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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 양명학을 둘러싼 담론 분석 -메이지기 이후 양명학 현창의 ‘본질’과 ‘현상’을 중심으로-
Analysis of Discourse on Modern Japanese Yangming Studies -Focusing on the 'essence' and 'phenomenon' of prominence for the Yangming Studies after the Meiji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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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9-S1A5B5A07-2019S1A5B5A07091434
선정년도 2019 년
연구기간 1 년 (2019년 09월 01일 ~ 2020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김선희
연구수행기관 아주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2015년 2월12일 아베(安倍) 수상은 제189회 국회의 시정방침 연설에서 “일본을 되돌린다.”라는 목표를 향해 대개혁을 하자고 호소하면서 조슈(長州) 출신의 막말기 지사이자 양명학자였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소환하였다. 또 메이지 150년 기념사업은 ‘계승해야 할 일본의 영광’을 드높이고 ‘위대한 선조’를 현창하면서 그들의 사상적 기둥이 양명학이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이렇게 ‘양명학’은 일본의 중앙정치에 종종 회자되었다. ‘메이지 유신’과 ‘지사’, ‘양명학’은 역대 일본 수상들도 즐겨 쓰는 하나의 수사였으며, 이것은 육상자위대 총감부에서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양명학 현창과 함께 양명학=우익 경향이라는 인식 틀을 형성하는 하나의 매개가 되었다.
    일본의 근대 양명학을 우익 경향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사상사 연구에 있어서 두 가지 축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일본의 근대 양명학 연구가 어떠하였는지, 그 학문적 양상에 관한 축이다. 메이지(明治) 30년대 도쿄(東京)제국대학의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郎)나 다카세 다케지로(高瀬武次郎), 또는 다케베 돈고(建部遯吾)같은 학자들, 또 전후의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에 이르기까지 서로 결을 달리하면서도,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넘어 서구 열강과 동일선상에서 일본이란 국가를 자리매김하면서 국민도덕을 부르짖거나, 서구문명의 폐해를 씻어줄 ‘일본정신’을 현창하는 것이 기본적 입장이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양명학이 ‘활용’되는 역사적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축은 일본의 양명학 관련 저술이 우익인사에 의한 것이 많다는 현실과 함께 현재의 우리와 일본의 유학연구에 대한 자세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각성이다. 많은 일본인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바이자, 놀라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유학을 고민하고 문제로 삼는 자세의 차이일 것이다. 일본의 연구자들이 유학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연구대상이 되는 개개인에 대한 분석, 즉 지적인 측면에 머무는 반면,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유학의 현재적, 실천적인 의의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단순한 지적(知的) 대상으로서 유학 연구자가 아니라 유학의 본질을 논하고 고민하는 실천적 자세가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유학이 소환되는 근본적인 이유라 생각된다. 본 연구는 일본의 근대 양명학을 둘러싼 이와 같은 물음에서 출발한다.
    한일 양국의 선행연구는 중국철학, 중국사상사, 일본사상사, 일본사 등 연구자의 전공에 따라서 관점과 서술에서 차이가 보이는데, 크게 나누면 중국철학 연구자의 시각과 일본사상사 연구자의 시각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주로 양명학이라는 외래사상이 일본에 수용되어 정착하는 과정을 살피면서도, 그 본질에서 벗어난 일본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한다.
    반면 후자는 당시 일본의 개별 사상가들이 처한 역사적 현실과 시대적 배경을 연관 지으면서 사상형성을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근대 일본의 양명학을 직접적으로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주로 한일 양명학의 비교연구나 박은식과 근대 일본의 양명학과의 관계를 논한 것이 있고, 근대 일본의 양명학을 직접 다룬 연구는 일본의 중국철학 연구자의 입장과 동일선상에 있으면서도 우리나라 연구자가 유학연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있어 특징적이다. 
    본 연구는 선행연구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선행연구에서 보이는 양명학의 본질과의 거리를 묻는 시각을 재검토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하나의 흐름으로 등장한 근대 일본의 양명학 현창과정을 면밀히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본 연구를 수행하겠다. 이를 통하여 본 연구는 한국과 일본의 선행연구의 시각과 문제 제기의 ‘현재적 의의’를 음미하고, 실제 일본의 근대에 양명학이 어떻게 ‘연구’되고 ‘활용’되었는지를 고찰함으로써 그것의 사상사적 의미를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과정에서 산출될 것으로 예상되는 기대효과와 활용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연구의 중간 결과물은 일차적으로 일본의 민관을 아우르는 근대 지식인들이 수행한 양명학 관련 연구의 계보와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완성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자료는 인물, 작업, 내용 별로 분류하고 각각의 특징까지 정리하여 후속 연구에 활용되도록 할 것이다.
