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의 ‘근대’를 논할 때 종종 ‘탈아입구’에 성공하고 가장 먼저 근대국가를 건립한 일본의 특징을 언급할 때, 메이지 유신 지사의 사상적 토대가 양명학에 있었다고 회자된다. 이는 현재까지도 역대 일본 수상들이 즐겨 쓰는 수사이기도 하다. 한편, 1970년 육상자위대 ...
한중일의 ‘근대’를 논할 때 종종 ‘탈아입구’에 성공하고 가장 먼저 근대국가를 건립한 일본의 특징을 언급할 때, 메이지 유신 지사의 사상적 토대가 양명학에 있었다고 회자된다. 이는 현재까지도 역대 일본 수상들이 즐겨 쓰는 수사이기도 하다. 한편, 1970년 육상자위대 총감부에서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양명학을 혁명철학이라고 현창한 사실은 양명학=우익 경향이라는 인식 틀을 형성하는 하나의 매개가 되었다. 본고는 일본의 근대 양명학 ‘현창’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사상사적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일본은 에도 시대에 들어 유학연구과 이전에 비해 활발해 지면서 ‘유자’라 불리는 지식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유학에 대한 태도는 주자학 중심이던 조선과 달리, 주자학과 반주자학, 양명학과 그에 대한 비판, 신유학의 비판에서 성립한 고학 등, 매우 다양하였다. 이 점은 에도 시대 후기에도 이미 지적되는 바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에도 초기 주자학자로 분류되는 후지와라 세이카에 대해 그의 수제자 하야시 라잔은 왕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으며, 에도 후기 히로세 단소도 유림평(儒林評)(1836)이란 저술에서 일본의 학자의 7,8할이 절충학자라고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본의 주자학자, 일본의 양명학자 등 학파의 계보로 구분하는 방식이 여전한 것은, 도쿄제국대학 제1회 졸업생이었던 이노우에 데쓰지로의 힘이다. 그는 도쿄제대 졸업 후 독일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독일의 관념론철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한편, 칙어연의(1891), 교육과 종교의 충돌(1893)을 저술하여, 천황제 근대 국가 일본의 기본 방침이 고스란히 담긴 교육칙어를 해설하고 외래사상인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국민도덕 함양을 강조하였다. 또한 서양철학의 방법론에 기초하여 저 유명한 3부작 일본 양명학파의 철학(1900) 일본 고학파의 철학(1902), 일본 주자학파의 철학(1905)을 통해 일본 유학사를 재구성하였다. 이것은 이노우에의 3부작 ‘작업’이 갖는 최대 의의라 하겠다. 또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의 왕양명(1893)에서 유학을 서양철학과 비교하면서 중국철학의 정점으로서 양명학을 발견하고 양명학의 진보성을 강조하면서, 메이지 유신과 양명학을 연결시켰다. 같은 시기 민간을 대표하는 지식인인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도 대표적 일본인(1894)을 통해, 메이지 유신에 활약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를 양명학자로 규정하면서 그를 상찬한다.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를 기독교적 양심으로 등치시키며 양명학과 기독교의 유사성을 설파한다. 메이지기 일본의 양명학 연구는 실천성을 강조하면서 민간에서 일어난 것이 큰 특징이라 하겠다. 다만 그들이 이해한 양명학은 형식주의의 주자학에 대비되는 심정주의적인 양명학이라는 도식에서 비롯한 것이지, 양명학의 사상적 내용에 대한 구체성은 보이지 않는다.
1890년 교육칙어 발포, 1890년대 중반, 동양철학 주자학 양명학 등의 기관지 발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를 경험하면서, 유학적 언설 중에서 특히 양명학이 시대구제의 사상이라는 인식이 더욱 강화된다. 하나의 사상운동으로서 양명학 현창의 목적이 잘 드러나는 기관지 양명학의 발간사에는, 양명학 자체에 대한 내용보다는 세상을 혁신하고 현 풍조를 쇄신하여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메이지 유신을 완성했던 유신 지사들의 사상이었다고 일컬어졌던 양명학이 여기서는 일본의 오래된 ‘전통’과 ‘풍속’을 지키는 데 유용한 철학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근대 일본의 양명학이 국수주의적 성격을 띠는 것은 그 시작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고 할 것이다.
1900년대 초에 발간된 왕학잡지는 이전의 국가진흥을 위한 충효윤리 배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양명학을 배워야 하는 의미를 확장하여 서술한다. 현재 도덕이 쇠퇴하고 풍속이 어지러운 이유를 심성수양이 부족한 탓이며, 양명학을 고취하는 이유는 정신수양에 있다고 강조한다. 또 비슷한 시기에 창설된 세심동학회가 발간한 양명은 일본과 서양이 비교되면서 우월함이 강조되는데 “우리 황국만은 왕도가 탕탕하게 행해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만국이 신속히 우리 왕도에 다르도록 해야만 한다”며, 이 원대한 의도를 오늘날의 커다란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양명학을 심신수양의 학문으로 삼아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문맥은 당초부터 있었으나, 여기서는 그야말로 ‘제국’의 의식까지 드러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메이지 기 성립한 개혁사상으로서의 양명학, 메이지 유신을 뒷받침한 양명학, 국민도덕으로서의 양명학, 정신수양으로서의 양명학이라는 상(像)은 그것이 당대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었다는 점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메이지 유신과 연동되어 소환되는 ‘양명학’의 실천적 성격 또는 혁명적 성격은, 당시 시대상황이 만들어낸 하나의 상(像)으로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독일 관념철학의 유입과 그것을 번역할 때 한학적 소양을 가진 지식인들에게 양명학의 ‘양지’는 ‘이성’과 결부되어 이해되기 쉬웠고, 또 우치무라 간조처럼 양지를 기독교적인 양심과 천리라고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노우에 데쓰지로나 다카세 다케지로가 서양철학의 틀을 빌려 양명학에 접근했다면, 우치무라는 양명학을 실천운동으로서 접근하였다.
단, 막말부터 메이지 기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일종의 ‘붐’으로 당시에는 양명학 외에도 선(禪)이나 기독교도 유사한 문맥에서 관심이 높아진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근대 일본에서의 양명학 이해의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 시기에서 요청되었던 ‘시대성’을 강력하게 반영한 것으로서 봐야한다. 그렇지 않고 당시의 언설을 추수하는 형태로, 양명학에 ‘실천철학’으로서 성격을 묻거나, 천주를 향하는 기독교적 양심을 양명학의 양지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려거나, 혹은 서양 철학의 용어를 좇아 해석하려는 시각은 양명학 현창이 왜 근대 일본에서 하나의 붐처럼 일어났는지에 대한 본질을 가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복고적 유신’ 후 천황을 정치적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 건립에 요구되었던 다양한 사상(事象)의 문맥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서양의 국민국가를 본뜬 국가에 필요한 신민으로서의 국민을 만들 ‘도덕’의 창출, 서구에 비견할 수 있는 일본적 전통이라 할 만한 정신의 창출, 그리고 오랜 역사동안 가깝고도 가장 강렬한 타자로서의 중국을 ‘지나’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할 시대적 요청의 반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