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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 상세정보

13-14세기 쌍성총관부의 위상에 대한 고찰
A Study of the status of Ssangseong Chonggwanbu in the 13th-14th centur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B유형)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연구과제번호 2020S1A5B5A17088663
선정년도 2020 년
연구기간 1 년 (2020년 09월 01일 ~ 2021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오기승
연구수행기관 중앙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13세기 후반, 여몽전쟁 말기에서 양국 간 화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고려의 북방 영역 일부가 침탈되어 몽골제국의 관할로 이탈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설치된 몽골제국의 기구가 고려의 서북 영역에 설치된 동녕부(東寧府)와 동북 영역에 설치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였다.
    이 중에서 본 연구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동북 영역의 쌍성총관부이다. 쌍성총관부는 종종 동녕부와 병렬되어 언급되면서 유사한 성격의 영역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그 발생에서 조직 면에 있어서까지 세부적인 성격에서는 다른 면이 많다. 동녕부가 여몽 화의 이후에 설치된 조직이라면 쌍성총관부의 설치는 여몽전쟁 기간 중의 일이었다. 또한 설치의 배경에 있어서도 둘 모두 고려 내부에서의 이탈이 발단이 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이탈이 일어난 정황과 과정 면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이 두 지역을 몽골제국의 제도라는 기준에서 분류해 볼 경우,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는 각각 부(府)와 총관부(摠管府)로서 그 편제구조와 성격 면에서 엄연히 다른 측면이 존재하고 있다.
    해방 이후 국내 학계에서 쌍성총관부 자체에 대한 연구는 방동인 등을 시작으로 하여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져 왔으며, 연구 성과 또한 어느 정도 축적된 상태에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엽까지의 시기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연구가 고려의 입장에 주로 입각하여 영토의 상실과 탈환이라는 측면에 집중되어 있거나,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고려 중앙정부 차원에서의 지역 통제권 여부에 주목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여몽전쟁과 그 여파를 분석함에 있어 소위‘외세의 침략과 이에 대항하는 민족의 투쟁’이라는 구도에 강하게 집중하고, 이와 연동하여 여원관계 또한‘지배와 그 지배로부터의 해방’측면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강했던 이전 시기 연구의 흐름에 기인하는 면이 적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하여 13-14세기 당시 쌍성총관부가 여몽 경계지대에서 가지고 있었던 복합적 성격이나 쌍성총관부 영역 내의 실질적인 조직 혹은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크게 조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후 21세기 들어 해당 지역의 구조에 주목하는 연구가 일부 등장하기는 하였으나, 그 성과 면에서는 여전히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상술한 기존 연구의 한계와 추가적 연구의 필요성에 입각하였을 때, 본 연구에서 지향하는 목표는 다음과 같이 설정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영토적 득실 요소로서의 쌍성총관부가 아니라 쌍성총관부라는 연구대상 그 자체에 분석의 중심을 두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쌍성총관부가 가지고 있는 복합적 성격을 조망하고 영역 내의 구조가 어떻게 편제 혹은 형성되었는가에 대해 천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쌍성총관부의 실체를 국가 간 대립 구도 아래의 획득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세력과 세력 사이의 경계지대였던 쌍성총관부 영역 그 자체에 주목하는 시각에서 구체적으로 조망해 내는 것이 본 연구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역적 조망과 더불어 이것이 당대 국제관계의 전체적 틀 속에서 어떠한 위치와 의미를 가지는가를 아울러 제시하는 것까지를 아울러 제시하는 것을 본 연구의 종합적인 목표로 삼고자 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에서 쌍성총관부라는 접경지대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는 것을 통해 고려시대, 나아가 한국사 전체의 접경사 연구에 대하여 새로운 고찰과 시점을 더하여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우선적인 기대효과로 제시할 수 있다. 이는 당대의 국제질서와 몽골제국의 구조라는 틀 속에서 쌍성총관부의 구체적인 구조와 위상에 대하여 재고찰한다는 본 연구의 기본 산출물을 기반으로 한다. 13-14세기 쌍성총관부를 구체적으로 다시 고찰해 본다는 중심 성과를 바탕으로 해당 지역과 시대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전근대 접경지대 연구에 대한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제도와 혈연을 비롯한 복합적인 측면으로 얽혀 있는 13-14세기 여몽관계의 다면적 측면 중 하나를 조명하여 시대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국제관계 안에서 고려가 가지는 정체성을 고찰하는 측면에서도 기여하는 부분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국제관계사와 관련해서는 당대 여몽관계, 그리고 지역사로서는 접경지대사와 관련된 후속연구와의 연결점을 가진다.
