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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 조일관계의 전개와 彦滿圖書 교섭
Development of Joseon-Japan Relations and Negotiations on the Unman-Doseo(彦滿圖書) in the mid-seventeenth centur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시간강사지원사업 [지원년도 신청 요강 보기 지원년도 신청요강 한글파일 지원년도 신청요강 PDF파일 ]
연구과제번호 2019S1A5B5A07111891
선정년도 2019 년
연구기간 1 년 (2019년 12월 01일 ~ 2020년 11월 30일)
연구책임자 유채연
연구수행기관 전북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본 연구의 목표는 17세기 중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격변 속에서 조선이 새롭게 조일관계를 구축해 가는 과정을 쓰시마(일본)와의 彦滿圖書 교섭을 중심으로 검토하는데 있다.
    언만도서에 대한 교섭이 진행되었던 17세기 중반은 명·청교체라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맞물려 조선과 일본의 국내 상황도 급변하면서 양국의 외교체제에도 변화가 모색되는 시기였다. 1635년 일본에서는 ‘국서개작사건’ 이후 막부의 지시로 이테이앙 윤번제(以酊庵 輪番制)가 시행되었고, 그동안 쓰시마는 막부로부터 위임받은 대조선 외교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막부의 간섭과 통제를 받게 되었다. 한편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전쟁 후유증과 함께 청의 압박과 견제 속에서도 일본의 동향을 주시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과 일본은 변화된 환경에 따른 새로운 조일관계를 모색해야 했다. 이에 1640-43년 전개된 언만도서 교섭과정은 조선과 일본이 변화된 환경에서 조일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운영해 나가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이 시기는 명·청교체로 인한 북방에 대한 위기의식과 급변하는 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대일관계는 현상 유지에 맞춰지면서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했다는 평가가 주류적인 시각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일본의 무위를 과시한 외교적 압박과 수세에 몰린 조선의 대응 구도로만 조선의 대일정책을 이해하는 데에서 진행되었으며, 17세기 후반 조선의 대일정책 기조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지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이 시기에는 소극적인 자세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은 1640-43년 쓰시마와 언만도서를 중심으로 교섭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평가와는 다른 양상으로 교섭에 임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쓰시마에 끌려가는 형국으로 조선이 언만도서를 허락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결정에는 일본에 대한 관심과 정세 분석이 바탕이 되어 나온 것이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지금까지의 선행 연구에서 17세기 중반 조선의 대일정책이 방어적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보는 시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17세기 중반 조일관계의 특징을 언만도서 교섭과정을 통해 재조명하고자 한다.
    첫째, 17세기 중반 조일관계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둘째, 조선의 대일정책 수립에 있어 중요한 정보처리 능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셋째, 조일관계의 실상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17세기 중반 조선이 일본 정세를 파악하여 정책 결정에 반영함으로써 명·청교체로 재편되어 가는 동북아 정세에서 대일관계를 능동적으로 끌어나가려고 했다고 보는 본 연구의 가설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 기대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의 기대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7세기 중반 대일외교방식에 대한 재평가 및 한일관계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나아가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조일관계를 파악하여 17세기 국제질서를 이해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제공할 것이라 기대한다. 더불어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도서’에 대한 이해를 높임으로써 차후 다양한 연구로 이어져 한일관계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둘째, 조선시대 외교업무를 주로 담당하던 전객사에서 기록한 󰡔전객사일기󰡕를 비롯한 등록류 등 한일관계사에 중요한 일차사료를 활용하여 조선후기 대일교섭과정을 풍성하게 이해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더불어 동시기 일본측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연구에 활용함으로써 조선후기 조일관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셋째, 교육현장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는 사례로 활용할 수 있다. 대학 강단에서 ‘한국사의 이해’, ‘대외관계사’ 등 교약과 전공강좌에서 전통시대 주변국가와의 관계 설정 및 전개과정을 다룰 때 유용한 주제로 이용할 수 있다. 아울로 역사탐방이나 인문학강연과 같은 대중강연에서 미시적 연구를 소개함으로써 참가자의 관심을 유도하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담론의 소재로 활용될 것이라 기대한다.
