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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경운궁 경영과 ‘舊本新參’
The Management of Gyeongun Palace during the Great Han Empire period and ‘Ku-bon-shin-cham’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B유형)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연구과제번호 2020S1A5B5A17090048
선정년도 2020 년
연구기간 1 년 (2020년 09월 01일 ~ 2021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이민아
연구수행기관 서울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이 연구의 목적은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의 건립 과정 및 운용을 통해 대한제국의 정책 이념인 ‘舊本新參’의 구체적 특징을 파악하는 데 있다. 대한제국과 구본신참에 대하여 대개 두 가지 평가가 존재한다. 전통과 현대를 절충한 우리식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황제권 극대화를 위한 반동적 전제정치로 회귀라는 부정적 평가가 그것이다. 일견 대립적으로 보이는 이들 평가는 모두 전통과 근대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당대를 풍부하게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평가와 가치판단에 앞서서 그 구체적 특징을 당대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한제국 시기 정책이념을 구본신참이라고 표현하지만 구본신참의 구체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탐구한 연구는 많지 않다. 그렇다면 근본으로 할 옛 것과 참작할 새 것의 실 내용은 무엇인가? 이는 당시 영건된 궁궐 공간을 분석함으로써 살펴볼 수 있다. 고종은 대한제국 설립 전후 지속적으로 경운궁을 확장했다. 이때 정치주체인 고종의 정치 지향은 공간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공간은 단지 고정되어 있는 물질적 형식이 아니라 공간의 변화를 주도하는 주체의 정치적 지향을 담고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르페브르는 고정되어 있고 측량할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생산된 공간에 주목한 바 있다. 사회적으로 생산된 공간이란 정치적 색채가 담긴 능동적인 과정의 결과물이다. 특히 건축 공간은 주체가 의지를 가지고 설립을 시도할 때 비로소 가시화될 수 있다. 공간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행위 속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권력 주체는 건축을 통해 공간을 배치·형성함으로써 행위를 구조화하고 권력을 실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건축 주체의 건축 행위를 통해 주체의 정치적 지향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건축 결과물의 실제 용도를 확인함으로써 행위를 어떻게 구조화하고 권력을 실현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궁궐도 마찬가지다. 궁궐은 단순히 생활의 편의를 위해 조성된 것이 아니다. 궁궐 공간의 구성은 궁궐 내 권력 주체, 곧 국왕의 정치적·이념적 지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궁궐 전각은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 고유한 기능과 의미를 담아 영건된다. 따라서 특정한 시기에 영건된 전각의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정치세력의 지향을 살펴볼 수 있다.
    대한제국 시기 궁궐 및 주변 공간의 조영 과정 또한 당시 정치주체인 고종의 정치 지향, 곧 구본신참의 내용과 특징을 살펴보는 중요한 매개로 활용될 수 있다. 경운궁 자체에 전통과 근대의 성격이 공존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전통적 황제국가와 근대 제국의 위상을 함께 갖추기 위해 고종이 경운궁 안팎에서 다양한 영건사업을 벌였다는 사실이 선행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경운궁의 전각 배치와 형태, 용도와 성격이 공간의 확장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 분석한 연구는 거의 없다. 중명전, 돈덕전 등 개별 건물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 바 있으나 전체적인 경운궁 영건의 흐름 속에서 이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지는 못했다. 건물이 지어졌던 당대의 대내외적 상황, 재정적 여건까지 함께 고려하여 고종의 경운궁 조영이 의미하는 바를 입체적으로 분석해야만 한다.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에는 함녕전, 선원전, 중화전을 비롯한 전통 양식의 건물과 중명전, 석조전, 정관헌, 구성헌, 돈덕전 등 서구식 건물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건물은 일정 공간에 한꺼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점차 확장된 공간에 순차적으로 만들어졌다. 또 신축된 전각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가치를 구현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이 축적되어 반영된 것이었다. 이러한 연속과 축적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구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구본’에 비추어 ‘신참’의 의미도 함께 파악할 수 있다. 즉 경운궁의 건립 과정 및 운용을 통해 고종의 정치적 지향이자 대한제국의 정책이념인 구본신참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기대효과
  • 본 연구를 통한 기대효과는 크게 학술적인 측면과 대중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본 연구의 학술적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운궁 영건 과정과 각 건물 기능에 대한 상세한 사실 규명이다. 구체적으로 1896년 대한제국 성립 전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중심으로 신축된 전각의 기능을 알 수 있다. 또 1902년 즉위 40주년 칭경예식 준비를 전후로 지어진 건물의 영건 순서와 건물 규모를 파악하여 건물의 중요도와 실제 사용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1904년 경운궁 대화재 이후 중건 과정에서 고종이 강제 퇴위했던 1907년까지 고종이 경운궁 공간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구체적 실체를 보여줄 수 있다.
