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성과물검색
유형별/분류별 연구성과물 검색
HOME ICON HOME > 연구과제 검색 > 연구과제 상세정보

연구과제 상세정보

한국서예사에서 왕희지 집자비의 출현과 전개
The Appearance and Development of the Stelae Written in Wang Xizhi’s Characters in the History of Korean Calligraphy
  • 연구자가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시스템에 직접 입력한 정보입니다.
사업명 (B유형)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연구과제번호 2022S1A5B5A17043799
선정년도 2022 년
연구기간 1 년 (2022년 09월 01일 ~ 2023년 08월 31일)
연구책임자 정현숙
연구수행기관 원광대학교
과제진행현황 종료
과제신청시 연구개요
  • 연구목표
  • 한국서예사에서 왕희지 집자비가 처음 등장한 것은 8세기 통일신라 때이고, 신라에서 행서가 처음 등장한 것은 6세기 후반 제작된 목간에서이다. 삼국기에 행서가 처음 출현하고 약 150년 후 왕희지 행서로 집자한 비가 건립된 것이다.
    동아시아 서예사에서 행서를 논할 때 왕희지는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서예가이다. 동진의 명필인 왕희지는 특히 행초서에 뛰어나 남조에서 첩으로 전해진 그의 글씨가 성행했다. 당나라 때는 그를 흠모한 태종에 의해 서성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태종은 왕희지 글씨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초당삼대가에게 그의 대표작인 <난정서>를 임서하게 하고 궁중의 모사가들에게 모사하게 했다. 더불어 왕희지 글씨로 집자비 건립을 명했는데 그 첫 비가 바로 태종 자신이 짓고 승려 회인이 집자한 <대당삼장성교서>(이하 집자성교서)(672)이다. 왕희지 글씨의 애호는 현종대로 이어져 승려 대아가 집자한 <흥복사단비>(721)가, 문종대에는 <금강경>(832)이 건립되었다. 이 전통은 후대까지 계승되어 당대부터 청대까지 18기의 왕희지 집자비가 건립되었는데 그중 절반이 당나라 것이다. 이런 왕희지 행서와 집자비 건립의 성행은 당시 동아시아의 서예 사조였다.
    이런 국제적 문화 사조를 좇아 유학생, 유학승, 숙위생 등을 통해 정치·외교·문화적으로 당나라와 자주 교섭한 신라에서도 8, 9세기에 왕희지 행서와 집자비 건립이 유행했다. 8세기에 <황복사비>(추정), 9세기에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비>(이하 무장사비)(추정, 801)와 운철이 집자한 <사림사홍각선사비>(886) 총 3기의 집자비가 세워졌다. 신라의 집자비 건립 전통을 이어 고려에서도 초기에는 당태종 집자비인 <흥법사진공대사비>(940)와 김생 집자비인 <태자사낭공대사비>(956)가 세워졌고, 말기에는 왕희지 집자비인 <인각사보각국사비>(1295)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집자비 글자가 그러하듯 신라와 고려의 집자비 글자도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신라보다 고려의 집자비가 더 유창하고 수려하다. 그것은 왕희지의 글자가 다양하여 집자승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글자들이 집자에 사용되었고, 없는 글자들은 집자승이 왕희지풍으로 직접 서사했기 때문이다. 이 다름이 신라의 추정 왕희지 집자비의 가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신라의 추정 왕희지 집자비 2기 가운데 <황복사비>는 대체로 왕희지 글씨로 본다. 그러나 <무장사비>의 서자에 대해서는 왕희지, 김육진, 황룡사 승려 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따라서 합당한 근거로 이에 대한 정리와 결론이 필요해 보인다. 결과에 따라 신라의 왕희지 집자비가 2점이 될 수도, 3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한국서예사에서 왕희지 집자비가 출현하게 된 배경과 그것이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어떻게 전개되고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당나라 왕희지 집자비 글자 분석, 신라의 왕희지 집자비 글자 분석, 신라와 고려의 왕희지 집자비 글자 비교, 당나라와 신라 및 고려의 집자비 글자 비교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왕희지 집자비에 대한 연구가 단편적이었다면, 본 연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것을 통섭적으로 고찰하고 한국의 고대와 중세 서예사에 등장하는 왕희지 글씨를 좀 더 명확하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연구 목적을 둔다.