    둘째, 당대 양명학 현창 운동가들의 사회적 활동과 ‘정치적 활용’에 대한 내용을 조사하고 표로 정리하여 기초자료로서 후속 연구에 활용되도록 할 것이다. 학자들에 의한 양명학 연구 자체에 대한 논의 외에, 민간결사를 중심으로 ‘일본정신’과 ‘도덕심’이 강조되는 문맥에서 행해진 양명학 현창 운동은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 만들기에 일정정도 역할을 하였다. 현실 정치와 맞물린 양명학 현창 운동에 대한 기초 자료 정리가 될 것이다.
    셋째, 연구의 최종 결과물은 논문으로 정리하여 한국과 일본의 관련학계에 그 성과를 발표할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도 각종 미디어나 저술에 자주 등장하는 언설의 형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즉 ‘양명학의 완성은 근대 일본이었다’, ‘명분과 존재론에 집착하는 사변적인 주자학보다 실리와 실천에 중점을 둔 실학으로서의 양명학은 중국과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전통에 부합하였다’는 언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과정과 구체적 내용을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 본 연구는 향후 근대 일본의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박은식이나 중국의 쑨원(孫文), 량치차오(梁啓超) 등 조선과 중국의 근대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일본의 양명학을 해석하고 수용하는지를 살피고, 동아시아 근대 ‘지’가 형성되는 단면을 고찰하는 후속 연구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부연하면, 조선에서 양명학파는 마이너리티였고, 근대 이후 ‘조선학 운동’시기에도 정인보를 중심으로 하는 양명학 연구 역시 조선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한 지향점을 가진 것으로 국가나 정치에 대한 인식의 기본 바탕으로 작용하는 특징은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정인보의 학문적 전통은 민영규 등으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학술적으로 전승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 ‘이행’은 유교사회가 비유교적 서구형 사회로 이행하는 것에서 일치하며, 삼국 모두 정체(政體)의 측면에서는 유교적 군주제와 그에 수반되는 법제가 모두 해체되었다. 이 과정을 ‘근대 양명학’을 중심으로 볼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점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근대 일본사상사뿐 아니라 조선사상사, 중국사상사와 접변하는 연구로서 학제 간 융합을 꾀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
    신청자 개인으로서는 본 연구를 시작으로 패전 시기까지 후속 연구를 순차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며, 최종적으로 ‘메이지 유신에서 패전에 이르는 시기 일본의 양명학 현상’이라는 주제의 저술을 목표로 하고 있다.
  • 연구요약
  • 근대 일본의 양명학 연구에서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郎)의 연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심축이 되어왔다. 본 연구는 첫째, 근대 일본 지식인들의 양명학 연구가 갖는 의미를 사상사적으로 고찰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노우에는 서양철학의 방법론에 기초하여 󰡔일본 양명학파의 철학󰡕(1900), 󰡔일본 고학파의 철학󰡕(1902), 󰡔일본 주자학파의 철학󰡕(1905)을 통해 일본 유학사를 재구성하였다. 이것은 이노우에의 3부작 ‘작업’이 갖는 최대 의의이다.
    본 연구의 주된 관심은 이노우에를 비롯한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다카세 다케지로(高瀬武次郎)같은 이들의 양명학 관련 ‘작업’이 선행연구가 제기하는 양명학의 본질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라는 문제보다는 당시에 왜 그러한 담론 ‘선택’이 필요하였고 이후 일본사회에서 하나의 경향으로서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는지, 그 의식의 ‘원형’에 대한 고찰에 있다.