    둘째, 대한제국 정치사 및 궁궐사 연구의 심화이다. 이 연구를 통해 아관파천, 황제 즉위, 을사조약, 강제 퇴위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 시기에 고종의 대응이 궁궐 공간에 반영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연구목표에서 언급했듯이 경운궁 영건과 운영의 구체적 과정을 시기별로 정리함으로써 고종의 정치적 지향을 살펴보고 구본신참의 실제 내용을 규명할 수 있다.
    셋째, 연구의 시간적·공간적 확장 가능성이다. 우선 후속연구에서 경운궁 건립 이전 시기와 이후 시기의 궁궐 영건사업을 비교할 예정이다. 곧 고종 즉위 직후 흥선대원군 주도로 영건된 경복궁과 고종 친정 전후로 영건된 건청궁, 1880년대 개화정책 속에서 건립된 집옥재를 비롯한 다양한 건물 영건에 드러난 정치적 지향을,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과 비교하여 살펴볼 것이다. 또한 경운궁 건립 이후 일본의 영향력 강화로 어떻게 공간이 변화하였는지 분석하여 당대의 공간 변화 속에 투영된 식민지성을 분석할 것이다. 비교사를 통한 공간적 확장도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한중일 궁궐 형태의 특징과 유형을 각각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비교 분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과 경운궁의 비교 연구를 통해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힘으로써 고종의 대한제국과 유럽의 절대왕정의 관계까지 살펴볼 수 있다.
    본 연구의 대중적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유산에 대한 대중적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문화 일반과 역사적 유산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이해가 높아진 오늘날, 본 연구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문화재 관련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대중의 갈증을 해소하는데 일조할 수 있다. 또 대중들이 근대 문화재를 바라보는 데 있어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할 수 있다. 경운궁을 중심으로 한 근대문화재 답사 프로그램 및 대중강연 등 문화 사업과 연계하여 시민 교양 증진에도 기여할 수 있다.
    둘째, 경운궁과 궁궐은 물론 문화재 정책 수립 전반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현재 경운궁을 중심으로 활발한 문화재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 연구를 통해 사업 방향의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으며 이후 엄밀한 고증으로 역사적 실체에 부합하는 복원의 결과물을 산출해낼 수 있다.
  • 연구요약
  • 이 연구의 목적은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의 건립 과정 및 운용을 통해 대한제국의 정책 이념인 ‘舊本新參’의 구체적 특징을 파악하는 데 있다.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에는 함녕전, 선원전, 중화전을 비롯한 전통 양식의 건물과 중명전, 석조전, 정관헌, 구성헌, 돈덕전 등 서구식 건물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들 건물은 일정 공간에 한꺼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점차 확장된 공간에 순차적으로 만들어졌다. 또 신축된 전각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가치를 구현한 것이 아니라 과거 경험이 축적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고종은 제사 및 기억 공간, 곧 계지술사의 실현 공간을 중심으로 경운궁 공간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연속과 축적의 경험이 건물에 어떻게 구현되는지 살펴봄으로써 ‘구본신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경운궁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했던 1896년부터 고종이 퇴위했던 1907년까지 끊임없이 변화하였다. 고종은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비밀리에 옮겨갔다. 이때부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명성황후 국장을 치르는 동안 경운궁 공간은 지속적으로 확장했다. 경운궁의 원 공간은 즉조당과 석어당이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원 공간 주변으로 명성황후의 혼전 경효전과 선왕 어진에 제사를 위한 선원전이 세워졌다. 이와 같은 제사 공간의 정비와 함께 규장각을 계승한 황실도서관 수옥헌이 세워졌다. 제사 관련 공간과 선왕 관련 공간을 우선하여 경운궁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고종이 궁궐 영건에서 주목한 바가 숙종대 이후 강조된 ‘繼志述事’에 있음을 보여준다.