  • 기대효과
  •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글씨는 서자가 직접 필사하거나 명필의 글씨를 집자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특히 왕희지 글씨의 집자는 중국에서 시작된 전통을 고대 한국이 수용한 것이다. 통일신라에서 시작된 왕희지 집자비 건립은 고려로 이어졌고 조선이 그것을 이었다. 왕희지 집자비 건립은 한국 서예가의 집자비로 범위를 확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왕희지 집자비는 시기별 또는 집자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었다. 본 연구에서 언급할 중국 왕희지 집자비 글씨의 특징, 한국 왕희지 집자비 글씨의 특징, 한중 왕희지 집자비 글씨의 비교를 통해 집자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이고, 그간 논쟁이 되어온 신라의 추정 왕희지 집자비에 대해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동아시아에서 왕희지 행서와 그 집자비 연구가 차지하는 학문적 비중을 고려할 때 본 연구를 바탕으로 하면 한국 서예가의 집자비 연구로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 고려에서는 김생의 집자비 건립에 그쳤지만 조선에서는 한호, 송준길, 효종, 김수증, 김수항 등 한국 서예가의 집자비 건립이 매우 성행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라의 김생과 영업, 고려의 탄연 등 고대와 중세의 행서 명필들은 모두 왕희지 글씨를 부지런히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글씨에 나타난 왕희지풍의 고찰을 통해 한국서예사에서 왕희지 행서의 영향, 그리고 한국 서예가들이 그것을 배운 후 어떻게 자가풍으로 발전시켰는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중국 서예의 한국 토착화의 과정을 면밀히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후속 연구들로 인해 한국서예사의 부족한 부분들이 조금씩 채워져 궁극적으로 한국의 서예문화 연구가 완숙될 것으로 기대한다. 방대한 자료에 비해 연구자 부족 등 여러 열악한 환경으로 미술사 속에서 서예사 연구는 미미하니 그런 것을 보충해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이 연구는 필요 불가결한 기초 연구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큰 나비 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 연구요약
  • 본 연구는 중국 당나라 왕희지의 행서와 그 집자비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한다. 당나라 이후의 집자비는 대부분 당나라 집자비에서 집자했기 때문이다. 즉 당나라의 왕희지 집자비가 후대 집자비의 범본이 된 것이다.
    왕희지 집자비 유행의 국제적 사조를 좇아 신라에서도 8세기부터 왕희지 집자비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중국처럼 집자와 각은 거의 승려가 맡았다. 신라의 왕희지 집자비 3기는 모두 비편 상태로 출토되었다. 그중 <사림사홍각선사비>(886)에는 ‘集晉右將軍’이라 적혀 있어 왕희지 집자비가 확실하고 <황복사비>(8세기)와 <무장사비>(801)는 명문의 내용이나 글씨로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한국의 왕희지 집자비 가운데 가장 이른, 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황복사지 출토 비편에 쓰인 글자는 서사한 듯 생생하고 힘차면서 전아하다. 노련한 행서는 대부분 당나라 왕희지 집자비인 <집자성교서>나 <흥복사단비>와 흡사하여 왕희지 집자비로 보아도 무방하다. 8세기는 서성 왕희지에 견줄 만한 해동서성 김생이 활동한 시기이므로 이전에 왕희지 행서와 그 집자비 글씨가 당연히 신라에 입수되었을 것이다.
    9세기 초인 801년에 건립된 <무장사비>는 세 편이 전하는데 그중 한 편에 적힌 ‘金陸珍奉敎’로 찬자가 김육진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서자에 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어 본 연구에서 세밀한 분석을 통해 타당한 결론을 낼 것이다.
    첫째, 왕희지 설은 청나라 옹방강이 김정희가 보낸 탁본을 본 후 왕희지 글씨라고 처음 주장했고 이후 보편적으로 수용된 주장이다. 둘째, 김육진 설은 홍양호, 오세창 등 조선과 근현대 비평가들의 주장이다. 셋째, 황룡사 승려 설은 근자에 비편 1행 하단에서 ‘皇龍寺’를 새로 판독하고 그 아래에 적었을 승려가 곧 서자라고 보는 주장이다.