    본 연구의 두 번째 추진 전략은, 근대 일본의 양명학을 하나의 정신적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고 ‘사회운동’으로 현창해 온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후 ‘대일본제국헌법’(1889)과 ‘교육칙어’(1890)의 발포로 국체가 확립되면서, 동양사상의 정수인 유학사상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현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신민의 ‘수양’에서 시민의 ‘교양’으로서 다시금 양명학이 채택된다. 이렇게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일본에서 양명학이 꾸준하게 소환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메이지 유신의 성공에는 양명학이라는 사상적 토대가 있었다’는 언설을 비판적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
    이 관점에는, 메이지기 양명학 연구의 주된 논리 중 하나였던 체제수호의 관학으로서의 주자학 vs 주자학의 비판담론으로서 양명학이라는 구도가 존재한다.
    또한, 근대 지식인들의 연구에서 막말 메이지 유신기에 활약하였던 지사들을 ‘양명학파’로 분류함으로써, 유신 지사의 사상적 토대로서의 양명학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왔다. 즉, 일본의 근대 양명학은 일본의 근대 내셔널리즘이 만들어낸 정치언설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현창된 양명학 ‘운동’을 재검토하는 것은, 양명학에서 이른 바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근대성’을 확인하고 주자학적 사고의 해체 과정에서 양명학이 성립하였다는 도식이 근대에 활약한 유학적 소양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근대의 스토리’일지라도, 현대까지도 이어지는 양명학을 향한 ‘특정한’ 시선의 본질을 규명하고 그것이 갖는 사회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데 유의미하다고 확신한다. 지금도 그 맥을 잇는 이러한 ‘현상’을 ‘근대의 스토리’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서 치부해 버리고 말 것이 아니라, 근대 일본의 양명학을 구성하는 한 축으로 설정하고 그 의미를 고찰하는 것은, 모두에서 제기한 ‘근대 일본 양명학의 우익 경향’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도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본 연구의 세 번째 추진전략은, 패전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양명학에 대하여 일본에서 전개된 연구의 경향을 밝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의 중국학 연구자들과 일본사상사 연구자들 사이에는 일본 양명학을 설명하는 관점과 내용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다. 이 점을 자세히 밝힘으로써 일본에서 양명학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고찰하여, 우리의 양명학 연구와 비교의 지평을 열고자 한다.
    위와 같은 연구수행을 위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대 학계를 중심으로 활약한 지식인과 운동으로서 양명학 현창에 관여했던 이들을 구분, 이원적으로 접근하면서 이들의 양명학 관련 작업을 표로 정리하겠다.
    둘째, 시야를 확대시켜 메이지 유신 시기 양명학의 ‘정치적 활용’에 대한 실증적 연구와 계보, 성과를 정리하고자 한다. 메이지를 전후해서 패전에 이르는 시기의 양명학 관련 사회적 활동을 정리함으로써 근대 일본의 ‘양명학 현상’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한중일의 ‘근대’를 논할 때 종종 ‘탈아입구’에 성공하고 가장 먼저 근대국가를 건립한 일본의 특징을 언급할 때, 메이지 유신 지사의 사상적 토대가 양명학에 있었다고 회자된다. 이는 현재까지도 역대 일본 수상들이 즐겨 쓰는 수사이기도 하다. 한편, 1970년 육상자위대 총감부에서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양명학을 혁명철학이라고 현창한 사실은 양명학=우익 경향이라는 인식 틀을 형성하는 하나의 매개가 되었다. 본고는 일본의 근대 양명학 ‘현창’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사상사적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일본은 에도 시대에 들어 유학연구과 이전에 비해 활발해 지면서 ‘유자’라 불리는 지식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유학에 대한 태도는 주자학 중심이던 조선과 달리, 주자학과 반주자학, 양명학과 그에 대한 비판, 신유학의 비판에서 성립한 고학 등, 매우 다양하였다. 