    또한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던 고려 동북면 지역은 조선 건국자인 이성계와 그 선조들이 자리를 잡았던 지역이었다. 즉 이 지역은 여몽관계의 지속기간과 그 이후의 시기를 걸쳐 무력집단을 위시한 조선 건국주체의 주요 기반세력이 양성되고 성장한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이들 세력의 구성 요소는 군사제도를 비롯한 조선 초기의 여러 부문에 영향을 드리우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쌍성총관부 내부의 권력구조와 세력구도를 새로이 고찰하고자 하는 본 연구의 성과는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 초기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조망하는 데 추가적인 시사점과 고려사항을 제공하여 시대에 대한 이해에 기여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본 연구는 쌍성총관부 자체에 대한 이해와 쌍성총관부가 존재하던 시대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는 학문적 성과라는 1차적 기여점을 가진다. 이는 후대에 대한 교육적 측면에서도 해당 시대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자료로서 사회적 기여를 제공할 수 있다.
    또한 본 연구의 결과물은 주변의 지역사와 당대 여몽관계 및 인접 시대와 관련된 후속연구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선적으로는 13-14세기 요동-한반도의 지역사 및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와의 연계를 기대할 수 있다. 또한 그 중에서도 한국사라는 범주 안에서는 접경지역사 및 조선 초기에 대한 후속연구와 특히 밀접한 연계를 기대할 수 있다.
  • 연구요약

  • 쌍성총관부 자체에 주목하여 그 성격과 구조를 구체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본 연구의 기본적 지향점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수행해야 할 세부적인 연구 내용 및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몽골 제국 체제 내에서 쌍성총관부라는 기구 자체가 가지는 구체적인 위치이다. 여기서 지금까지 구체적인 조명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은 바로 몽골제국의 총관부라는 기구의 구체적인 사항이다. 특히 이 기구가 제국 내에서 어떠한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어떠한 방식으로 설치 및 운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쌍성총관부를 다른 국내의 연구에서 구체적인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래 대몽골 울루스의 전체 세력 안에서 중원과 강남 및 요동 지방을 포함하여 소위‘원 제국’의 영역으로 구별되는 지역은 수도 인근의 중서성 및 다수의 행중서성(=행성)으로 분할 관리되고 있었다. 요양행성 및 그 하부기구와 상호관계가 이루어지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쌍성총관부 조직 역시 이러한 행성체계의 하부에 편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총관부라는 기구는 동녕부와 같은 부(府)와도 다르거니와, 명칭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행성조직의 각 로(路)에 설치되는 제로총관부(諸路摠管府)와도 구별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총관부를 설치하여 군민을 관할하는 방식은 요동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쌍성총관부를 위시하여 이러한 총관부 기구 및 해당 기구 내 총관과 천호의 구체적 위상을 추적하기 위해서, 본 연구에서는 먼저 앞서 언급한 행성 조직기구와의 상호관계 기록을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요동 지역에서 다른 시기에 설치되고 유지되었던 총관부들의 사례와 제국 내 다른 기구에서 운용된 총관부의 사례를 비교할 것이다. 또한 동녕부를 포함하여 접경지대 각지에 설치된 총관과 천호들의 사례를 종합적으로 비교 분석하여 당대 총관부 기구의 실상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이를 쌍성총관부의 실상에 접근하는 한 방편으로 삼으려 한다.
