의 이미지와 같은 ‘불쾌의 미’ 표현이 예술 및 대중문화 분야 전반에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입증하고, 그 이론적 배경을 밝히는 목적을 가진다. 불쾌(不快)를 조장하면서 생경한 경험을 제공하는 이러한 이미지들에 대중은 찬사와 경멸을 동시에 보내기도 한다. 기괴하게 과장되거나, 파괴적이면서 우스꽝스러운 불쾌의 이미지들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의 욕망까지 생산·소비하는 중요한 감성적 매개(媒介)가 되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전해주는 추와 그로테스크의 역사는 세속화와 해방의 역사다. 물론 “추는 우주의 조화에 이바지한다.”(스콜라 철학)와 같은 긍정론이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미술은 보통 ‘추의 미술사’, ‘그로테스크 미술사’, ‘비주류 미술사’ 등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예술적 면모를 갖추어 왔다. 이 맥락 안에서 추와 그로테스크는 미의 결핍이 아니라, 그 자체로 특별한 미학적, 인류학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설명된다.
    추와 그로테스크가 일으키는 부정적인 감정은 그 자체로도 불편할 수 있지만, 그것이 깊은 인류학적 반성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인류 최초의 도상 중 하나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자연의 엉뚱함과 뒤틀림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미(美)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또한 난감할 뿐이다. 구석기 시대의 비너스가 가진 고고학적 위상을 떠나서 본다면, 이 기괴한 형상은 불쾌 혹은 ‘추의 미’라는 역설로 그 미학적 의미를 따져 물어볼 수밖에 없다. 본 연구는 ‘잔인한 면은 예술이 행하는 비판적 자각의 일부’라는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입장과 같은 맥락을 유지하되, 기존의 ‘불쾌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이론적 측면에서 ‘불쾌의 감성학’을 정립한다. 나아가 이를 미술사와 현대 문화의 다양한 징후들에 적용함으로써 그 사회적, 인류학적 동인을 실천적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결국, 본 연구는 현대적 ‘불쾌의 미’에 대한 학술적 탐구와 대중문화비평이라는 융합적 전제 안에서 인용 가치가 높은 지식 콘텐츠 창출을 꾀한다고 말할 수 있다.
  • 영문
  • This study aims to demonstrate that an expression of “the beauty of displeasure,” which consists of the images of ugliness, grotesqueness, and bad taste, has had enormous influences throughout the fields of art and popular culture with specific examples and to discover the theoretical background thereof. The general public express compliments and contempt at the same time to such images that foster displeasure and provide eerie experiences. Those grotesquely exaggerated, destructive and ridiculous images have served as the sensible medium for productions and the consumptions of desires of not only individuals but also groups. The history of ugliness and grotesqueness delivered by Umberto Eco is also the history of secularization and liberation. Surely, a positive thought that “ugliness devotes to the harmony of the universe (Scholasticism)” indeed existed in the past, as well. Art that presents “a negative impression” has established its artistic aspect in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art history of ugliness,” “art history of grotesqueness,” “art history of non-mainstream” among others. In this context, ugliness and grotesqueness do not mean a lack of beauty: they have special aesthetic and anthropological meanings of their own accords. The feelings derived from ugliness and grotesqueness can be uncomfortable by themselves, but what makes us more uncomfortable is the fact that they are connected to deep anthropological introspection. The Venus of Willendorf, one of the earliest icons of humans, also make us uncomfortable in that it is difficult to explain i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traditional notion of beauty, similar to the randomness and distortion of nature. Aside from the archeological status as the Venus from the Paleolithic Era, it is only natural to raise a question on the aesthetic significance of this eerie figure in terms of a paradox of displeasure or the “beauty of ugliness.” While taking up the same position by Theodor W. Adorno, “a cruel side is part of critical self-awareness that is created by art,” this Study establishes the “sciences of sensibility for displeasure” in terms of theory by critically succeeding to the existing “theories on displeasure.” Furthermore, this Study contemplates on social and anthropological motives for the science from the perspective of practice by applying it to various symptoms in art history and contemporary culture.
    Eventually, this Study can be deemed to intend to create knowledge content with high values for citation in a premise of confluence of academic explorations and criticisms for popular culture on the contemporary “beauty of displeasur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오늘날 추(醜, ugliness), 그로테스크(grotesque, 기괴함), 악취미(bad taste)의 이미지와 같은 ‘불쾌의 미’ 표현이 예술 및 대중문화 분야 전반에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입증하고, 그 이론적 배경을 밝히는 목적을 가진다. 불쾌(不快)를 조장하면서 생경한 경험을 제공하는 이러한 이미지들에 대중은 찬사와 경멸을 동시에 보내기도 한다. 기괴하게 과장되거나, 파괴적이면서 우스꽝스러운 불쾌의 이미지들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의 욕망까지 생산·소비하는 중요한 감성적 매개(媒介)가 되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전해주는 추와 그로테스크의 역사는 세속화와 해방의 역사다. 물론 “추는 우주의 조화에 이바지한다.”(스콜라 철학)와 같은 긍정론이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미술은 보통 ‘추의 미술사’, ‘그로테스크 미술사’, ‘비주류 미술사’ 등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예술적 면모를 갖추어 왔다. 이 맥락 안에서 추와 그로테스크는 미의 결핍이 아니라, 그 자체로 특별한 미학적, 인류학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설명된다.