    고종은 견제세력을 제어하고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경운궁을 비롯한 지방 각지에 다양한 영건 사업을 벌였다. 왕실 시조묘인 조경단 건립되었고, 태조의 5대조인 이양무와 그의 부인 삼척이씨의 묘소도 정비되었다. 1902년 즉위 40주년 기념식(御極 40년 稱慶禮式)을 위해 법전인 중화전을 건립하고 양관 돈덕전을 신축하였다. 서양식 의례공간인 석조전 공사를 중단하고 전통 의례공간인 중화전을 영건한 것은 고종의 구본신참의 지향과 관련이 있다. 칭경예식은 무산됐지만 이때 지어진 건물들은 대부분 완공되었다. 따라서 각 건물들의 착공 및 완공 시점과 그 활용을 통해 고종이 정치적으로 지향했던 바를 규명할 수 있다.
    1904년 4월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 공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화재로 경운궁 중심부가 피해를 입자 고종은 미국공사관 서편의 양식 서재인 수옥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1905년 수옥헌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 되었다. 고종은 1907년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면서 같은 건물에서 위임장을 내렸다. 결국 이 일을 빌미로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 퇴위되었다. 1904년 화재로 경운궁을 중건한 후 고종은 서구열강과 긴밀한 관계를 통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고자 했다. 경운궁 공간 운영은 고종의 저항 양상 및 그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와 같이 제사공간, 의례공간, 기억공간을 중심으로 확장했던 경운궁을 통해 ‘구본’의 의미를 찾고, 이후 공간의 기능 변화를 통해 ‘신참’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본 연구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승정원일기》에서 1894년부터 1910년까지 궁궐 영건 및 활용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추출하여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궁궐 공간에 관한 고종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으며 화재와 수리, 영건 등 건축 관련 정보를 비롯해 봉안 및 제사, 이동 등 궁궐 경영 관련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또 전각의 기능과 건축 의도를 살펴보기 위해서 전각의 상량문을 활용할 것이다. 영건 및 진찬 관련 의궤 및 《官報》 등 공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등 일본 측 자료도 검토할 것이다. 그밖에 1890년대 이후 발간한 신문자료 및 외국인 견문기록, 당대 지도를 통해 경운궁을 비롯한 주변 건물의 영건과 부지 매입, 이건, 고종의 건물 내 행사 등 다양한 정보를 교차 검증할 예정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수옥헌은 ‘규장각’ 계승을 표방한 건물이었다. 정조대 창덕궁 후원에 건립된 전각 ‘규장각’은 선왕의 어제와 어필 봉안을 기반으로 청나라에서 수입한 최신 서적을 보관하는 일종의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의 역할을 하는 ‘규장각’은 전통과 근대의 교차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규장각’은 단순한 도서수장고가 아니라 선왕의 기억, 현왕의 어진을 비롯한 당대의 중요한 가치와 이념을 보여주는 기록을 보관하는 장소이자 최신 지식을 수장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숙종이 종부시에 선왕의 전적을 봉안하기 위해 세웠던 ‘규장각’의 현판을 창덕궁 후원 ‘규장각’에 옮겨 걸음으로써 자신의 규장각이 숙종의 규장각을 계승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정조대에 규장각이 국왕을 지지하는 중추적인 기관이 될 수 있었던 명분은 국왕의 어진, 어필 등을 봉안하는 기능을 법제적으로 독점하도록 해주었던 데서 가능했다.