    두 번째로 재조명해 볼 지점은 쌍성총관부 내부의 세력구도이다. 쌍성총관부의 전체 존속기간을 통틀어 볼 때, 기록상 유력한 것으로 인식되는 세력으로는 세습 총관 조씨 가문과 세습 천호 탁씨 가문, 그리고 이안사 계통의 이씨 가문을 나열해볼 수 있다. 여기서 특이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이씨 가문이다. 이들은 쌍성총관부에 있어서는 후참자에 속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세습 총관인 조씨 가문과 비견될 정도의 위치를 내부에서 구축했으며, 결국 고려의 주요한 내부 협조자로서 기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세력구도가 가능했던 것은 이씨 가문이 쌍성총관부에서는 후참자이지만 몽골제국 전체로 보았을 때는 이안사가 조휘나 탁청보다 위치 면에서 어드밴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쌍성총관부 내부의 구조 규명을 위해서는 이들 간의 세력관계와 각 세력의 움직임을 다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특히 제국 조직 내부 기구로서의 쌍성총관부에 주목하여, 쌍성총관부 내 각 세력의 움직임을 제국 내의 외부 조직과 상호작용하는 구도 하에서도 시계열에 따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즉 쌍성총관부 내의 각 세력이 보인 움직임을 몽골제국과 고려 사이의 구도에서 분석하는 한편으로, 상위기관인 요양행성과 인접기관인 정동행성(=고려) 사이라는 구도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해석되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존에 널리 알려진 이자춘과 고려와의 협조관계 외에도 여원관계가 안정기로 접어든 이후 총관 조씨 가문이 경계지대에서 보인 움직임에도 주목해 보려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구 자체에 대한 조명과 내부 세력 및 세력가들에 대한 조명이라는 두 방면에서의 조명을 마치고 이를 조합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얻으려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13-14세기 쌍성총관부라는 기구의 구체적인 위상에 대하여 기존과 차별성을 가진 구도와 분석결과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쌍성총관부란 쌍성 지역에 설치된 총관부를 가리킨다. 또한 총관부란 총관이 주재하는 부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몽골제국의 제도에서 총관부라는 기구 및 그 중심이 되는 총관의 위상이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하나의 관건이 되는데, 이는 실상 단일하지 않고 가변적인 것이었다.
    13세기 여몽관계에서 기록이 등장하는 주요 고려인 총관으로는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 홍차구와 비슷한 시기 총관직을 받은 영녕공 왕준, 동녕부의 총관으로 임명된 최탄, 쌍성총관부의 총관으로 임명된 조휘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수여받은 총관직이 모두 동등한 위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제로총관부를 예로 들어 설명해볼 수 있다. 몽골제국은 수도와 그 주변 지역으로 구성되는 중앙의 중서성을 중심으로 각지에 행중서성을 설치하여 할당된 구역을 관할케 하는 소위 ‘행성’체계를 운용하였다. 행성체계에서 행성 아래에는 이른바 로-부-주-현 체계라 하여 로 혹은 로에 소속되지 않는 독립된 부 등이 부속되는데, 각 로에는 총관이 임명되어 총관부를 담당한다. 동녕부를 승격시켜 동녕로로 만들 때 동녕로총관부가 설치되었던 것이 그 사례이다. 한편 쌍성총관부는 후일 계승권 분쟁에서 개원로에 판결을 요청했던 데서 알 수 있다시피 로 아래에 놓이는 총관부이다. 즉 동녕로총관과 개원로총관은 거의 동격이라 할 수 있지만 쌍성총관부의 총관은 명칭은 같은 총관이지만 제로총관부를 담당하는 로 총관과 동격으로 볼 수 없다. 이외에도 주에 총관부가 설치되는 경우, 광교총관부나 강회재부총관부 등의 설치 사례 등을 확인해보면 총관부라는 기구의 성격을 추정해볼 수 있다.
    몽골제국에서 총관부란 반드시 어떤 고정된 위치를 가진 것이 아니라 로, 부, 주 등 다양한 층위에 설치될 수 있으며, 꼭 지방 통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으로 군민이 집단으로 편제될 때면 그에 맞추어 설치되는 것이다. 즉 총관부란 어떤 고정된 직제라기보다는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인호를 편제하여 설치하는 기구에 가까운 것이며, 총관직의 위상은 해당 총관부의 위상에 비례했던 것이다. 이는 고려의 도감 설치 및 운용에서 나타나는 특성이나 그 책임자인 별감의 위상이 가변적이었던 것과도 일정 부분 유사성을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총관이 얼핏 특정 지역에 임명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주국가에서의 지방관과는 좀 다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지역의 행정권을 받은 것을 근거로 지역 내의 인호를 통제하는 정주국가의 지방관과 달리 총관은 기본적으로 인호 집단을 관할하는 직책으로서 해당 인호의 거주지에 대한 행정권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쌍성총관부에서 나타나는 복합적 권력구조를 설명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쌍성총관부를 비롯한 몽골제국 지방기구에서 복합적인 권력구조가 나타나는 것은 총관부 설치와 총관 임명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지역’이 아니라 ‘인호’이기 때문에 동일한 지역에서 각각 다른 인호 집단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받은 인물이 각각 별개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주제가 되는 쌍성총관부가 설치될 당시 이에 대하여 몽골제국이 기대한 역할은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널리 알려진 고려에 대한 견제와 더불어 한반도 쪽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하던 동방왕가에 대한 견제, 그리고 금이라는 물산에 대한 요구가 그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 쌍성총관부는 고려와의 무력충돌, 몽골군의 향도역 및 동방왕가 종왕 세력의 반란 당시 방어선의 역할 등을 수행하였던 바 있다.
