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전개 과정에서 전쟁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전쟁은 국가 또는 이에 준하는 거대 세력 간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사회 질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해당 연구의 중심 주제로 설정한 귀주대첩(龜州大捷) 역시 26년간 펼쳐진 고 ...
한국사의 전개 과정에서 전쟁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전쟁은 국가 또는 이에 준하는 거대 세력 간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사회 질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해당 연구의 중심 주제로 설정한 귀주대첩(龜州大捷) 역시 26년간 펼쳐진 고려-거란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중요한 사건으로, 고려 전기의 주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성 및 일반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이 전투를 전면적으로 다룬 연구는 많지 않다. 본 연구에서는 종래의 연구 성과들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측면에 대한 재검토를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로, 전쟁 상황에서 국왕인 현종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이다. 귀주대첩을 전면에서 지휘한 강감찬의 활약 이면에는 개경으로 우회 진격하는 거란군을 청야전술로 방어해 낸 현종의 군사적 역량이 있었다. 둘째로, 귀주대첩의 전황이 청야전술을 바탕으로 한 개경방어전 등의 교전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귀주대첩은 1019년 2월 2일, 귀주에서 있었던 고려군과 거란군 사이의 대규모 회전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 대회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관련 기록을 면밀히 분석하면 귀주대첩은 고려군에 의해 짜여진 전장에서 펼쳐진 일전이라 할 수 있다. 고려군은 주요 교전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거란군의 전술적 기동 범위를 제한하였다. 따라서 귀주대첩이 펼쳐지기 전에 있었던 개경 방어전 역시 최종전을 위한 전략적 포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주요 전장이나 주요 인물의 활약에 초점이 맞춰졌던 연구 시야에서 벗어나 귀주대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전쟁 상황에서 후방 전략에 대한 재검토는 종래 개설적인 귀주대첩에 대한 서술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며, 몇 가지 키워드로 이미지화되어버리기 쉬운 전쟁사의 장면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여겨진다.
기대효과
본 연구를 통한 기대 효과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전쟁사 연구에 있어서 후방 전략의 중요성 부각이다. 전쟁은 특정 국가나 세력의 명운을 건 충돌이다. 따라서 전선에서의 직접적인 상황 외에도 그 이면에서 다양한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러나 종래 연 ...
본 연구를 통한 기대 효과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전쟁사 연구에 있어서 후방 전략의 중요성 부각이다. 전쟁은 특정 국가나 세력의 명운을 건 충돌이다. 따라서 전선에서의 직접적인 상황 외에도 그 이면에서 다양한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러나 종래 연구에서는 흔히 전면전의 상황이 부각되었지 전쟁과 동시에 벌어지는 후방에서의 움직임들은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고려-거란 전쟁이 귀주대첩이라는 큰 승리를 통해 마무리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마지막 대첩 하나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교전 상황들과 더불어 전간기의 사회 안정책 등이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해당 연구는 종래 ‘귀주대첩=강감찬’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공식에 다양한 이야기를 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둘째, 기존에 조명되지 못했던 인물·사안들에 대한 접근이다. 본 연구에서 주목한 고려 현종은 2차 전쟁시점과 6차 전쟁시점에서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전자에서는 외침을 피해 몽진하였고, 후자에서는 스스로 청야전략을 입안하여 병력을 운용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약 8년의 기간 동안에 있었던 고려사회 내부 정세를 통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처럼 본 연구를 통해 강감찬 등 전쟁 영웅에 주목하였던 경향에서 주제 범위를 확장하여 전쟁 과정 속의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재조명의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연구요약
귀주대첩은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전투이다. 따라서 고려 측의 기록뿐만 아니라 거란 및 송의 기록까지 함께 검토하여 전황을 재구성할 계획이다. 특히 귀주대첩으로 종지부를 찍는 고려-거란 전쟁은 약 26년의 긴 시간 속에서 진행되었으므로 적극적 교 ...