이 점은 에도 시대 후기에도 이미 지적되는 바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에도 초기 주자학자로 분류되는 후지와라 세이카에 대해 그의 수제자 하야시 라잔은 왕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으며, 에도 후기 히로세 단소도 󰡔유림평(儒林評)󰡕(1836)이란 저술에서 일본의 학자의 7,8할이 절충학자라고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본의 주자학자, 일본의 양명학자 등 학파의 계보로 구분하는 방식이 여전한 것은, 도쿄제국대학 제1회 졸업생이었던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힘이다. 그는 도쿄제대 졸업 후 독일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독일의 관념론철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한편, 󰡔칙어연의󰡕(1891), 󰡔교육과 종교의 충돌󰡕(1893)을 저술하여, 천황제 근대 국가 일본의 기본 방침이 고스란히 담긴 󰡔교육칙어󰡕를 해설하고 외래사상인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국민도덕 함양을 강조하였다. 또한 서양철학의 방법론에 기초하여 저 유명한 3부작 󰡔일본 양명학파의 철학󰡕(1900) 󰡔일본 고학파의 철학󰡕(1902), 󰡔일본 주자학파의 철학󰡕(1905)을 통해 일본 유학사를 재구성하였다. 이것은 이노우에의 3부작 ‘작업’이 갖는 최대 의의라 하겠다. 또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의 󰡔왕양명󰡕(1893)에서 유학을 서양철학과 비교하면서 중국철학의 정점으로서 양명학을 발견하고 양명학의 진보성을 강조하면서, 메이지 유신과 양명학을 연결시켰다. 같은 시기 민간을 대표하는 지식인인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도 󰡔대표적 일본인󰡕(1894)을 통해, 메이지 유신에 활약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를 양명학자로 규정하면서 그를 상찬한다.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를 기독교적 양심으로 등치시키며 양명학과 기독교의 유사성을 설파한다. 메이지기 일본의 양명학 연구는 실천성을 강조하면서 민간에서 일어난 것이 큰 특징이라 하겠다. 다만 그들이 이해한 양명학은 형식주의의 주자학에 대비되는 심정주의적인 양명학이라는 도식에서 비롯한 것이지, 양명학의 사상적 내용에 대한 구체성은 보이지 않는다.
    1890년 교육칙어 발포, 1890년대 중반, 󰡔동양철학󰡕 󰡔주자학󰡕 󰡔양명학󰡕 등의 기관지 발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를 경험하면서, 유학적 언설 중에서 특히 양명학이 시대구제의 사상이라는 인식이 더욱 강화된다. 하나의 사상운동으로서 양명학 현창의 목적이 잘 드러나는 기관지 󰡔양명학󰡕의 발간사에는, 양명학 자체에 대한 내용보다는 세상을 혁신하고 현 풍조를 쇄신하여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메이지 유신을 완성했던 유신 지사들의 사상이었다고 일컬어졌던 양명학이 여기서는 일본의 오래된 ‘전통’과 ‘풍속’을 지키는 데 유용한 철학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근대 일본의 양명학이 국수주의적 성격을 띠는 것은 그 시작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고 할 것이다.
    1900년대 초에 발간된 󰡔왕학잡지󰡕는 이전의 국가진흥을 위한 충효윤리 배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양명학을 배워야 하는 의미를 확장하여 서술한다. 현재 도덕이 쇠퇴하고 풍속이 어지러운 이유를 심성수양이 부족한 탓이며, 양명학을 고취하는 이유는 정신수양에 있다고 강조한다. 또 비슷한 시기에 창설된 세심동학회가 발간한 󰡔양명󰡕은 일본과 서양이 비교되면서 우월함이 강조되는데 “우리 황국만은 왕도가 탕탕하게 행해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만국이 신속히 우리 왕도에 다르도록 해야만 한다”며, 이 원대한 의도를 오늘날의 커다란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양명학을 심신수양의 학문으로 삼아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문맥은 당초부터 있었으나, 여기서는 그야말로 ‘제국’의 의식까지 드러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메이지 기 성립한 개혁사상으로서의 양명학, 메이지 유신을 뒷받침한 양명학, 국민도덕으로서의 양명학, 정신수양으로서의 양명학이라는 상(像)은 그것이 당대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었다는 점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메이지 유신과 연동되어 소환되는 ‘양명학’의 실천적 성격 또는 혁명적 성격은, 당시 시대상황이 만들어낸 하나의 상(像)으로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독일 관념철학의 유입과 그것을 번역할 때 한학적 소양을 가진 지식인들에게 양명학의 ‘양지’는 ‘이성’과 결부되어 이해되기 쉬웠고, 또 우치무라 간조처럼 양지를 기독교적인 양심과 천리라고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노우에 데쓰지로나 다카세 다케지로가 서양철학의 틀을 빌려 양명학에 접근했다면, 우치무라는 양명학을 실천운동으로서 접근하였다.