    추와 그로테스크가 일으키는 부정적인 감정은 그 자체로도 불편할 수 있지만, 그것이 깊은 인류학적 반성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인류 최초의 도상 중 하나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자연의 엉뚱함과 뒤틀림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미(美)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또한 난감할 뿐이다. 구석기 시대의 비너스가 가진 고고학적 위상을 떠나서 본다면, 이 기괴한 형상은 불쾌 혹은 ‘추의 미’라는 역설로 그 미학적 의미를 따져 물어볼 수밖에 없다. 본 연구는 ‘잔인한 면은 예술이 행하는 비판적 자각의 일부’라는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입장과 같은 맥락을 유지하되, 기존의 ‘불쾌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이론적 측면에서 ‘불쾌의 감성학’을 정립한다. 나아가 이를 미술사와 현대 문화의 다양한 징후들에 적용함으로써 그 사회적, 인류학적 동인을 실천적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결국, 본 연구는 현대적 ‘불쾌의 미’에 대한 학술적 탐구와 대중문화비평이라는 융합적 전제 안에서 인용 가치가 높은 지식 콘텐츠 창출을 꾀한다고 말할 수 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프랑스의 루시앙 골드만(Lucien Goldmann)은 예술과 사회변혁의 의존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오늘날의 예술이 후기산업사회의 특징인 사회의 물화(reification) 현상과 영합하는 데 주목하고, 예술을 빌려 사회의 ‘탈물화(to irreify)를 지향할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우리 시대의 예술이 걸어야 할 휴머니즘을 환기하였다.
    1. 후기산업사회를 맞아 초개인적·정신적 가치들이 절하되고 이것들이 한낱 교환가치(exchange value)로 추락함에 즈음해, 문화예술이 이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서는 안 되며, 이를 막기 위해 사회의 물화(reification)를 비판해야 한다.
    2. 예술은 이를 위해 사회의 물화와 상이한 방향을 지향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집단의 올바른 정신적 가치를 견인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사회의 물화에 저항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술은 사회를 휴머니즘의 방향으로 견인할 수 있다.
    3. 오늘의 예술이 긍정적 주인공(positive hero)을 다룰 수 없게 된 건 정신적 가치가 교환가치로 전락하고 항상적인 가치가 부정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주인공을 부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4. 궁극적으로 오늘의 예술은 이를 빌려, 정신적 가치의 소멸과 보편적 인격의 몰락을 서술하고, 그 부산물로서 개인의 소멸과 죽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초개인적 가치를 복원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골드만의 제안처럼, 예술은 후기산업사회가 용인한 인간성의 물화를 비판하고 부정적 주인공(negative hero)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디. 바로 이 지점에서 불쾌의 감성학이 지니는 형이상학적 메시지가 생성된다. 그동안 한국의 정서적·문화적 풍토 안에서 예술로서의 ‘불쾌의 이미지’는 미학적, 윤리적 일탈이라는 부정적 평가에 늘 직면해 있었다. 본 연구는 불쾌의 감정을 동반하는 예술작품에 대한 감성적 판단 기준을 점검·수정하고, 그 안에 담긴 고도의 휴머니즘과 유익한 정신적 가치를 함양했다는 측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에 본 연구는 학술적·비평적 의미에서 크게 두 가지의 구체적인 활용 방안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첫째,
    불쾌를 동반하는 작품들이 표현하는 노골적인 페티시(Fetish)와 성(性) 취향, 변덕스러움, 병적이거나 기형적인 것에 대한 강한 집착 등은 강력한 대상 앞에서 느끼는 좌절과 불쾌가 쾌로 전환되는 숭고(Sublime)나 비극의 연민과 공포를 통해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카타르시스(Catharsis)와 같은 미학적 개념들 과는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들이 어떤 미학적 절차와 근거를 통해 결과를 도출하는지에 관한 연구는 쉽게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본 연구는 이 문제를 ‘불쾌의 감성학’을 정립함으로써 해소하고, 그것의 미학적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밝혀 창작자에는 이론적 정당성을 주고, 감상자에게 비평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본 연구는 팬데믹과 같은 집단적 공포와 질병에 의한 죽음의 이미지를 우리 사회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관한 미학적, 윤리적 판단의 진전된 기준을 제시하였다. 고통받는 인간을 다룬 작품들에 나타난 인간의 의지와 행동은 미학적 평가 이전에 주체와 타자의 관계 맺기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여기서 고통의 이미지는 신체적 고통은 물론, 종교적 고통, 도덕적 고통, 사회적 고통 등과 같은 다양한 의미 영역 안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 유한한 인간에게 고통이라는 주제는 본질적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그 특유의 모호성을 완전히 지울 순 없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물학적 합목정성 외에도 사회적, 문화적, 철학적 기능이 잠재하고 있기에 진지한 ‘사유의 대상’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가다머와 레비나스는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 고통의 과정을 수용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고통은 실존의 깨임 즉, 우리가 ‘무엇인지’를 자각할 수 있게 하는 체험이며, 삶의 고유한 차원도 고통 속에서 예감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 관여함으로써, 그 고통의 호소에 귀 기울임으로써 건강한 이성을 지닌 윤리적 주체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실존의 깨임' 안에서 ‘불쾌의 감성학’의 형이상학적 지향성도 긍정성과 보편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불쾌 이미지가 어떤 순기능과 역기능을 발생시키는 지를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미술 비평은 물론, 사회, 문학, 영화, 게임, 문화 비평 영역에서 활용 가능한 비평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본 연구는 이상의 기대 효과와 활용 방안을 기본으로 학문적 성과를 대중사회로 환원한다는 실리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불쾌의 미, 추, 그로테스크, 카니발, 악취미, 페티시, 언캐니, 타나토스, 조엘 피터 위트킨, 포스트모던 낭만주의, 에로티시즘, 아브젝시옹, 흑사병 이미지, 고통, 타자 철학,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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