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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 後期 節度使의 移鎭과 幕職官 隨府
The military commander moved the new post and the secretary go with his lord in the late Tang Period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8-S1A5B5A07-2018S1A5B5A07073897
선정년도 2018 년
연구기간 1 년 (2018년 11월 01일 ~ 2019년 10월 31일)
연구책임자 이영철
연구수행기관 영남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는 唐 後期 藩鎭에서 시행된 벽소를 통해 辟主인 節度使와 被辟召者인 幕職官 사이에 형성된 人的關係가 唐 後期 官僚制와 陞進過程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피기 위한 것이다. 관료에게 승진이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관료의 승진은 승진 대상자의 개인적 능력을 기초로 이루어져야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出身이나 私的 紐帶關係를 기초로 하는 人的關係 등 다양한 요인이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기도 힘들다. 때문에 관료들은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출신의 문제를 제외하고, 개인적 능력이나 인적관계 등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에 연구자는 승진에 영향을 주는 인적관계에 주목하여 唐 後期 藩鎭에서 시행된 벽소를 통해 辟召의 주체인 節度使와 벽소의 대상인 幕職官 사이에 맺어진 人的關係의 형성과 유지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이를 근거로 번진에서 맺어진 인적관계가 관료가 된 후 陞進過程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한다.
    唐 後期처럼 官僚의 人事積滯가 심각한 상황에서는 개인의 능력이나 인적관계가 승진과정에 더욱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唐代에는 玄宗 시기를 전후해서 조정에서 임명할 수 있는 관직의 數와 官職을 희망하는 자 사이의 불균형으로 인사적체가 심각하였다. 인사적체를 해결하기 위해 待選期間을 부여한 인사운영이 이루어졌지만, 양자 사이의 심각한 수적 불균형은 새로운 문제만 만들어 내었을 뿐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대선기간은 관료들의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승진을 어렵게 만들어 관료사회에서는 다음의 관직을 얻을 수 있을까하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 대선기간의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문제를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것 중의 하나가 藩鎭에서 이루어진 막직관 辟召였다.
    막직관은 절도사가 번진의 행정을 처리하기 위해 선발한 私的인 조직이었지만, 唐朝의 관료제 운영이나 唐代 사회의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된 존재였다. 막직관 벽소는 現職에 있던 官僚, 任期가 끝나 다음의 관직을 기다리고 있던 前資官, 科擧를 합격한 出身者뿐만 아니라 地域社會에서 경제력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막직관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幕職官은 출신이 다양하였던 것만큼 다양한 利害關係를 매개로 번진과 결합하였다. 現職에 있던 관료나 前資官, 出身者 등은 번진에서 막직관으로 근무하기는 하였지만 언제든지 관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관료제 운영과 관련된 이해관계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또한 지역사회의 유력자들은 관료제 운영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었다지만 지역사회의 권력인 번진과 결합하여 막직관으로 활약하면서 개인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결합과정의 차이는 藩帥가 다른 번진으로 옮겨갈 때 각기 선택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연구자는 이해관계에 따라 막직관을 수부막직관과 재지막직관으로 분류하여 보았다. 隨府幕職官은 자신을 벽소한 절도사가 다른 번진으로 임지를 옮겨갈 때 따라가 막직관으로 활동하면서 절도사와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자들을 가리키며, 在地幕職官은 절도사가 다른 번진으로 옮겨갈 경우 벽소했던 절도사와 관계가 단절되었던 자들로 주로 절도사가 任地에 부임한 후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인사들 중에서 벽소된 자들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隨府幕職官과 在地幕職官은 자신을 벽소했던 절도사가 다른 번진으로 옮겨갈 때 왜 서로 다른 선택을 하였을까? 이와 같은 차이가 나타나게 된 것은 벽소에 응했던 막직관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藩鎭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던 막직관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분리하여 접근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隨府幕職官만을 대상으로 분석을 시도해 보려 한다. 연구자가 隨府幕職官을 대상으로 분석하려는 것은 이들이 벽소를 통해 절도사와 결합되었지만, 양자사이의 인적 관계는 번진을 옮겨 다니는 과정을 통하여 지속되고 강고해졌고, 이 과정을 통해 맺어진 인적관계는 藩鎭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만 한정되지 않고 관료 사회로 진출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적관계는 관계를 맺고 유지되는 기간이나 지속여부에 따라 강고하게 유지될 수 있다. 연구자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절도사와 막직관의 관계를 절도사가 다른 지역으로 임지를 옮겨갈 때 따라가서 이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隨府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幕職官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在地幕職官에 대해서도 분석이 이루어져야 막직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이 문제는 새로운 연구를 통해 보완해 나가겠다.