    <무장사비>가 왕희지 집자비임을 부정하는 이들은 왕희지 글씨와의 비교를 통해 몇몇 글자가 다르다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든다. 그러나 집자비는 집자승이 모사한 것을 새기므로 그의 서사 솜씨에 따라 글자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왕희지 글씨에 없는 글자는 집자승이 왕희지풍으로 직접 쓸 수밖에 없다. 당나라의 <집자성교서>, <흥복사단비> 그리고 <금강경>, 신라의 <사림사홍각선사비>, 고려의 <인각사보각국사비>는 모두 확실한 왕희지 집자비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글씨가 조금씩 다르다. 이런 전개 양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힐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첫째, 한중일 삼국의 왕희지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면서 문제점을 찾고 자료를 취사선택한다. 특히 일본에서도 왕희지 연구가 매우 심도있게 진행되고 관련 전시도 여러 차례 개최되었으므로 일본 자료도 최대한 모아 활용한다. 둘째, 당나라 왕희지 집자비 3기의 동일자를 모으고 비교하여 그 특징을 파악한다. 셋째, 신라와 고려의 왕희지 글씨와 집자비 관련 선행 연구를 살피고 본 연구와의 연관성, 이견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한다. 넷째, 신라의 (추정) 왕희지 집자비의 글자를 비교, 분석하고 특징을 파악한다. 고려의 왕희지 집자비 글자와의 동이도 같이 살핀다. 특히 신라 <무장사비>의 명문 내용과 글자를 통해 집자비 가부를 더 명확하게 밝힌다. 다섯째, 당나라, 신라, 고려의 집자비 글자를 비교하면서 한국서예사에서 왕희지 집자비가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되었는지 살핀다. 또한 중국과 한국 집자비 글자의 동이를 살펴 한중 왕희지 집자비 글씨의 특징을 고찰한다.
    필자는 차후 이 연구를 확장시켜 당태종의 집자비 글씨도 살필 생각이다. 왕희지 글씨에 대한 태종의 열정은 수집은 물론 학습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진사비>와 <온천비>를 쓰기에 이른다. 태종이 친히 하사한 두 비의 탁본은 648년(진덕왕 2) 김춘추에 의해 신라에 입수되었다. 고려 초인 940년 마침내 두 비에 있는 당태종의 글자로 새긴 <흥법사진공대사비>가 건립되었다. 따라서 왕희지 집자비 글씨와 당태종 집자비 글씨의 비교를 통해 명필과 그를 배운 황제 글씨의 특징을 고찰할 것이다.
결과보고시 연구요약문
  • 국문
  • 이 글은 한국 서예사에서 왕희지 집자비의 출현과 전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의 왕희지 집자비와 당나라 왕희지 집자비 글씨를 비교하여 同異를 찾아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왕희지 집자비 글씨의 특징을 알게 되었다. 조선의 집자비 2기는 사적 용도이며 시대가 멀어 비교 대상에서 제외했다.
    왕희지 집자비는 중국 당나라 7세기 후반에 처음 건립되었고,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통일신라 8세기에 처음 건립되었다. 신라의 첫 왕희지 집자비는 <皇福寺碑>이며, 다음은 801년에 건립된 <鍪藏寺碑>, 마지막은 886년에 건립된 <沙林寺碑>다. 그중 <사림사비>만 명문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현전하는 고려의 것은 1295년에 건립된 <麟角寺碑>뿐이다.
    중국에서는 당 태종(재위 626-649)을 시작으로 이후의 황제들이 대를 이어 왕희지의 글씨를 애호했기 때문에 왕희지 집자비는 대부분 황명으로 건립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고종대(649-683)의 <大唐三藏聖敎序>(<集字聖敎序>, 672), 현종대(713-755)의 <興福寺斷碑>(721), 문종대(827-840)의 <金剛經>(832)이다. 집자는 주로 승려가 담당했는데 이런 전통이 이어져 통일신라와 고려의 집자비도 왕명으로 승려가 집자했다.
    통일신라의 <황복사비> 글씨는 당나라의 <집자성교서> 글씨와 흡사하다. 글씨, 비문 머리의 서술 양식, 문장의 배열 형식이 <집자성교서>와 흡사하여 왕희지 집자비로 볼 수 있는 <무장사비>는 당나라의 <집자성교서>, <흥복사단비>처럼 승려, 특히 황룡사 승려가 집자했을 가능성이 크다. 옹방강이 언급했듯이 <무장사비> ‘崇’의 상부 세 점의 필법이 왕희지의 <난정서>와 흡사하고 더 나아가 <난정서>를 저본으로 한 <집자성교서>와 흡사한 것도 하나의 근거다.