    고종은 친정 전후부터 규장각에 주목하였으며, ‘규장각’을 계승한 전각을 궁궐에 계속 건립하였다. 고종 원년에 흥선대원군은 숙종이 세웠던 9칸 규모의 전각 ‘규장각’을 종친부로 옮기고, 국왕이나 대왕대비 전교 등 공식적인 절차 없이 종친부로 하여금 ‘규장각’ 현판을 옮겨달게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선대의 기억 장치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을 종친부 공간으로 옮긴 이유는 선대의 권위를 통해 종친부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정치적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에 대항하여 親政 의지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고종은 영조와 정조의 뜻을 이어받아 현왕의 어진을 도사할 것을 명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규장각’ 전각과 현판을 옮길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초상화를 그곳에 봉안할 수는 없었다. 이는 선왕의 뜻을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현재의 국왕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상징적 장치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정조가 즉위 직후 궁궐 후원에 ‘규장각’을 세웠던 것을 계승하여 경복궁 북쪽 권역에 건청궁을 새로 지었다. 고종이 경복궁에 머물던 시기 修政殿에 임시로 봉안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고종 어진은 건청궁 내 관문당에 봉안되었다. 그리고 어진 봉안 이후 관문당의 명칭은 관문각으로 바뀌었다.
    경복궁에서 두 차례의 대형 화재가 일어나자 고종은 창덕궁에 자신의 지향을 담은 새로운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1881년 3월 창덕궁 壽靜殿 일대 수리가 그것이다. 이때 수정전의 이름은 함녕전으로 바뀌었으며, 새로 지어지는 북별당의 이름을 ‘集玉齋’라고 붙였다. 집옥재는 서적을 수장하고 국왕이 학문을 궁구하는 일종의 별전이었다. 고종은 연이은 화재로 인해 선왕의 유품이 훼손되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防火 기능을 갖춘 서재의 건설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집옥재는 화재에 강한 벽돌로 지어졌다. 그러나 집옥재에서 더 주목되는 부분은 중국식 건축 양식을 가미한 독특한 외형에 있다. 집옥재는 중국을 통해 정보를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이 경복궁으로 환어한 후 고종의 어진은 관문각에 다시 봉안되었다. 그런데 고종은 1888년 관문각의 어진을 장안당으로 옮기고 관문각을 다시 지을 것을 명했다. 관문각은 러시아 출신 건축기사 사바찐이 설계와 공사를 주관함으로써 새로운 외형으로 세워졌다. 관문각은 궁궐 내에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고종은 궁궐에 불타지 않는 양관을 신축하여 선왕과 관련된 기록들, 그리고 선대를 계승하는 국왕 그 자체를 상징하는 자신의 어진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부실공사 논란으로 관문각은 어진봉안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결국 1891년 창덕궁에 있던 집옥재를 경복궁으로 옮겨올 것을 명하여 고종의 어진은 이건된 집옥재에 봉안되었다.
    창덕궁 이어와 경복궁 환어를 반복하면서도 고종은 창덕궁과 경복궁에 ‘규장각’ 계승을 표방한 건물을 계속 지었다. 관문각, 집옥재 등은 모두 현왕 어진 봉안처이자 선왕의 기록 보관처의 성격을 바탕으로 서적 수집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수용할 목적으로 창출된 공간이었다. 궁궐 내 최초의 양관인 관문각과 청나라풍 건물인 집옥재의 외형은 고종의 개화의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처럼 ‘규장각’을 계승한 새로운 전각은 고종이 선왕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숙종대 이후 건립된 ‘규장각’의 전통은 고종대로 이어졌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외형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건립된 수옥헌은 ‘규장각’을 모범으로 한 경운궁 내 최초의 양관이었다. 수옥헌과 만희당을 중심으로 문화각, 정이재, 외화보 곳간 등과 함께 수옥헌은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중 문화각에 어보와 옥책 등을 보관하였으며 1901년 2월 이후에는 잠시 황제의 어진까지 봉안되었다. 그러나 “가장 경건하고 지엄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어진봉안처, 문화각은 각국 공사관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 때문에 문화각에 봉안했던 고종 어진은 결국 즉조당 부근의 흠문각으로 옮겨졌다.
    주변 여건 때문에 고종의 어진은 수옥헌 영역에 봉안되지 못했지만 수옥헌은 건립단계에서 밝힌 것과 같이 규장각을 계승한 도서관의 역할을 하였다. 수옥헌 건립 이후 경운궁 내에 다양한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다. 고종은 황제 권력을 절대화하기 위한 기관으로 법규교정소와 원수부를 창설하였고, 이 기관의 청사를 서구식으로 건립하였다. 이를 통해 고종은 서구식 기준의 절대 황권을 과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관이 실제 국력 강화에 기여한 바는 크지 않다.