    넷째, 최근 불거지고 있는 한일간의 현안문제를 해소하는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 양국에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등에 대한 일본의 성찰 없는 역사 부정은 갈등의 불씨가 되어 No Japan, 일본 기피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양국관계가 극단으로 내몰린 대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혼란과 분노의 감정을 수습하면서 공존과 평화시대를 이끌어간 17세기 조일관계의 전개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한국과 일본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행보로 나가는데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쓰시마가 언만도서를 요청하는 방식과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첫째, 1640~41년 언만도서 요청과 조선의 대응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1640년 9월 문위행 파견에 대한 회사차왜로 나온 藤智繩이 처음 언만도서를 요청하면서 교섭이 시작되었다. 교섭과정에서 쓰시마는 언만도서를 허락받기 위해 왜관을 부산성으로 이관해 달라는 등 조선이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함께 거론하면서 교섭을 주도해 나갔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조선은 도서 사급에 대한 원칙을 세우고,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 조선이 쓰시마의 무리한 교섭태도에도 불구하고 원칙을 고수하며, 의지를 관철해 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조선이 쓰시마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것이 대일정책 수립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 1642년 언만송사의 격상문제에 관한 교섭과정을 다룰 것이다. 1642년 3월 언삼·언만도서 교체로 나온 藤智繩이 언만송사의 격을 만송원송사 격으로 접대를 요청하면서 언만도서에 관한 교섭이 재개되었다. 이때에도 쓰시마는 무뢰하게 교섭에 임했으며, 결국 조선은 언삼·언만도서를 모두 허락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조선의 결정은 쓰시마의 위협을 받아 이전의 입장을 수정한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그들의 불만을 차단하고 언만송사에 대한 접대의 격을 올려주는 선례를 남길 수 있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본 장에서는 조선이 이러한 판단을 어떻게 내릴 수 있었는지 교섭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1642년 언만송사에서 봉진압물 1인 증원과 서계식례의 변경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1642년 윤 11월 언만도서를 받고 출송한 언만송사는 사전협의도 없이 봉진압물 1인을 증원하고, 지참한 서계의 수신인을 ‘예조참의’로 해서 나왔다. 조선은 이러한 쓰시마의 태도에 항의하면서도, 봉진압물에 대한 접대와 ‘예조참의’ 명의의 서계 작성을 허락하였다. 겉으로는 쓰시마의 막무가내식 요청을 따라가는 듯 하지만, 여기에는 1635년 ‘국서개작사건’의 여파가 미친 것이었다. 조선은 이 점을 인지하여 쓰시마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검토하는 본 연구는 조선이 쓰시마의 일방적인 주장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조선이 일본 정세에 대한 관심과 정보 분석을 통해 능동적으로 대일정책 방향을 추진해 나갔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본 연구는 17세기 중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격변 속에서 조선이 새롭게 조일관계를 구축해 가는 과정을 대마도와의 언만도서(彦滿圖書) 교섭을 중심으로 검토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1640년 문위행의 파견을 ‘도주의 득남’을 축하하는 사절로 인식한 대마도는 같은 해 9월부터 언만도서를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언만도서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대마도는 왜관의 이관문제를 제기하거나 조선에 민감한 안보 이슈를 이용하여 조선을 압박하였다. 또한 언만송사에 대해 접대의 격을 높이기 위해 막부의 특별한 관심을 강조하며, 대마도주의 교체가능성도 암시하였다. 더욱이 조선과의 협의없이 언만송사에 압물관 1인을 증원하고, ‘예조참의’에게 보내는 서계를 지참하여 파견하였다.
    당시 조선은 대마도의 위협적인 요청이 막부에 대한 부담에서 나온 것임을 파악하고, 대마도의 요청을 수용하였다. 동시에 대마도에 은혜를 베풀어 조선이 상황을 주도하는 방향으로 결론지었다. 이같은 조선의 결정은 그동안 수집해 온 일본정세에 관한 정보를 바탕으로 ‘국서개작사건’으로 위축된 대마도주의 지위를 안정시킴으로써 기존의 조일외교체제에 변동사항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를 줄이면서, 무엇보다도 그동안 대마도에 베풀어온 포용과 관대함을 바탕으로 확보해 온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판단이었다.
  • 영문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iew the process of the Joseon Dynasty establishing a new Joseon-Japan relationship through the negotiations of Unman-Doseo with Tsushima in the mid-17th century.