  • 기대효과
  • 硏究者는 이 연구를 통해 節度使의 移鎭과 幕職官의 隨府 사이의 얽힌 다양한 이해관계를 인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더 나아가 藩鎭에서 맺어진 人的關係가 官僚로 진출한 이후에도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지를 분석하려한다. 이와 같은 막직관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 다면 唐 後期 관료제 운용의 실태와 人事政策, 더 나아가 사회 변화를 이해하는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선 藩鎭에서 이루어진 벽소를 통하여 맺어진 인적관계가 唐 後期 관료사회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관료 사회에서 人的關係가 중요하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唐 後期에 발생한 牛李黨爭에서도 보이듯 人的關係의 형성과 결합의 영향은 어떤 시대보다 컸다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인적관계가 형성되는 장소로서 번진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벽소로 맺어진 인적관계를 매개로 隨府幕職官이 관료로 진출하는 과정을 분석하면 당시의 官僚나 文士階層이 唐代의 인사정책과 인사적체문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막직관을 번진에 벽소되어 번진행정을 담당했던 존재로서 唐朝의 번진 정책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기존의 수동적인 해석을 극복하고, 막직관이 官僚制의 운용이나 사회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주체로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幕職官이 절도사와의 인적관계를 매개로 관료로 진출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확인이 된다면 唐 後期 관료의 人事체계와 정책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의 기준을 제시하고, 이해의 틀을 넓혀줄 것이다. 이미 언급하였던 것처럼 번진의 절도사에 임명되었던 자들은 왕조의 고위관료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절도사로 재직하다가 중앙에 복귀하여 고위관료가 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이는 절도사 계층이 지방에서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관료사회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번진에서 막직관으로 결합한 자들은 절도사와의 인적관계를 맺어 관료로 진출하거나 진출한 이후에 승진과정에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가능해 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는 기존 연구의 시각을 보완하여 막직관 실태를 다각적이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막직관이 다양한 이해관계를 매개로 번진과 결합하였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분류하고 어떠한 존재형태를 보였는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때문에 이 연구는 기존 연구의 한계에서 출발하였다고 하겠다. 연구자는 절도사의 移鎭에 직면하여 隨府하거나 在地에 남기로 선택하였던 막직관의 결정 과정에는 벽소과정에 나타나는 이해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고 본다. 그래서 이 연구의 주제로 삼았던 隨府幕職官, 즉 절도사를 따라 다른 번진으로 옮겨갔던 막직관의 결정은 이후 관직으로 복귀나 승진과 관련된 인적관계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절도사를 따라 다녔던 수부막직관에 대한 분석은 藩鎭에서 활동했던 막직관 계층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의 일면을 밝혀 줄 것으로 기대된다.