귀주대첩은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전투이다. 따라서 고려 측의 기록뿐만 아니라 거란 및 송의 기록까지 함께 검토하여 전황을 재구성할 계획이다. 특히 귀주대첩으로 종지부를 찍는 고려-거란 전쟁은 약 26년의 긴 시간 속에서 진행되었으므로 적극적 교전이 발생하지 않는 소강 기간의 사회적 변화까지 시야에 두고 해당 주제에 대해 천착하고자 한다.
1) 청야전술에 대한 전략적 유효성 측면 해석 고려 현종은 개경으로 빠르게 진군하는 거란군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청야 전술로 대응하였다. 청야 전술은 적의 침입로상 모든 식량을 없애거나 성으로 반입한 후 농성하여 원정군을 피로하게 한 뒤 격퇴하는 전술이다. 거란군의 주력은 기병으로 그 특성상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하였기에 원활한 보급이나 약탈 없이는 장기전을 수행하기 어렵다. 고려는 수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거란의 병력운용에 대한 장단점을 미리 파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종은 거란의 약점인 보급을 봉쇄하고자 청야 전술로 지구전을 채택하였고, 전선과의 긴밀한 연락을 통해 강감찬으로 하여금 퇴각하는 거란군을 포착, 격멸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2) 청야전술을 수립, 강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한 분석 한편으로 청야전술은 보급이 취약한 적의 기병에 대응하는 유용한 방책이지만 동시에 방어하는 입장에서도 큰 희생을 감내해야만 하는 약점을 갖고 있다. 아군 측 물자의 징발과 파기는 민심의 이반을 불러올 수 있고, 청야를 결정하더라도 민의 협조가 없으면 일사분란한 작전 수행이 불가능하다. 현종이 이러한 위험성이 있는 전술을 강행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즉위 초와는 달리 굳건해진 현종의 위치를 들 수 있다. 강조의 정변을 통해 즉위한 현종의 초기 치세는 순탄치 않았다.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한 거란군에 의해(2차 전쟁) 개경까지 위협받게 되자 현종은 소수의 인원을 거느리고 나주로 몽진하였다. 거란과의 화친으로 전란이 일단락된 뒤, 현종은 여러 시책을 통해 통치기반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6차 전쟁 당시 현종은 과거 개경을 버리고 피난하였던 것과는 달리 개경 인근의 민호를 청야하면서까지 수도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략이 순간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민심이 국가의 통제에 우호적이었다는 방증이 된다. 이는 전쟁이 소강상태였던 시기 시행되었던 여러 구휼책 및 전몰자에 대한 예우 등이 효과를 발휘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즉 청야를 통한 피해 역시 전란 이후에 복구될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하였기에 민호의 발빠른 동원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국문
현종대에 있었던 고려-거란 전쟁은 임금의 재위 기간의 절반에 가까운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속된 장기전이었다. 특히 귀주대첩은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가장 중요한 전투이다. 따라서 종래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전쟁을 지휘한 강감찬의 활약에 주목하여 귀주대첩 ...
현종대에 있었던 고려-거란 전쟁은 임금의 재위 기간의 절반에 가까운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속된 장기전이었다. 특히 귀주대첩은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가장 중요한 전투이다. 따라서 종래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전쟁을 지휘한 강감찬의 활약에 주목하여 귀주대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은 국가간의 거대한 충돌이므로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전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해당 과제에서는 이러한 문제 의식 하에, 국왕 현종의 역할에 주목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현종은 5차 전쟁이 마무리된 시점부터 6차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약 1년 간의 기간 동안 세 차례의 열병을 시행하여 고려군을 전체적으로 점검하였으며, 강감찬을 중용하여 북방의 군권을 맡겼다. 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방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거란군이 고려 주력군을 피해 수도를 향해 진격하자 개경 주변을 청야하는 다소 극단적인 수비책을 사용하였다. 이는 기병 중심으로 편제되어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려던 거란의 전략에 유효하게 작용하였다. 병력을 나누어 거란의 우회 기동에 대응한 강감찬의 전술과 수도 일대를 청야하여 거란의 전략을 맞받아친 현종의 전술은 모두 거란의 움직임을 조기에 읽고 전방과 후방 사이의 긴밀한 연락을 통해 이루어낸 성과라고 여겨진다. 즉 귀주대첩은 단지 전방에서의 교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고려 후방에서의 정보전과 방어 전략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가운데에서 거둔 성과이다. 현종이 청야전술을 통해 개경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고려는 거란의 전장 주도권을 빼앗고, 퇴각하는 거란군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처럼 귀주대첩은 개전 초부터 종전까지 고려가 취한 여러 전술적 움직임이 유기적으로 얽혀 이루어진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이번 연구에서는 전쟁 상황에서의 후방 전략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귀주대첩을 전후한 여러 상황을 보다 넓게 살펴보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귀주대첩으로 대표되는 마지막 고려-거란 전쟁은 강감찬이라고 하는 뛰어난 지휘관의 역량으로 얻어낸 승리로 회자되곤 한다. 그러나 이를 면밀히 살펴보면 전방의 고려 군세와 별개로 후방에서의 지원이나 유기적인 작전 전개가 존재했음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영문
The Goryeo-Khitan War was a prolonged war that lasted over ten years, covering almost half of King Hyeonjong's reign. The battle of Guiju was the most important battle of the war, putting an end to it. Most of the previous studies on the subject focus ...