    13세기 말까지의 쌍성총관부는 동녕로에 비하면 설립 초기부터도 서류상의 행정적 지위는 낮았고 영역 또한 다소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몽관계가 불안정하고 종왕세력의 위협이 존재하던 동안에는 기대되는 역할에 비례하는 발언권을 가진 모습이 나타나는 만큼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도 그 상대적인 위상만은 이 시기가 가장 높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엽 쌍성총관부의 위상과 성격을 변화시킨 요소로는 크게 세 가지를 거론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여몽관계의 안정화이며 두 번째는 행성체계의 정비 및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제국 중앙과 동방 종왕 세력간의 갈등국면 완화이다. 이는 둘 모두 경계지대에서 쌍성총관부가 가지는 전략적 위상, 즉 견제세력으로서의 가치를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서 인접지역과의 갈등이 완화되면서 고려 본국이나 합란부와의 인적, 물적 교류가 촉진되는 측면이 나타났으며, 그 결과로 세 번째 요소인 북방에서의 전주 이씨 세력 유입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립 초기 쌍성총관부와 고려 본국 사이의 상호관계는 험악한 편이었으나 여몽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자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계층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고려 본국과 쌍성총관부 사이를 오가며 교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쌍성총관을 습직하던 조씨 가문도 예외는 아니어서, 2대 총관 조양기의 아들들 중 3대 총관이 되는 조림은 고려에서 벼슬을 하다가 가업을 계승하여 쌍성총관을 맡았으며, 그 동생인 조돈 역시 고려에 출사하였던 바 있다.
    그리고 이 시기 합란부 지역과의 상호간 인호 이동을 거치면서 이성계의 직계 조상인 전주 이씨 세력이 쌍성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이행리가 쌍성과 주변 지역의 다루가치에 임명되면서 공식적으로 쌍성의 유력자가 되었다. 이씨 세력은 합란부와 쌍성의 경계지대인 함주를 근거지로 두고 합란부와 쌍성총관부 양 지역에 걸치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또한 이들 역시 고려 본국과 연결고리를 만들면서 양호한 관계를 구축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후 14세기 공민왕대에 들어 쌍성총관부 세력과 고려 본국 사이에는 다시 대립적 양상이 등장하게 된다. 다만 이는 공민왕의 영토 수복 의지라는 해석 외에도 왕권 수호를 위한 노력과 당대의 권력자 기씨 가문과의 대립이라는 측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는 쌍성총관부 총관 조씨 가문과 다루가치 이씨 가문의 대립과도 연관되는 측면이 있다.
    조씨 가문과 이씨 가문은 이춘이 조씨 가문의 딸을 후처로 맞으면서 연합관계가 되었으나, 이후의 세습 과정에서 이춘의 첫 부인인 박씨의 아들들과 후처인 조씨의 아들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서 대립관계로 변하게 된다. 이에 이자춘이 주도하던 이씨 가문은 고려국왕과 협조하였다. 반면 조씨 가문의 입장은 통일되지 않았다. 총관 조소생이 기씨와 연합하려는 의도를 보인 반면, 조돈과 그 일족은 고려국왕에게 협조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쌍성총관부의 인호는 총관 조씨 관할, 다루가치 이씨 관할, 고려국왕 관할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총관 조소생의 세력권은 대략 12개 성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공민왕은 1356년 유인우를 파견하여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으며, 조돈 일족과 이자춘 등이 이에 호응하여 협공한 결과 조소생은 패배하고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공민왕은 이를 회유하려 하였으나 조소생은 이후로도 고려에 공격적인 태도를 유지하였으며, 1362년에는 요동의 세력가인 나하추와 연합하여 고려의 북쪽 경계를 침공해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성계를 파견하여 이를 격퇴하였으며, 다시 도주하던 조소생이 그해 7월 살해당하면서 쌍성총관부 세력은 근거지와 중심인물 양쪽 모두를 상실하면서 결국 완전한 소멸을 맞게 되었다.