    단, 막말부터 메이지 기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일종의 ‘붐’으로 당시에는 양명학 외에도 선(禪)이나 기독교도 유사한 문맥에서 관심이 높아진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근대 일본에서의 양명학 이해의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 시기에서 요청되었던 ‘시대성’을 강력하게 반영한 것으로서 봐야한다. 그렇지 않고 당시의 언설을 추수하는 형태로, 양명학에 ‘실천철학’으로서 성격을 묻거나, 천주를 향하는 기독교적 양심을 양명학의 양지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려거나, 혹은 서양 철학의 용어를 좇아 해석하려는 시각은 양명학 현창이 왜 근대 일본에서 하나의 붐처럼 일어났는지에 대한 본질을 가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복고적 유신’ 후 천황을 정치적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 건립에 요구되었던 다양한 사상(事象)의 문맥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서양의 국민국가를 본뜬 국가에 필요한 신민으로서의 국민을 만들 ‘도덕’의 창출, 서구에 비견할 수 있는 일본적 전통이라 할 만한 정신의 창출, 그리고 오랜 역사동안 가깝고도 가장 강렬한 타자로서의 중국을 ‘지나’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할 시대적 요청의 반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영문
  • When discussing the "modern era" of Korea, China and Japan, it is often said that the one of reason Japan succeeded “the exit from Asia to Europe” and built a modern nation state, is the ideological foundation of Meiji revolution was Yangming Studies. This study is focusing on phenomenon of prominence for the Yangming Stuides in modern Japan.
    Confucian intellectuals in Edo period were different to Joseon Confucian intellectuals focuced on the doctrines of Chu-tzu. Their attitudes toward Confucianism were various. For example, Fujiwara Seika, who was classified as an early Edo scholar, was criticized by his disciple Hayashi Rajan for not just as Neo-Confucian Scholar and Hirose Tansō also said that seventy or eighty percent of Edo scholars were compromisers.
    Nevertheless it is still very strong perspective on genealogy of Japanese scholars and it is due to trilogy of Inoue Tetsujiro in 1900~1905. He who was a the first Tokyo university graduate introduced classical German idealistic philosophy to Japan and emphasized national morals. Miyake Setsurei writer WangYangming, 1893, compared Confucianism with Western philosophy and stressed on progressive idea of Yangming studies which would serve the relations between Meiji revolution and Yangming studies. Uchimura Kanjo insisted that Christianity was the same to Yangming studies and emphasized practical spirits. But we need to be careful their way of understanding Yangming studies were not based on its ideas but comparison with speculative doctrines of Chu-tzu.
    Among Confucian theories, the perception that Yangming studies was the idea of the salvation of the times was further strengthened with some historical background such as the logic of 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1890), the Sino-Japanese War(1894~5) and the russ-japanese war(1904~5). For example, the journal Yomeigaku which was published with a sense of purpose to reform the world and revamp the current trend. Its perspective of Yangming studies had changed as a philosophy that is useful for protecting old Japanese traditions and customs. The journal Ogakuzasi published in the early 1900s, went one step further than before and expanded the meaning of learning Yangming studies-spiritual cultivation. The journal Yomei also published in the same period insisted superiority of Japan comparing the Western.
    It is desirable to interpret a practical Yanming studies as a presentation created by the situation of the times. Not only Yanming studies but also Zen and Christianity became more interested in a similar context, Japanese modernities.