    Tsushima regarded the dispatch of the Munwihaeng in 1640 as a congratulatory remark for the birth of a Tsushima Governor’s son. Therefore, Tsushima officially requested the Unman-Doseo from September, 1640. In the process of requesting the Unman-Doseo, Tsushima raised the issued of the Waegwan transfer or put pressured on Joseon by security issues. And Tsushima showed the possibility of replacing the Tsushima dictator to emphasized the special attention from Bakufu in order to raise the level of entertainment for Unman Songsa. Furthermore, Tsushima dispatched one Apmulgwan(押物官) with a letter to ‘Yejochameui(禮曹參議)’ as the Unman-songsa without consultation with Joseon.
    At that time, Joseon recognized that the threat of Tsushima came from the Bakufu’s pressure and accepted Tsushima’s request. At the same time, Joseon gave grace to Tsushima and induced that Joseon was leading the negotiation. Joseon’s decision was based on information about the situation in Japan that has been collected. This Joseon policy stabilized Tsushima Governor’s position after the “the Yanagawa Affair”, so it reduced the possibility of changes in the existing diplomatic regime between Joseon and Japan. Moreover, Joseon could maintain the leadership that was secured based on the Joseon’s inclusiveness and generosity on Tsushima.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본 연구는 17세기 중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격변 속에서 조선이 새롭게 조일관계를 구축해 가는 과정을 대마도와의 언만도서(彦滿圖書) 교섭을 중심으로 검토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1640년 문위행의 파견을 ‘도주의 득남’을 축하하는 사절로 인식한 대마도는 동년 9월부터 언만도서를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언만도서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대마도는 왜관의 이관문제를 제기하거나 조선에 민감한 안보 이슈를 이용하여 조선을 압박하였다. 또한 언만송사에 대해 접대의 격을 높이기 위해 막부의 특별한 관심을 강조하며, 대마도주의 교체가능성도 암시하였다. 더욱이 조선과의 협의없이 언만송사(彦滿送使)에 압물관 1인을 증원하고, ‘예조참의’에게 보내는 서계를 지참하여 파견하였다.
    당시 조선은 대마도의 위협적인 요청이 막부에 대한 부담에서 나온 것임을 파악하고, 대마도의 요청을 수용하였다. 동시에 대마도에 은혜를 베풀어 조선이 상황을 주도하는 방향으로 결론지었다. 이같은 조선의 결정은 그동안 수집해 온 일본정세에 관한 정보를 바탕으로 ‘국서개작사건’으로 위축된 대마도주의 지위를 안정시킴으로써 기존의 조일외교체제에 변동사항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를 줄이면서, 무엇보다도 그동안 대마도에 베풀어온 포용과 관대함을 바탕으로 확보해 온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판단이었다.

    <영문>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iew the process of the Joseon Dynasty establishing a new Joseon-Japan relationship through the negotiations of Unman-Doseo with Tsushima in the mid-17th century.
    Tsushima regarded the dispatch of the Munwihaeng in 1640 as a congratulatory remark for the birth of a Tsushima Governor’s son. Therefore, Tsushima officially requested the Unman-Doseo from September, 1640. In the process of requesting the Unman-Doseo, Tsushima raised the issued of the Waegwan transfer or put pressured on Joseon by security issues. And Tsushima showed the possibility of replacing the Tsushima dictator to emphasized the special attention from Bakufu in order to raise the level of entertainment for Unman Songsa. Furthermore, Tsushima dispatched one Apmulgwan(押物官) with a letter to ‘Yejochameui(禮曹參議)’ as the Unman-songsa without consultation with Joseon.
    At that time, Joseon recognized that the threat of Tsushima came from the Bakufu’s pressure and accepted Tsushima’s request. At the same time, Joseon gave grace to Tsushima and induced that Joseon was leading the negotiation. Joseon’s decision was based on information about the situation in Japan that has been collected. This Joseon policy stabilized Tsushima Governor’s position after the “the Yanagawa Affair”, so it reduced the possibility of changes in the existing diplomatic regime between Joseon and Japan. Moreover, Joseon could maintain the leadership that was secured based on the Joseon’s inclusiveness and generosity on Tsushima.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연구결과>
    본 연구에서는 17세기 중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 속에서 조선이 새롭게 조일관계를 구축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하여 대마도와의 언만도서 교섭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을 겪은 후유증과 함께 청의 압박과 견제 속에서 국내 안정과 국가재건이라는 과제 수행과 동시에 조일관계의 안정을 확보하는 문제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대마도 또한 국서개작사건 이후 島政의 혼란을 수습하고, 막부에도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아 기존의 입지를 회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1640년 언만도서에 대한 교섭은 이러한 양측의 사정이 반영될 수 밖에 없는 구조에서 시작되었다.