  • 영문
  • Ssangseong Chonggwanbu refers to the general government office installed in the Ssangseong area. In addition, Chonggwanbu can be said to refer to the institution presided over by Chonggwan. Then, one of the keys to the status of the organization called Chonggwanbu and Chonggwan, the central figure of Chonggwanbu in the system of the Mongol Empire, is what it is. In fact, it is not uniform but variable.
    Hong Cha-Gu, Wang Joon, Choi Tan, and Jo Hui of Ssangseong Chonggwanbu are the main Chonggwans from Goryeo whose records appear in the 13th century. However, it is difficult to see that all Chonggwan positions awarded to them are equivalent. For example, in the provincial system of the Mongol Empire, the head of Ro-Chonggwanbu and the head of other Chonggwanbu such as Ssangseong Chonggwanbu have the same designation Chonggwan, but their positions are not the same.
    In the Mongol Empire, Chonggwanbu does not necessarily have a fixed position, but can be installed on various layers, and is installed according to when people are organized into groups for a specific purpose, not necessarily for local government. In other words, Chonggwanbu is not a fixed organization, but rather an organization that organizes and installs inhos whenever necessary. And the status of the Chonggwan position was proportional to the status of the corresponding Chonggwanbu. This shows some similarities to the characteristics of Dogam installation and operation in Goryeo, and the variable status of Byulgam, who was in charge.
    One thing to note here is that although Chonggwan appears to be appointed to a specific region at first glance, it should be viewed in a slightly different concept from the general idea of ​​a provincial official in a settlement country. This is because Chonggwan basically has administrative authority over the place of residence of the people as a position to have jurisdiction over people, unlike local officials in the settlement state, who control the people in the region based on receiving administrative powers of the region.
    This is also a starting point to explain the complex power structure that appears in Ssangseong Chonggwanbu. The appearance of complex power structures in regional organizations of the Mongol Empire including Ssangseong Chonggwanbu is
    This is because, since the criteria for the establishment of Chonggwanbu and the appointment of Chonggwan are “people” rather than “region” to the last, a person who is given control over different people group in the same area can exist independently of each other.
    And when Ssangseong Chonggwanbu was established, the role expected by the Mongol Empire in this regard can be broadly mentioned in three ways. These are the check on Goryeo, the check on the three Eastern ulus that were trying to expand their power toward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demand for gold. In fact, during this period, Ssangseong Chonggwanbu performed armed conflict with Goryeo, served as a guide for the Mongol army, and served as a defense line during the rebellion of the three Eastern ulus forces.
    Compared to Dongnyungro, Ssangseong Chonggwanbu until the end of the 13th century had a lower administrative status on paper even from the beginning of its establishment, and it seems that the area was somewhat smaller. However, while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was unstable and the threat of the three Eastern ulus existed, a voice commensurate with the expected role appeared. Therefore, even in the unstable situation, it can be seen that the relative status was the highest during this period.
    From the end of the 13th century to the beginning of the 14th century, there are three major factors that changed the status and character of Ssangseong Chonggwanbu. The first is the stabilization of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and the second is the improvement of the local system of the Mongol Empire and alleviation of the conflict between the Great Khan and the three Eastern ulus. Both of these resulted in lowering the strategic status of Ssangseong Chonggwanbu in the border area, that is, the value as a check force. However, in return, conflicts with neighboring regions were alleviated, and human and material exchanges with Goryeo and Habranbu were promoted. And, as a result, the third factor, the influx of the Jeonju Lee clan from the north, appeared.
    In the early days of establishment, the mutual relationship between Ssangseong Chonggwanbu and Goryeo was on the rough side, but as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entered a stable period, it seems that various characters exchanged relatively freely between Goryeo and Ssangseong Chonggwanbu. The Jo family, who inherited Ssangseong Chonggwan, is no exception. Jo Lim, who becomes the 3rd Chonggwan among the sons of the 2nd Chonggwan Jo Yang-ki, originally served the King of Goryeo, succeeded his father and inherited the status of Ssangseong Chonggwan. His younger brother Jo Don also served the King of Goryeo.