    In conclusion, the prominence for ths Yangming studies in the modern era, Japan, should be considered as a reflection of creation of nations morals of a new Japan like a Western nation, and request to establish China as a "Gina"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메이지 유신’과 ‘지사’, ‘양명학’은 역대 일본 수상들이 즐겨 쓰는 하나의 수사였으며, 이것은 육상자위대 총감부에서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양명학 현창과 함께 양명학=우익 경향이라는 인식 틀을 형성하는 하나의 매개가 되었다. 본고는 일본의 근대 양명학 ‘현창’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사상사적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신유학으로 불리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뿌리는 동일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리(理)에 대한 해석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성즉리’를 주장하는 주자학에 반해 양명학은 사람의 마음이 곧 리라고 하는 ‘심즉리’를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주자학 중심이었던 조선과 달리 일본은 에도 시대에 들어 유학연구과 이전에 비해 활발해 지면서 ‘유자’라 불리는 지식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유학에 대한 태도는 다양하여 주자학과 반주자학, 양명학과 그에 대한 비판, 신유학의 비판에서 성립한 고학 등, 조선의 지식인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 점은 에도 시대 후기에도 이미 지적되는 바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히로세 단소(廣瀬淡窓)는 유학자들의 학풍과 행장, 인품에 대한 논평을 한 것인데, 단소는 일본의 유학전개를 3시대로 구분하여 논하면서, 결론적으로 일본의 학자의 7,8할이 절충학자라고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본의 주자학자, 일본의 양명학자 등 학파의 계보로 구분하는 방식이 여전한 것은, 도쿄제국대학 제1회 졸업생이었던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힘이다. 그는 도쿄제대 졸업 후 독일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독일의 관념론철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한편, 󰡔칙어연의󰡕(1891), 󰡔교육과 종교의 충돌󰡕(1893)을 저술하여, 근대 일본의 기본 방침이 고스란히 담긴 󰡔교육칙어󰡕를 해설하고 외래사상인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국민도덕 함양을 강조하였다. 또한 서양철학의 방법론에 기초하여 저 유명한 3부작 󰡔일본 양명학파의 철학󰡕(1900) 󰡔일본 고학파의 철학󰡕(1902), 󰡔일본 주자학파의 철학󰡕(1905)을 통해 일본 유학사를 재구성하였다. 이것은 이노우에의 3부작 ‘작업’이 갖는 최대 의의라 하겠다. 또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의 󰡔왕양명󰡕(1893)에서 유학을 서양철학과 비교하면서 한학이 아니라 중국철학으로서 자리매김하면서, 그 정점으로서 양명학을 발견하고 양명학의 진보성을 강조하면서, 메이지 유신과 양명학을 연결시켰다. 동시에 민간을 대표하는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도 󰡔대표적 일본인󰡕(1894)을 통해, 메이지 유신에 활약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를 양명학자로 규정하면서 그를 상찬한다. 메이지기 일본의 양명학 연구는 실천성을 강조하면서 민간에서 일어난 것이 큰 특징이라 하겠다. 다만 그들이 이해한 양명학은 형식주의의 주자학에 대비되는 심정주의적인 양명학이라는 도식에서 비롯한 것이지, 양명학의 사상적 내용에 대한 구체성은 보이지 않는다.
    1890년 교육칙어 발포, 1890년대 중반, 󰡔동양철학󰡕 󰡔주자학󰡕 󰡔양명학󰡕 등의 기관지 발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를 경험하면서, 유학적 언설 중에서 특히 양명학이 시대구제의 사상이라는 인식이 더욱 강화된다. 하나의 사상운동으로서 양명학 현창의 목적이 잘 드러나는 기관지 󰡔양명학󰡕의 발간사에는 양명학이 어떠한 철학사상인지에 대한 설명보다, 세상을 혁신하고 현 풍조를 쇄신하여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메이지 유신을 완성했던 유신 지사들의 사상이었다고 일컬어졌던 양명학이 여기서는 일본의 오래된 ‘전통’과 ‘풍속’을 지키는 데 유용한 철학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근대 일본의 양명학이 국수주의적 성격을 띠는 것은 그 시작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고 할 것이다. 1900년대 초에 발간된 󰡔왕학잡지󰡕는 이전의 국가진흥을 위한 충효윤리 배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양명학을 배워야 하는 의미를 확장하여 서술한다. 현재 도덕이 쇠퇴하고 풍속이 어지러운 이유를 심성수양이 부족한 탓이며, 양명학을 고취하는 이유는 정신수양에 있다고 강조한다. 복잡한 세상에서는 경서연구나 심대한 이학보다는 “간이직재”한 양명학이야말로 현실의 폐단을 극복하는 학문이라고 평가한다. 또 비슷한 시기에 창설된 세심동학회가 발간한 󰡔양명󰡕은 일본과 서양이 비교되면서 우월함이 강조되는데 “우리 황국만은 왕도가 탕탕하게 행해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만국이 신속히 우리 왕도에 다르도록 해야만 한다”며, 이 원대한 의도를 오늘날의 커다란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양명학을 심신수양의 학문으로 삼아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문맥은 당초부터 있었으나, 여기서는 그야말로 ‘제국’의 의식까지 드러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고에서는 근대 일본에서 양명학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메이지 기 성립한 개혁사상으로서의 양명학, 메이지 유신을 뒷받침한 양명학, 국민도덕으로서의 양명학, 정신수양으로서의 양명학이라는 상(像)은 그것이 당대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었다는 점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특히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3부작으로 대표되는 제국대학의 학자들이 구성한 일본의 ‘주자학파’ ‘고학파’ ‘양명학파’라는 학파의 성립이라는 구조는 지금도 그 틀을 벗어나서 일본의 유학사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고 있다.