    고종은 황제의 신성성을 과시하기 위한 황제 어진을 평양에 건설된 이궁 풍경궁에 봉안하게 하였다. 전통방식으로 제작된 황제의 어진을 전통적으로 존중 받는 ‘기자의 고장’ 평양에 봉안함으로써, 고종은 서구 근대 국가의 특징으로 지목된 양경제도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와 같이 고종은 ‘선왕’을 비롯한 전통적 권위를 바탕으로 서구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절대적 황권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현왕의 어진과 어진봉안처는 현왕 그 자체를 상징했다. 친정 전후시기부터 ‘규장각’을 계승한 현왕 어진봉안처 건립을 통해 국정주도 및 개화 의지 등을 보여주었던 고종은,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도 서구식 도서관 건립, 현왕 어진봉안처 건립을 통해 궁극적으로 대한제국이 서구 근대 국가와 동등한 국가임을 대외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신민들에게 황제의 신성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발생하는 화재와 정치적 혼란, 국제 정세의 불안 가운데 궁궐 내 건물 신축과 확장, 이궁 건립 등 토목공사를 지속적으로 벌인 것은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황제의 위상과 지위에 대한 지나치게 많은 관심과 비용은 결국 국가의 혼란을 부추길 뿐이었다.
    ‘규장각’ 계승 전각에 드러난 ‘구본신참’에서 ‘舊本’은 현왕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선왕의 권위, 그리고 선왕과 관련된 기억이라고 할 수 있으며 ‘新參’은 당대 청, 혹은 구미로부터 수용하는 새로운 정보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종은 한편으로는 선왕의 권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위상을 강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서구 문물을 활용하고자 하였고, 한편으로는 전통적 방식을 통해 자신이 서구의 황제와 동등한 지위를 갖고, 대한제국이 서구 국가와 동등한 국가임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발생하는 화재와 정치적 혼란, 국제정세의 불안 가운데 궁궐 내 건물 신축과 확장, 이궁 건립 등 토목공사를 지속적으로 벌인 것은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황제의 위상과 지위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비용은 결국 국가의 혼란을 부추길 뿐이었다.
  • 영문
  • Suokheon(漱玉軒) is a building that stands for the succession of Kyujanggak(奎章閣). ‘Kyujanggak’, which functions as a library, can be an important clue that shows the intersection of tradition and modernity. This is because ‘Kyujanggak’ is a place to store the records of the previous kings and the portraits of the current king, as well as a space to store the latest knowledge.
    King Jeongjo(正祖) moved the signboard of King Sukjong(肅宗)’s ‘Kyujanggak’ to ‘Kyujanggak’ at Changdeokgung Palace(昌德宮). This symbolically expresses that his own Kyujanggak succeeded King Sukjong's Kyujanggak.
    Heungseon Daewongun(興宣大院君) moved the small building ‘Kyujanggak’ built by King Sukjong to Jongchinbu(宗親府) and had the ‘Kyujanggak’ signboard moved. The reason why Heungseon Daewongun moved 'Kyujanggak' to the Jongchinbu space was a political act to elevate the status of Jongchinbu through the authority of the previous kings.
    King Gojong(高宗) paid attention to Kyujanggak before and after his direct reign, and continued to build buildings that succeeded ‘Gyujanggak’ in the palace.
    In the process of opposing Heungseon Daewongun, King Gojong ordered the portrait of the current king to be painted in imitation of Yeongjo(英祖) and Jeongjo. Heungseon Daewongun was able to move the ‘Kyujanggak’ and the signboard, but he could not keep his portrait there. This is because it was a special symbolic device that only the current king could do in the name of succeeding the will of the previous king. Just as King Jeongjo built ‘Kyujanggak’ at the back of the palace, Geoncheong Palace(乾淸宮) was newly built in the northern area of ​​Gyeongbokgung Palace(景福宮).
    After two large fires broke out in Gyeongbokgung Palace, King Gojong began to build a new building in Changdeokgung Palace(昌德宮) to reflect his intentions. When King Gojong experienced an incident where the relics of the previous kings were damaged by successive fires, he built a library with a fire-fighting function, Jibokjae(集玉齋). Because of this, Jibokjae was built with fire-resistant bricks. However, the part that attracts more attention in Jibokjae is its unique appearance with Chinese architectural style. Jibokjae is a building that shows its will to accept new information through China.
