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구의 목적
이 연구는 한국의 사회, 의료문화, 법제, 문학과 대중문화, 역사와 기억, 여성과 가족에 걸친 다양한 국면들의 ‘취약성(vulnerability)’의 조건과 고통 및 상처 경험을 서사(narrative)를 통해 비판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려는 초학제적 연 ...
1. 연구의 목적
이 연구는 한국의 사회, 의료문화, 법제, 문학과 대중문화, 역사와 기억, 여성과 가족에 걸친 다양한 국면들의 ‘취약성(vulnerability)’의 조건과 고통 및 상처 경험을 서사(narrative)를 통해 비판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려는 초학제적 연구 기획이다. 연구 방법론이 될 ‘비판적 실천 서사학’은 서사 연구를 텍스트 연구와 비평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현실과 일상의 삶-서사의 회복과 치유, 화해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술적·실천적 프로그램이다. 특별히, 서사 연구의 실천적 활용에서 사회적, 윤리적, 교육적 측면의 효용을 강조한다.
또한, 이 연구는 ‘의학-문학-법학-인류학’(의료인문학 및 서사 의학, 법 서사 비평, 의료사회학, 서사학, 젠더연구) 분야의 상호 조명과 초학제적 협력을 통해 새로운 학문적 잠재력을 부여하고자 한다. 취약성의 입체적 관점을 통해 상처와 고통, 치유와 회복에 관한 사유는 더욱 심화 ‧ 확장되고 풍부해질 것이다. ‘취약성’ 개념은 비판적 실천 서사학을 통해 각 전공 영역에서, 그리고 다른 인접 학문들에서도 실천될 수 있는, 확장력 있고 실천적인 이론으로 재탄생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2. 연구의 배경 및 필요성
(1) 어째서 ‘취약성과 서사’인가? ― 위태로운 삶, 서사적 난파
새로운 자본주의(New Capitalism)의 확산으로 불안정한 시대에는 표준화된 사회적 서사가 붕괴되며, 개인의 서사 또한 혼란과 위기에 처한다. 불안정 노동, 변화에 대한 찬양, 불확실성은 삶의 연속성을 파괴하고 실존과 삶의 서사를 뒤흔든다. 작금의 개인의 삶과 서사는 ‘서사적 난파’(narrative wreck) 상황에 몰린 것이다. 인간의 본래적 취약성에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양극화, 기후 변화와 같은 더해진 사회적 · 환경적 취약성은 오늘날 개인의 서사를 취약성의 서사로 물들인다. 이 시점에, 한국 사회의 취약성의 서사를 비판적으로 탐구한다는 것은, 곧, 취약성의 윤리에서 출발하는 (사회적, 생태적, 문화적) 연대와 회복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리처드 세넷이 서사적 발화 및 해석 역량의 의미로 말한 ‘서사적 행위능력’(narrative agency)이 사회적으로 다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론 작업을 넘어선 이 연구의 실천적 지향점이다.
(2) 스토리텔링 붐 시대, 초학제적 서사 연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판적 실천 서사학은 기존 서사학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실천적 프로그램이다. 서사학의 확장성을 이어 나가면서도 사회적 효용을 강조하여, 다양한 서사를 통해 사회의 취약성을 비판적으로 포착하고 치유와 회복, 포용과 화해를 위한 실천을 추구한다. 비판적 실천 서사학은 와시다 키요카즈가 제안한 ‘임상철학’(臨床哲學)에서도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임상철학이란 ‘괴로워하는 장소’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학문이자,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일(sym-pathy)’로서 철학적 활동을 전환하려는 기획이다. 비판적 실천 서사학 역시 취약성의 현장에 임하여 괴로움의 이야기를 청취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서사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서사 연구를 지향한다.
(3) 사회적 기여 및 시의성 : 치유와 포용을 위한 연구
비판적 실천 서사학은 상처 입을 가능성이라는 존재론적인 영역과 취약성의 불평등한 배분이라는 사회정치적 조건 모두에 주목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누적된 사회적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 오랜 국가폭력의 역사와 반복되는 사회적 재난은 한국 사회에 수많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이들의 경험이 가진 존재론적 차원과 사회구조적 차원 모두에 주목함으로써, 치유와 사회적 정의의 회복을 함께 이뤄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이다. 이 연구의 성과는 사회적 상흔에 대한 치유가 시급한 한국 사회에서 정의와 치유를 단계적으로 접근하거나 분리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모델을 제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