    고야스 노부쿠니가 지적하듯이 근대 천황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국가 일본의 성립은 후기 미토학이 재구성한 국체이념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유학적 ‘천’의 개념이 ‘황조신’과 결합하여 천황의 국가통치의 정통성을 명확히 한 것이다. 따라서 봉건적 구제를 타파하고 유신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뜻을 둔 메이지 지사들을 사상적으로 지탱한 것은 후기 미토학이라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메이지 유신과 연동되어 소환되는 ‘양명학’의 실천적 성격 또는 혁명적 성격은, 당시 시대상황이 만들어낸 하나의 상(像)으로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독일 관념철학의 유입과 그것을 번역할 때 한학적 소양을 가진 지식인들에게 양명학의 ‘양지’는 ‘이성’과 결부되어 이해되기 쉬웠고, 또 우치무라 간조처럼 양지를 기독교적인 양심과 천리라고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노우에 데쓰지로나 다카세 다케지로가 서양철학의 틀을 빌려 양명학에 접근했다면, 우치무라는 양명학을 실천운동으로서 접근하였다.
    단, 막말부터 메이지 기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일종의 ‘붐’으로 당시에는 양명학 외에도 선(禪)이나 기독교도 유사한 문맥에서 관심이 높아진 것에 주의해야 한다. 우치무라 간조가 기독교와 양명학을 연결시키면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높이 평가했던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사이고의 유훈이라 불리는 󰡔남주유훈(南洲遺訓)󰡕이 출판된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남주유훈󰡕에 명말의 양명학자인 유종주(劉宗周)의 말이 인용된 것으로 보면, 사이고가 양명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곧바로 ‘혁명의 정신’이 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봐야한다.
    근대 일본에서의 양명학 이해의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 시기에서 요청되었던 ‘시대성’을 강력하게 반영한 것으로서 봐야한다. 그렇지 않고 당시의 언설을 추수하는 형태로, 양명학에 ‘실천철학’으로서 성격을 묻거나, 천주를 향하는 기독교적 양심을 양명학의 양지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려거나, 혹은 서양 철학의 용어를 좇아 해석하려는 시각은 양명학 현창이 왜 근대 일본에서 하나의 붐처럼 일어났는지에 대한 본질을 가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복고적 유신’ 후 천황을 정치적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 건립에 요구되었던 다양한 사상(事象)의 문맥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서양의 국민국가를 본뜬 국가에 필요한 신민으로서의 국민을 만들 ‘도덕’의 창출, 서구에 비견할 수 있는 일본적 전통이라 할 만한 정신의 창출, 그리고 오랜 역사동안 가깝고도 가장 강렬한 타자로서의 중국을 ‘지나’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할 시대적 요청의 반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활용계획>
    본 연구결과의 활용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일차적으로 일본의 민관을 아우르는 근대 지식인들이 수행한 양명학 관련 연구의 계보와 성과를 목록으로 정리하여, 후속 연구에 활용되도록 할 것이다.
    둘째, 연구수행과정에서 입수한 󰡔양명학󰡕 󰡔왕학잡지󰡕 등을 토대로, 당대 양명학 현창 운동가들의 사회적 활동과 ‘정치적 활용’에 대한 내용을 조사하고 표로 정리하여 기초자료로서 후속 연구에 활용되도록 할 것이다.
    셋째,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하여 한국과 일본의 관련학계에 그 성과를 발표할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도 각종 미디어나 저술에 자주 등장하는 ‘일본 양명학’ 언설의 형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 본 연구는 향후 근대 일본의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박은식이나 중국의 쑨원(孫文), 량치차오(梁啓超) 등 조선과 중국의 근대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일본의 양명학을 해석하고 수용하는지를 살피고, 동아시아 근대 ‘지’가 형성되는 단면을 고찰하는 후속 연구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색인어
  • 이노우에 데쓰지로, 양명학 현창, 메이지 유신, 국민도덕, 정신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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