  • 연구요약
  • 唐代에 宰相으로 재직하다가 節度使에 임명되어 번진으로 나가거나, 藩鎭에서 節度使로 근무하다가 조정에 들어와 宰相에 올랐던 사례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藩鎭에서 막직관으로 勤務할 경우 有力者와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기가 쉬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번진에서 절도사와 막직관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官界로 진출하거나, 승진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때문에 有力者가 절도사로 부임하였을 때 그 밑에서 막직관으로 근무하며 맺어진 인간관계를 매개로 有力者가 중앙으로 복귀할 때 막직관이었던 자가 같이 중앙으로 들어가 관료가 되는 사례 역시 사료에서 확인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憲宗 元和7年 進士 李珏은 鄂岳節度使 牛僧儒에게 掌書記로 벽소되었다. 이를 통해 이각은 우승유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牛僧孺가 재상으로 入朝할 때 殿中侍御史에 임명되어 관직에 오른 후 禮部員外郞, 吏部員外郞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이각은 牛僧孺의 막직관으로 재직하면서 李宗閔 등과도 親分을 쌓았는데, 이는 司勳員外郞 知制誥, 度支郞中 知制誥, 翰林學士를 거쳐 文宗 大和7年에 中書舍人으로 승진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이 외에도 절도사가 번진을 옮겨 다닐 때마다 따라다니며 막직관으로 활약하였던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穆宗 長慶2年 浙西관찰사 李德裕에게 벽소되었던 劉三復도 武宗 會昌6年까지 24년 동안 이덕유가 浙西, 義成, 劍南西川, 山南西道, 浙西, 浙西, 淮南, 荊南 등 8번이나 관찰사나 절도사로 나갈 때마다, 절서 번진 1회를 제외하고 7번을 막직관으로 따라 다녔다. 또한 文宗 大和8年 忠武節度使 杜悰도 35년 동안 淮南, 劍南東川, 劍南西川, 淮南, 鳳翔 등 6 번진의 절도사를 역임하였는데, 이 때 畢諴도 여러 번진을 따라다니며 막직관으로 활동하였다. 李德裕를 따라 다녔던 劉三復이나 杜琮을 따라다녔던 畢誠도 이각과 마찬 가지로 번진에서 맺은 인적관계를 바탕으로 성공적인 관료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 동안 연구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唐 後期 藩鎭에서 번수인 절도사가 다른 번진으로 임지를 옮겨갈 때 따라가서 막직관으로 활동하였던 인물들의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상당한 수에 이르렀다. 또한 隨府過程을 통해 맺어진 인적관계를 바탕으로 관료로 진출하였던 인물도 상당한 수에 이르렀으며, 관료로 진출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사례 역시 확인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연구자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막직관들을 隨府幕職官이라 명명하고, 이번 연구를 통해 節度使와 隨府幕職官 사이의 인적관계가 관료사회에서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분석해보려 한다.
    이를 위하여 우선 節度使의 移鎭 事例를 분석해보겠다. 唐代에 조정의 고위관료로 재직하다가 절도사로 부임하거나, 번진의 절도사가 조정에 들어와 재상에 올랐던 사례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憲宗 元和10年 6월 처음으로 守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되어 재상에 올랐던 裴度의 경우는 4번이나 재상에 임명되었고, 그 중 3번은 번진의 절도사로 부임하면서 재상 직에서 물러났다. 배도는 元和10年 6월부터 元和12年 7월까지 재상으로 재직한 후 彭義節度使로 부임하면서 재상에서 물러났다. 이후 元和13年 11월 조정으로 돌아와 5개월간 다시 재상으로 재직하다가 河東節度使로 出鎭하였다. 河東節度使로 재직하던 배도는 穆宗 長慶2年 11월 다시 재상으로 복귀했다가 3개월 후에 罷職되었다. 배도는 敬宗 寶歷2年 2월에 4번째 재상에 임명되어 4년 7개월을 재직하고는 山南東道節度使로 나가 관직생활을 마감하였다. 연구자는 裴度처럼 재상과 절도사를 오갔던 사례를 조사하기 위해 막직관에게 동천 참여가 허용되었던 德宗 貞元9年 이후 임명되었던 재상의 관력을 조사하였다. 德宗 貞元9年 이후 임명되었던 재상은 135명이다. 135명의 재상 중에 번진의 절도사에 임명되었던 경우가 72 사례나 되었다.