    1640년 조선에 대마도주가 아들을 얻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조선은 도주의 還島를 위무하는 문위행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당시 대마도는 문위행의 파견을 '도주의 득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동년 9월부터 언만도서를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대마도가 언만도서를 얻기 위해 왜관의 이관을 제기하거나 조선에게 민감한 안보 이슈를 이용하여 조선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의 병력 가동가능성이 없으며, 대마도의 목적이 언만송사를 성사시키는데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그동안 거론하지 않았던 현 도주의 아명도서(언삼도서)를 환납하는 조건으로 언만도서를 허락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였고, 결국 대마도도 이를 수용하였다.
    언삼, 언만도서의 유지에 실패한 대마도는 언만송사에 대한 '특송선 격의 접대'를 요청하면서 교섭을 재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막부의 관심을 강조하면서, 도주의 교체 가능성도 암시하는 등 위협도 서슴치 않았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의 위협이 막부에 대한 부담에서 나온 것임을 파악하고, 언삼, 언만도서를 함께 허락하여 애초 대마도의 요청을 수용하여 불만을 차단하였다. 동시에 대마도에 은혜를 베풀어 조선이 상황을 주도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울러 언만송사가 조선과 협의없이 압물관 1인을 증원하고, '예조참의' 앞으로 보내는 서계를 지참하고 출래했을 때에도 조선은 대마도가 조선을 상대로 자신의 역할을 막부에 증명하려는 사정을 헤아려 그 요청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결정은 1631년 대마도주와 柳川調興 사이의 갈등을 보고받은 이후 일본의 사정을 주시하며 수집한 정보를 통해 내린 판단이었다. 즉 '국서개작사건' 이후 막부가 1635년 마상재의 파견, 1636년 통신사 파견을 임무로 제시하여 대마도의 외교능력을 시험하고 있는 상황에서 언만도서 교섭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인식은 막부가 주목하는 사안에 대해 대마도가 외교능력을 증명하지 못하게 될 경우, 일본 내에서 도주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조선은 언만도서를 허락함으로써 대마도주의 입장을 안정시키고, 무엇보다 조선이 그동안 대마도에 대해 베풀어온 포용을 바탕으로 확보해 온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활용방안>
    첫째, 17세기 중반 대일외교방식에 대한 재평가 및 한일관계사 연구의 외연을 확대한다. 주지하다시피 17세기 중반 조선은 대일정책에서 남방의 안정을 위해 다소 소극적이었다는 평가가 주류적인 시각이었다. 그러나 1640년대 彦滿圖書를 중심으로 조선과 대마도가 보여준 교섭방식과 대응양상을 통해 17세기 중반 조선의 대일외교방식에 대한 재평가를 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 ‘도서’라는 새로운 주제로 조일관계의 추이를 짚어나간다는 점에서 새로운 주제로 한일관계사 연구의 다양성을 꾀할 수 있다. 특히 ‘도서’는 조일무역의 부수적인 내용으로 언급 정도만 되어 왔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도서’에 대한 이해를 높임으로써 이후 다양한 연구로 이어져 한일관계사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셋째, 조선시대 외교업무를 현장에서 담당하는 역관, 부산첨사, 동래부사, 경상감사 등이 중앙에 보고한 장계를 중심으로 도서 교섭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대일교섭과정을 깊이있게 이해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넷째, 교육현장에서 한일 간의 외교관계를 바로 알 수 있는 사례로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외교라는 것이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상대방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작은 결정이라도 그 안에 많은 의미와 고민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彦滿圖書 결정에도 당시 조선의 고뇌와 정책방향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
    다섯째, 최근 악화되는 한일관계에서 새로운 대안책으로 소개할 수 있는 주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교라는 것이 일방적인 것이 아닌 상대방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이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현재 한일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색인어
  • 대일정책, 언만도서, 언만송사, 대마도, 국서개작사건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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