The Goryeo-Khitan War was a prolonged war that lasted over ten years, covering almost half of King Hyeonjong's reign. The battle of Guiju was the most important battle of the war, putting an end to it. Most of the previous studies on the subject focused on the performance of Kang Gam-chan that led the Goryeo forces in the war to examine the Battle of Guiju, but there is a need to figure out the war situations from a more macroscopic perspective since war is a massive clash between two states. Based on this problematic consciousness, this study focused on the roles of King Hyeonjong, who checked the Goryeo forces on the whole through three formal military inspections for approximately a year before the breakout of the last war. He appointed Kang Gam-chan and granted military power to him for the northern part. Once the war broke out, he kept a close watch on the war situations. Once finding out that the Khitan forces marched toward the capital of Goryeo to avoid the main force units of Goryeo, he employed a rather extreme defensive measure to scorch the fields around Gaegyeong. His measure was effective in the strategy of the Khitan that tried to end the war swiftly with its cavalry-led forces. Both Kang's tactics of reacting to the turning movement of the Khitan forces by dividing the Goryeo forces and King Hyeonjong's tactics of scorching the field around the capital to fight the Khitan forces were achievements made possible by their reading of Khitan's movement early and their close liaison between the front and rear. In other words, Goryeo did not win a victory at the Battle of Guiju by simply engaging in actions at the front. They engaged in effective information warfare and defensive strategies at the rear for the victory. As King Hyeonjong succeeded in defending Gaegyeong by employing the tactics of scorching the fields, Goryeo was able to take the lead on the battleground from the Khitans and induce the retreating Khitan forces to battlefields favorable to them. These findings indicate that Goryeo won the Battle of Guiju based on the organic entanglement of its several tactical movements from the start to the end of the war. The present study examined various situations before and after the Battle of Guiju more broadly by reviewing again the rear strategies of Goryeo under the war situations. It is generally said that Goryeo won the last Goryeo-Khitan war lastly punctuated by the Battle of Guiju thanks to the competence of a superb leader named Kang Gam-chan, but a closer look into the war shows that Goryeo clearly provided support and developed organic operations at the rear separate from the Goryeo troops at the front. King Hyeonjong especially played an effective role by deciding to implement the tactics of scorching the field in the defensive warfare of Gaegyeong at the midway point of the war.
연구결과보고서
초록
현종대에 있었던 고려-거란 전쟁은 임금의 재위 기간의 절반에 가까운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속된 장기전이었다. 특히 귀주대첩은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가장 중요한 전투이다. 따라서 종래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전쟁을 지휘한 강감찬의 활약에 주목하여 귀주대첩 ...