    그리고 세로 계선만 그었으나 자간도 정연한 것, 해서의 필의가 많은 것, 개성적인 글자의 특징은 고려의 <인각사비>와 닮아 <인각사비>의 집자승인 죽허가 <무장사비>의 글씨를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왕희지 집자비는 당나라 <집자성교서>와 <흥복사단비>를 저본으로 했기에 字體가 닮기는 했으나 書風은 조금 다르다. 중국 왕희지 집자비 글씨는 行氣가 많아 유려하지만 한국 집자비 글씨는 해서의 필의가 강해 瘦硬하다. 그리고 중국 글자와 다른 특징적인 글자는 한국 집자비들끼리 닮기도 하여 고려 <인각사비>의 집자승 죽허가 중국 두 비에서 집자하면서, 동시에 전대인 통일신라의 집자비도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왕희지 집자비는 고려의 집자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향을 받은 고려의 글씨가 영향을 준 통일신라의 글씨보다 더 유창하다. 이는 송나라, 원나라와의 빈번한 문화적 교류로 인해 고려 사회 전반에 행초서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의 왕희지 집자비 글씨가 다른 것도 나라, 시대, 그리고 집자인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는 시공의 차이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 영문
  • This paper is to look into the appearance and development of the stele written in the characters of Wang Xizhi(王羲之 集字碑, Wang Xizhi jipjabi), the famous calligrapher of the Eastern Jin in China. I compared the characters of Wang Xizhi jipjabi of the Unified Silla(統一新羅) and Goryeo(高麗) dynasties in Korea with those of the T’ang(唐) dynasty in China. As a result, I found out the characteristics of the writing of Wang Xizhi jipjabi of Korean through the similarity and difference.
    Wang Xizhi jipjabi was first built in the late 7th century in T’ang dynasty. To that effect, it was first built in the 8th century in the Unified Silla dynasty. The first of the Unified Silla is Hwangboksa Stele(皇福寺碑), the second Mujangsa Stele(鍪藏寺碑) built in 801, the last Sarimsa Stele(沙林寺碑) built in 886. Of the three, the last is the only one identified by the writing of the stele. Wang Xizhi jipjabi of Goryeo in existence is Ingaksa Stele(麟角寺碑) built in 1295.
    In China, most emperors since Taizong(太宗) were fond of Wang Xizhi’s calligraphy. Accordingly, Wang Xizhi jipjabi was mostly built by the imperial order, and collecting characters was mainly performed by the Buddhist monk. The typical ones are Jizi Shengjiaoxu(集字聖敎序) in the reign of Gaojong(高宗), Xingfusi Stele(興福寺碑) in the period of Xuanjong(玄宗), and Diamond Sutra(金剛經) in the time of Wenjong(文宗). Following the tradition of China, in Korea, monk collected Wang’s characters by the king’s order as well.
    The characters of Hwangboksa Stele of the Unified Silla resemble those of Jizi Shengjiaoxu of T’ang. The characters and description form of the head sentence of Mujangsa Stele are similar to those of Jizi Shengjiaoxu, so Mujangsa Stele can be considered as Wang Xizhi jipjabi. There is a strong possibility that a monk collected the characters of Mujangsa Stele like Jizi Shengjiaoxu and Xingfusi Stele. Especially, he would be the monk of Hwangryongsa(皇龍寺) because the character ‘皇龍寺’ was engraved on the end of the first line. The name of compiler Kim Yukjin(金陸珍) is written above ‘皇龍寺’.
    In general, the first the name of compiler and next that of writer were recorded in the sentence on the stele. As Wen Fanggang(翁方綱) of Qing(淸) mentioned in the record of Kim Jeonghi on the left side of Mujangsabi, the three strokes on the upper part of the character ‘崇’ on the stele is identical to those of Lantingxu(蘭亭序) Wang wrote in 353. It is one of the evidences that Mujangsa Stele is Wang Xizhi jipjabi.
    And the point that the space between character is regular although only vertical lines were drawn, that the writing includes the bush stroke of the regular script, and that the characters carry personal characteristics rather resemble to those of Ingaksa Stele of Goryeo. Therefore, it is highly possible that monk Jukje(竹虛) who collected Wang’s characters for the writing of Ingaksa Stele copied the writing of Mujangsa Stele.