    After King Gojong returned to Gyeongbokgung Palace, the portrait of King Gojong was enshrined again in Geoncheonggung(乾淸宮) Gwanmungak(觀文閣). In 1888, King Gojong temporarily moved the portrait of Gwanmungak to another location and ordered the reconstruction of Gwanmungak. Gwanmungak was built with a new exterior design and construction by Russian architect Sabatin.
    King Gojong built a non-burning, western-style building in the palace to protect his portraits and records related to the previous kings. However, the portrait could not be enshrined at Gwanmungak due to controversy over poor construction.
    The exterior of Gwanmungak, the first Western-style building in the palace, and Jibokjae, a Chinese-style building, clearly showed King Gojong's will for enlightenment. In this way, the new building that succeeded ‘Kyujanggak’ was a space where King Gojong could express his intentions by leaning on the authority of the previous kings. The tradition of 'Kyujanggak', which was built after Sukjong's dynasty, was carried on to Gojong's dynasty, and it appeared in a new shape according to the changes of the times.
    Built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Empire, Suokheon was the first Western-style building in Gyeongungung Palace, modeled after 'Kyujanggak'. However, Suokheon could not keep the portrait of the emperor because it was too close to the legations of other countries and only served as a library. After the construction of Suokheon, various Western-style buildings were built inside Gyeongungung Palace.
    King Gojong established the Law Correction Center and the Marshal Department as institutions to absolute imperial power, and built the office of these institutions in a western style. Through this, King Gojong wanted to show off his absolute supremacy by Western standards.
    In order to show off the emperor's holiness, King Gojong enshrined the emperor's portrait in Punggyeonggung Palace(豐慶宮), built in Pyongyang(平壤). By enshrining the portrait of the emperor produced in a traditional way in the traditional city of Pyongyang, King Gojong tried to implement the same two capital systems as in the modern Western state. In this way, by embracing Western civilization based on the authority of tradition, Gojong tried to visually reveal the absolute imperial power.
    However, frequent fires, political turmoil, and unrest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continued. In the midst of this, it is difficult to say that the continuous civil works in the palace were an appropriate response to the crisis.
    Now, let's take a look at the meaning of 'Kubonsincham(舊本新參)' through the palace building. At this time, ‘Kubon(舊本)’ is the authority of the previous kings to strengthen the legitimacy of the current king, and ‘Sincham(新參)’ is new information received from the Qing Dynasty or Europe and America. Through this, King Gojong tried to express that the Korean Empire was a state equal to that of the Western countries while having the same status as the Western emperors. However, excessive interest and expense for the emperor's status and status only fueled chaos in the end.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수옥헌은 ‘규장각’ 계승을 표방한 건물이었다. 도서관의 역할을 하는 ‘규장각’은 전통과 근대의 교차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규장각’은 단순한 도서수장고가 아니라 선왕의 기억, 현왕의 어진을 비롯한 당대의 중요한 가치와 이념을 보여주는 기록을 보관하는 장소이자 최신 지식을 수장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숙종이 종부시에 선왕의 전적을 봉안하기 위해 세웠던 ‘규장각’의 현판을 창덕궁 후원 ‘규장각’에 옮겨 걸음으로써 자신의 규장각이 숙종의 규장각을 계승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고종 원년에 흥선대원군은 숙종이 세웠던 9칸 규모의 전각 ‘규장각’을 종친부로 옮기고, ‘규장각’ 현판을 옮겨달게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선대의 기억 장치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을 종친부 공간으로 옮긴 이유는 선대의 권위를 통해 종친부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정치적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규장각’ 전각과 현판을 옮길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초상화를 그곳에 봉안할 수는 없었다. 이는 선왕의 뜻을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현재의 국왕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상징적 장치였기 때문이다. 고종이 경복궁에 머물던 시기 修政殿에 임시로 봉안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고종 어진은 ‘규장각’을 계승한 어진봉안처로 지어진 건청궁 내 관문각에 봉안되었다.