    다름으로는 절도사와 재상을 오갔던 사례를 기초로 절도사로 재직하던 시기에 벽소했던 막직관을 찾아 절도사가 이진할 때 隨府하였던 경우를 같이 조사하겠다. 앞의 연구의 내용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절도사가 移鎭할 때 따라 다녔던 막직관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隨府幕職官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 막직관과 절도사의 관계가 어디까지 연결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특히 절도사가 조정으로 들어갈 때 따라가 관료로 연결되는 경우를 조사하면 벽소과정을 통해 맺어진 인적관계가 어떠한 작용을 하였는지도 살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어 관직 생활 과정에 번진에서 맺었던 관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는지 까지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唐 後期 藩鎭 幕職官의 존재형태가 좀 더 명확하게 밝혀질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당 중기 이후 조정의 고위 관직자가 절도사에 임명되어 번진에 부임하거나, 절도사로 번진에서 근무하다가 조정에 들어와 재상을 비롯한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더불어 번진에서 막직관으로 근무하다가 조정의 관료로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과정에서 같은 번진에서 절도사와 막직관으로 근무하였던 자들이나, 막직관으로 근무하였던 자들 사이에 일정한 유대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번진에서 이루어진 벽소 과정과 동료로서 근무하면서 맺어진 상호 관계가 관료 사회로까지 연결되었다.
    그동안 연구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 후기 번진에서 번수인 절도사가 다른 번진으로 임지를 옮겨갈 때 따라 가서 막직관으로 활동하였던 인물들의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상당한 수에 이르렀다. 또한 수부(隨府) 과정을 통해 맺어진 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관료로 진출하였던 인물도 상당한 수에 이르렀으며, 관료로 진출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사례 역시 확인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연구자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막직관들의 번진 근무와 관직 경력을 조사하여 이 과정에서 양자 사이의 인적 관계가 관직 경력과 승진 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연구는 당 후기 관료제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영문
  • After the mid-Tang Dynasty, a high-ranking official was appointed as Military Commander in the Border Region, or worked as Military Commander in the Border Region entering the government and entering high-ranking posts, including the finance minister. In addition, there were many cases in which the secretary of prosperity entered the bureaucracy. In this process, you can see that there is a certain bond between those who served as commanders and secretaries in the same region and those who served as colleagues.
    According to research conducted by researchers, many of the secretaries followed the late commander of the Tang Dynasty when he moved to other regions. In this process, there were quite a few people who entered the bureaucracy through ties, and this relationship continued even after becoming a bureaucrat. The researchers examined the careers of secretaries who had shown this and analyz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당 중기이후 조정의 고위 관직자가 절도사에 임명되어 번진에 부임하거나, 절도사로 번진에서 근무하다가 조정에 들어와 재상을 비롯한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더불어 번진에서 막직관으로 근무하다가 조정의 관료로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과정에서 같은 번진에서 절도사와 막직관으로 근무하였던 자들이나, 막직관으로 근무하였던 자들 사이에 일정한 유대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번진에서 이루어진 벽소 과정과 동료로서 근무하면서 맺어진 상호 관계가 관료 사회로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憲宗 元和 7년(812) 李珏은 진사 시험에 좋은 성적(高第)으로 합격하였지만,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각처럼 과거에 합격하고도 초임직에 임명되지 못하는 경우는 관료적체가 심각하여 출신자에게 까지 대선기간 적용이 확대된 상황에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관직에 임명되지 못한 이각은 河陽절도사 鳥重胤에게서 벽소를 제의받고는 하양의 節度推官으로 나아갔다. 