    And during this period, through the reciprocal movement of people with the Habranbu area, the Jeonju Yi clan, the direct ancestor of Yi Seong-gye, flowed into the Ssangseong area. They officially became influential in the Ssangseong area as Yi Haeng-li was appointed to the Darughachi in Ssangseong and surrounding areas. The Lee clan had its base in Hamju, the border area between Habranbu and Ssangseong, and expanded its power across both Habranbu and Ssangseong Chonggwanbu. In addition, they were also trying to establish a good relationship by making connections with Goryeo.
    Later, in the 14th century, during the reign of King Gongmin, a confrontational aspect appeared again between Ssangseong Chonggwanbu and Goryeo. However, in addition to the interpretation that this was King Gongmin's will to restore the territories, it is necessary to look at the aspect of efforts to protect the king's authority and the confrontation with the powerful Ki clan at the time. And this is also related to the conflict between the Chonggwan Jo clan and the Darughachi Yi clan.
    Jo clan and Yi clan became a union when Yi Chun took Jo Clan's daughter as his second wife, but in the course of hereditary succession there was a dispute between the sons of Park clan, Yi Chun's first wife, and the sons of Jo clan, the second wife. As this happens, it turns into a confrontational relationship. Accordingly, Yi clan led by Yi ja-Chun cooperated with King Gongmin, King of Goryeo. On the other hand, Jo clan's position was not unified. This is because Jo So-saeng, the Chonggwan showed an intention to unite with Ki clan, while Jo Don and his family cooperated with the King of Goryeo. At this time, the people of Ssangseong Chonggwanbu were divided into Jo clan jurisdiction, Yi clan jurisdiction, and the King of Goryeo jurisdiction. And among them, Jo So-saeng, the Chonggwan's sphere of influence seems to have reached about 12 provinces among Ssangseong Chonggwanbu.
    In the end, King Gongmin dispatched Yoo In-woo to attack Ssangseong Chonggwanbu in 1356. Jo Don and his family and Lee Ja-chun and his force responded and attacked with Yoo In-woo. As a result, Jo So-saeng was defeated and fled to the north. King Gongmin tried to convince him, but Jo So-saeng maintained an aggressive attitude toward Goryeo. Furthermore, conversely, in 1362, it invaded the northern border of Goryeo in association with Naghachu of Liaodong. However, King Gongmin dispatched Yi Seong-gye to repel it, and Jo So-saeng, who escaped again, was murdered in July of that year. And with this, Ssangseong Chonggwanbu lost both the its base area and the central figure, and eventually met its complete annihilation.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쌍성총관부란 쌍성 지역에 설치된 총관부를 가리킨다. 또한 총관부란 총관이 주재하는 부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몽골제국의 제도에서 총관부라는 기구 및 그 중심이 되는 총관의 위상이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하나의 관건이 되는데, 이는 실상 단일하지 않고 가변적인 것이었다. 몽골제국에서 총관부란 어떤 고정된 직제라기보다는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인호를 편제하여 설치하는 기구에 가까운 것이며, 총관직의 위상은 해당 총관부의 위상에 비례했던 것이다. 이는 고려의 도감 운용에서 나타나는 특성과도 일정 부분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총관부는 인호를 중심으로 설치되는데, 이는 쌍성총과부에서 나타나는 복합적 권력구조를 설명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쌍성총관부 설치 당시 몽골제국이 기대한 주요 역할은 고려에 대한 견제, 동방왕가에 대한 견제, 그리고 사금 획득이라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이 시기 정세는 불안정하였으나 그 때문에 제국에서 쌍성총관부의 중요성은 가장 높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여몽관계가 안정화되고 몽골제국의 행성체계가 정비되면서 정세가 안정되자 쌍성총관부의 전략적 가치는 이전보다 낮아졌지만, 그 대신 인접지역과의 갈등이 완화되면서 고려 본국이나 합란부와의 인적, 물적 교류가 촉진되었고, 그 결과로 북방에서 전주 이씨 세력이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는 쌍성총관 조씨 가문이나 북방에서 유입된 전주 이씨 세력 모두 고려 본국과 비교적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전주 이씨 세력은 이행리가 쌍성 등지의 다루가치로 임명된 이후 쌍성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합란부와 쌍성의 경계지대인 함주에서 두 영역의 인호를 모아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조씨 가문은 한때 혼인관계로 이들과 연합하였으나, 후계자 분쟁에서 조씨의 아들들이 패배하면서 두 가문은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씨 가문의 이자춘은 고려국왕인 공민왕과 연계하였는데, 조씨 가문은 총관 조소생이 권신 기씨 가문과 연계를 꾀했던 반면 그 숙부인 조돈과 그 일족은 공민왕과 연계하였다.