    The form of characters is similar to that of T’ang stelae because Wang Xizhi jipjabi of Korea is based on those of China. But the the style of writing is different each other. The writings of T’ang are flowing due to the brush strokes of the running script, but those of the Unified Silla and Goryeo is stiff due to those of the regular script. In addition, a few characteristic characters on the stelae of the Unified Silla and Goryeo resemble each other. It means that monk Jukhe would see the writing of Wang Xizhi jipjabi of the Unified Silla, following those of T’ang.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Wang Xizhi jipjabi of the Unified Silla influenced on that of Goryeo.
    Meanwhile, the writing of Wang Xizhi jipjabi of Goryeo influenced by the Unified Silla is better than that of the Unified Silla that influenced on Goryeo. The reason is that the running and grass scripts were prevalent in the Goryeo society due to the frequent cultural exchanges with the Song(宋) and Yuan(元) dynasties in China.
    The dissimilarity of the writing of Wang Xizhi jipjabi between Korea and China is because the country, period, and collector of characters are different. It is a natural phenomenon that occurred in the gap of time and space.
연구결과보고서
  • 초록
  • 이 글은 한국 서예사에서 왕희지 집자비의 출현과 전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의 왕희지 집자비와 당나라 왕희지 집자비 글씨를 비교하여 同異를 찾아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왕희지 집자비 글씨의 특징을 알게 되었다. 조선의 집자비 2기는 사적 용도이며 시대가 멀어 비교 대상에서 제외했다.
    왕희지 집자비는 중국 당나라 7세기 후반에 처음 건립되었고,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통일신라 8세기에 처음 건립되었다. 신라의 첫 왕희지 집자비는 <皇福寺碑>이며, 다음은 801년에 건립된 <鍪藏寺碑>, 마지막은 886년에 건립된 <沙林寺碑>다. 그중 <사림사비>만 명문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현전하는 고려의 것은 1295년에 건립된 <麟角寺碑>뿐이다.
    중국에서는 당 태종(재위 626-649)을 시작으로 이후의 황제들이 대를 이어 왕희지의 글씨를 애호했기 때문에 왕희지 집자비는 대부분 황명으로 건립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고종대(649-683)의 <大唐三藏聖敎序>(<集字聖敎序>, 672), 현종대(713-755)의 <興福寺斷碑>(721), 문종대(827-840)의 <金剛經>(832)이다. 집자는 주로 승려가 담당했는데 이런 전통이 이어져 통일신라와 고려의 집자비도 왕명으로 승려가 집자했다.
    통일신라의 <황복사비> 글씨는 당나라의 <집자성교서> 글씨와 흡사하다. 글씨, 비문 머리의 서술 양식, 문장의 배열 형식이 <집자성교서>와 흡사하여 왕희지 집자비로 볼 수 있는 <무장사비>는 당나라의 <집자성교서>, <흥복사단비>처럼 승려, 특히 황룡사 승려가 집자했을 가능성이 크다. 옹방강이 언급했듯이 <무장사비> ‘崇’의 상부 세 점의 필법이 왕희지의 <난정서>와 흡사하고 더 나아가 <난정서>를 저본으로 한 <집자성교서>와 흡사한 것도 하나의 근거다.