현종대에 있었던 고려-거란 전쟁은 임금의 재위 기간의 절반에 가까운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속된 장기전이었다. 특히 귀주대첩은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가장 중요한 전투이다. 따라서 종래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전쟁을 지휘한 강감찬의 활약에 주목하여 귀주대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은 국가간의 거대한 충돌이므로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전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해당 과제에서는 이러한 문제 의식 하에, 국왕 현종의 역할에 주목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현종은 5차 전쟁이 마무리된 시점부터 6차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약 1년 간의 기간 동안 세 차례의 열병을 시행하여 고려군을 전체적으로 점검하였으며, 강감찬을 중용하여 북방의 군권을 맡겼다. 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방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거란군이 고려 주력군을 피해 수도를 향해 진격하자 개경 주변을 청야하는 다소 극단적인 수비책을 사용하였다. 이는 기병 중심으로 편제되어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려던 거란의 전략에 유효하게 작용하였다. 병력을 나누어 거란의 우회 기동에 대응한 강감찬의 전술과 수도 일대를 청야하여 거란의 전략을 맞받아친 현종의 전술은 모두 거란의 움직임을 조기에 읽고 전방과 후방 사이의 긴밀한 연락을 통해 이루어낸 성과라고 여겨진다. 즉 귀주대첩은 단지 전방에서의 교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고려 후방에서의 정보전과 방어 전략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가운데에서 거둔 성과이다. 현종이 청야전술을 통해 개경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고려는 거란의 전장 주도권을 빼앗고, 퇴각하는 거란군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처럼 귀주대첩은 개전 초부터 종전까지 고려가 취한 여러 전술적 움직임이 유기적으로 얽혀 이루어진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이번 연구에서는 전쟁 상황에서의 후방 전략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귀주대첩을 전후한 여러 상황을 보다 넓게 살펴보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귀주대첩으로 대표되는 마지막 고려-거란 전쟁은 강감찬이라고 하는 뛰어난 지휘관의 역량으로 얻어낸 승리로 회자되곤 한다. 그러나 이를 면밀히 살펴보면 전방의 고려 군세와 별개로 후방에서의 지원이나 유기적인 작전 전개가 존재했음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해당 연구에서는 고려 측의 기록뿐만 아니라 거란 및 송의 기록까지 함께 검토하여 전황을 분석하였으며, 귀주대첩이 단일한 한 번의 교전이 아니라 적의 예봉을 꺾은 흥화진-삼교천 전투, 적의 우회기동을 포착하여 청야전술로 대응한 개경 방어전 등이 유기적으로 연 ...
해당 연구에서는 고려 측의 기록뿐만 아니라 거란 및 송의 기록까지 함께 검토하여 전황을 분석하였으며, 귀주대첩이 단일한 한 번의 교전이 아니라 적의 예봉을 꺾은 흥화진-삼교천 전투, 적의 우회기동을 포착하여 청야전술로 대응한 개경 방어전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전투였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고려-거란 전쟁의 소강 기간에 있었던 사회적 변화까지 시야에 두고 이것이 전쟁에 끼친 영향을 함께 살폈다. 본 연구를 통한 기대 효과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전쟁사 연구에 있어서 후방 전략의 중요성 부각이다. 전쟁은 특정 국가나 세력의 명운을 건 충돌이다. 따라서 전선에서의 직접적인 상황 외에도 그 이면에서 다양한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러나 종래 연구에서는 흔히 전면전의 상황이 부각되었지 전쟁과 동시에 벌어지는 후방에서의 움직임들은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고려-거란 전쟁이 귀주대첩이라는 큰 승리를 통해 마무리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마지막 대첩 하나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교전 상황들과 더불어 전간기의 사회 안정책 등이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해당 연구는 종래 ‘귀주대첩=강감찬’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공식에 다양한 이야기를 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둘째, 기존에 조명되지 못했던 인물·사안들에 대한 접근이다. 본 연구에서 주목한 고려 현종은 2차 전쟁시점과 6차 전쟁시점에서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전자에서는 외침을 피해 몽진하였고, 후자에서는 스스로 청야전략을 입안하여 병력을 운용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약 8년의 기간 동안에 있었던 고려사회 내부 정세를 통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처럼 본 연구를 통해 강감찬 등 전쟁 영웅에 주목하였던 경향에서 주제 범위를 확장하여 전쟁 과정 속의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재조명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