하양에서 추관으로 재직하면서 이각은 拔萃科를 통과하였고, 그 덕택에 渭南尉에 보임되었다. 이후 그는 左拾遺를 거쳐 下邽令으로 승진하였다. 이각이 하규령에 임명되어 지방관으로 나갔던 것은 ‘수차에 걸친 간언에도 남아있지 못하고 하규령으로 나갔다(珏以數諫不得留 出爲下邽令)’라는 기록을 통해 원하던 바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寶曆 원년(825) 鄂岳절도사에 임명된 牛僧儒가 벽소를 제의하자 이를 받아들여 掌書記로 나가는 선택을 하였다. 이각은 장서기로 재직하면서 우승유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이각은 殿中侍御史, 禮部員外郞, 吏部원외랑, 司勳원외랑 知制誥, 度支郞中 지제고, 翰林學士를 거친 후 文宗 大和 7년(833)에 中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이각이 승진하는 과정에는 번진에서 근무를 통하여 맺었던 우승유, 李宗閔 등과의 인연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문종 長慶 2년(822) 浙西관찰사에 임명되었던 李德裕는 武宗 會昌 6년(846)까지 24년 동안 절서(穆宗 장경 2년(822) ~ 문종 대화 3년(829)), 義成(문종 대화 3년(829) ~ 대화 4년(830)), 劍南西川(대화 4년(830) ~ 대화 6년(832)), 산남서도(山南西道, 대화 8년(834)), 절서(대화 8년(834) ~ 대화 9년(835)), 절서(문종 開成 원년(836) ~ 개성 2년(837)), 淮南(개성 2년(837) ~ 개성 5년(840)), 荊南(회창 6년(846)) 등 8 번에 걸쳐 관찰사와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덕유의 막직관으로 근무하였던 자 중에 劉三復은 문종 대화 8년(834) ~ 대화 9년(835) 사이 절서 번진 1회를 제외하고 7번을 막직관으로 따라 다니며, 근무하였다. 이덕유가 절도사로 근무할 당시 유삼복 외에도 李蟾은 절서, 의성, 검남서천에서, 杜顗와 陳修古는 절서와 회남에서 따라 다니며 막직관으로 활동하였다.
    덕종 정원 17년(801) ~ 順宗 永貞 원년(805) 容管절도사에 임명되었던 위단(韋丹)도 검남동천(순종 영정 원년(805) ~ 헌종 원화 원년(806)), 하중(원화 원년(806)), 강서(원화 2년(807) ~ 원화 5년(810))까지 10년 동안 4 번진의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위단이 번진을 옮길 때마다 王叔雅가 모두 따라가서는 막직관으로 근무하였다. 또한 문종 대화 8년(834) ~ 개성 2년(837) 忠武절도사에 임명되었던 杜悰은 회남(무종 회창 2년(842) ~ 회창 4년(844)), 검남동천(회창 5년(845) ~ 宣宗 大中 2년(848)), 검남서천(대중 2년(848) ~ 대중 6년(852)), 회남(대중 6년(852) ~ 대중 9년(855)), 鳳翔(懿宗 咸通 4년(863) ~ 함통 10년(869)) 까지 35년 동안 6 번진의 절도사를 역임하였는데, 이 때 畢諴(충무, 회남), 楊收(회남, 검남동천, 검남서천), 楊嚴(검남서천, 회남) 등이 따라 다니며 막직관으로 활동하였다. 이 중 이덕유를 따라 다녔던 유삼복이나 두종을 따라다녔던 필함이 조정의 관료로 진출하는 과정은 이각의 사례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동안 연구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 후기 번진에서 번수인 절도사가 다른 번진으로 임지를 옮겨갈 때 따라 가서 막직관으로 활동하였던 인물들의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상당한 수에 이르렀다. 또한 수부(隨府) 과정을 통해 맺어진 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관료로 진출하였던 인물도 상당한 수에 이르렀으며, 관료로 진출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사례 역시 확인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연구자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막직관들의 번진 근무와 관직 경력을 조사하여 이 과정에서 양자 사이의 인적 관계가 관직 경력과 승진 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이와 같은 연구는 당 후기 관료제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자는 지금까지 당대 번진의 행정 담당자인 막직관 집단에 대해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 연구 역시 그동안 연구의 연장선에 있다. 연구자는 궁극적으로 당대 번진의 막직관 집단에 대한 연구 결과를 하나의 저서로 출판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연구의 결과는 학술지를 통해 발표할 것이다.