    경복궁에서 두 차례의 대형 화재가 일어나자 고종은 창덕궁에 자신의 지향을 담은 새로운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1881년 3월 창덕궁 壽靜殿 일대 수리가 그것이다. 이때 ‘集玉齋’라는 벽돌 건물을 새로 지었다. 벽돌은 화재에 강하다. 그러나 집옥재에서 더 주목되는 부분은 중국식 건축 양식을 가미한 독특한 외형이라는 데 있다. 집옥재는 중국을 통해 정보를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이 경복궁으로 환어한 후 고종의 어진은 관문각에 다시 봉안되었다. 그런데 고종은 1888년 관문각은 러시아 출신 건축기사 사바찐이 설계와 공사를 주관함으로써 새로운 외형으로 세워졌다. 관문각은 궁궐 내에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고종은 궁궐에 불타지 않는 양관을 신축하여 선왕과 관련된 기록들, 그리고 선대를 계승하는 국왕 그 자체를 상징하는 자신의 어진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부실공사 논란으로 관문각은 어진봉안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결국 1891년 창덕궁에 있던 집옥재를 경복궁으로 옮겨올 것을 명하여 고종의 어진은 이건된 집옥재에 봉안되었다.
    고종은 창덕궁과 경복궁에 ‘규장각’ 계승을 표방한 건물을 계속 지었다. 관문각, 집옥재 등은 모두 현왕 어진 봉안처이자 선왕의 기록 보관처의 성격을 바탕으로 서적 수집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수용할 목적으로 창출된 공간이었다. 궁궐 내 최초의 양관인 관문각과 청나라풍 건물인 집옥재의 외형은 고종의 개화의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처럼 ‘규장각’을 계승한 새로운 전각은 고종이 선왕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건립된 수옥헌은 ‘규장각’을 모범으로 한 경운궁 내 최초의 양관이었다. 수옥헌과 만희당을 중심으로 문화각, 정이재, 외화보 곳간 등과 함께 수옥헌은 하나의 권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중 문화각에 어보와 옥책 등을 보관하였으며 1901년 2월 이후에는 잠시 황제의 어진까지 봉안되었다. 그러나 “가장 경건하고 지엄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어진봉안처, 문화각은 각국 공사관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 때문에 문화각에 봉안했던 고종 어진은 결국 즉조당 부근의 흠문각으로 옮겨졌다. 흠문각과 함께 황제의 어진은 평양의 이궁 풍경궁에 봉안되었다. 전통방식으로 제작된 황제의 어진을 전통적으로 존중 받는 ‘기자의 고장’ 평양에 봉안함으로써, 고종은 서구 근대 국가의 특징으로 지목된 양경제도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와 같이 고종은 ‘선왕’을 비롯한 전통적 권위를 바탕으로 서구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절대적 황권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현왕의 어진과 어진봉안처는 현왕 그 자체를 상징했다. 고종은 대한제국 수립 이후 서구식 도서관 건립, 현왕 어진봉안처 건립을 통해 궁극적으로 대한제국이 서구 근대 국가와 동등한 국가임을 대외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신민들에게 황제의 신성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발생하는 화재와 정치적 혼란, 국제 정세의 불안 가운데 궁궐 내 건물 신축과 확장, 이궁 건립 등 토목공사를 지속적으로 벌인 것은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황제의 위상과 지위에 대한 지나치게 많은 관심과 비용은 결국 국가의 혼란을 부추길 뿐이었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본 연구는 정조대에 세워진 규장각을 정치제도의 차원이 아니라 건축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전각 ‘규장각’이라는 문화유산은 현재 창덕궁 후원에 옛 모습으로 남아있다. 고종은 개항기 급변하는 국내외 상황 속에서 창덕궁에서 경복궁, 경운궁으로 잦은 이어 속에서도 ‘규장각’을 계승한 새로운 건물을 세웠다. 건청궁 내 관문각, 집옥재, 수옥헌이 그것이다. 건청궁, 집옥재, 수옥헌은 지금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한 강연과 답사를 통해 현존하는 문화유산의 의미에 대해 시민 혹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확대할 수 있다. 또한 관문각 복원이나 집옥재 및 수옥헌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때 그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 색인어
  • 규장각, 고종, 건청궁, 관문각, 집옥재, 수옥헌, 풍경궁, 경복궁, 창덕궁, 경운궁, 어진, 왕실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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