    그리고 세로 계선만 그었으나 자간도 정연한 것, 해서의 필의가 많은 것, 개성적인 글자의 특징은 고려의 <인각사비>와 닮아 <인각사비>의 집자승인 죽허가 <무장사비>의 글씨를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왕희지 집자비는 당나라 <집자성교서>와 <흥복사단비>를 저본으로 했기에 字體가 닮기는 했으나 書風은 조금 다르다. 중국 왕희지 집자비 글씨는 行氣가 많아 유려하지만 한국 집자비 글씨는 해서의 필의가 강해 瘦硬하다. 그리고 중국 글자와 다른 특징적인 글자는 한국 집자비들끼리 닮기도 하여 고려 <인각사비>의 집자승 죽허가 중국 두 비에서 집자하면서, 동시에 전대인 통일신라의 집자비도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왕희지 집자비는 고려의 집자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향을 받은 고려의 글씨가 영향을 준 통일신라의 글씨보다 더 유창하다. 이는 송나라, 원나라와의 빈번한 문화적 교류로 인해 고려 사회 전반에 행초서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의 왕희지 집자비 글씨가 다른 것도 나라, 시대, 그리고 집자인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는 시공의 차이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글씨는 서자가 직접 필사하거나 명필의 글씨를 집자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특히 왕희지 글씨의 집자는 중국에서 시작된 전통을 고대 한국이 수용한 것이다. 통일신라에서 시작된 왕희지 집자비 건립은 고려로 이어졌고 조선이 그것을 이었다. 왕희지 집자비 건립은 한국 서예가의 집자비로 범위를 확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왕희지 집자비는 시기별 또는 집자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었다. 본 연구에서 언급할 중국 왕희지 집자비 글씨의 특징, 한국 왕희지 집자비 글씨의 특징, 한중 왕희지 집자비 글씨의 비교를 통해 집자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이고, 그간 논쟁이 되어온 신라의 추정 왕희지 집자비에 대해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동아시아에서 왕희지 행서와 그 집자비 연구가 차지하는 학문적 비중을 고려할 때 본 연구를 바탕으로 하면 한국 서예가의 집자비 연구로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 고려에서는 김생의 집자비 건립에 그쳤지만 조선에서는 한호, 송준길, 효종, 김수증, 김수항 등 한국 서예가의 집자비 건립이 매우 성행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라의 김생과 영업, 고려의 탄연 등 고대와 중세의 행서 명필들은 모두 왕희지 글씨를 부지런히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글씨에 나타난 왕희지풍의 고찰을 통해 한국서예사에서 왕희지 행서의 영향, 그리고 한국 서예가들이 그것을 배운 후 어떻게 자가풍으로 발전시켰는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중국 서예의 한국 토착화의 과정을 면밀히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후속 연구들로 인해 한국서예사의 부족한 부분들이 조금씩 채워져 궁극적으로 한국의 서예문화 연구가 완숙될 것으로 기대한다. 방대한 자료에 비해 연구자 부족 등 여러 열악한 환경으로 미술사 속에서 서예사 연구는 미미하니 그런 것을 보충해 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이 연구는 필요 불가결한 기초 연구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큰 나비 효과를 불러올 것으로 예상한다.
    더불어 필자는 본 연구를 활용하여 현전하는 4점의 고려 집자비 글씨를 통해 고려 집자비 문화의 다양성을 살펴볼 생각이다. 3점은 행서 집자비인데 이 중 1점은 해서와 혼용되었고 1점은 해서 집자비다. 3점의 행서 집자비 중 고려의 첫 집자비는 고려 태조가 지은 문장을 최언위의 아들 최광윤이 당 태종의 글씨로 집자하여 940년에 세운 <흥법사진공대사비>다. 둘째 집자비는 □裕가 고서에서 북위 해서를 집자하여 941년에 세운 <명봉사자적선사비>다. 특정 서가의 글씨가 아닌 한 시대 글씨로 집자한 점이 특이하고 고려 초에 북위 해서가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셋째 집자비는 신라 경명왕이 지은 문장을 고려승 단목이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로 집자하여 956년에 세운 <태자사낭공대사비>다. 이것은 고려 초에 김생의 글씨가 높이 평가되었음을 보여 주며, 최초의 한국 서가 집자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생 집자비 건립은 조선에서 재현되어 조선 집자비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태자사비>는 김생의 해서와 행서로 집자되어 그의 행서는 물론 해서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다. 마지막 집자비는 본 연구에서 언급한, 민지가 지은 문장을 죽허가 왕희지의 글씨로 집자하여 1295년에 세운 <인각사보각국사비>다.
    이처럼 왕희지 한 사람의 글씨만 집자한 통일신라에 비해 고려의 집자 대상 서가와 서체는 더 다양해져 고려의 서예문화가 더 성숙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건국 초인 10세기에 3기가 세워져 집자비 건립이 집중되어 있고 고려 말에 1점인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집자된 고려의 글씨와 원래 서가의 글씨와의 동이를 통해 고려 집자비 글씨의 특징을 찾아내는 데 본 연구가 유용하게 활용될 것이다.
  • 색인어
  • 왕희지 집자비, 난정서, 집자성교서, 흥복사단비, 황복사비,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비, 사림사홍각선사비, 인각사보각국사비
  • 연구성과물 목록
데이터를 로딩중 입니다.
데이터 이용 만족도
자료이용후 의견
입력