    당대 막직관 집단에 대한 연구는 강의 자료로서 활용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당 후기는 중국사에서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시기이다. 일찍이 소위 ‘당송변혁기론’과 연계된 시대구분의 논쟁이 되었던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시대구분과 관련된 논의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당 후기에서 송대로 이행되는 시기에 보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화상은 당송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 번진에 대한 이해는 번진 자체가 당대적 통치의 모순의 결과물로서,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을 모색하는 단계로서, 당 후기 사회의 변화가 발생하였던 무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지고 있기 때문에 당송사회로 이행과정에 나타나는 변화상을 파악하는데 무엇보다 필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 번진의 막직관 집단은 통치집단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존재이며, 그 변화에 대응하여 보여주는 막직관의 외적, 내적 모습은 송대 사대부 계층의 출현과 맞물려 있다고 보기 때문에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고, 지속적인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연구자는 절도사가 다른 번진으로 부임해 나가는 이진(移鎭) 상황과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막직관의 수부(隨府) 사이에 나타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인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분석을 시도하였다. 더 나아가 번진에서 맺어진 다양한 인적 관계가 관료로 진출한 이후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얻어진 결과를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번진에서 이루어진 벽소와 이 과정에 맺어진 인적 관계가 당 후기 관료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관료 사회에서 인적 관계는 무엇 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당 후기 우이당쟁(牛李黨爭)에서 보이듯이 인적 관계의 형성과 결합의 영향은 어떤 시대보다 컸다고 할 수 있는데, 번진은 인적 관계가 형성되는 장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둘째, 벽소를 통해 맺어진 인적 관계를 살펴 보면 당 후기 관료나 문사(文士) 계층이 당시의 인사 정책과 인사 적체 문제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한 모습은 막직관이 번진에 벽소되어 번진행정을 담당했던 존재로서 당조의 번진 정책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기존의 수동적인 해석을 극복하고, 막직관이 관료제의 운용이나 사회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주체로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셋째, 막직관은 번진에서 근무하면서 절도사나 동료들과 맺은 인적 관계를 관료로 진출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를 통해 이를 이용하여 인사 정책에 대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번진의 절도사에 임명되었던 자들은 왕조의 고위 관료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절도사로 재직하다가 중앙에 복귀하여 고위관료가 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이는 절도사 계층이 지방에서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관료 사회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번진에서 막직관으로 결합한 자들은 절도사와의 인적관계를 맺어 관료로 진출하거나 진출한 이후에 승진과정에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존 연구를 보완하여 막직관 실태를 다각적이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연구는 막직관이 다양한 이해관계를 매개로 번진과 결합하였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분류하고 어떠한 존재 형태를 보였는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때문에 이 연구는 기존 연구의 한계에서 출발하였다고 하겠다. 연구자는 절도사의 이진에 직면하여 수부하거나 재지에 남기로 선택하였던 막직관의 결정 과정에는 벽소과정에 나타나는 이해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고 본다. 그래서 이 연구의 주제로 삼았던 수부막직관, 즉 절도사를 따라 다른 번진으로 옮겨갔던 막직관의 결정은 이후 관직으로 복귀나 승진과 관련된 인적관계를 위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절도사를 따라 다녔던 수부막직관에 대한 분석은 번진에서 활동했던 막직관 계층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의 일면을 밝혀 줄 것으로 기대 된다. 물론 좀 더 명확한 이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재지에 남았던 막직관에 대한 분석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는 다른 연구를 통해서 진행할 예정이다.
  • 색인어
  • 幕職官 隨府, 安史의 亂, 唐宋變革, 藩鎭體制, 使府, 節度使, 使職, 辟召制, 牛李黨爭, 宰相, 幕職官, 人的關係, 陞進, 冬薦制, 待選期間, 墓誌銘, 官僚制, 行政機構, 官僚社會, 在地勢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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