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중기이후 조정의 고위 관직자가 절도사에 임명되어 번진에 부임하거나, 절도사로 번진에서 근무하다가 조정에 들어와 재상을 비롯한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더불어 번진에서 막직관으로 근무하다가 조정의 관료로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과정에 ...
당 중기이후 조정의 고위 관직자가 절도사에 임명되어 번진에 부임하거나, 절도사로 번진에서 근무하다가 조정에 들어와 재상을 비롯한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더불어 번진에서 막직관으로 근무하다가 조정의 관료로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과정에서 같은 번진에서 절도사와 막직관으로 근무하였던 자들이나, 막직관으로 근무하였던 자들 사이에 일정한 유대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번진에서 이루어진 벽소 과정과 동료로서 근무하면서 맺어진 상호 관계가 관료 사회로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憲宗 元和 7년(812) 李珏은 진사 시험에 좋은 성적(高第)으로 합격하였지만,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각처럼 과거에 합격하고도 초임직에 임명되지 못하는 경우는 관료적체가 심각하여 출신자에게 까지 대선기간 적용이 확대된 상황에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관직에 임명되지 못한 이각은 河陽절도사 鳥重胤에게서 벽소를 제의받고는 하양의 節度推官으로 나아갔다. 하양에서 추관으로 재직하면서 이각은 拔萃科를 통과하였고, 그 덕택에 渭南尉에 보임되었다. 이후 그는 左拾遺를 거쳐 下邽令으로 승진하였다. 이각이 하규령에 임명되어 지방관으로 나갔던 것은 ‘수차에 걸친 간언에도 남아있지 못하고 하규령으로 나갔다(珏以數諫不得留 出爲下邽令)’라는 기록을 통해 원하던 바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寶曆 원년(825) 鄂岳절도사에 임명된 牛僧儒가 벽소를 제의하자 이를 받아들여 掌書記로 나가는 선택을 하였다. 이각은 장서기로 재직하면서 우승유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이각은 殿中侍御史, 禮部員外郞, 吏部원외랑, 司勳원외랑 知制誥, 度支郞中 지제고, 翰林學士를 거친 후 文宗 大和 7년(833)에 中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이각이 승진하는 과정에는 번진에서 근무를 통하여 맺었던 우승유, 李宗閔 등과의 인연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문종 長慶 2년(822) 浙西관찰사에 임명되었던 李德裕는 武宗 會昌 6년(846)까지 24년 동안 절서(穆宗 장경 2년(822) ~ 문종 대화 3년(829)), 義成(문종 대화 3년(829) ~ 대화 4년(830)), 劍南西川(대화 4년(830) ~ 대화 6년(832)), 산남서도(山南西道, 대화 8년(834)), 절서(대화 8년(834) ~ 대화 9년(835)), 절서(문종 開成 원년(836) ~ 개성 2년(837)), 淮南(개성 2년(837) ~ 개성 5년(840)), 荊南(회창 6년(846)) 등 8 번에 걸쳐 관찰사와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덕유의 막직관으로 근무하였던 자 중에 劉三復은 문종 대화 8년(834) ~ 대화 9년(835) 사이 절서 번진 1회를 제외하고 7번을 막직관으로 따라 다니며, 근무하였다. 이덕유가 절도사로 근무할 당시 유삼복 외에도 李蟾은 절서, 의성, 검남서천에서, 杜顗와 陳修古는 절서와 회남에서 따라 다니며 막직관으로 활동하였다.
덕종 정원 17년(801) ~ 順宗 永貞 원년(805) 容管절도사에 임명되었던 위단(韋丹)도 검남동천(순종 영정 원년(805) ~ 헌종 원화 원년(806)), 하중(원화 원년(806)), 강서(원화 2년(807) ~ 원화 5년(810))까지 10년 동안 4 번진의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위단이 번진을 옮길 때마다 王叔雅가 모두 따라가서는 막직관으로 근무하였다. 또한 문종 대화 8년(834) ~ 개성 2년(837) 忠武절도사에 임명되었던 杜悰은 회남(무종 회창 2년(842) ~ 회창 4년(844)), 검남동천(회창 5년(845) ~ 宣宗 大中 2년(848)), 검남서천(대중 2년(848) ~ 대중 6년(852)), 회남(대중 6년(852) ~ 대중 9년(855)), 鳳翔(懿宗 咸通 4년(863) ~ 함통 10년(869)) 까지 35년 동안 6 번진의 절도사를 역임하였는데, 이 때 畢諴(충무, 회남), 楊收(회남, 검남동천, 검남서천), 楊嚴(검남서천, 회남) 등이 따라 다니며 막직관으로 활동하였다. 이 중 이덕유를 따라 다녔던 유삼복이나 두종을 따라다녔던 필함이 조정의 관료로 진출하는 과정은 이각의 사례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동안 연구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 후기 번진에서 번수인 절도사가 다른 번진으로 임지를 옮겨갈 때 따라 가서 막직관으로 활동하였던 인물들의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상당한 수에 이르렀다. 또한 수부(隨府) 과정을 통해 맺어진 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관료로 진출하였던 인물도 상당한 수에 이르렀으며, 관료로 진출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사례 역시 확인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연구자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막직관들의 번진 근무와 관직 경력을 조사하여 이 과정에서 양자 사이의 인적 관계가 관직 경력과 승진 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이와 같은 연구는 당 후기 관료제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