    1356년 공민왕은 유인우를 파견하여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고, 이자춘과 조돈 일족이 이에 합세하여 조소생은 근거지를 잃고 도주하였다. 조소생은 이후로도 고려와 대립하여 나하추와 함께 고려의 북방을 침입하기도 하였으나 공민왕은 이성계를 파견하여 이를 격파하였고, 다시 도주하던 조소생이 살해당하면서 쌍성총관부 세력은 근거지와 중심인물 양쪽을 모두 상실하고 세력으로서는 완전히 소멸하는 결말을 맞게 되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의 수행 과정을 통해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쌍성총관부의 설치와 소멸 및 해당 기간을 통해 나타났던 세력의 부침과 그 배경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구체적인 요소들로는 설치 당시의 여몽관계 및 제국 내의 상황에 비추어 당대의 쌍성총관부에 부여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역할, 시기에 따른 쌍성총관부의 위상 변화와 그 시대적 배경, 몽골제국의 제도 내에서 총관과 총관부가 가지는 상대적 위치, 여몽관계의 안정기를 거치며 나타났던 쌍성총관부 내부 세력구도의 변화, 고려 말 공민왕대를 배경으로 나타나는 대립구도의 재등장과 소멸 과정 및 이것이 당대 고려 내의 역학구도 및 여몽관계와 연결되는 지점 등에 대하여 짚어보았다. 이와 같은 연구의 수행과정과 그 결과물을 통해 아울러 기대할 수 있는 학문적, 사회적 기여 및 후속연구와의 연계 활용 방향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학문적 영역에서의 기여로서는 쌍성총관부라는 접경지대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고려시대, 나아가 한국사 전체의 접경사 연구에 대하여 새로운 고찰과 시점을 더하여 제시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당대의 국제질서와 몽골제국의 구조라는 틀 속에서 쌍성총관부의 구체적인 구조와 위상에 대하여 재고찰한다는 본 연구의 기본 산출물을 기반으로 한다. 13-14세기 쌍성총관부를 구체적으로 다시 고찰해 본다는 중심 성과를 바탕으로 해당 지역과 시대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전근대 접경지대 연구에 대한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종속 혹은 사대관계가 아니라 제도와 혈연을 비롯한 복합적인 측면으로 얽혀 있는 13-14세기 여몽관계의 다면적 측면 중 하나를 조명하여 시대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국제관계 안에서 고려가 가지는 정체성을 고찰하는 측면에서도 기여하는 부분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국제관계사와 관련해서는 당대 여몽관계, 그리고 지역사로서는 접경지대사와 관련된 후속연구와의 연결점을 가진다.
    또한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던 고려 동북면 지역은 이성계로 이어지는 전주 이씨 세력이 자리잡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즉 이 지역은 여몽관계의 지속기간과 그 이후 시기에 걸쳐 가별초라는 무력집단을 위시한 조선 건국주체의 주요 기반세력이 양성되고 성장한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이들 세력의 구성 요소는 군사제도를 비롯한 조선 초기의 여러 부문에 영향을 드리우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쌍성총관부 내부의 권력구조와 세력구도를 새로이 고찰하고자 하는 본 연구의 성과는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 초기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조망하는 데 추가적인 시사점을 제공하여 시대 해석에 기여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본 연구는 쌍성총관부 자체에 대한 이해와 쌍성총관부가 존재하던 시대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는 학문적 성과라는 1차적 기여점을 가진다. 이는 후대에 대한 교육적 측면에서도 해당 시대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자료로서 사회적 기여를 제공할 수 있다.
    또한 본 연구의 결과물은 주변의 지역사와 당대 여몽관계 및 인접 시대와 관련된 후속연구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선적으로는 13-14세기 요동-한반도의 지역사 및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와의 연계를 기대할 수 있다. 또한 그 중에서도 한국사라는 범주 안에서는 접경지역사 및 조선 초기에 대한 후속연구와 특히 밀접한 연계를 기대할 수 있다.
  • 색인어
  • 쌍성총관부, 총관, 여몽관계, 접경지대, 요동, 조휘, 이안사, 이성계
  • 연구성과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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